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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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손주가 아닌 손녀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인문계가 아닌 상고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나는 그 주장에 반하여 인문계와 대학을 졸업했다. 자식의 편에 섰던 엄마 덕분에 가능했다. 엄마는 딸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고 결혼도 늦게 천천히 해도 좋다고 여겼다.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 오빠만 결혼을 한 상태였다. 이른 나의 결혼을 결정한 오빠도 마음에 들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김명순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엄마와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그늘에 갇혀 살아온 삶.


『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소설이 세 편 수록되었다. 데뷔작인 「의심의 소녀」 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이다. 「의심의 소녀」 (1917년)엔 제목이 암시하듯 소녀가 등장한다. 평양 대동강 근처의 마을에 ‘범네’라는 이름의 소녀와 할아버지가 이사를 온다. 그러나 둘만 소통할 뿐 동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그러다 동네에 한 신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할아버지와 범네는 급히 동네를 떠났다. 놀랍게도 그 신사는 범네의 아버지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로 범네의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이름도 바꾸고 손녀를 살리려 숨어사는 것이다.


「돌아다볼 때」(1924년)의 주인공 ‘소령’도 평탄한 삶이 아니다. 소령은 신여성이지만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머니와 같은 운명일까 주변의 걱정을 산다. 공교롭게 소령은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이학자 ‘효순’이란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효순은 유부남이었고 이를 안 소령의 고모는 소령의 혼처를 찾아 결혼시킨다. 그러나 소령의 남편은 난봉꾼이었고 시어머니는 모든 걸 소령의 탓으로 돌렸다.


공부를 열심히 한 신여성이지만 자유연애에 대한 확신과 사회 구조는 바꿀 힘은 없었다. 100여 전에 발표한 소설인데 어떤 면에서는 현재의 삶에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여성 혐오와 차별을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소유물로 착각하고 구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변하지 않는가. 「의심의 소녀」의 범네의 아버지는 헤어지자는 말에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이혼한 전처를 죽이는 현재의 남성과 다르지 않다.


장편소설 「외로운 사람들」 (1924년)에서는 시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신념과 사랑으로 인해 갈등하는 네 남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대엔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인을 맺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순희’와 ‘순철’ 남매는 달랐다. 신연성 순희와 사회학자 정택은 사랑을 위해 도피했다. 각자 정혼자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순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둘은 같이 떠난 것과 다르게 따로 돌아왔다. 순희의 동생 순철은 어린 나이에 두 살 많은 복순과 혼인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사이라 어른의 뜻에 따라 혼인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유학에서 청국 왕녀 순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순영에게 결혼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치게 된다. 순영이 조선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순철의 순영과 복순 사이에서 갈등한다.


서로 잘 이해하는 두 연인이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소식까지 서로 알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다른 곳에 사랑을 옮기지도 아니하였다면 세상은 그 연고도 모르고 웃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이 믿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운명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발자국마다 그들의 피를 흘리면서 그들의 꿈꾸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걸어나간다. 이런 일이 세상에는 흔히 없는 일이요, 사람들은 다-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 「외로운 사람들」, 117~118쪽)


「외로운 사람들」에서 정택과 순철은 자신의 사랑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고뇌한다. 말이 고뇌이지 뻔뻔하다. 정택은 조선에서 다른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를 보호할 이가 자신뿐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친다. 그나마 순철은 양심적이다. 순철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복순과 이국 땅에서 순철의 사랑만이 전부인 순영을 외면할 용기가 없다. 그래도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순철을 기다리던 순영은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고 정택의 혼인 소식에 순희도 죽음을 택한다. 순희와 순영의 마지막은 죽음이어야 했을까. 시대를 탓해야 할까.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2차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100년 후의 지금을 생각하면 모르겠다.


