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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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이상문학상 수상집은 내게 필독서였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이 가물 가물한 역대 수상작들. 얼마 전에 만난 김훈의 에서이 <바다의 기별>이 아니었다면 기실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즘 많은 문학상들이 수상작을 내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하게 이상문학상은 문학계에서 귄위가 있지 않나 싶다. 수상작인 김훈의 <화장>을 비롯하여 우수상을 수상한 내게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
 
 김훈의 <화장>에는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火葬)과 대조적으로 젊은 여직원의 생동감있는(化粧)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메마르고 건조한 아내의 육체, 싱그러운 여직원에 대해 감춰둔 욕망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병든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 남성적이라서 그런지 소설은 애잔함보다는 사실적 기술이 많다. 죽은 아내를 화장시키는 내내 화자가 근무하는 화장품 회사에서는 두 개의 광고 카피에 대한 언급이 계속된다. <여자의 내면여행>, <여름에 여자는 가벼워진다>라는 두 개의 문구는 죽은 아내와 여직원으로 연결된다. 결국 <가벼워진다>라는 것이 선택됨과 동시에 나는 자꾸만 죽은 아내가 떠오른다. 삶과 죽음, 삶이라는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세상으로의 여행이 삶이 아닐까.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글, 김훈의 글이 가진 특징을 잘 살린 소설이 아닐까 싶다.
 
 문순태의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제목처럼 어머니가 가진 향기에 대한 이야기다. 늙은 어머니, 그녀에게서는 고약한 냄사가 난다. 아무리 환기를 시키고 집 안 가득 향수를 뿌려도 그 냄새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은 시작되고 그 사이에서 있는 아들은 어머니의 잠시 동생에게 부탁한다. 어머니의 방을 청소하면서 발견한 어머님의 물건들,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새우젓을 팔던 젓국자, 냄새의 시작은 그것들이었다. 어머니의 냄새는 나를 만든 냄새였건만.  문득, 내 어머니의 냄새는 어땠던가, 코를 킁킁거려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슬픈 소설이었다. 늙는다는 것,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을. 우리는 때로 잊고 산다. 내 어머니의 모습은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7편의 우수상 수상작들중에서 특히 좋았던 소설은 김승희의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과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 였다. 김승희 작가의 단편은 처음 만난 것이다.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의 여성 주인공들의 독백, 대화 형식으로 독특하다. IMF를 겪고 힘들어진 생활을 위해 여자들은 전화방에서 일을 한다. 각각의 힘든 가정사를 독백으로 털어 놓는다. 우리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흙 파이잖아. 물기가 없어 버석버석하긴 하지만 울면 진흙이 흘러내려. 진흙이 마구 흘러내리면 우리는 자신을 잃게 되잖아. 굽자, 굽자, 또 굽자. 흘러내리려는 내 몸을 굽기 위해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거는 거야. p145 그녀들은 모두 진흙 파이로 묘사된다. 부서질 듯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절망하지 않고 삶을 지탱하는 그녀들.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는 점진적으로 소설의 실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연한 사고로 기억을 잃은 남자는 요양원 창 밖의 자전거만을 주시한다. 사실을 알리려는 아내, 사실을 숨기려는 어머니. 그 사실속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남자의 기억속에 자리잡은 것은 손 안에 무언가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손을 맞잡은 것은 바로 아이의 손이었다. 트럭이 아이를 치었고 남자는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다. 하성란은 차갑고 차분하게 그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
 
 새로운 작가, 알고 있었던 작가의 새로운 단편을 읽는 즐거움과 동시에 소설들이 갖는 의미를 평하는 작품 해설을 이해하기에는 한계를 느낀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글이 있어 소개해 본다.<늙으신 어머니의 향기>의 작가 문순태의 글이다. 진정 문학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작가의 노력과 문학을 저버리지 않는 독자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는 낡지 않은 것도 새롭지 않은 것도 없다. 축적된 전통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고, 최첨단 과학 안에서도 낡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실험정신도 중요하지만
옛것 안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가꾸는 노력도 작가는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실험적 의식이나 새로움만을 찾으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보편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와 가치도 존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p108 작가의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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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걸어간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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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환적인 표지는 금세 나를 윤대녕만의 세상으로 이끈다. 네 번째로 만나는 그의 소설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그 설렘을 기억하게 한다.  같은 듯 다른 느낌의 소설들, 혹독하게 말하자면, 윤대녕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윤대녕의 소설에는 언제나 낯선 이와의 만남, 일상에서 벗어난 또 다른 행로,  누군가의 부재, 결핍이 있다.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 2004)소설집에서도 마찬가지다. 6편의 중단편의 소설을 통해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 상실, 절망에 대해 쓰고 있다. 그의 글은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보랏빛의 소설, 서정적인 신비로움이 아닐까 싶다. 

