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글씨를 제법 잘 썼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특히 조카는 설마? 하는 표정을 한다. 심지어 그 당시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다고 해도 말이다. 연필로 쓰는 글씨였다. 그랬던 나인데 이제는 연필을 쓰지 않는다. 손글씨를 쓰더라도 연필이 아니라 알록달록 사인펜을 겨우 쓸 뿐이다. 아마도 아무튼 시리즈에서 『아무튼, 연필』이 궁금했던 건 아련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기도 전에 나는 연필 수집광이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연필 이야기, 혹은 연필의 역사 정도로만 이 책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정도 그런 이야기도 있다. 연필이니까. 연필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연필의 디자인, 연필의 색상, 연필의 관련한 에피소드 말이다.

연필이라니. 초등학생들도 연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연필보다는 샤프, 숙제도 컴퓨터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연필은 애틋하다. 이상하게 그렇다. 연필을 쓰지 않아도 내겐 연필이 있다. 필통도 있다. 버리지 못하는 물건 중의 하나가 연필이다. 모아두었던 불펜은 한 번씩 선 긋기를 해서 상태를 확인하고 버린다. 연필은 쓰지 않으면, 연필심이 존재하는 한 버릴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필을 찾아보았다. 필통 속 연필, 컵 속 연필, 연필이 꽤 많았다.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연필은 취향을 떠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처음 내 이름을 쓴 연필, 소중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쓰고 시험지에 답을 쓰고. 누군가는 연필로 쉽게 지울 수 있고 고칠 수 있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연필이 더 좋은 건 아닐까.


김지승의 작가가 연필로 바라본 여자들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근사하다. 연필심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좋았다. 뭔가 다른 말로 쓰고 싶다. 그냥 연필처럼 좋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흑연 심 연필을 처음 만든 사람이 여학생이었다는 글로 시작하지만 우리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 속에서 발명가, 사업가, 전문가의 이름이 여성으로 기록된 게 언제인가. 여성의 삶은 그렇게 흐릿하며 쉽게 지워졌다. 여성이었던 비서가 연필로 쓴 건 임시였고, 중요한 결재는 상사인 남자가 만년필로 했던 과거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튼, 다시 연필로 돌아가면 저자는 자신과 연필을 연결해 준 이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그들과의 사연을 들려준다. 다른 지방에서 이사를 온 저자가 만난 신부님이 선물한 오셀로 연필, 양배추가 말을 걸아 상담을 하면서 만나 상담사의 연필, 연필을 선물 받기 위해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듣는 코끼리 소동, 같은 건물 지하에 살았던 마녀로 불리던 이웃 할머니의 지우개가 달린 노란색 연필. 단종된 연필을 구하기 위해 웹서핑으로 연락이 닿은 스페인 프리힐리아의 실비아 할머니, 연필로 이어지는 여성작가들. 처음에 의아하게 여겼던 표지 속 코끼리와 긴 머리칼의 여성과 연필이 등장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연필로 시작해 연필로 끝나는 이야기들. 나는 한 자루의 연필을 사기 위해 거리로 선 버지니아 울프에게 듣고 싶은 연필의 의미를 생각하고 “연필은 어딘가에서 어디로 가는 다리다”란 최윤의 문장 속 연필을 상상하며,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나라도 연필이 필요하다는 <작은 아씨들> 속 막내 에이미에게 연필을 사 주겠노라 다짐하게 만든 메이 올컷의 연필을 응원한다.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114쪽)


인간이 자기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과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치는 순간의 교차는 우연이 아니다. 연필을 쓰다 보면 인간과 연필이 만나 아주 드문 풍경을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필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145쪽)


특정한 물건을 좋아하는 일, 그건 특별하거나 위대한 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에게는 연필이고, 누군가에는 그런 글을 엮은 책이고, 수많은 무엇일 수 있다. 아무튼, 연필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풍부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연필을 쓰지 않더라도 연필을 쥐는 순간, 나는 이런 문장을 떠올리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존재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기를 바란다.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46쪽)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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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제목 그대로 잊고 있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들고 아련한 추억을 선물한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구멍가게, 그곳에서만 펼쳐지는 풍경과 오가는 정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얼핏 누군가에게는 그저 전국을 다니며 현존하는 구멍가게를 스케치한 책이 무슨 대단한 감동을 안겨주는 거냐고 묻을 수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한다. 가만히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보고 듣는 순간, 그들의 삶에 동화되고 그곳이 궁금해질 거라 말이다.