박민정의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 ‘세윤’의 실종과 죽음에 대해 들려준다. 세윤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화자와 함께 ‘JLPT’시험 준비를 한다. 그런 세윤이 실종 후 자살한다. 세윤이 남긴 건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가 전부다. 나는 그 브이로그를 통해 세윤의 고통을 짐작하고 가늠할 뿐이다. 놀라운 건 브이로그에 등장하는 ‘로사’였다. 나의 학교 후배였던 로사가 세윤의 직장 동료였다. 세윤에게 로사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말해줬지만 세윤은 듣지 않았다. 세윤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로사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나는 더 강하게 로사를 멀리하라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어떤 억측이나 소문은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가담한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에서 정확한 사실을 모르면서 소문에 가담하는 동네 사람들, 「돌아다볼 때」의 고모처럼 지레 짐작한다. 뉴스나 언론을 통한 보도에 상상하는 더한다. 박민정의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 세윤이 감당해야 할 시선은 어땠을까. 이혼녀, 전 남편과 연락을 하는 일을 바람을 피우는 거라 수군거리는 동료들. 그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박민정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로 이어진다.


작가는 누구보다 ‘나’를 많이 말하지만, 가장 ‘나’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단 한 명의 작가이지만 또한 오롯이 작가일 수 있으려면 끝없이 나르시시즘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쓰는 사람이 자기 생애까지 대생화해서 이루려는 문학 행위가 그저 소문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306쪽)


어렵고 쉽게 읽었다 말할 수 없지만 좋은 소설이었다. 이런 기획이 아니었다면 나는 김명순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소설을 찾아 읽을 일도 없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교재가 될 것 같다. 소설적 재미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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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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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내일이 오지 않을 꺼라 생각한 적이 없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들이 있었을 뿐.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무너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이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일까. 살아있기에 살아가가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목』의 ‘나’도 그랬을까. 전쟁이라는 폭력을 견뎌내며 폐허와 함께 살아가는 일을 지금을 사는 이는 알 수 없다.


미 8군 PX 아래층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나’는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 접수와 가격을 흥정한다. 환쟁이에게 업무를 배분하고 독촉한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 일상에 새로운 환쟁이 ‘옥희도’씨가 들어온다. 똑같이 미군 애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는 달라 보였다. 물론 ‘나’에게 관심을 주는 남자는 따로 있었다. 전기부에서 일하는 ‘태수’였다. 태수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러나 태수와 옥희도 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태수는 아니었다. 태수와 관계는 약간의 밀당 같은 것이라면 옥희도와는 자석 같은 끌림이었다. 옥희도도 ‘나’의 마음을 알고 ‘나’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옥희도는 ‘나’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있고 5명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어도 그는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었을 것이다.


옥희도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물한 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었고 그 마음의 끝을 맺을 수 있는 사람. 스물한 살인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옥희도에게 전한다. 아파서 일을 나오지 못한 그를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안에 같이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옥희도 같은 사람은 잊고 태수를 생각하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옥희도를 사랑한다고 믿는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금지옥엽으로 자신을 아꼈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 여동생을 챙기던 오빠 둘의 부재가 만든 감정 말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않았을 감정이다. 피난을 갖다 돌아온 오빠들은 다락에 숨어지냈다. 계동의 고가에는 ‘나와 어머니만 살고 있어야 했다. 전쟁의 날들이었지만 숨어지내는 오빠들과 어머니가 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큰아버지와 사촌 오빠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 네 명이 거하기에 다락은 좁았고 ‘나’는 오빠 둘의 거처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거처를 옮기고 폭격으로 오빠들은 죽음을 맞았다. 자신 때문에 오빠 둘은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은 일을 마치고 계동의 고가로 오는 시간을 늦추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죽은 아들들만 붙자고 사느라 살아있는 딸은 봐주지 않았다. PX에서 돌아온 경을 환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무서운지 묻지 않았다. 부서진 고가 그 자체였다.


때문에 ‘나’는 퇴근 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을 같이 보내고 견뎌준 이가 옥희도였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장난감 가게 앞에서 만났다. 옥희도에게 어머니와의 갈등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전쟁이 앗아간 삶을 그 역시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벌이로 초상화를 그려야 해지만 화가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번뇌하며 말이다. ‘나’는 옥희도의 고독과 고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옥희도가 그린 그림을 보고 죽은 나무, 고목으로만 보았으니까. 그의 아내를 책망하고 질투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 박완서가 세밀하게 담아낸 미 8군 PX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쓸쓸하고 황폐한 거리를 가득 채운 상념과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계동의 고가의 풍경을 그려볼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은 조금 알 것 같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과 한 번이라도 자신을 안쓰럽게 봐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자신을 사로잡는 우울과 죽음, 반대라 삶에 대한 열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 곳곳에서 빛나고 눈부신 문장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늙고 초췌한 어머니와 젊고 싱그러운 ‘나’의 모습, 한순간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고 싶은 마음에 호텔로 향한 ‘나’의 마음, 요란하게 움직이는 장난감 침팬지의 몸짓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와 옥희도의 눈빛.