 표제작인 <누가 걸어간다>를 비롯해 <찔레꽃 기념관>, <올빼미와의 대화>, <흑백 텔레비젼의 꺼짐>의 단편들은 주인공의 행동,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 일상의 풍경의 묘사가 탁월하다. <누가 걸어간다>의 주인공은 몇 년 전 아내와 이혼을 하고 암 진단을 받아 생의 마감을 생각하며 파주로 들어온다. 때마침 근처 군부대에서 탈영한 남자는 미용사인 여자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두 남녀의 모습은 주인공과 학원강사인 한 여자와의 만남과 비교되며 절망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탈영병은 암에 걸린 주인공과 겹쳐진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삶은 그 순간,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행 간 사이에서 백색의 찔레꽃이 튀어나올 것 같은 <찔레꽃 기념관> 은 무척 아름다운 단편이다.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삼류 영화의 시나리오를 손봐주는 소설가로 전락한 주인공과 일이 없는 방송작가의 우연한 만남은 둘 사이에서 <찔레꽃>에 대한 추억은 둘 사이를 점점 긴밀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어린시절 만났던 이발사의 집 앞에 가득했던 찔레꽃, 시인이었던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방송작가의 병든 아버지가 부르던 노래 찔레꽃. 이발사이면서 시인이었던 그는 같은 사람이었을까. 추억과 동시에 붙잡을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쓸쓸하다.

 윤대녕의 소설 속 화자는 항상 자신이 누군인가를 찾아 헤메고 있다. <흑백 텔레비젼의 꺼짐>에서 주인공 서정원은 권력자의 서자로 자신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다 자신의 첫 남자가 자신의 생부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녀를 사랑한 일도를 남겨둔 채, 서사모아에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물방울 같은 존재였어요. 무엇에 부딪히면 툭 꺼져버리는 존재말예요. 그걸 터뜨리지 않기 위해 정말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왔어요. 매순간 숨이 차게 말예요. 하지만 그게 햇빛 속에 떠 있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버티겠어요.”p55

 소설 속 정원만 물망울 같은 존재일까.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물방울 속에 갇혀있거나, 물방울 속에 살고 있는 타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물방울을 터뜨렸을 때, 비로서 관계는 확장되고 커다란 그들만의 물방울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말없이 혼자 사라져 여관방에 누워 있거나 일부러 먼 곳에 있는 술집에 찾아가 문을 닫을 때까지 벽을 바라보고 안자 있거나 혹은 나처럼 걷고 있거나 또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엉뚱한 장소에서 마치 타인인 듯한 심정으로 자신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름 없는 존재들 말이다. 알고 보니 그게 모두 사람이라는 존재였다. p247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처음에도 말했지만, 중복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누가 걸어간다>를 읽으면서 단편 <배암에 물린 자국>을 생각했고, 걷기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는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를 떠올린다.  윤대녕의 집필실이 제주도여서 그럴까, 꼬집어 말하자면 낯선 공간, 여행지,  섬은 제주도라는 공간과 마주한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소설석 화자를 통해 작가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게 아닐까 하는 엉뚱함으로 이어진다.  비릿한 바다냄새, 그럼에도 나는 그의 성실한 독자이고 싶다.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글 속을 유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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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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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증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눈이 먼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살아있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차 어둠의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라고 해도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어떻게 이런 소설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를 통해 그가 인간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하는 작가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만나고 보니 그가 더 궁금해진다.

 나만이 아닌 세상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 눈이 먼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점진적으로 세상에 눈 먼 자들이 늘어난다면 제발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 모두가 바랄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없기에, 다수를 위해 소수의 전염자들을 정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하에 감금한다. 그것은 마치 정부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양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인간은 쉽게 동요한다. 죽음을 몰고 오는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SARS, 조류 독감같은 경우에도 인간은 아무리 안전하다고 강조해도 닭고기를 먹지 않으며 중국이라는 단어조차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이처럼 단순하며, 이기적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 인지 모른다. 하여, 의사의 아내는 홀로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기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눈먼 자들에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으며, 그들의 노예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녀는 그들과 같이 눈 먼 자로 남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잔인한 고통인가.

