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나무 식기장 - 제15회 한무숙문학상 수상작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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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통해 만나는 삶은 소설이므로 가능한 삶이 있는 반면, 이것이 과연 소설일까 하는 삶도 있다. 소설속에 녹아든 일상이 평범하여 마치 누군가의 인생 스토리를 듣는 듯 하다. 이현수의 소설 <장미나무 식기장>은 사실, 제목과 표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찬장'이라 불리며 마루 한 쪽에 놓여있던 내 어머니의 낡은 장식장이 떠올랐다. 이현수의 소설에는 여자의 다양한 삶이 있었다. 
 
 ‘어제 산 여자는 닭살 피부였다. 옷을 벗겨보니 생각보다 휠씬 오돌토돌햇다. 드물게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p 9 단편 <녹>은 조금은 섬뜩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포장 전문 학예사인 남자에게 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오로지 그에게는 유물만이 전부였고, 최우선이었다. 손이 갖는 고유의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여자를 만났는지 모른다. 하여, 함께 살았던 여자가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물이 좋으면 유물과 살라고 말이다. 

 이 단편은 불교박물관에 학예관으로 일하는 은영이 역사학도인 후배 정호의 청혼을 거절하는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되는 것들의 목록>와 함께 읽으면 좋다. 대대로 내려오는 문화재 남유당을 지키는 안주인 역할을 은영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행여 집이 어떻게 될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남들에게 부러움과 대단한 삶인양 보여도 정작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다. <녹>여자도 은영도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표제작인 <장미나무 식기장>과 <추풍령>은 과거의 추억에서 이어진 현재를 이야기한다.  <추풍령>은 대대로 여자만이 남겨져, 그리하여 자동적으로 호주가 되어야 했던 여자가 풀어내는 이야기. 내력인지 모두 과부가 된 여자들은 집 안 살림과 먹거리에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어머니만은 여기 저기 친척집을 전전하며 밖으로 나돈다. 

 주인공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한번씩 집에 돌아와서 끓여준 감자탕은 집 안 여자들뿐아니라, 동네 모든 여자들과 함께 먹었다. ‘감자탕을 먹는 동안은 호주라는 무거운 짐도 내려놓을 수가 있었고, 슬픔과 분노, 원인을 알 수 없는 노여움, 삿된 기운일 수도 있는, 몸 안에 떠도는 대책 없는 열기 들을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잠재울 수가 있었다. ’p 61 어머니의 한과 슬픔이 녹아들어 끊인  감자탕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힘이었다.

<장미나무 식기장>의 주인공은 어느날 주워 온 장미나무 식기장을 보고 어린 시절 책상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만든 살통을 겸한 책상은 부피만 컸을 뿐, 실용적인 구석이라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가 죽고 가장이 된 어머니는 수완좋게, 억척스럽게 살림을 늘렸고, 애물단지 같은  책상을 어디든 끌어안고 다녔다.

 ‘책상은 어머니에겐 그냥 책상이 아니었다. 나와 언니들이 무심히 책상을 볼 때도 어머니는 그 책상을 다른 눈으로 봤던 것이다. (……)생전의 아버지는 그 물건이 어떤 용도로 쓰일 때 기뻤을까. 그것이 책상이라면 단 한순간일도 온전한 책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이 쌀통이라면 단 한순간이라도 온전한 쌀통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 같은, 요령부득한 그 물건.’p 101 

 결국 자신의 손으로 태워버렸지만 어머니에게 그 책상은 아버지를 대신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여자 혼자 딸 셋을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때는 몰랐을 터, 삶은 그런 것이리라.

 <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 들이지 마라>는 우연하게 늙은 여자의 정원에 들어간 젊은 여자의 일상이다. 후처의 삶을 선택한 젊은 여자, 본처였지만 귀가 넷인 아이를 낳고 엄마와 아내의 자리를 저버린 늙은 여자. 일반적인 삶이라 볼 수 없다. 계모라는 자리를 벗어던질 수 없었고, 버린 아이를 키워온 후처에게 늘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있어 더 속도를 내고, 신나게 읽었다. 그러나 결코 신나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들에겐 남들은 쉬이 사는 것 처럼 보였을 삶이 얼마나 기막힌가 생각하니 자못 슬퍼졌다.  

 한 때, 소녀였던 그녀들은 이제 엄마가 되거나 중년의 여인이 되어 지나온 삶을 반추하리라.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겼던 살림살이, 마흔이 넘어 혼자인 큰 언니, 이제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를 소설 속에서 만난 것이다.

