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걸
페터 회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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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천적 장애나 후천적 장애로 인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소리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하여, 일반적으로 그 소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 소리가 소음인 경우는 다르지만 말이다. 때로 목소리를 통해 상대의 심리를 짐작하기도 한다. 불안한 경우엔 목소리는 떨리고, 흥분한 경우엔 자신도 모르게 커지기도 한다. 비가 내리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경쾌한 하이힐 소리, 피아노 연주 소리처럼 세상엔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소리를 듣는 일과 고유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건 정말 신비하고 오묘한 일이다. 그런 소리를 남다른 재능으로 내면의 감정까지 읽을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콰이어트 걸>은 천부적인 청각의 소유자로, 놀라운 재능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페터 회를 기억한다면, 분명 설레일 것이다.  주인공 카스퍼는 유명한 서커스 광대로, 작은 벌레의 움직임, 전화선 너머 누군가가 어떤 마음까지 소리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카스퍼에게 어느 날 여자와 남자가 클라라마리아란 소녀를 데리고 온다. 소녀는 자신이 유괴되었다고 말하며 영수증을 건네준다. 영수증 뒤에는 소녀가 그린 그림이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카스퍼는 클라라마리아를 찿아 나선다. 소녀를 구해줄 카드는 영수증이 전부였다. 

 영수증의 전화번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추리가 시작된다. 그 과정에 만나는 많은 사람과 그 사람들의 소리를 통해 카스퍼는 놀라운 사실과 마주한다. 클라라마리아도 자신과 같이 소리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어, 멀리 않아 지진이 일어날 꺼라는 것과 그 사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스퍼가 사랑했던, 자신을 떠난 여자, 스티나가 그 중심에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심장에서는 소리가 나죠. 그 소리에는 근사한 울림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린 그 기를 꺾어버리죠. 지금 여러분 모두의 소리는 정말 훌륭해요. (...) 여러분이 매일 10분만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면. 그리고 긴장을 풀면, 그 파동이 계속해서 퍼질 겁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에게선 바흐와 같은 소리가 날 겁니다.” p291

 모호하며 몽환적인 분위기, 소리로 만나는 과거와 현재, 카스퍼가 찾는 사람들과 그를 쫓는 사람들의 소리를 상상하게 한다. 소설엔 내내 음악이 흐른다. 카스퍼가 좋아하는 바흐의 선율이 함께한다. 하여, 독자는 카스퍼처럼 바흐를 듣고, 그 소리에 색과 형상을 입힌다. 여타의 추리소설과는 확연하게 다른 소설이다. 소설은 무척 난해했다. 인물의 관계는 복잡했고, 현재와 과거 회상의 구성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공간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스티나는 왜 떠났을까. 카스퍼는 소녀를 구할 수 있을까. 안개처럼 음악이 깔린 세계로 독자는 깊이 들어간다. 

  ‘사랑은 상대를 알아보는 것이다. 미지의 것에 매료되고 끌릴 수는 있지만, 사랑은 신뢰 속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것이다. 해변에서 처음 스티나를 봤을 때부터 그는 신뢰와 믿음의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었다. 지금도 그 신뢰와 믿음은 존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처럼 뭔가 다른 것, 마치 미지의 대륙처럼 낯설고 정복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았다.’ p 514

 누가 이렇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카스퍼에게 그 소리는 아마도 바흐가 아닐까. 아, 소리로 느끼고 기억되는 사랑이라니. 음악이 흐르는 추리소설이라 말할 것인가, 소리로 그려낸 사랑이라 할 것인가. 그건,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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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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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웃음을 주기도 하고, 때로 분노와 슬픔을 준다. 아니, 어떤 소설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미 그 결과가 결정되었다 할 수 있다. 그랬다. 첫 장편 <나쁜 피>로 만난 김이설은 즐거움과 행복보다는 아픔과 절망쪽에 가까웠다.  하여, 두 번째 소설이자 첫 번째 소설집에 대한 기대와 염려로 나뉠게 분명하다. 물론 나는 염려가 아닌 기대를 선택했고, 만족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그녀가 소설로 담고 싶었던 삶에 대한 답을 주는 소설집이었다.  