 사람들은 불과 몇 시간만에 이성과 사회규범을 잃어버리고 혼돈의 세상에 빠져버리고 만다.  한 순간, 나는 마치 내 눈이 멀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막아가며 나의 눈이 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나는 꼭 확인해야만 했다. 눈먼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버렸다. 아니, 차라리 동물의 왕국처럼 체계가 있었다면 나았으리라

 먹을 것을 시작으로 숨어있어서 차마 드러내지 않았던 인간의 탐욕은 눈이 멀고서도 드러난다. 살아 남기 위한 본능적 욕구를 이용하여 여자를 농락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버린다. 끝내, 의사의 아내는 그들을 살인하기에 이른다.  전쟁터가 이러했을까. 그 안에서 인간이므로 가져야 할 본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추악한 모습이 본질일까.

 이제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이 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회가 구성되고 새로운 규범이 생겨난다.  서로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선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인가. 본다는 것으로 선의 역할이 맡겨진 의사의 아내, 그녀는 진정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끌고 돌봐야만 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영영 그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대로  소설이 끝나지 않는다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본문 461쪽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보여준 인간의 본질, 그것은 우리의 사회의 모습과 같은지 모른다. 눈을 뜨고 있어도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쉽게 생각하고 시류에 휩싸여 행동하는 어리석음, 그 안에서 제대로된 시선으로 선을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신비의 거울처럼 위기에 처한 인간들의 내면이 변모하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경고한다. 

 다행스럽게도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려 하고 함께 협력하여 살게 되었을 때 점진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 처럼 다시 그들에게 눈뜬 자들로 돌아가게 한다. 그들에게 보이는 한 줄기 빛, 그것은 무엇일까. 새로이 만나는 세상에 빛과 같은 삶을 살라는 메시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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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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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역사에 있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욕망은 전쟁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인류는 잔혹한 죽음을 역사에 기록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소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로 이어지고, 토론의 대상이 된다. 인간으로써는 차마 행할 수 없는 처참한 살인 기록들을 마주하며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건 사실이다. 

 잔인함이 자리잡은 인간의 내면, 그 살벌한 현장에 작가 코맥 매카시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그에게 있어 소년은 <로드>에서 만난 아들과 같다. 냉랭한 눈빛,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소년, 코맥 매카시는 여전하게 불친절하기만 하다.  역사적 기록, 전쟁을 재구성한 소설이지만, 그 시절 그 무리에 분명 열네 살, 아니 더 어린 소년은 존재했을 것이다.  소년과 감옥에서 만난 토드빈, 전직 신부라는 이유로 선의 표상으로 보여지는 토빈, 살벌한 눈빛이 그려지는 인간 사냥군 글랜턴, 궤변을 늘어놓는 판사등 구체적 인물을 제시하지만 소년에게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소년이라는 단어가 그 이유를 대신할지 모른다. 아이, 소년, 그들은 세상과 세상을 이어 줄 끈이 아니던가.
 
 1842년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기록과 실제는 언제나 다르다. 멕시코와 미국은 새로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모래 바람이 가득한 사막, 가물거리는 오아시스, 마른 선인장,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건조한 눈빛만이 소설을 진행시킨다. 이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세상을 서정성 짙은 문장으로 승화시킨 코맥 매카시, 아마도 이런 이유로 그의 소설을 극찬하는 것이리라.

 살인과 약탈, 방화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피로 물들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낭자한 피는 그저 결과일 뿐이며, 살아있으니 또 다시 걷을 뿐이다. 군대는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영입되거나 한꺼번에 소멸된다. 소년은 혼자가 되었다가 어디선가 스친 그들과 재회를 한다. 그들이 죽여야 할 사람들은 아파치였으나, 끔찍하고 잔인한 욕망은 인디언과 주민들에게로 향한다.

