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 - 2009 제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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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문학상이든 수상집을 읽은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름만으로 익숙한 작가들의 단편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소문이나 평론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런 소문만으로  때로 편견에 빠지기도 한다. 2009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자인 박민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워낙 그의 소설에 대한 호평이 많아 수상작 단편<근처>에 대해 궁금증과 기대도 컸다. 결과를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었다.
 
 수상작 <근처>는 제목을 먼저 정해놓고 쓴 소설이라고 했다. 주인공 호연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소위 성공을 이룬 남자다. 마흔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그에게 삶은 암을 선고했다. 간암 말기, 어떤한 치료도 시도하지 않고,  삶의 끝을 향해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향했고,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친구들의 하루과 호현의 하루는 달랐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호연의 마음이 담담하게 잘 표현된 소설이다. 악착같이 삶을 부여잡고 싶은 욕망, 신에 대한 원망, 그 어떤 절규도 없었다. 그래서 더 슬펐고, 더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었다.
 
 나는 혼자다. 혼자인 것이다. 찾아 나설 아내도 없다. 설사 네 명의 자식이 있다 해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문득 혼자서, 혼자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할 인간일 뿐이다.   p 39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든지 결국엔   ‘혼자’ 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이 절대  외롭거나 슬픈 일이 아님을 확인 시켜주는  것도 삶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살고 있지만,  삶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기 때문에.
 
 <근처>외에도 반가운 소설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은희경의<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크리스마스와 눈을 기다리는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꺼내보게 한다. 점점 더 좋아지는 작가 김숨의 <간과 쓸개>는 죽음이라는 소재가  <근처>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김경욱의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도 좋았다. 단편 c1+y=:[8]: 를 통해 처음 만나는 김중혁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선 만난 단편들은 김숨의 <철>, 김중혁의 <펭귄뉴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향하는 설레임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박민규에
대해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내게 그와의 첫 만남은 난로 같았다. 그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나온다.  그의 다른 소설을 만나는 시간이 생각보다 빨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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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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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소설에 매료되어 그 작가의 전작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김연수도 내게 그런 소망을 갖게 한 작가 중의 하나다. 그는 인기 작가다.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소설가로의 모습보다 인간 김연수의 인기가 더 많지 않나 싶다. 그의 소설은 때로 어렵고, 때로 방대하여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읽은 장편들을 대체로 그러했다.  

 글을 쓰는 모든 작가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특히 김연수의 소설은 김연수 개인에서 시작하여 우리로 끝나는 느낌을 준다. 김연수의 사적인 이야기일 것 같은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제목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처럼 낡은 사진 한장으로도 나와 당신은 우주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이야기를 만든 그였다. 하여, 김연수는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닫혀있는 나와  타자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지 않나 생각한다.

 한국에 온 미국 출신의 여류 소설가, 나와 통역을 맡은 여자, 혜미의 짧은 만남을 다룬 <케이 케이를 불러봤어>는  다른 언어를 쓰는 인물들이 언어로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혜미해피로, 밤에밤뫼로 다르게 이해되지만, 나와 혜미에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공허한 슬픔이 같았다. 나에게 ‘케이케이’라 불렸던 남자친구의 죽음, 혜미에겐 아이의 죽음. 이로 둘은 자연스레 서로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다소 엉뚱하게 시작된 일들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하니 조심하라는 경고와도 같은 두 단편.  <내겐 휴가가 필요해>, <웃는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레스> 도 결국은 소통에 관한 문제였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도서관 사서는 단지 피곤하여 휴가를 원했던 것 뿐이며, 과거 자신이 행했던 일로 괴로워하는 남자의 대화는 전혀 다른 의도로 이해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오해하며 서운해한다. 그리하여, 나를 드러내려 더 웃고, 더 울고, 더 화를 내며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첫 문장들. 그 첫 문장들은 평생에 걸쳐서 고쳐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 <중략> 그로부터 인생은, 쉬지 않고 바뀌게 된다.  우리가 완벽하게 어둠으로 들어가지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 고쳐질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첫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 p 227~228
 
 김연수가 첫 문장이라 표현한 것은 우리의 삶은 아닐까.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문장들처럼 우리의 삶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고 경험하고 싶었던  소녀의 감정 변화를 잘 그려낸 <기억할 만한 지나침>과 지금의 나로 유지되는 삶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을 생각하게 한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는 묘한 여운이 남았다. 

 그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 쉽게 절망하지 않을 것, 그게 핵심이다. 이 말이 내겐 사랑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모든 일들은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이렇게도 들렸다. 완성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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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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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무도하>를 읽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묻는 질문엔 이러하다 라고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온라인에서 연재되는 동안에도 읽지 않았던 터라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란 문구를 보고 진부한 사랑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으나,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김훈은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소설의 절반은 신문기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격인 문정수가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한 사건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지방 소도시에서  일어난 노동운동, 환경문제로 시끄러운 해안 도시에서 크레인에 깔려 죽은 여고생 사건, 서울에서 한 소년이 자신이 기르던 개에게 물려 죽은 사건은 각각 다른 듯 보이지만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강의 저편이 아닌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였고, 지탱해줄 배경이 없었고, 돈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문정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기사화하지 못하는 사회의 구성원이었을 뿐이다.