죽고 싶다. 주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315쪽)


팽팽하게 대립한다고 여겼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다. 나의 반항적인 외박이 불러온 결과였을까. 약을 먹고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고가에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나의 곁에는 태수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중년의 ‘나’는 남편 태수와 함께 고인이 된 옥희도의 전시회를 찾는다. 그곳에서 마주한 그림.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古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390쪽)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391쪽)


박완서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들은 전쟁을 살아내느라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독과 싸우고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싸우고 버텼다. 잎이 지고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裸木)처럼 살았다. 박완서 작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진 삶이라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봄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을 통해 폐허의 삶에서 발견한 한 가닥의 희망을 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부서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독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곧 봄에의 믿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1970년에 발표한 『나목』이 육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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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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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리는 얼굴이 있다. 그려지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다. 형체도 없는 얼굴, 그러나 선명하다. 가만히 세 글자,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최지은의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을 때는 몰랐다. 읽고 나서 나는 읽는 내개 그 얼굴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름에 돌아가신 엄마였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이나 환한 웃음 대신 무겁고 피곤한 낯빛이 전부였던 얼굴. 그러나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수줍음과 설렘 말이다. 우리가 보낸 여름에도 그런 날들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의 부재는 강력하다. 끝내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부재를 인정하는 노력도 할 수가 없다. 인정하는 순간 삶이 무너져내릴까 두려워서.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건 자랑이 될 수 있다. 나의 유일한 자랑, 삶을 지탱하는 자랑, 시인 최지은의 글은 그런 자랑이었다. 오래 듣고 싶은 당신의 자랑이었다. ‘당신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란 박준 시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가장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고 살아가는 일은 상실과 나란히 걷는 일이다. 때로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맞추고 때로 상실을 부축하거나 상실에게 기대며 걷는 일. 어린 나이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나의 어린이는 그걸 조금 일찍 감당했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큰아버지가 주신 탕수육에서, 선생님의 화난 말투에서. 그러니 저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어린이는 열한 살이 넘도록 할머니의 품에 안겨 머리를 감으면서도 할머니의 걱정이 되면 안 되었다.

어디 하나 모날까 봐 조심스럽게 그러나 강단 있게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는 맑은 동그라미 같았다. 조금씩 커져도 절대 터지지 않을 힘을 지닌 동그라미라는 게 느껴졌다. 기억의 시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엄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부재가 익숙했던 시간을 채우던 불안.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돌봄과 보살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든든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자랑이었다. 우주 같은 사랑. 그 사랑을 딛고 앞으로 나간다. 슬픔을 바라볼 힘을 키우고 슬픔이 지나간 자리를 비추는 햇빛을 발견하다.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날이 밝으면 이 빛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나가 걷자고 생각하면서. 한번 더 이불을 끌어당겼을 땐 처음 보는 햇빛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63쪽)





어른이 된 후에 마주한 엄마, 아버지, 할머니, 큰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과 부재는 나의 슬픔의 근원이 되었다. 슬픔의 그물에 빠져지내기도 했다. 저자는 어땠을까.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담긴 글을 읽으며 헤아려본다. 읽다가 가만히 멈추고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읽다가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저자의 마음속 어린이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다. 그러다 금세 글을 읽으며 위로받는다. 특히 이런 글 앞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 무거운 수박을 굳이 들겠다며 결국엔 수박을 깨트린 다섯 살 어린 손녀를 혼내는 게 아니라 쪼개진 수박을 붙여 모은 할머니. 두부와 콩나물을 사 오라는 할머니의 심부름.