소설은 막힘없이 읽혔다. 해서 너무 잘 익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느낌, 그것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슬그머니 했다.  살아 온 날들을 기록한다면, 어떤 단편과 가장 근접할까, 남겨진 삶은 잘 살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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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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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약속 장소가 서점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책에 대한 정보나 구매는 모두 온라인 서점을 통해서 하고 있다. 그래도 서점은 내게 언제나 달콤하고 은밀한 공간이다.  온갖 책들이 뱉어내는 냄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흥분된다. 하여,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이라면이 <노란 불빛의 서점>은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저자 루이스 버즈비는 책이 좋아서 서점을 찾고, 그리하여 서점에서 근무하여 책을 팔고, 어디서든 서점을 들러서 책을 사야 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그의 서점 탐문기이며, 그의 서점 사랑기라 할 수 있다.  서점에 대한 책으로는 실비아 비치의 <셰익스피어 & 컴퍼니>와  제레미 머서의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를 만났다.  두 책은 특정한 서점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노란 불빛의 서점> 는 책의 역사와 더불어 책과 서점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전해주고 있다. 하나 하나 손수 책의 내용을 옮겨 적으며 판매했던 책의 유통과정, 헌 책방에서의 즐거움, 텍사스의 '북트업'과 웨일스의 '헤이온와이'같은 책 도시와 세계 곳곳의 특이한 서점들을 소개한다. 
  
 진정한 탐서가로 그가 쓴 글들은 무척 매력적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 ‘책은 느림을 동반한다. 시간을 요한다. 글을 쓰는 일, 책으로 펴내는 일, 읽는 일이란 죄 늘어지는 일이다.’ p 11 ‘한 권의 책, 거기서 읽은 하나의 문장으로 세상의 온갖 좋은 것, 사소한 것, 심오한 것들이 시작되었음을 나는 배웠다. ’p 111 책은 마치 모든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마력을 지닌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책에 빠져들게 한다.
 
 루이스 버즈비는 서점에서 만난 동료들의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다. 어머니 뻘 되는 그레타가 ‘어른들의 참견이 지나치면 아이의 선택 능력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조언을 읽으면서 내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여 읽게 하고 있는 어른으로 가슴이 뜨금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고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신경학자들이 책을 읽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 신체 움직임이 마음을 지배하는 뇌를 자극하고 조절한다고 알아낸 사실이 책을 읽을 때마다 떠오를 것이다.  이 사실을 들먹이며 아이와 조카에게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대형 서점이 늘어남에 따라 소형 서점, 동네 서점은 찾아보기 어려운 안타깝고 씁쓸한 상황에 ‘모든 서점은 저마다 고유의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 ’p 261 는 말은 왠지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책에 소개된 칼비노의 소설 『한겨울 밤의 여행자』의 일부는 책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다.
 
 당신이 읽어본 적 없는 책들, 당신에게는/ 필요없는 책들, 독서 외의 다른 목적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들, 쓰이기 전에 읽는 책들의/ 범주에 속하지 때문에 당신이 미처 책장을 펴기도/ 전에 읽어버린 책들, 당신에게 생명이 더 있다면/ 분명 읽겠지만 불행히도 당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읽을 수 없는 책들, 당신이 꼭 읽어야 하지만 먼저/ 읽어야 할 다른 책들이 있어 읽을 수 없는 책들,/ 지금은 너무 비싸 재고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책들,/ 훗날 똑같은 내용으로 페이퍼백이 나올 책들,/누구에게선가 빌려볼 수 있는 책들,/모든 사람이 읽었다 하는 탓에/ 당신도 언젠가 읽은 것 같은 책들  p 266~267 
 
 마음은 벌써 가장 가까운 서점으로 향하고, 머리 속은 읽고 싶은, 사고 싶은 책들의 책등으로 가득찬다. 저자는 책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고, 그것들과 함께 했으며 책으로 펴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그의 서고에는 얼마나 많은, 얼마나 다양한 책들이 있을까. 노란 불빛이 가득한 서점, 딸과 함께 책을 고르는 루이스 버즈비의 모습을 상상하니 내게도 그 따듯한 불빛이 전해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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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 채플린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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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현실의 도피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실의 고통이 극에 다랐을 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마술이나, 판타지에 환호한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옷장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염승숙는 꼬리뼈를 통해, 숫자를 통해, 달력을 통해서 환상으로 이끈다. 그 환상은 환영이 아니라, 그리움이고 추억이었다. 황정은의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을 읽은 이라면 분명, 두 소설이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닮은 듯 달랐다.  황정은은 깊고 무거웠으며, 염승숙은 엉뚱하면서도 따뜻했다. 