 그런 문정수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은  출판사에 다니는 노목희뿐이었다. 폭우로 인해  죽은 사체를 보고, 불구덩이의 현장을 기록하고, 시위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기사로 작성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지친 육체와 영혼은 노목희만이 달래주었다. 죽은 소년이 그린 날개 달린 개의 그림, 죽은 딸의 보험금을 타고 고향을 떠난 아버지의 이야기, 연기로 가득한 화재현장에서 보석을 훔친 소방관의 이야기, 그들의 슬픔을 마주하며 답답했던 가슴을 쓸어 내려줄 따뜻한 손. 

 권력을 행하는 자들의 이기심,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12월이면  2주년을 맞는 기름 유출 사건을 떠올렸다. 용서를 구해야 할 자는 강자라서 말이 없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사람들은 힘이 없었다. 소설처럼 강의 저편의 윗선에선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만이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 참 속상하고 화가 난다. 

소설엔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은 구절이 있었다. 문정수와 노목희가 나누는 대화.

-국물이 달구나.
-달걀을 풀어야 해. 파만 넣으면 단맛이 뒤가 날카로워.
-달걀을 넣으면 어떤데?
-달걀이 들어가면 날카로운 게 포근해져. 둥글어지지.
-그래? 거참······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맛이 둥글다.
-파는 달걀과 잘 어울려. 뜨거운 국물 속에 달걀이 파맛을 끌어당겨서 달래는 것 같아.
-넌 국물 속 일을 알 수가 있니?   p 215


 날카로운 파도 포근한 달걀도 국물 속에서는 하나가 되는, 그런 둥글어지는 국물처럼 우리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나의 생각. 이 대화를  몇 번 더  읽었다. 그러면서 서글펐다. 함께 사는 사회, 모두 잘 사는 사회, 어울려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소리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자신들이 사는 강 쪽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싶다.

 김훈은 <바다의 기별>이라는 에세이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화장>을 읽었고, <언니의 폐경>은 드라마를 통해 보았다. 소설도 드라마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공무도하>를 읽으면서 베트남에서 시집온 후에, 개에 물려 죽은 소년의 어머니, 오금자에게서 내내  김훈의 인물을 연기하던 정애리의 마른 눈빛이 따라다녔다.

 김훈은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지난 삶과 어떻게 조우했을지 궁금하다.  내가 소설에서 느낀 그 이상으로 서글퍼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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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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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출판되기 전에  미디어는 이 책을 주목하고 있었다. 10억이라는 선인세로 출판계를 흔들었지만, 하루키의 신작 <1Q84>에게 독자는 이미 매료된 상태였다. 몽환적인 여와 남의 그림자, 1Q84란 모호한 제목, 화제가 된 책이 아니더라도, 오래도록 시선이 머무를 책이다. 그리하여, 내게 온 책, 13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 갑자기 책이 두려워졌다. 더구나 나는 하루키의 광팬도 아니다. 단지,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 실체가 궁금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왜 1Q84에 세상은 흥분하는가. 

 소설은 이내 나를 사로잡았다. 1984년을 살아가는서른 살의 동갑내기 아오마메와 덴고, 여와 남의 두 주인공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오마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 평범한 헬스 클럽 강사다.  덴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남자로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분명 둘은 밀접한 관계일 터, 그러나 하루키는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1Q84가 갖는 의미도 그러하다.

 평범함을 가장한 아오마메와 덴고의 진짜 삶은 보여지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오마메는 여자를 폭행하는 파렴치한 남자만을 은밀하게 죽이는 킬러로 그녀는 남자를 증오한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보이며, 순간 지금 살고 있는 시대가 과연 어떤 시간인지 혼돈과 의문이 든다. 1Q84의 Q는 바로, question mark.  덴고, 그 역시 수학 강사 뒤엔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다. 자신의 소설을 꾸준하게 쓰면서 대필도 한다. 아오마메와 덴고, 그리고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을 쓴 십대의 한 소녀.  짐작했겠지만, 소설은 액자소설의 형태다. 1Q84아안에 <공기 번데기>를 만날 수 있다. 아니, 반대일 수 있다. <공기 번데기> 안에  1Q84의 숨은 뜻이 있을 수 있다. 

 아오마메와 덴고, 둘의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으로 각각 흐른다. 아오마메를 후원하는 노부인은 마지막 살인을 의뢰한다.  어린 소녀와 자신의 딸까지 성폭행하는 종교단체의 수장을 죽이라는 임무. 신변을 정리하고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지만, 그녀에게도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그가 덴고 였다. 10살때 단 한 번 손을 잡았던 남자 아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드디어, 수장과 마주했다. 그런데 그는 아오마메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단체가 덴고를 죽일 꺼라고 말한다. 아오마메는 덴고를 선택한다.