할머니라면 이럴 때 나에게 어떤 심부름을 줄까. 어떤 말을 들려줄까. 할머니의 해답을 상상하면 조금 덜 속상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미움도 잊어버리고 ‘문득 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하게 되는 마음이. 그러니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며 상상합니다. 저 방에서 할머니가 나와 오늘 나에게 하나의 심부름을 준다면 무얼까?

ㅡ기쁘렴.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렴. (117~118쪽)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다. 그럴 때 나는 큰언니를 생각한다. 이상하다. 엄마가 아닌 큰언니라니. 큰언니라면 어떨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가 할머니가 어떤 심부름을 줄까 생각하는 것처럼.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라는 심부름. 큰언니는 마지막 순간에 행복하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든 행복하라고. 행복이 우선이라고.

엄마는 초여름에 떠났고 큰언니는 막바지 더위와 함께 떠났다. 여름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게 성장하는 여름처럼 나 역시 여름을 먹고 살아간다. 술이나 길고 긴 대화에 의지하며 잠들었던 과거의 여름이 지나고 쌓여 고유한 여름밤의 기쁨을 안다. 여름에 물든 상처가 만들어 낸 삶의 풍경을 기억한다. 저자가 스스로를 돌보고 더 깊게 사랑하는 여름. 저자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저자를 돌보러 오는 것처럼 나의 그들도 그렇다는 걸 느낀다. 저자는 그 사랑과 돌봄 덕분에 슬픔과 상처와 결핍은 채워졌고 아무런 조건 없이 선물을 주는 기쁨으로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변했다. 내 마음은 달라졌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달라졌다. 틈이 생겨버렸다. 구멍이 생겼고 어둠이 오갔고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파도가 오고 또 갔다. 엉뚱한 구멍을 파기도 했고 어둠을, 바다를 손에 쥐려고 힘껏 애쓰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됐다. (126쪽)

읽을 부분이 줄어드는 게 아쉬운 책이다. 가볍고 가뿐하면서 힘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여름에게』는 나누고 싶은 여름이 되었다. 여름이면 생각날 책이 되었고 여름이면 그리울 감정이 되었다. 우리가 지나온 여름과 앞으로 살아갈 여름이 얼마나 환하고 빛날까 기대한다. 어떤 여름은 지독해서 무릎이 꺾이고 주저앉아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혀줄 한 줄기 바람이 함께 할 여름이라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여름에 보태는 마음을 지키는 마음이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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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그녀
왕딩궈 지음, 김소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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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세상은 고요해진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와 당신, 둘 사이에만 고유한 침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말할 때 세상은 요란해진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고요하고 은밀하면서도 끝나지 않을 소란으로 가득하다. 처음 만난 왕딩궈의 장편소설 『가까이, 그녀』는 은밀하고도 고요한 사랑으로 다가왔다. 십 대 때 대만 유수의 문학상을 휩쓴 작가가 절필 후 20년 만에 쓴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내게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가까이, 그녀』란 제목과 꽃으로 입을 가린 표지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가까이, 그녀’란 누구일까. 짐작대로 아내일까, 아니면 가까이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그녀일까. 아니면 사랑과는 무관한 그녀일까. 입을 가린 꽃은 무엇 의미하는 것일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걸까.


소설은 작년에 57세의 생일을 맞은 남자, 그러니까 올해 58세인 화자인 ‘량허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의 근황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량허우는 감옥에 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신혼부부인 아들의 집에 잠깐 있다가 따로 나왔다. 아들 ‘뤠이슈’와 사이는 좋지 않다. 량허우가 감옥에 간 이유,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다. 그렇다. 아내가 죽었다. 나는 아내가 무척 그립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량허우’는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에 대해 들려준다. 현재 자신의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은 며느리와 간병과 살림을 봐주는 아윈이 있다. 물리적으로 가까울 뿐 소원한 사이다. 기억 속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시계점에서 일할 때 가게에 들어온 아내,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짝사랑한 종잉. 그녀들 가운데 가장 궁금한 건 스물한 살에 만난 아내 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작가는 쉽사리 그녀의 부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공들여 아주 천천히 들려주기로 작정한 것 같다.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일찍 시계점에 일을 한 사정과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이 아닌 시계점으로 돌아온 사연. 놀랍게도 감옥에 찾아온 종잉과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까지 상세하게 전하지만 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그 편지를 통해 차별받은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애틋함과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끄러움을 전한다. 그가 살아온 시대, 아니 그 가까이의 그녀들의 삶은 억눌림이 있었다. 가족과 사회는 그녀들을 억압했다. 아내 쑤도 그랬다. 아버지와 오빠들의 폭언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했다. 종잉도 다르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하는 남자친구를 위해 헌신했고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했다. 그녀들의 삶은 없었다.