책 속에 수록된 80여 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낀다. 책 밖에 있던 모든 감정들, 속상했던 마음이나 화가 사라지고 책 안으로 들어온 평온한 기분이 남는다. 작고 낡은 오래된 구멍가게의 그림의 힘을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그 구멍가게를 통해 마주하는 보통의 삶, 서민의 삶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그 가게를 찾아가는 동안 품었던 생각과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우리네 이웃을 닮았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 중심이 아닌 변두리의 삶이 책에 있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 기억하고 찾아왔을 때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곳을 지키는 이들은 통해 사회 어딘가의 고단한 이들을 떠올린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진 골목, 낡은 주택,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원주민의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짐작할 수 없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도시에서 공부하고 일하다 다시 시골로 돌아왔기에 월세, 이주민, 재개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의 구멍가게는 힘겨웠던 과거의 삶인 동시에 외로운 현대인에게 지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전국의 구멍가게를 찾아가 그곳의 어르신과 작가가 나누는 이야기는 평범한 것이다. 구멍가게의 이력과 주변의 변화, 어떻게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지 사연을 들려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을 통해 자신의 유년시절을 꺼내고 과거를 반추한다. 가게 앞에 놓였던 아이스크림 통, 평상, 그리고 나무들. 사진을 찍고 세밀하고 정교하게 펜화를 그리면서 작가는 항상 나무를 그리고 평상을 그린다고 했다.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의 풍경처럼 평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꽃의 풍경도 다채롭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바로 구멍가게는 그런 공간이었다.

‘내 그림엔 평상이 단골로 등장한다. 평상은 함께 앉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자리다. 나눠 앉을 수도 있고 둘러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누군가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제 내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다. 또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유연하게 쓸 수도 있는 자리다. 낯선 이들과 어우러져 앉아도 어색하지 않다. 평상은 나눔의 자리다. 가게 앞에는 평상이 하나씩 있다.’ (본문 중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동전 하나로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나날만이 아닐 것이다. 잃어버린 이웃과 잃어버린 정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딘가 구멍가게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작가에게 알리는 기자의 마음도 그것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한 공간과 그 공간에 숨 쉬는 삶을 마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가. 뭔가 대단한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책을 읽는 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삶의 고난과 역경을 나누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하면 어떨까? 뉴스나 정보 프로그램만 보는 이 역시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책이 주는 기쁨은 그런 것이다.

작가의 그림 속 시간은 멈춰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온 이들과 그곳을 아는 이들에게 그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이 책은 살아 숨 쉬는 삶이고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그리움이며 누군가에는 궁금한 시간이다. 영원의 시간 속에서 유한의 존재인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책은 묻는다. 간직하면 잊히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힘으로 우리는 삶을 지탱하고 이어간다고 말이다. 그러한 힘을 알기에 작가는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리라. 오래도록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 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 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듯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다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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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1-1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작은 가게가 거의 없겠지요 시골에나 가야 있을 듯합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갔을 텐데, 지금은 커다란 마트가 생기고 그런 곳은 거의 문을 닫아야 했겠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가까운 가게가 없어서 멀리까지 물건 사러 가야 하다니... 세상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어쩐지 그런 건 형태가 없는 것뿐일 듯합니다