 덴고는 <공기 번데기>를 리라이팅하면서 소녀의 삶에 점점 개입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리틀피플, 두 개의 달과 소녀에 대해 알고자 한다. 소녀, 아오마메에 의해 죽은 수장의 딸이었다.  <공기 번데기>의 리틀피플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와 같은 존재라는 하루키의 친절한 설명에도 나는 감을 잡을 수 없다. 소녀와의 대화끝에 덴고는 <공기 번데기>속 두 개의 달이 현실에서 존재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순간, 자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바로 아오마메였다. 그와 그녀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하늘엔 두 개의 달이 존재한다.  

  이것이 그만의 매력인가?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 그물로 저절로 걸어들어간 나는 어지럽다. 서로를 간절하게 원했지만, 적극적이지 못했던 그들.  두 개의 달도, 사이비 종교도, 리틀피플도, 하루키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의 소설을 얼마만큼 이해하느냐도 별개다.  놀라운 흡입력, 상상 그 이상의 세계, 그럼에도 초반부터 내내 기억하게 던 장치. “현실은 언제든 단 하나밖에 없어요.” p 23 - 1권 그렇다. 현실은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어떤 세상이든 1Q84의 Q는 있을 꺼란 사실, 빅브라더나 리틀피플로 표현되는 괴물 아닌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존재인 것과 똑같은 만큼 비뚤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그림자는 지옥에서 내려가 악마가 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계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깊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p 326 - 2권 (하루키가 인용한 카를 융의 말)

 한 인간의 그림자는 결국 사회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 두 개의 달을 보는 의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게 달은 더이상 달 본연이 가진 의미가 아니다.  이제 달은 하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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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의 도시들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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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끝에서 살아남은 부자의 긴 여정을 통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던 소설 <로드>로 코맥 매카시를 처음 만났다. 무척 힘들게 읽었고, 난해했기에  타자의 호평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았던 터라 후에 <핏빛 자오선>에 이어 <평원의 도시들>까지 만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의 마지막인 이 소설은 힘들지 않게 읽었다. 

 멕시코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미국 서부 국경지대. 국경 3부작 전작의 주인공 존과 빌은 목장에서 카우보이로 일한다. 동생을 잃은 빌리는 존을 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다 존은 강을 건너 창녀촌에서 막달레나라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첫 눈에 반한다. 존은 소녀를 창녀촌에서 탈출시켜 결혼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빌리를 비롯해 목장의 동료들은 모두 극구 반대한다. 창녀촌에서 막달레나를 빼내 국경을 건너는 일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 소녀를 만나러 가는 존의 행복한 표정을 생각한다.  막달레나가 어떤 여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살 집을 손보고,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총을 전당포에 맡기고,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말을 팔아 돈을 구해  오직 소녀를 데려오는 일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막달레나 역시 존을 사랑했고,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존이 세운 계획에 동의한다. 그러나 존을 향한 막달레나의 사랑은 창년촌의 포주로 인해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종이 인형처럼 누워있는 막달레나의 영혼을 확인하자 존은 포주 앞에 선다. 광기보다 더 지독한 존의 분노는 포주를 향해 칼를 던지고, 칼에 찔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존은 빌리를 찾고,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은 존과 막달레나의 애절한 사랑을 중심으로 목장에서의 일상이 크게 그려진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 가족을 잃고 그리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며 살고 있다. 말을 타고 소를 몰며 달리는 카우보이들의 끈끈한 우정과 삶.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 그 위를 달리는 카우보이의 함성이 들리는 듯 편의 서부 영화를 만나는 기분이다.  존이 죽고, 여기 저기 떠도는 빌리. 에필로그에서 빌리는 한 여행자를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눈다. 마지막 그 부분은 마치 신과 인간 삶과 죽음에 대해 나누는 대화와 같았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불러올 뿐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우리 인생 역시 마찬가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애초에 무에서 빚어지고, 우리 모두는 달라졌을 수도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은 없기에 헛소리에 지나지 않죠. 삶은 무엇으로 만들어질까요? 어디에 감추어져 있을까요? 혹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현실은 확률은 100퍼센트죠. 우리가 삶을 미리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다른 역사를 상상하는 것은 무의미하죠.’ p 397

 존이 막달레나와 자신의 죽음을 추측할 수 없었기에 결혼과 행복한 삶을 꿈꾸었듯 빌리도 자신의 앞 날을 모른 채 넓은 서부를 가로지르며 계속 말을 달리는 것이 아닐까. 긴 밤을 지나 새벽이 오고,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과 마주하는 그 벅찬 감동이랄까. 점점 더 코맥 매카시의 매력에 빠져든다. 기회가 되면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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