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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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죽음을 기다리는 여자가 있다. 아니, 죽음을 실천하고 싶은 여자라고 해야 겠다. 그 여자의 죽음을 막고 싶은 남자도 있다. 독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복어>는 죽으려는 여자와 그녀를 살리려는 남자의 이야기다. 소설은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들려준다. 조각가인 여자와 건축가인 남자는 자살로 죽은 가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편과 자식 앞에서 복어국을 마시고 자살한 여자의 할머니,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고 투신한 남자의 형. 여자에겐 죽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악몽을 꾸는 아버지가 있었고, 남자에겐 아들의 죽음으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아버지가 있었다. 죽음이라는 그늘에 속한 삶이었다. 

 조각가인 여자는 자살 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혼자서 깔끔하고 단정하게 삶을 마무리 하고 싶어서다. 여러 방법을 생각한 끝에 복어를 선택한다. 모임에서 여자를 본 남자는 그녀의 눈에서 죽음을 본다. 형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여자에게로 향했던 것일까. 남자는 여자와 만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여자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어떤 계기라도 있나요?
그냥 끌린 거예요. 복어한테.
자연스럽게 말입니까?
그런 셈이죠.
분명한 목적도 없이요.
오른손이 왼손을 이끄는 것처럼요.
그럼 복어는 오브제 같은 것이로군요.
……오브제요?
그렇죠. 자연스럽게 끌리면서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거요. p.170~171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죽음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 변명하고 싶다. 조경란 특유의 감정을 배제한 건조함과 섬세함으로 심리를 묘사하고 있으나  죽기 위해 살고 있는 여자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공의 직업으로 인해 등장하는 공간과 예술에 대한 부분도 형상화 시키기 어려워 힘들었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찾을 수 없었다. 타고난 기질, 운명이었을까. 우울했고 침울했다. 

 간질을 앓는 여자의 친구 사임, 사후 정리를 도와주는 유품 정리인, 주변인물마저 모두 쓸쓸하고 어두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와 달리 생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녔다. 예고없이 닥치는 발작으로 언제나 죽음을 대비하는 삶, 끔찍한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삶이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여자에게 그들은 죽음의 실체가 얼마나 두려운지 보여준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여자에게 그들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이가 있을까.    

 너는 내가 복어로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 가까이 갔어. 그리고 그것을 만져보지 않고는, 먹어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었어. 그 이전에는 결코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어. 왜냐하면 나를 압박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 밤에. 복어의 뼈가 말했어. 온몸으로 밀고 가야만 하는 삶이 있다고. 복어의 눈이 말했어. 소중한 것이 사라지기 전에 똑바로 봐야 할 게 있다고. 그리고 나는 눈을 떴어. 내가 눈을 떴을 때 본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기다리는거야. p. 331

 소설은 죽음을 말하는 동시에 삶을 이야기한다. 아니다, 복어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죽기 위해 매일 복어를 보러 간 여자는 복어를 마주할 때마다 지독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건 고역이다. 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조경란은 생에 대해 회의를 느낀 여자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소중한 것에 대해 말한다. 절망의 연속일 때,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할 때 언제나 누군가 있다고 알려준다. 또한 사는 동안 죽음은 그림자처럼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해야 한다. 존재, 그 자체가 생의 이유이며 목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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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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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경꾼들>이란 제목이 흥미롭다. 누군가를 지켜보는 일은 관심이 있을 때 가능하다. 때로 지나친 관심은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책을 읽기 전에 떠오른 단어는 관심, 애정, 훔쳐보기, 동물원 등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스타나 동물은 언제나 행복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도 구경꾼이 아닌 주목받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을 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소설의 구경꾼들은 누구를, 무엇을 구경할까. 

 소설은 주인공 나가 들려주는 나의 가족 이야기다. 한 가족의 일대기라 해도 좋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가족을 시작으로 내가 성장하는 동안 일어나는 가족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모님의 연애사, 친가와 외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가족 모두의 삶을 들여다 본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나와 엮여 있고 나로 시작한 모두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큰 삼촌, 작은 삼촌, 고모, 나로 구성된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제 독자는 3대 가족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된다.

