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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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짐 알칼릴리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인상 깊게 읽었다. 어려운 주제였지만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그 책을 읽었기에 브라이언 키팅의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가 궁금했다.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란 제목과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는 살피지 않고 말이다. 누군가 대중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유튜버 궤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미리 언급하자면 이 책에 윤하의 노래로 잘 알려진 ‘사건의 지평선' 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물리학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물리학자는 내게 특별한 이름이 될 것이다. 물론 외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우주론자이자 과학자인 브라이언 키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9명과 만나 나눈 대화 인터뷰다. 물리학자의 삶과 연구자의 태도에 관해 중점적으로 들려준다. 저자의 설명처럼 여자 물리학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연구자의 삶이란 어떠할까. 수식과 실험이 전부일 것 같다. 성과를 내야 하고 남보다 빠르게 어떤 이론을 발표하는 일 그게 목표가 아닐까. 이런 나의 생각은 무지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물리학자들은 거의 비슷한 느낌을 안겨주었는데 동료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실패는 당연한 일이며 성과는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 협력이 중요하며 실패로 인해 좌절하는 대신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9명이 연구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말이다.


모든 연구는 사실 어느 한 개인이 홀로 내놓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종합되는 겁니다. 새로운 뭔가가 출연할 때, 그게 맥락에 놓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려요. (물리학자 덩컨 홀데인, 162~163쪽)


그들은 연구자이면서 과거에는 제자였고 현재는 누군가의 스승이었다. 생각해 보면 물리학에서 하나의 이론이나 우주적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주제를 몇 십 년 이상 파고들어 연구를 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괏값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건 우리도 안다.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려도 당장은 결과를 보여줄 수 없는 일.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쓸모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뤄진 놀라운 발견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물리학자 셀던 글래쇼, 101쪽)






전자기약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셀던 글래쇼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을 말한다. 누군가 그의 강의 덕분에 물리학의 세계를 만나고 연구자의 길을 걸으며 물리학은 발전한다. 그가 연구에만 집중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시를 좋아한다는 물리학 교수 프랭크 윌첵의 말도 인상적이다.


세상은 여러 층위로 기술할 수 있는데, 시도 중요한 역할을 해요. 제 말은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해야 하는 게 아니란 겁니다. 양쪽 다일 수도 있어요. 같은 대상이나 현상을 다른 식으로 기술할 수 있고, 각 기술 방식은 나름대로 타당해요. (물리학자 프랭크 윌첵, 183쪽)


우주배경복사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메데의 솔직함은 감동적이다. 연구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대해 확신을 갖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꾸준하게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 누구나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난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연구하지요. 따라서 매일 난 학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물리학자 존 메더, 219쪽)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책이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롭고 인상적인 책이다. 물론 실패로 인한 기억으로 도전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일어설 힘을 안겨준다. 그러니 이 책은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에 우리의 삶을 대입하기에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실패를 저자의 바람처럼 물리학자처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삶이란 책의 원제(Into the Impossible)처럼 불가능 속으로 전진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할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하는 문제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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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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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에 취한 게 엊그제 같은데 초록에 반하는 날들이다. 나는 혼자 멈춰 있고 계절은 사부작사부작 제 길을 걷는다. 곧 모내기가 시작될 테니 여름인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의 움직임을 조금 안다. 그건 참 좋은 일이다. 이맘때의 절기를 찾아보는 것, 계절을 사는 일이다. 경계가 불분명해하지만 계절의 문턱을 지나 다음 계절이 온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김신지의 『체절 행복』 그런 일상의 감사를 들려준다. 제목 그대로 체절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일 말이다. 입춘부터 대한까지 24절기를 소개한다. 절기마다 어떻게 재밌고 즐겁게 지내는지 집중하게 만든다.