 제목은 원래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니, 그렇다면 금기의 것들일까? 아니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 묵인하고 외면하는 사회의 단면이었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소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작정하고 살벌한 일상을 묘사한 문장을 읽어 내는 일은 힘겨운 것이었다.  

 구걸하는 엄마와 노숙자로 사는 소녀의 일상을 취재하듯 그려낸 <열 세살>, 열세살 소녀가 세상을 빨리 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열세 살처럼 살고 싶었지만, 소녀는 미혼모가 되고 말았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떠나고 남겨진 가족과 살아가기 위해 대리모가 된 여대생<엄마들>, 간절하게 엄마가 되기를 원했지만 될 수 없는 여자와 필요에 의해 자궁에 아이를 키우는 여자의 이야기는 ‘엄마들’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묘한 감정이 전해졌다.

 바람난 엄마에게 버려진 고속도로 휴계소에서 만난 자신을 거둬준 남자를 아빠라 부르지만, 결국 그 남자의 아이를 낳는 여자<순애보>, 불로 인해 남편과 아이를 잃고 남편의 형과 기이한 동거를 하는 <아침처럼 고요히>는 차마 글로 옮길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거침없는 폭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거둬준 사람을 거부할 수 없는 어린 소녀였고, 좀 더 잘 살려는 게 아니라, 최소의 생계를 위해 노래방 도우미를 해야 했다. 폭력에서 벗어나고 살아 남아야 했기에 선택한 일들이었다. 

 아니, 힘들었어. 하지만 힘들 수 없는 일 년이었다. 성과물을 받기 위해 소비된 시간이었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평하다. 공평하지 못한 건 그저 운명뿐이지 않은가. p 63 엄마들 중에서 

 암에 걸린 것도 억울한 일도 아니었다.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 나는 그저 무수한 암 환자 중에서 한 명일 뿐이었다. 내 평생에 아이가 없는 것도 불운일 뿐, 억울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자위해야 했다. p 105~106  환상통 중에서 

 아마 누군가는 묻고 싶을 것이다. 왜 엄마는 열세 살 소녀를 돌보지 않느냐고, 왜 여대생은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느냐고, 왜 경찰서에 신고 하지 않느냐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통해 그 답을 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걸 다 갖춘 30대 주부의 감춰진 내면을 다룬 <하루>, 온라인 게임과 채팅을 하며 지내는 백수의 삶<손>은 전체적은 불안의 색은 같았으나 관계에 대해 생각케 했다. 나를 알아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온라인에 갖혀 사는 현대인의 씁쓸한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손을 한 번 더 잡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잡게 되면 절대 놔주지 않을지 모른다. 나는 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에 집착하고 있다면 손목을 잘라 손만 가지면 된다.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소유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다. p 183 손 중에서 

 김이설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고단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다. 절박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고, 삶이었다. <열 세살>, <엄마들>,<순애보>,<환상통>, <아침처럼 고요히>, <막>, <하루>, <손> 8편의 화자는 <손>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 자궁을 가진 여자였다.  그 안에서 아내, 엄마, 딸인 여자들은 가혹한 피해자였다. 사회적으로 약자였지만, 모성을 가진 강자였다. 그리하여 더 단단했고, 더 굳건하게 버텨내고 있는지 모른다. 

 소설은 <나쁜 피>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쁜 피>에서 화숙의 삶으로 대표되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각각 단편의 삶은 최악의 최상이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가정과는 거리가 먼 가족들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작된 균열로 가정은 붕괴되었고, 바로 우리 곁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내는 일이 절망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계속 살아내야 한다. 절망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러기에 그녀들은(아니, 우리들은)암에 걸렸어도, 버려졌어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은 결국 너무 아파서 다시는 떠올리기 싫지만 모두가 알아야 할, 우리들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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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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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할 때마다, 이보다 더 큰 절망은 없을 꺼라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위안도 잠시, 다양한 형태의 절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여, 절망에도 슬픔에도 노하지 않는 건조한 사람이 되가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아니, 실은 그리되고 싶지 않다. 적절하게 웃고, 적절하게 화내고, 적절하게 울고, 적절하게 내 소리를 내고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제목소리를 내며 산다는 게 가능할까. 
 
 말이 길어졌다. 1987년생, 신예작가 문진영의 소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제1회, 제2회, 수상작이 남겼던 아쉬움이 있었기에 제 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담배 한 개비의 시간>에 대한 편견을 앞세웠다. 이십대 초반의 청춘이 그려낸 세상은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정확했고 솔직했으며 나쁘지 않았다. 