 모든 가족의 일상이 그렇듯 소설 속 나의 가족도 평범하다. 불행은 큰 삼촌의 죽음이었다. 가족 여행에서 교통사고가 나고 입원한 병원의 옥상에서 떨어진 여자에게 깔려 죽는다. 여덟 명이 아닌 일곱 명이 모여 앉은 식탁을 떠올리자 코 끝이 찡하다. 큰 삼촌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어머니와 여행을 떠난다. 

 소설은 부모님의 여행과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로 계속된다. 낯선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네의 그것과 똑같이 닮았다. 감동적인 사연, 슬픈 사연, 모두가 자신만의 사연이 있었다. 내게만 닥친 불행이 아니었고, 기적이라 불리는 일들은 계속 이어진다. 나는 방황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여덟 명이었던 나의 가족이 점차 줄어들고 나는 더이상 소년이 아니다. 비워진 가족의 자리에 새로운 가족이 들어오고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부모님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볼 것이다. 구경을 하는 동안 부모님은 자신을 잊을 것이다. 그러니 부모님을 구경할 또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뷰타인더로 아버지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반으로 자른 다음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에 맞춰 숨을 멈추었다. p.237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는 형식으로 확장된 이야기 속에 독자는 빠져든다.  솔직히 말하면, 직접 읽어야만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윤성희의 입담이 얼마나 대단하지 표현하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적절한 익살과 적절한 슬픔이 어우러진 따뜻한 소설이다. 살아가면서 쉽게 놓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달는다. 소설을 통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곧 나와 당신의 이야기였다. 해서, 슬픈 사연에 함께 울고 기쁜 사연에 함께 웃는다. 누군가의 삶을 구경하던 구경꾼이었던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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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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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어렵다. 읽는 것도 어렵고 읽고 나서 책에 대해 말하는 건 더 어렵다. 그러나, 감히 나는 말하고 싶다. 헤르타 뮐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라고 말이다. ‘숨그네’와 마찬가지로 ‘마음짐승’은 그녀만의 언어다. 그것은 독재치하의 시대를 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가 부모 세대의 시선으로 독재를 경험하고 바라 보았다면 <마음짐승>은 자녀 세대인 청춘의 눈으로 바라본 글이라 하겠다. 차우세스쿠의 독재자 시절 루마니아의 상황은 같지만 <마음짐승>은 분명, 젊은 소설이다.  공포와 불안의 시대를 살아내며 분노하고 투쟁하는 젊은 이의 이야기였다. 

 소설은 대학생 롤라의 자살로 시작한다. 헤르타 뮐러가 네모라 명명한 기숙사에서 옷장에 허리띠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일주일 전에 당원이 된 롤라는 왜 자살을 했을까. ‘다만, 이 여학생은 자살했다. 우리는 그녀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며, 그녀를 경멸한다. 이는 국가적 수치다.’ p.35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국가적 수치라 말하는 사회,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는 세상일까.

 죽은 롤라와 같은 방을 쓰던 주인공은 롤라가 남긴 노트에서 체육 강사에게 강간을 당했음을 알게 된다. 롤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와 만나 매일 매일 시대를 논한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정치를 비판한다. 동시에 그들은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경감 프옐레는 네 사람의 방을 수색하고 심문한다. 가족이 있는 시골 집까지 수색이 이뤄지고 그들이 가는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감시는 계속된다. 

 공장에서 번역사로 일하는 주인공은 다른 도시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편지로 소식을 전한다. 감시와 검열이 철저했던 시절, 그들은 머리카락을 한 올 넣는 걸 잊지 않는다. 심문은 손톱가위, 수색은 신발, 미행은 감기 걸렸다는 암호로 가득한 편지로 서로를 위로해야 했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친구들뿐이었다.  동료라 믿었던 테레사도 경찰의 심부름꾼이었다. 과거 장발 단속이나, 금지곡, 통행금지를 떠올리면서도 나는 이런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머리속에 풀이 자란다. 말을 하면 풀이 잘린다. 침묵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제멋대로 두번째, 세번째 풀이 계속 자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p. 8 이 문장을 읽었을 때, 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침묵할 수 밖에 없었으니, 풀이 자랄 수 없었다. 침묵을 강요받는 시대, 주인공의 할머니가 미쳐서 노래하는 건 당연했다. 공장에서 쫓겨난 주인공은 풀이 자랄 수 있는 곳으로 망명한다. 헤르타 뮐러가 그 시대를 겪은 때문일까.<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나 <숨그네>보다 <마음짐승>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치욕적인 심문을 견디고 루마니아를 떠나 함께 떠나지 못하고 죽음으로 남은 친구들을 애도한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는 그 시절을 기록하여 세상에 알려야 하는 의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살아남은 고통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네들이 함께 읊었던 시를 읊으며  제멋대로 계속 자란 풀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는 황홀한 상상에 빠져든다.