어쩌면 쑤는 돈과 권력을 쥐고 흔드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량허우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쑤가 사랑한 사람은 브라질로 이민을 간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량허우는 달랐다. 쑤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 그 방식을 몰랐다. 쑤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간극이 컸던 것일까. 그것은 아들 ‘뤠이슈’로 이어졌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가족으로 살아온 시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경험한 바에 의하면 돈을 지불하고 시계를 산다고 해서 시간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계를 착용하지 않아도 모두와 똑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시계를 착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일종의 완전성에 있다. 그건 마치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광채를 더해주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런 게 아니어도 시간은 살 수 없다. (202쪽)


소설에서 시계점과 시계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량허우에게 삶의 공간은 집보다는 시계점이었고 그곳에서 아내 쑤를 만났기 때문이다. 쑤가 아버지에게 가출 후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다는 의미로 선택한 롤렉스 시계와 스위스 장인의 마지막 작품으로 량허우가 아내에게 선물한 스위스 시계는 특별하다. 아내는 떠났지만 그 시계를 통해 그녀와의 시간을 간직할 수 있기에.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런 이유로 시계를 선물하는 게 아닐까.


엉킨 실타래 같은 삶을 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엉킨 부분을 싹둑 잘라내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엉킨 부분을 푸는 동안 실로 무엇을 짤까 계획할 수도 있다. 잘라냈으면 존재 불가능한 계획. 량허우가 종잉에게 편지를 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시간이 그렇다. 아들에게 변명이나 변호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들이 엉킨 부분을 찾아 풀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상대로 인해 고통을 느낀 적이 없다면 그건 진정으로 사랑이 없었다는 의미다. 아는 것도 없지만, 또 무엇이든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251쪽)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쑤의 삶이 곧 나의 삶이기에 죽음 역시 나의 죽음이라는 것. (281쪽)


량허우의 삶과 사랑처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소설이다. 쑤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은 끝까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잘 짜인 소설이다. 쑤를 향한 량허우의 사랑은 애절하고 애처롭다. 사랑의 소리와 몸짓을 조금만 키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량허우가 되어 가까이에 있는 그녀들과 마주한다. 가만히 그녀들을 생각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삶을 선택하고 살아온 그들이다. 도움을 받을 이가 없어 안타까운 시절을 살아낸 그녀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어 본다. 입을 가린 꽃을 치우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량허우가 사랑한 쑤의 목소리, 지금 곁에 있는 종잉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다. 종잉과 량허우가 사랑을 말할 때 세상은 고요하고 은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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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팝니다, T마켓 - 5분의 자유를 단돈 $1.99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앵글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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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소설을 만났다. 그런데 정말 재밌다고 할 수 있을까? 재밌게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씁쓸한 기운이 몰려오는 건 왜일까? 길고 복잡한 이름의 저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의 『시간을 팝니다, T마켓』 은 그런 소설이다. 시간을 파는 마켓이라고, 정말 가능한 일일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오는 제목이다. 때마침 시간을 견딜수록 엄청난 상금을 받는다는 설정의 드라마를 보고 난 후였다. 놀라운 건 이 소설이 11개국에서 출간되어 20년 가까이 베스트셀러란다.