희선

자목련 2020-11-18 07:3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제가 사는 곳도 시골이지만 마트가 많아요. 책 속에서 만나는 구멍가게는 찾기 힘든 것 같아요. 비가 오네요. 희선 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우리는 부주의하고 망각하는 인간들이다. 사실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수 세기 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는 우주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핏빛으로 물든 달과 불길과 강풍 속에서, 10월에 지는 얼어붙은 나뭇잎에서, 나비의 초조한 날갯짓에서, 밤을 무한대로 길게 늘리거나, 매일 정오 갑자기 멈추는 불규칙한 시간의 맥박 속에서 어떤 존재의 반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낮의 집, 밤의 집』, 116쪽)

소설을 읽으면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한 발을 내디디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하면 적절할까. 어떤 이야기가 계속될지, 어떤 문장을 발견할까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이해했다거나 인물이 또렷하게 그려지는 게 아니어도 괜찮다. 그게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거대한 꿈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 『낮의 집, 밤의 집』을 읽으면서도 모호한 존재들을 상상한다.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인간의 생과 존재들 말이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라는 거다.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짧고도 긴 사유의 글들이 조각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고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돌고 돈다. 『방랑자들』보다 1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방랑자’들이 이 소설의 후속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화자인 ‘나’의 꿈으로 시작해 그녀가 들려주는 ‘마르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축을 이룬다. 1990년대 폴란드의 작은 마을 피에토느에서 가발을 만드는 마르타와 교류한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화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노인인 마르타다. 그러나 마르타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니다. 다만 화자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 때로 환상처럼 때로 꿈속처럼 다가온다. 마르타 외의 마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쓰는 아버지로 힘든 가족의 상처를 대물림되고,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일상에서 허전함이 전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니 괴물처럼 여겨지는 인물도 있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타인의 이야기, 서로 다른 꿈들,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사유를 듣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조각들이란 걸 알게 된다. 전설처럼, 신화처럼 성녀 쿰메르니스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평범했던 한 여자가 성녀가 되는 과정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 수녀원, 동굴, 지하실, 다락방, 숲, 소설 속 장소와 공간은 모두 집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21쪽)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생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세상에 감탄하지만 소설 속 모든 관계와 사건들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했을까. 액자소설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성녀 쿰메르니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는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어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분명한 사유를 전한다.

인생이 갈망이 될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종이처럼 보이고,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져 떨어진다. 모든 동작들과 모든 생각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각각의 감정은 시작되긴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움의 대상조차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오직 그리움만 진짜이고, 중독성이 있다. 있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소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져야 한다. (『낮의 집, 밤의 집』,430~431쪽)


맨 처음 그녀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도무지 따가갈 수가 없았다. 외국 소설의 경우 주요인물의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많은 인물이 등장해 신화처럼 폴란드의 역사를 말한다. 그녀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척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그 소설에서도 보리수, 버섯 균, 과수원, 죽은 자, 신의 시간이 등장한다. 저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할까. 그라인더의 시간이라니.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태고의 시간들』, 54쪽)


작품 순서를 보면 『낮의 집, 밤의 집』이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보다 먼저 출판되었지만 번역으로 출판된 순서는 다르다. 어쩌면 순차적으로 읽었더라면 더욱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와 가까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나하나 조각으로 이어진 소설, 서로 다른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좋은 문장이라고 여겼던 부분에서 멈칫한다. 모든 소설의 인물은 방랑자이며 올가 토카르추크 그녀 자신이구나 알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가 이동하는 공간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 그리고 구축하고 만들어지는 세상.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이 세 개뿐인 눈금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놀라운 통찰력.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 『방랑자들』, 35쪽)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방랑자들』, 280쪽)


다시 『낮의 집, 밤의 집』로 돌아와서 생각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안내하는 독특하고 다양한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동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만큼만 가능할 것이다. 그녀와 소설이 방랑자인 것처럼. 그런 이유로 이 굉장한 소설 속에서 이런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다. 우리 생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명징한 사실을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나 자신에게서 생기고, 공간과 시간의 한 지점을 흘러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장소와 시간의 속성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다른 지점에서만 바라본 세계들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많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80쪽)


마르타의 집은 그녀와 닮았다. 그녀처럼 하느님도, 그의 피조물도,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직 한순간, 지금만 존재할 뿐이지만, 그것은 거대하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압도적이다. (『낮의 집, 밤의 집』,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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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파롤 2020-11-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고의 시간들 읽으면서 너무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보았는데.... 이 책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0-11-05 11:1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랑그와파롤 님의 말씀처럼 신비하고 새로운 세계.
이 책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입을 것 같은 건 버리는 거야.”