누군가 사느라 바빠서 절기 따위는 챙길 여력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추운 겨울 지나 꽃이 피면 꽃이 반갑고 그 소식을 전한 기억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계절이 오고 가는지 체감도 못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계절이 지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적도 말이다. 엊그제 24절기 중 일곱 번째, 여름의 입구인 입하(立夏)였다. 벌써 올여름의 더위를 걱정한다. 제철이었던 주꾸미도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얼려 둔 머위 쌈도 먹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체절 행복』을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았는지 감탄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야 했지만 여름 더위를 피하고 겨울 추위를 피해 다른 나라에 갈 수도 있는 세상이니 제철 절기를 알고 챙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난다면 나만의 제철 절기를 즐기는 기쁨을 쌓고 싶을 것이다. 봄마다 조팝과 이팝나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헷갈렸던 나는 이제 확실히 안다. 키가 큰 게 이팝나무라는 걸 말이다. 계절에 맞게 사는 일, 그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다.


새하얀 눈꽃 치즈를 수북이 뿌려둔 것 같은 이팝나무는 이맘때 어딜 가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꽃 좀 봐, 하고 멈춰 서는 순간에 우리 삶은 조금 느리게 흐른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렇게 말한 순간들만 모아 편집해둔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이 될까. (110쪽)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마다 심어야 할 작물이 무엇이고 수확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한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잊고 지낸 게 많았다. 요즘 마늘종 뽑을 때인데, 어렸을 적에는 그게 정말 싫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학교로 도망 치곤했는데,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는 것, 제철 절기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이 좋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을 어쩌면 ‘마음을 쏟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무사히 잘 담아온 마음을 한 군데다 와르르 쏟아붓는 시간 같다. 그렇다면 내게 초여름은 ‘바깥’에 마음을 쏟고 지내는 계절. 좋아하는 계절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즐기고 그게 곧 잘 사는 이이라고 믿으며 지낸다. (141~142쪽)


바깥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려고 오며 가며 카페나 식당을 봐 둔다는 저자의 마음이 괜히 설렌다. 나도 더위가 몰려오기 전에,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맘껏 바깥을 즐기는 일상을 계획하고 싶다. 우선은 지금 한창인 작약을 보는 일에 몰두할 생각에 설렌다. 바깥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작약, 지금의 제철 행복이다.


다가오는 절기를 헤아려본다. 절기를 안다는 게 참 좋다. 계획을 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까. 물론 나이가 들고 계절의 흐름이 더 놀라고 신기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주변의 것들을 둘러보는 마음, 같은 자리에서 좋은 이들과 작년의 이맘때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 이 역시 감사하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과 다르게 춥고 날카롭던 겨울에 점점 무뎌지고 한여름의 땡볕 더위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쉽고도 안타깝다. 이 땅에 살면서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절기의 즐거움이 어느 순간 기록에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결국 계절의 흐름을 알고, 계절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도 알고, ‘제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옛사람들과 동식물처럼 사는 것.(333쪽)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봄이 오는 한 우리는 매번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이번 봄은 다음 봄이 아니기에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334쪽)


눈이 부신 이 계절,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제철의 행복을 만끽하고 누리고 싶다. 내가 맞이하는 여름은 작년과 같지만 다를 것이다. 내가 맞이할 가을과 겨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봐야 할 것을 보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하자. 계절이 보내는 기척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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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5-07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작약철이죠 저희집에도 작약이 조금 폈어요 활짝은 아니고^^ 며칠 지나면 또 장미철이고요 꽃 피는거 보고 있으면 제철행복이 느껴집니다 자목련님이 들이신 작약 보면서 5월 행복하게 보내셔요😄

자목련 2024-05-09 10:49   좋아요 0 | URL
작약에 반갑고, 장미에 설레고!
제가 들인 작약은 활짝으로 가고 있어요^^

서니데이 2024-05-1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둔 것 같은데, 샀는지 찾아봐야겠어요.
자목련님, 비오는 주말입니다. 따뜻하고 좋은 시간 되세요.^^

자목련 2024-05-13 15:09   좋아요 1 | URL
지금은 이 책을 곁에 두셨을 것 같아요.
비 오고 깨끗하고 맑은 월요일이에요. 서니데이 님 좋은 오후 이어가세요^^
 