 소설은 화자인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젊은 청춘의 일상을 담았다. 강남의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물 한살 나와 J, 나의 대학 선배 M, 카페에서 일하는 물고기라 불리는 그녀.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찾지 못하는 나, 특별한 이유없이 입산을 꿈꾸는 J, 나름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결국 취업준비생인 M, 세계일주를 계획하는 물고기. 일정한 시간 노동을 하고, 그 댓가로 최소한의 생활을 한다. 옥탑방에 살거나, 반지하가 아니면 고시원에 산다. 대단한 것을 원하지도 않고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최선을 다한다. 반복되는 동선의 하루 일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거울을 보듯 서로에게 닮은 듯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고, 열병처럼 사랑을 하고 최저임금인 자신의 일자리를 논한다. 사랑이라 말하기 두려웠던 나와 M, 입산과 세계일주를 떠날꺼라던 J와 물고기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J의 죽음과 혼수상태에 빠진 물고기는 나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준다. 방황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진지한 고독과 존재에 대한 회의와 사랑이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아파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불안의 연속이었던 시간들, 나는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만날 빛을 기대하며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그 시절을 경험했으나 '88만원 세대'란 말을 꼬리표로 달고 사는 20대를 이해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따금 달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면, 문득 이곳이 아닌 어디에서도 달은 조금씩 제 모습을 바꿔가고,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지구는 저만의 속도로 돌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슬픔도 절망도 아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외로움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서도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p 44

 최근에 만나 젊은 작가의 소설 중 단연 돋보였다. 같은 세대의 고민을 20대만의 감성으로 표현한 소설이다. 투명한 슬픔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그러나 이 슬픔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제 빛을 발휘하는 게 청춘이라 믿는다. 발랄한 감수성을 유려하게 담아 낼, 문진영의 소설을 빨리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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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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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은 비주류와 같다.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주목받기 보다는 무관심이 많다.  해서, 그런 이유로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로 대다수의 바깥에 있는 이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사는 이들의 시선을 받는다.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기분은 무엇일까. 그 경계는 또 무엇일까.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는 부제에서 따뜻함이 전해진다. 누군가의 가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가만히 이야기 하고, 곁에서 들어주는 사람과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인터뷰이는 허리우드클래식 김은주 사장을 시작으로 연극배우 택배기사 임학순씨, 시간강사,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씨,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절판되는 책, 우표, 막걸리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1등, 2등이 아닌 등외에 있었고,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으나 자신의 삶에 충실히 생활하며 사랑하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하여, 내가 갖었던 편견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쉽게 속단하는 습관이 있다. 코끼리의 꼬리만 보고 전체를 보았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처럼,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왜 그렇게 사냐고 쉽게 말하고 질책한다. 그리하여 안이 아닌 바깥으로 밀어낸다. 

 진솔한 인터뷰 중 택배기사가 된 연극배우, 군무 발레리나, 메일에 밀려 난 바깥의 대표주자인 우표는 더 눈이 갔다. 예술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극배우 임학순씨는 왜 택배기사가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컸다. 무대는 비정규직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연극외에 할 수 있는 일이 택배였다고, 그러나 다시 무대로 돌아갈 거라고. 

 주인공이 있으면 조연이 있고 엑스트라가 있을 터.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기를 꿈꾸나, 조연이기도 하고 엑스트라이기도 하고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미 알면서도 주인공에 시선을 두고 기억한다.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씨는 주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역만으로 이뤄지는 공연은 없다. 많은 군무 발레리나가 있어야 작품은 더 빛이 난다. “발레 보시는 분들은 대개 주역을 보러 오시잖아요. 코르드 발레는 들러리쯤으로 생각하기 쉽죠. 발레단 안에서조차 그렇게 여기는 이들도 없진 않아요. 그러면 정말 안되는데….” p 246  발레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손 편지의 설렘과 기쁨을 알기에 하얀 편지 봉투에 풀 대신 침을 발라 우표를 붙이는 즐거움을 안다. 이런 우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 안타깝다. 편리한 스탬프와 스티커가 우표의 감성을 대신할 수 있을까. “우표는 그 나라 정서와 문화, 역사를 담는 얼굴이잖아요. 국가가 존속하는 한 우표는 영원할 것이고, 그 영원한 상징 속에 저도 담기는 것이니 영광이죠.” p 298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흔희들 삶을 여행에 비유하지만, 삶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은 새로운 여행지와 달리 대개는 외롭고 황량하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쳐갈 나그네나 구경꾼이 아니라, 불편한 시선을 무릎쓰고 어떻게든 비집고 껴 앉아야 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세상은 그들이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넉넉한 세상, 지금보다는 휠씬 헐겁고 느슨한 세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p 313