 걷고 걷는다. 적과 아군의 차이는 없다. 그저 나만이 아군일 뿐이다. 그들이 맞는 새벽, 새로운 빛은 말 그대로 핏빛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결정은 정의에 관한 모든 질문을 무력화하네. 하느님의 거대한 선택에는 도덕적이고 영정이고 자연적인 모든 사소한 것들이 다 포함되네. 325족)전쟁이라는 상황은 살인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다. 그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진행시키는 살벌함,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가. 선과 악,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죽음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인가.  말이 없는 소년은 목격자이며 관찰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하는 판사는 마치 하느님의 대변자처럼 느껴진다.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락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427쪽)문득,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한다. 성악설(性惡說), 성선설(性善說)로 대두되는 인간의 본질, 과연 그 본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해한 문학을 이해하고자 욕심을 부릴 것도 아니요, 추악하고 살벌한 인간에 대해 논할 것도 아니다. 다만, 작가가 그려내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언제나 소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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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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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온 날들, 경험하지 못한 역사 속 많은 사건들을 종종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된다. 시나, 소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강자의 편에서 기록된다고. 우연찮게 오늘은 새로운 정권이 구도를 잡으려 용트림한지 꼭 1년을 맞는 날이다. 작년 한 해, 조금이나마 나아질 꺼라는 기대를 품었던 수많은 이들의 가슴, 그 가슴에 지금은 분노와 냉대로 가득하다.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올 해, 세상은 모두를 정치에 참여하는 자로 이끌어냈다. 촛불을 손에 든 유모차 부대,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 넥타이 부대, 어느 하나 자신의 이익을 염두해두고 거리로 달려나가지 않았다. 스스로의 판단하에 자발적인 동참이었다. 그들의 뜨거운 밤의 노래가, 그들의 흥겨운 춤사위의 진심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세상은 알아줄까.

 편향적인 사고로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내게, 부끄럽지만 역사는 지나간 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이념은 어떤 것이며, 혁명을 위해 무참히 죽은 이들의 영혼, 그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청춘을 바쳤는가. 그들의 무수한 밤들, 두려움에 떨던 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불렀던 노래들. 

 북간도, 1932년 9월의 용정, 내게는  윤동주의 생가로 기억되는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삶을 내던졌는가. 그저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김해연,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혁명을 위해 죽는 그 순간에서야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 이정희. 중국, 일본, 조선의 젊은이 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스파이로 이용하여 그들은 <민생단 사건>의 중심에 선다. 이념이 중요했던, 민족이 중요했던 그 시대는 피끓는 청춘의 죽음을 요구한 시대였다.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연인을 이해하기까지 김해연은 입과 귀는 닫히고, 눈은 멀고 만다.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운 봄 날의 기억임을 알기에 그의 침묵이 그의 모부림이 가슴 아프다. 그를 꼭 안아주고 잠들게 할 사랑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봄날 아스라한 아지랑이 같은 사랑, 그 눈과 입을 열리게 한 이, 역시 혁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여옥이라는 청춘이었다.  새로운 사랑은 새로운 혁명으로 이어지나, 시대는 그들에게 사랑 보다 혁명을 요구한다. 그들이 바람과 맞서며 지새운 밤들, 정의라 믿고 그것을 위해 총을 겨누는 그 밤의 공포를, 포근한 침대 속에서 그들의 밤과 마주한 나는 머리 속으로도 느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힘겹게 얻어지는 것일까. 여옥이 불러대던 노래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처연함이 이 시대,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의 노래와 같다는 것을 안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이 이야기를 쓰고자 고민했다는 김연수식 밤의 노래는 이제 세상의 낮과 밤에 울려 퍼진다. 길고 깊은 밤, 아침이 혹여 오지 않을까 두려운 내게 김연수의 노래는 말을 건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이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중략)
우리가 영국더기 언덕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요. 그러니까 멀리서 몸을 뒤척이며 흘러가던 강물들. 눈송이들처럼 떨어져 내리던 봄의 하얀 꽃잎들. 십자가를 향해구불구불 이어지던 영국더기 언덕길. 사진 속에 찍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더없이 아끼던 보물들이었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게 보물이라는 걸 알아보는 단 한 사람뿐이었어요. 내가 원할 때마다 지치지 않고 함께 그 보물들을 봐줄 사람이었죠. 한때는 이 세상 전부를 원했지만. 이젠, 겨우 그 정도. 이제 내가 아는 세계의, 그러니까 거의 전부. 323~324쪽 정희가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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