“자주 입는 옷만 남기고?”

“웅, 좋아하고 즐겨 입는 것만.”


작은언니와 나눈 대화다. 계절이 바뀌면서 정리하는 옷에 대해서다. 언니는 잘 버리지 못한다. 나의 기준으로 그렇다. 그러니 서랍장에는 옷이 넘쳐나고 빽빽한 옷걸이도 옷이 가득하다. 모두가 느끼는 것처럼 옷이 이렇게 많아도 입을 만한 옷이 없고 어디 입고 나갈 옷이 없다. 그렇다고 비싼 옷을 장만한 것도 아닌데 버릴 수도 없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란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정리는 늘 어렵다. 가지거나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는 물건을 버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물건도 그러니 마음이야 오죽할까.


언니와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서 ‘입을 것 같은’에 ‘읽을 것 같은’을 대입했다. 뜨끔했다. 언니가 보기엔 내 책장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책들. 책꽂이에 가지런하게 꽂힌 책 말고도 쌓아둔 책들이 많다. 굴러다니는 띠지, 포스트잇이나 노트도 그렇다. 그러니 언니에게 충고할 입장이 아니다. 아무튼 그래서 몇 가지 물건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컵을 좋아한다. 머그, 찻잔, 커피잔, 유리컵, 맥주잔, 모두 좋아한다. 수납할 공간이 있다면 장식장을 들려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가 나간 컵도 버리지 못하고 볼펜 통으로 쓰거나 머리끈과 머리핀을 놓아둔다. 지금 막, 돼지 저금통을 대신해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컵을 골랐다. 그런데 결국 고른 건 겨우 3개 정도다. 사용한 지 오래된 컵, 이미 필기구를 담아두었던 컵,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둔 컵. 그러면서 텀블러도 골랐다. 같은 디자인이 두 개인 경우, 이벤트 사은품으로 받은 경우. 더 고르고 싶지만 눈치가 보였다. 


조금씩 이렇게 골라내는 연습을 하면 괜찮아질 것이다. 소중한 의미를 부여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사용하지 않거나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이별을 하는 게 맞다. 이렇게 버릴 생각을 하고 다짐을 하면서도 또 책을 둘러본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김숨의 『떠도는 땅』, 올가 토카르추크의 『낮의 집 밤의 집』, 한지혜의 신간 소설집 『물 그림 엄마』까지. 뭐 3권 정도야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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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19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컵이며 텀블러 좋아합니다. ㅎㅎ 어디 여행가면 기념품으로 꼭 예쁜 머그컵 같은걸 사와서 쟁여둔다죠. ㅎㅎ

자목련 2020-10-20 11:31   좋아요 1 | URL
컵은 사랑입니다. ㅎㅎ
그래서 버리는 게 더 힘듭니다. ㅠ,ㅠ

scott 2020-10-1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두개를 가득채웠던 책들은 이사하기전 몇달에 걸쳐서 나눠주거나 중고로 팔아버리고 소장용이 아닌이상 이제는 이북으로 보게 되네요.
대신, 에코백을 모아요 박물관 미술관 셔틀하면서 시즌별로 ㅎㅎ

자목련 2020-10-20 11:30   좋아요 1 | URL
와, 대단하시네요. 소장용의 범위를 좁혀야 할 것 같아요. ㅎ
언제 모은 에코백 좀 보여주세요. 에코백도 좋아요!!
 