 인터뷰어의 믿음처럼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여직 만났던 어떤 인터뷰집보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책이다.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 안이 아니라 바깥의 삶. 바깥은 춥다. 나 역시 바깥에 있다. 그러나 나는 안을 갈망하지 않는다. 세상살이의 진리는 주류가 비주류가 되고, 변두리가 중심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된다는 걸 알기에.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를 다 읽고 이 책과 어울리는 시가 떠올랐다. 바로, 정현종 시인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가 그것이다.우리는 ‘안’이 아니라 ‘바깥’의 풍경으로 점점 더 빠져든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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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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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소설에 대해 딱딱하고 읽기 힘들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여, 오랜 시간 손에 잡았던 ‘카프카’의 <성>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작가나 작품은 많지 않다. 독일편의 작가엔 ‘괴테’, ‘카프카’, ‘헤쎄’를 제외하고 익숙한 이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9개국의 세계 문학 중 영국 다음으로 독일편으로 선택한 이유는 17명 작가의 단편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소설의 분량도 아주 짧은 것부터 중단편까지 다양하여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17편은 하나같이 독특했다. 히틀러의 독재와 유대인 학살, 동독과 서독에서 하나의 독일로 통일된 역사를 배경으로 다룬 단편들이 모여 독일스럽다는 표현이 맞을까 싶다. 기억에 남는 단편들은 표제작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이었다. 젊은 아내가 정부와 짜고 뚱보 남편을 죽게 만드는 ‘토마스 만’의 <루이스 헨>와 원숭이를 화자로 내세운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색다른 단편이었다. 

  제일 먼저 읽게 된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강제 수용소에서 방사선으로 불임시술을 한 후, 오래도록 그 상태가 유지하는지 포로들을 상대로 실험하는 내용이다. 과거 히틀러의 시대 ‘아우슈비츠’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며, 인간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듯 보였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형 카를로가 자신의 실수로 눈이 먼 동생을 옆에서 보살피며 생활하는 이야기다. 눈 먼 동생에게 동전을 건네며 손님이 형을 조심하라고 장난스런 말을 건넨다. 이 한 마디 말은 동생과 형의 사이를 위태롭게 만든다. 20년의 신뢰는 한 순간 무너지고, 동생은 형의 어떤 말도 믿지 않는다. 급기야 형은 동생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 잡힐 위기에 처한다. 20동안 지속된 관계가 하루의 오해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신뢰는 어디서 오나 묻게 한다.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는 중년의 의사가 자신이 사랑한 젊은 의사 바르바라를 추억하며 시작한다. 생화학을 연구하던 의사는 소아과 여의사 바르바라에게 첫 눈에 반한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소녀가 입원하고 모두가 뇌진탕을 진단한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뇌일혈을 앓고 있다며 괴로워한다. 의사는 그녀를 위로하다 둘은 가까워져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결국 소녀는 뇌일혈로 죽고 만다. 아이를 가진 바르바라에게 의사는 청혼을 하지만, 바르바라는 휴가를 떠나고 결국 자살한다.  읽는 내내 결말에 대해 궁금했는데, 바르바라는 공상당행동대원으로 사랑이 아닌 사상을 선택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 바르바라와 같은 삶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오빠와 동독에 남은 여동생이 13년에 만난 가족 상봉기다.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남매는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 단편은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특별하게 다가왔다.

 독일편은 단편 17편을 차례대로 모두 해설해주고 있다. 독일 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내게 자세한 작품 설명은 많은 도움을 준다.이 책을 계기로 언젠가 읽을 욕심으로 사둔 카프카 단편집을 책장에서 꺼내야겠다. 그리하여 조금씩 독일 문학과 가까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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