구름 한 점마다 친구가 들어 있네
공포로 가득한 세상에서 친구란 그런 거지
어머니도 원래 그런 거라 하셨네
친구야 아무렴 어떠니
진지한 일에나 마음을 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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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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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문장에 빠져들 때가 있다. 탄탄한 구성으로 잘 엮여진 줄거리가 아니라 강렬한 문장 하나 가슴에 박혀 버릴 때가 있다. [분홍 리본의 시절]로 처음 만난 권여선의 문장이 그러했다. 정곡을 찌르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장은 소설의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역시 아름답고 견고한 문장의 연속이었다.  

 <빈 찻잔 놓기>는 서울을 테마로 한 소설집을 통해 먼저 만났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염두해 두고  읽은 터라 그런지, 당시에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대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한데 이번엔 서울은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만이 보였다. 일로 엮인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들이 누군가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도 있다니. 성공을 위해, 진심을 이용하는 잔인함이 인간의 본성일까.  

 ‘누군가 그대 앞에 찻잔이든 술잔이든 빈 잔을 내려놓는다면 경계하라. 그것이 처음에는 온화하고 예의바른 권유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그대에게 가장 잔인하고 난폭한 지배로 돌변할 수도 있으니. 애당초 빈 잔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의도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 p.14

 상대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아는 듯한 권여선은 이런 진부하지만 눈부신 문장도 썼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p.46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누구나 사랑을 잃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산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던 때, 고아가 된 듯한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사랑을 믿다’ 란 제목처럼 주인공이 들려주는 연애 이야기다. 실연을 한 그에게 그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회상한다. 사랑이 끝난 후에 사랑을 믿었던 순간을 이야기하기에, 현재는 사랑을 믿을 수 없다. 처음부터 연인인 관계는 없다. 친구이거나, 동료이거나. 그와 그녀도 그랬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녀가 그와의 관계를 사랑이라 명했어도 그는 친구일 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리된 감정을 통해 과거의 관계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표제작인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친구와 만나 대학시절 함께 공부했던 선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나간 날들,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타인이 기억하는 모습은 다르다. 그리하여, 오해가 생기고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술에 취한 듯 내뱉은 고백이 상대에게는 감정의 소비처럼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진심이었음을 알았더라면 오랜 시간 서로를 미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한 번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기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찻잔이나 술잔, 밥공기 같은 것이 결코 화분이 될 수 없던 시절에도, 한쪽 모서리가 기운 사다리꼴의 그 방은 내게 충분히 훌륭한 화분이었다. 한때 나는 시루 속 콩나물처럼 동료들과 함께 그 방에서 쑥쑥 자라났다. 나와 동료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함을 느낄 때마가 나는 미칠 듯이 괴로웠다. 그 당시의 나는 젊기 때문에 차이를 못 견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젊기 때문에 차이를 과장하고 젊기 때문에 차이에 민감하다는 것을 몰랐다. 조사 하나, 어휘 하나에도  이고 살아야 할 하늘을 가르던 시절이었다.’ p.117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다. 젊다고 자부하던 그 때, 내 어설픈 행동만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을 터. 권여선의 문장이 위로로 다가오는 건 나뿐일까.  말이 길어지는 소설이다.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의 칼 날 같은 날 선 느낌이 다소 누그러진 듯하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3년이라는 시간 때문인지 모른다. 나 역시도 어떤 관계와 감정에 있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실수로, 누군가의 진심을 알지 못한 무심함으로 무너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선택할 수 있는 관계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해 말한다. 후자는 존재와 동시에 맺어진 관계 말이다. 혈연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나아가 가족의 관계가 될 것이다. 홀 어머니와의 아픈 기억을 담고 사는 남자의 삶을 다룬 <당신은 손에 잡힐 듯>, 한 가족의 탄생 이야기인 <K가의 사람들>, 잘못된 관계로 시작된 가족이 대물림되는 <그대 안의 불우>은 모두 가족을 다루었다. 소설 어디에도 단란한 가족 관계는 없다. 부모는 서로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