  염승숙은 환상의 도착점을 달로 연결시켰다. 달은 죽음이기도 했고, 희망이기도 했다. 꼬리뼈 전문 물리치료사가 주인공인 <뱀꼬리왕쥐>에서 아버지는 사라졌고, <춤추는 핀업걸>에서는 자유 자재로 달력속을 드나드는 엄마가 있다.  표제작인 <채플린, 채플린>이나 , <채플린, 채플린 2>에서도 마찬가지로 채플린의 모습처럼 사람들이 멈춰버린다. 세상사가 지겹고 돈벌이가 힘들어서 그들은 사라진 걸까. 아니다, 이미 사라진 사실일진대, 잠시 숨어버렸다고 남아있는 자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상이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그들을 추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퇴화해버렸지만, 우리 몸의 일부였던 꼬리뼈를 기억하는 <뱀꼬리 왕쥐>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각자 하나씩 자신만의 달을 가지고 태어나. 그게 바로 꼬리뼈야. 천골에 이어지는, 여러 개의 미추가 결합된 뼈. 태생기에는 누구나 아홉 개의 미추로 이루어진 꼬리뼈를 가지고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성장하면서 소실되어버리지만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지. 난 그게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달이라고 생각해. 안타깝게도 우린 늘, 삶이 너무 고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만 고개를 들어 하늘에 매달린 달을 바라보지.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자신만의 달이 떠오르고 있어. 우리는 스스로 그걸 깨달아야 해.”p 28

 정말 우리의 마음에 떠오른 달이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 지쳐, 눈물이 날때, 달을 올려다보면 그곳에 돌아가신 엄마가 웃고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염승숙은 그런 확신을 주고 싶었나 보다. 사라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것은 주민증록 말소를 해도 엄연하게 삶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피에로 행진곡>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소설도 있다. 태어날 때 온몸 구석구석 숫자를 가지고 태어나, 공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이의 이야기인 <수의 세계>. 공영에게 세상은 수로 통하는 것, 신비하고 놀라운 수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기발한 소설. 

 <다만 내가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동안에 그 누구도 아프거나 괴롭거나 슬프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당신에게 건네는 나의 조금만 농담이, 작게나마 따뜻한 위로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이 다정하게 들린다. 독자가 기꺼이 염승숙과 함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즐겁게 넘나드는 것은 앞으로 다양한 현실과 부딪쳐 많은 것을 겪게 되면서 선보일 소설에 대한 앞선 기대를 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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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도시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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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 없이 울적할 때, 소설은 힘이 된다. 하여 위로 받고 싶은 순간을 잊어버리려 소설을 찾기도 한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인물들을 만나면 가만, 안도의 쉼을 내쉬기도 한다. 조해진의 소설 <천사들의 도시>에 인물들이 그러했다. 철처하게 고립된 삶을 살거나, 보편적인 일상으로의 복귀가 힘든 상황으로 내몰려진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최선의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결과는 최악이었고, 위태로웠다. 

 표제작인 <천사들의 도시>를 포함해 7개의 단편 모두 울적하고 지친 군상들의 이야기다. <천사들의 도시>는 32세 한국어 강사인 ‘나’와 5살때 미국으로 입양되 15년간 살다가 한국에 잠시 돌아온 19살 ‘너’의 이야기다. 사랑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달랐다. 언어를 시작으로 생각과 감정의 표현도 다르다. 분명 서로에 대해 알고 싶으나 쉽지 않다.  결국 ‘너’가 천사들의 도시로 떠나고 난 뒤 ‘나’는 너를 여전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주일>는 독일 출장시 단 한 번의 관계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 여자의 이야기다. 극심한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아니, 그 순간 감정이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이즈 감염이라는 결과는 너무 혹독했다. 직장에도 가족에게도 알릴 수 없는 혼자만이 감당해야하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을 여자는 사무실로 카드 영업을 하는 남자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린다.  포기하고 싶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여자에게 삶은 이미 계획된 극본같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 세상의 문을 걸어 닫은 후 오늘분의 무대를 정리하고 커튼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p 62> 내일의 무대가 기다리고 잇음을 암시하는 것을 통해 작가는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억눌한 누명을 쓰고 2년 동안 감옥에 살다가 누명이 벗겨져 사회로 돌아온 남자와 연극배우로 단역만 전전하다가 주연을 땄지만 망막색소변성즈응로 인해 더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인 <기념사진>이 인상적이다. 분명 죄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직장도 구할 수 없고 가족과도 함께 살 수 없게 된 남자는 불륜 현장을 사진으로 담아 생계를 유지한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아파트 6층에 산다.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 여자는 무례하고 도도하게 보인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여자는 <그리고, 일주일>속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우연하게 여자에 대해 알게 된 남자는 여자를 돌봐 준다. <남자가 아는 것은 지금은 여자에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3년 전, 살인 사건이 이러난 집 앞을 지나가가 우연히 CCTV 카메라에 찍혔던 그날처럼, 그때 남자에게 절실하게 누군가가 필요해던 것처럼 지금 여자에게도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남자는 그것만 알 뿐이다. p 170>

