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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ㅣ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시는 언제나 어렵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숨겨진 의미를 시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해하기란 역부족이다. 더구나 익히 접해본 시인이 아닌 생경한 이름의 시는 더욱 그러하다. 온전하게 시를 이해할 수 없기에 시를 읽는지도 모르겠다. 허연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라고 소개하고 싶다. 역시나 내게는 잡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다.
긴 시간, 시를 쓰지 않은 듯한 시인은 이제 다시 시를 쓰면서 그 외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듯 보인다. 허나, 그의 가슴에는 언제나 시를 품고 살았을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토록 절절하면서도 일상적인 시어들을 탄생시킨게 아닐런지.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제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전문
시인을 빛나게 하던 푸른빛, 내게도 그런 빛이 있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것을. 늙음으로 향하는 내가 마지막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소망을 기억하게 하는 시다. 그리하여, 시인은 나쁜 소년으로 서 있고, 나는 나쁜 소녀로 서 있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나는 나쁜 소녀이고 싶을 뿐. 허연은 시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 빌딩숲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보면서도 시를 열망하던 나쁜 소년을 찾아내려 애쓴게 아닐까 싶다. 감히, 나는 이 집을 ‘시를 위한 시로 채워진 시인을 위한 시’라 말하려 한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 전문
이 시를 계속해서 읽고 또 읽었다. 사랑한다가 아닌 사랑했었다. 이미 과거가 되버린 사랑이며 삶이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나도 누군가를 사랑했던가. 상스럽고 상스럽게. 그런 적이 있었던가. 허연은 무엇을 잡고 싶었을까. 시를 위해 고뇌하던 먼 기억을 붙잡고 싶었을까. 허무하게 살아지는 복잡하고 건조한 모래성 같은 일상에서 ‘시’라는 빛을 다시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시라고 말하지만, 정작 시는 그 자신인 것을 느낀다.
여전하게 나쁜 소년인 허연, 그 나쁜 소년을 만난 나는 왠지 그가 나쁘지 않다. 그가 좋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