서두가 길다. 소설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아주 평범한 보통 남자(TC)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주변의 샐러리맨으로 보면 되겠다. 그의 꿈은 곤충의 몸과 영혼을 연구하는 과학자였지만 현실은 그냥 회사원이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고 아들 둘이 있다. 그리고 매달 갚아야 하는 주택 융자 상환금이 있다. 뭔가 기시감이 오는가? 어쩌면 당신과 똑같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견디고 버티며 사는 삶. 어느 날 라디오에서 말기 암 환자 전문의가 하는 말을 듣게 된다. 모든 이들은 생의 마지막에 인생을 결산해 본다고. 우리의 주인공 TC도 자신의 빚을 떠올렸고 그 빚을 갚으려면 3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월급쟁이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민 끝에 회사를 관두고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시간을 파는 것이다. 물론 아내는 남편이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어떤가, 어디서 들어 본 스토리 같지 않은가.


이제 TC가 팔려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자. 바로 시간이다. 병원에서 소변 검사를 할 때나 사용할 법한 플라스크 용기에 시간을 담아 팔겠다는 것이다. 엉뚱한 의뢰에 귀찮은 공무원들은 TC가 필요한 것들을 다 통과시켰다. 설마 진짜 그런 물건을 팔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TC는 굴하지 않았고 직진했다. 차마 이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은 못하는 대신 친구의 가게에 물건을 진열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단돈 1.99$에 살 5분의 T(시간)를 살 수 있다. 사실, 빈 용기에 불과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이 상품을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설명을 드리지요. 이 한 통을 제 가게에서 삽니다. 용기를 열면 5분의 T를 갖게 되는 겁니다. 물론 원하실 때 5분을 소비하실 수 있지요. 이 5분은 바로 구매자의 것이며 다른 누군의 T도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T는 원래 구매자에게 없던 시간이지만, 이 제품을 사시면 그 5분은 다시 구매자에게 귀속되는 셈이죠. 어디에 있든, 뭘 하고 있었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86쪽)


중요한 건 구매자에게 5분은 귀속되며 어디에 있든, 뭘 하든 상관없다는 것. 그러니까 5분의 구매자는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거나 눈을 감거나, 화장실에 갈 수 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5분의 시간. 그 5분이 얼마나 간절한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5분의 단잠, 5분의 여유, 업무를 미룰 수 있는 5분. 그렇다. 이제 TC는 5분의 용기가 아닌 더 큰 용량의 용기를 생산하고 판매한다. 시간을 점차 늘어난다.


5분의 여유와 휴식은 점점 커지고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당장 업무를 봐야 하는데 담당자가 자신의 시간을 구매했으니 일을 할 수 없다고, 뒤로 미루겠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이 어렵지 일단 시작된 시간 구매는 끝도 없이 늘어난다. 사회적 문제였다. 급기야 구매한 T를 소비해야 할 소비 기간까지 정해졌다. 물론 전 세계적인 열풍으로 이어졌고 35년짜리 시간도 판매가 되었다. 너도나도 35년짜리 T를 사기에 급급했다. 나만 유행에 뒤처질 수 없다는 일종의 동조심리가 같은 거라고 할까.


어떤 나라에서 T가 든 컨테이너는 며칠 안에 사회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대안 가치가 되었다. 다른 모든 것은 가치가 없었고 원하는 이도 없었다. 부동산이 곧 가치가 급락할 자산이 되리라는 점을 직감하기란 쉬웠고,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처분하고 싶어 했다. (144쪽)


T를 사기 위해 아파트는 담보가 되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가? 마냥 웃기고 재미난 웹툰과 소설이 될 수 없다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보통 남자((TC)가 사는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경제 소설이다. 소설 속 ‘대차대조표’나 ‘자유 주식회사’, 주식, 광고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경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의 주인은 누구인지 묻는다. 현재 누릴 수 있는 기쁨, 여유가 아닌 미래에 저당잡힌 삶을 위해 살 거냐고 말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위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현 체제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지만 때로 우리를 과도하게 노예화하며 체제를 지탱하고자 노력하는 개인에게 고통을 야기한다. 부富를 기준으로 한 국가 간 순위는 우울증을 겪는 국가들의 순위이기도 하다. 현대를 살고 있는 세계 시민들은 우리가 자신에게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 (177쪽, 저자의 말 중에서)


오직 나만이 계획하고 쓸 수 있는 시간과 현재를 사는 삶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한 적이 언제였던가. 남들과 비교하며 떠밀리듯 살아온 삶이 도착할 미래는 행복할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은 자신의 몫이니 시간의 노예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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