 단편 속 인물은 하나같이 그가 그녀같다. <인터뷰>의 주인공 우즈베키스칸에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왔지만 남편에게 버려진 여자 나탈리아는 한 말은 이 소설집을 대변하는 듯 하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인이 되는 건 아니란 걸 나도 몰랐으니까요. 운이 좋아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해도 나는 애초부터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일 뿐이죠. p 86>

 무엇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그 무엇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을, 나의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그것이 무엇이었다. 이처럼 조해진의 소설은 차분함을 너머 우울했지만 그래도 닫혀있지 않았다. 에이즈에 감염으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세상에 나를 버렸지만 나는 도움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해했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예기치 않게 닥친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은 버려야 한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경계에 서 있지만 경계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결국 그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이런 소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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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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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 일상과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류 작가를 특히 선호하는 것은 여자로써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든 그들의 소설과 공감할 수 있어서다.  지극히 권태롭고 불순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누구라도 이 소설을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작가의 등단작 <열 세살>과 <엄마들>을 읽었을 때 그 기대감을 기억하기에 주목받는 신예라는 문구가 내게는 당연한 것이다.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존재를 모르며 태어남과 동시에 나쁜 피라고 낙인찍힌 여자, 화숙이 있다. 두 모녀를 당연히돌바줘야 할 가족인 할머니와 외삼촌 조차 냉대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 엄마에게 화숙도 연민보다는 증오와 분노가 있었다. 천변에서 고물상을 하던 외삼촌의 폭력에 쓰러진 엄마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화숙이 비툴어진 심성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화를 동갑내기 사촌 수연에게 뒤집어 씌워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거짓말로 수연을 난처하게 했고, 외숙모의 외도를 외삼촌에게 고했다. 

 수연은 언제나 화숙는 다른 삶을 살았다. 연약했고, 여대생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심지어 사랑했던 옛 남자 재현과 다시 살림을 차린다. 화숙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늙은 할머니를 부양했고, 삼촌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화숙에게 남은 것은 악의뿐이었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손톱은 언제나 뭉뚝했고, 찬 바람이 불면 손등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붉게 변해 피가 났다. 발뒤굼치도 언제나 허옇게 들뜨고 굳은 살점이 갈라졌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p 53

 어린 혜주를 살뜰하게 돌보는 옆집 여자 진순을 이해할 수 없다. 딸까지 버려가며 사랑을 선택했지만 수연의 마지막은 자살이었다. 재현을 찾으러 간 외삼촌은 실종되고 결국 시신으로 돌아왔다. 화숙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남은 이는 없다. 지겹도록 끔찍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이 새로운 일터가 되었고, 엄마도 외삼촌도 그 누구도 아닌 혜주와 진순만이 화숙을 기다렸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천변과 고물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더럽고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삶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고물상이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근원지가 된다. 그 안의 사람들, 화숙을 비롯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우울증으로 아이마저 외면하고 도망쳐야 했던 진순, 장애인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할머니가 술꾼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기,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었다면 쉽게 천변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혜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화숙의 진심은 아니었을까. 하여,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가족을 만들고 지키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다녀오셨어요.”
안채로 들어서자 혜주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색연필을 쥐고 있던 혜주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자 셋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구석에는 세모 지붕의 집 한 채, 하늘에는 노란 해가 떠 있었다. p 178

 혜주가 그린 그림 속 여자들은 더이상 나쁜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가족이다. 혜주가 화숙과 수연처럼 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화숙과 진순혜주에게 자신의 분노와 피해의식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희생도 강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소설이나 외면할 수 없는 소설이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 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들이 몹시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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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9 0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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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0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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