숙면을 위해서 좋아하는 커피를 줄이고 있다. 하루에 세 잔 정도 마시는 커피를 저녁에는 마시지 않는다. 그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봄에는 제법 효과를 봤다. 계속 실천하지 않아서 몸이 화를 내는 걸까. 여름에는 더 많이 마신 것 같다. 열대야로 자다가 깨는 일이 익숙해서 그랬던 걸까. 최근에 귀가 아픈 이후로 종종 깬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잠들려고 뒤척이는 시간이 너무 길다. 스마트폰을 잡지 않으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으니 자꾸만 손이 간다. 악순환이다.

지난주에 발표된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루이즈 글릭’이란 시인이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의 시인다. 세상에 시인은 이렇게 많구나. 번역된 시집도 없다. 좋은 시를 엮어놓은 시집에 수록된 시가 전부인 듯하다. 그러니 올해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의 작품을 읽거나 구매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발 빠르게 준비한 출판사가 빠른 시일 내 출간한다 해도 현재는 그렇다.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넘쳐나니까. 기다렸던 책의 입고 소식처럼 반가운 게 또 있을까. 김이설 작가의 신간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다. 이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전자책으로 만난 이도 있다. 그래서 종이책을 더 기다렸다.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한때 필사를 했던 적이 있다. 손글씨는 아니었지만 자판으로 옮기는 것도 노력이 필요했다. 김숨의 초기 단편이었다. 현재 김숨의 소설과는 다른 결이었다. 쓰고 나니 그 단편집이 읽고 싶다. 기대하는 동화와 에세이도 있다. 『5번 레인』, 『다큐하는 마음』를 읽는 시간도 즐겁겠다.

가을이라 냉장고 여기저기 과일이 많다. 파지 사과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다. 엊그제 방송을 보니 우리가 선호하는 빨간 사과는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생산된다고 한다. 이제는 좀 더 현명한 소비를 해야겠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사과도 있다. 한 입에 쏙 넣을 수 있는 디저트 사과라고 할까.






깊은 잠에 빠져들기 위해 커피를 더 줄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새벽에 굳이 잠들려 하지 말고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게 좋을까. 처음 맞이하는 날들도 아닌데 잠들지 못하는 건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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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10-13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새벽을 열어주는 세가지가 자목련님 페이퍼의 제목과 같습니다. 사과, 커피, 책이요. 책 대신 인터넷이 될때도 많지만 (^^), 사과와 커피는 변함이 없는, 꼭 필요한 두가지랍니다. 파지사과 애용자예요.
김이설 작가의 소설 출간 소식, 저만 반갑게 느껴지는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동안 꾸준히 출간하셨을텐데 제가 그동안 우리 소설을 너무 안읽고 있었어요.

자목련 2020-10-14 10:20   좋아요 0 | URL
괜히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ㅎ 파지사과 애용자라니 더 반갑고요.
김이설 작가의 장편이 무척 오랜만이라 더욱 기대가 커요. 이번 기회에 함께 읽으면 더 좋겠습니다!

stella.K 2020-10-1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과는 자두만한가 봅니다.
사과의 붉은 색이 인위적으로 만든 거라니 처음들어 보네요.
그럼 사과의 본래의 책은 뭐였을까 싶네요.
초록색? 아니면 노란색?
저도 나이가 드니 커피 세 잔 마시기가 부담스럽더군요.
커피는 수면과 그다지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너무 늦게만 마시지 않는다면.
저는 오히려 아침과 저녁으로만 먹고 있습니다.
잠은 갱년기라 그런지 TV 켜놓고 잘 때가 많고, TV 끄면 말똥말똥하고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 이젠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목련 2020-10-14 10: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두만해서 한 입에 쏙 들어가요.
방송에서 과수원을 하는 분이 나와서 말씀하시는데 소비자가 붉은 사과를 선호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약간 파란, 덜 붉은 사과가 덜 익은 게 아니라고요.
커피가 잠과 상관이 없다면 저녁에도 마시고 싶은데, 제 몸을 길들여야 할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