<그대 안의 불우>에서 프로게이머였던 그와 그녀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녀는 부모에게 결핍된 애정을 보상받고자 했기에 모든 유닛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를 선택한다.  ‘모든 유닛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그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는 것, 모든 부모들이 자식에게 해주어야할 바로 그것을 해주는 것, 그뿐이었다.’ p.228 아버지를 경멸한 어머니를 닮은 그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 역시 아이를 유산하며 생성된 관계를 소멸시킨다. 버릇이나 습관처럼 관계마저 닮게 된다.

 누군가 재미에 대해 의문을 품을지 모르니 밝혀두자면,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제 3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듯 그려낸 <k가의 사람들>, 예술인 마을에 여류시인이라 불리던 여자에 대한 갈망과 질투를 다룬 <웬 아이가 보았네>는 특히 그렇다.과거 회상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현재에 이르러 어떤 결말을 맺는지 궁금증을 불러온다. 

 7편은 모두 빛났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몇 편의 소설은 연애소설같기도 했고, 몇 편은 가족소설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애정과 애증의 관계에 대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고백하지 못했던 사랑에 대해, 불편하게 지속되는 관계에 대해, 무한의 애정을 주지 못하는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관계와 관계로 이어진 거대한 삶, 나로 시작되는 관계와 나를 통해 맺어지는 관계속에 살고 있는 나를 본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만나는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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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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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의 마지막 날이다. 더이상 여름은 없다. 두 번의 입원과 곤파스의 위력으로 끔찍했던 나의 여름날을 위로하고 싶었다. 살다보면 모든 게 다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책이 박완서산문집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견뎌내고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픔까지 이겨낸 질곡의 세월을 살아낸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글은 소박하고 따뜻했다. 손녀들과 주말을 보내고, 귀한 손님이 오면 꼭 집 밥을 해주고 싶어하는 할머니, 자투리 시간에 영화를 관람하는 박완서의 일상은 평범했다.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불타버린 남대문을 보며 애통해하고 월드컵 축구 경기에 열광한다.

 이른 새벽 홀로 정원에 나와 풀을 뽑는 할머니는 맨 손으로 흙을 주무른다.  마치 자연으로 돌아간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타샤의 정원을 연상시키며 그런 노년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이런 문장을 만났다.  뭔가 거대한 것으로 가슴을 맞는 듯 기분이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개 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p 25~26 

 여든을 코앞에 둔 나이에, 던지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겨우 절반의 시간을 살아온 내게도 던져본다. 유난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올 여름을 보내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앞으로의 삶에 대해, 불안과 공포가 몰려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흔쾌히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는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붕괴의 날, 나 역시 조용하고 완벽한 붕괴가 되기를 감히 바란다.

 책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소개하는 책중에 내가 읽은 책도 몇 권 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거장이 소개하는 특별함 때문일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특히,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김훈의 <남한산성>이 그러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소소한 일상을 다룬 글과는 다르게 날선 차가움이 있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던 그 겨울과 1.4후퇴때의 모습을 겹쳐가며 써내려 간 피난 이야기는 내게도 차디찬 추위와 서러움을 안겨주었다.

 먼저 떠난 이들(김수환 추기경님, 박경리 작가님, 박수근 화백님)을 그리워하는 글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분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특히 소설 <나목>의 주인공인 박수근 화백님과의 인연은 아련함이 가득했다. 박수근 화백을 다룬 방송을 통해 사연을 접해서 그런지 그 분을  생각하며 말씀하시던 박완서 작가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꿈은 전쟁으로 인해 소설가의 길을 가게 했지만, 그것이 박완서 작가의 운명은 아니었을까. 누구나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이 있을 것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란 제목은 아련함과 동시에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강렬한 표지가 새롭게 보인다. 눈꽃이 내린 듯한 그림, 작가의 마당에 살구꽃이 이렇게 화사하지 않을까 싶다. 살구나무 아래에서 맨 손으로 흙을 만지는 작가의 일상이 오래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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