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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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소설은 어렵고 재밌다. 그리고 아름답다. 제발 그 놀랍고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이해하느냐고 묻지 말기를 바란다.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답으로 대신하겠다. 가장 최근에 만난 『미래과거시제』 가 가장 인상적이고 특별했지만 11년 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온 『청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 우리의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청혼』이라는 로맨틱한 제목만 생각하면 결혼해서 함께 우주여행이라도 떠나자는 내용인가 싶었다. “휴가를 받으면 한번 놀러 와.” 란 문장의 편지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장거리 연애 중이구나 싶었지 설마 우주 전쟁이 등장할 줄이야. 그랬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목성 근처 소행성대에서 궤도연합군 작전 장교로 복무 중이다. 지구 출신인 너와는 다르게 우주 출신이다. 지구와 목성 근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거기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까. 우주 전쟁은 상상도 못하는 지금의 나는 소설 속 연인의 연애가 얼마나 애틋할지 짐작할 수 없다.


“보고 싶었어” 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 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 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다시 17분 44초가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35~36쪽)


소설은 ‘나’가 ‘너’에게 전하는 우주 전쟁의 상황이라고 할까. 우주 출신이라 지구의 중력은 감당하기 힘들지만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 170시간을 날아가야 너를 볼 수 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를 사랑하니까, 모든 건 다 괜찮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너는 나를 만나러 왔다. 먼 우주를 지나 온 너에게 나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핑계라면 적들은 우리가 어떤 대형으로 잠복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그들은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행방을 찾아야 하는 게 나에게는 제일 큰 과제라서 너에게 소홀했다. 때가 되면 찾아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너는 떠났다.


어쩌면 내가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이런 연애와 사랑은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에 등장하는 우주 함대나 휴양선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주적 상상력 부재 때문일 것이다. 광활함 그 자체인 우주, 기회를 엿보고 있을 적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그곳을 떠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나를 비롯한 함대의 군인들의 외로움을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는 적만큼이나 우주 함대에 있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다. 적은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너와 나 사이에도 오해가 쌓이는데 업무로 만난 동료는 오죽할까.


배명훈이 묘사한 우주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그들의 고독을 너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과연 알 수 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 함대와 벌이는 전쟁, 전쟁이 끝나야만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갈 수 있다. 가능한 일일까? 편지와 함께 너에게 줄 반지도 준비했다. 그것을 받고 너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반지를 끼고 나를 기다릴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이 소설을 우주의 미래, 현실적인 우주 전쟁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학, 군사학, 중력렌즈, 전파 망원경의 등장으로 묘사되는 교전을 보면 그렇다. 비슷한 게임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겐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였다.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닿고자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멀어지는 연인의 사랑. 그 결말이 어떨지 알 것 같은 사랑 말이다. 그럼에도 우주 한복판에서 너를 향한 영원한 마음을 보낼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바라보며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을 말이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이상하지? 나 같은 우주 태생이 어딘가로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이제 나도 고향이 생겼어. 네가 있는 그곳에. 고마워. 그리고 안녕.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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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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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로맨스 소설을 쓰던 아이가 있었다. 반장이었다. 소설은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반장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거니와 예나 지금이나 로맨스 소설에는 큰 과심이 없기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박서련의 첫 청소년 소설집 『고백루프』를 읽고 뜬금없이 그 아이는 계속 소설을 썼을까 궁금해졌다. “청소년은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 쓰던 청소년이 결국 소설가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라는 박서련의 말 때문이다. 나의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현재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학 캠프나 공모전, 예술고등학교도 많으니 박서련처럼 고교 시절에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된 이들도 많을 것이다.


『고백루프』 에는 모두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1부에 수록된 「솔직한 마음」, 「안녕, 장수극장」, 「엄마만큼 좋아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감정과 마음을 잘 보여준다. 「엄마만큼 좋아해」 속 화자는 여섯 살 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솔직한 마음」의 ‘나’는 아이돌 그룹의 막내로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게 아니다. 걸그룹의 멤버 하나가 그룹 내 따돌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막내인 ‘나’도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기는커녕 기사를 믿고 대놓고 따돌린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원래 왕따였던 아이 ‘원따’의 주변을 서성인다. 일부러 말을 걸고 매점에 가자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움뿐이다. 무대에서 빛나게 노래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실체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십 대란 나이에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안녕, 장수극장」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였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장수극장’은 문을 닫는다. 고등학생인 ‘나’는 부모님을 대신해 매표소를 지킨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만든 극장이고 ‘장수’는 나의 아버지 이름이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배가 축제 때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한다. 놀라운 건 아버지가 직접 정성스럽게 영상을 촬영했다는 거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축제 때 학생회장이 담은 영상을 통해 동네 어른들이 장수극장을 추억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장수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닌 동네의 역사였고 동네의 기억이자 추억이었다. 내가 소읍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안녕, 장수극장」은 남다르게 다가왔지만 회장의 말에 뭉클하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어른이 되면 우리 모두 다른 길을 걷겠지만 우리가 이 마을에서 자란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장수극장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축제도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안녕, 장수극장」, 61쪽)


학창 시절 벗어나고 싶었던 곳을 그리워하고 더 넓은 곳을 원했던 마음은 어느 순간 애틋함으로 변한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소읍도 옛 모습과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말이다. 청소년기를 보낸 공간과 그 공간을 함께 누린 친구들, 그 시절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그때는 모르는 게 아쉽다. 하긴 이런 마음을 십 대엔 나도 몰랐으니까.


2부의 「보름지구」 와 「고―백―루―프」는 SF 요소를 적절하게 살린 소설이다. 미래에 지구를 떠나 달에서 거주하는 「보름지구」 속 청소년 ‘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게 한국 명절인 추석을 소개한다. 송편은 그 맛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지구에서 달을 보면 소원을 비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달이나 화성에서의 거주가 한낱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니 푸른빛 도는 지구를 보며 소원을 비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표제작인 「고―백―루―프」 특정한 날이 똑같이 반복되는 설정으로 친구의 고백을 받고 수락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 동성 친구를 향한 진심의 고백, 그 고백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3부의 두 소설은 작가가 고등학교에 쓴 것이다. 엄마가 암으로 죽고 철원을 떠나 언니가 사는 서울로 올라와 적응해야 하는 「가시」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새엄마와 단둘이 살 「발톱」은 상실과 애도를 겪고 서로 의지해야 하는 마음이 담겼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십 대의 상처와 방황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비슷한 구도와 설정이지만 가족과 타인을 향한 십 대의 마음을 가장 잘 묘사한 게 아닐까 싶다.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모르는 마음과 서툰 행동이 그러하다.


청소년 소설답게 십 대의 이야기를 실감 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래서 당사지인 청소년이 읽는다면 더욱 공감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확장해 나갈 것 같다. 소설을 쓰고 있는 청소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기 부여가 되고 응원을 건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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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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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다. 먹고 싶지 않다. 먹으면 안 된다. 갖고 싶다. 갖고 싶지 않다. 가져도 되는가? 뜬금없는 나열에 이게 뭔가 싶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의심. 그 욕구를 자제하고 절제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개인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사회의 규범과 시선의 기준에서 벗어난 욕망은 충족되어서는 안 되는가? 아사이 료의 『정욕』을 읽고 든 생각이다. 바른 욕망(正欲)이라니, 도대체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의 모든 욕망은 바른 것인가? 그것을 정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런 의미에서 아사이 료의 『정욕』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읽기도 전에 궁금증을 불러오고 읽은 후에도 정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니까. 소설적 재미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이냐고, 괜찮은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소수와 약자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 연대를 이끌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성향을 오픈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을 향한 편협한 시선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라고 할까. 소수의 선택을 존중하고 취향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봐야 할까. 이제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


남들과 다른 성향을 지닌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소수, 혹은 비주류에서도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이들이다. 다수가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그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당할 피해나 손실을 알고 있다. 아니,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뜻 소수를 응원하거나 그들의 편에 설 용기를 내지 못할 때가 많다. 『정욕』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로, 그들의 사정과 형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평범한 초등학생이 아닌 등교 거부를 하고 유튜버가 된 초등학생과 그의 가족, 연애나 결혼 출산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는 침구 판매 여사원,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고 가족 이외의 남자와 접촉해 본 적 없는 여대생, 이성의 모든 관심을 한몸에 받는 외모를 지녔지만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남학생. 그들은 주변에서 건네는 말과 시선이 불편하다. 일일이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고 설령 설명한다 해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애당초 나는 이 세상이 설정한 커다란 길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42쪽)


이쯤에서 궁금할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 취향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고 그게 뭐 어떠냐고 말이다. 침구 판매 여사원, 남학생의 욕망이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사물에 대한 페티시즘이라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놀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이성이 아닌 사물에 끌린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큰 관심도 없지만 막상 남다른 취향에 대해 알게 된다면 끊임없이 꼬집고 파고들기 마련이다.


소설은 소수에서도 소수인 그들이 연대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나아가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고, 내가 알 수 없는 욕망도 존재한다고 말이다. 얼핏 그런 의도는 나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욕망이 법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 달라진다. 도덕성, 인간 존엄성에 위배된다면 용납될 수 없다. 그 지점에 대해 작가는 언급을 회피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물론 소설 속 이런 문장은 우리 사회가 소수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부족하다는 걸 각인시키기에 훌륭하다.


어엿한. 평범한. 일반적. 상식적. 자신이 그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째서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사는 길을 좁히려고 할까. 다수의 인간 쪽에 있다는 자체가 그 사람에게 최대의, 그리고 유일한 정체성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누구나 어제 본 건너편에서 눈뜰 가능성이 있다. 어엿한 쪽에 있던 어제의 자신이 금지한 항목에 오늘의 내가 고통받을 가능성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살기 쉬운 세상이란 곧, 내일의 내가 살기 쉬운 세상이기도 한데. (329쪽)


모든 욕망과 다양성을 생각한다. 그 가운데 내가 속한 범주의 욕망과 다양성도 있을 것이다. 나의 그것은 존중받지 못하는가. 존중받고 있는가. 그것은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한 것인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에 어떤 욕망은 그 자체로 삭제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할 수도 있다.


다수의 결정과 선택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건 부당한 힘을 과시하는 행태를 지녔다. 다수와 소수가 균형을 맞춰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건 당연하다. 균형점을 정하는 일은 어렵고 함부로 강요할 수 없다. 그러니 바른 정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선을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는 것, 나는 끝내 알 수 없는 삶이 있다는 것, 그것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다.


재미와 함께 질문을 던지고 없던 의문을 끄집어 내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라는 전략적인 한 줄 광고는 탁월하나 동의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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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2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다락방 님도 과하다! 그랬는데 자목련 님도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읽기는 읽어야 하는데... ㅎㅎㅎ

자목련 2024-04-14 17:56   좋아요 0 | URL
지금은 다 읽으셨을 듯^^

다락방 2024-04-29 22:19   좋아요 0 | URL
이거 블랑카 님도 페이퍼 쓰셨는데 저랑 비슷하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자목련 2024-04-30 17:05   좋아요 0 | URL
마케팅 덕을 본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는 다른 느낌일까 싶기도 하고요.

페넬로페 2024-04-1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소설이었군요.
저는 인문학 서적인 줄 알았어요^^

자목련 2024-04-14 17:57   좋아요 1 | URL
제목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은오 2024-04-1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자목련님 두분 다 그저 그렇다고 하시는데.... 리뷰를 읽을수록 그래서 오히려 더 궁금해지는 마음. 악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4-13 20:2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내가 읽어야겠다~!!

은오 2024-04-13 23:38   좋아요 1 | URL
읽고계십니까?! ㅋㅋㅋㅋ

잠자냥 2024-04-14 00:24   좋아요 1 | URL
내일 아침부터….

은오 2024-04-14 10:21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 멋잇어...

잠자냥 2024-04-14 10:26   좋아요 1 | URL
🤯🔫

자목련 2024-04-14 17:58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읽으세요^^

그레이스 2024-04-22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정욕이었네요
저는 제목 한자를 못보고 표지만 지나치듯 봐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