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8쪽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12쪽

나의 세계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의 삶이 과거가 되며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나는 얼어붙는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빨아들이는 새 뿌리가 되어 바깥에, 어둠과 낯선 것에 닻을 내리고 붙박혀 있는 것을 감지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탄생이니까, 두려운 새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니까.-27쪽

카인에 관한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완전히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어. 그러면 대체로 훨씬 나은 뜻을 갖게 되지.-39쪽

<허용되었다>, <금지되었다>라는 것이 사실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는 곳에 넌 아직 가보지 못했어.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느낀 것뿐이야. 다른 것이 또 올 거야. 그것에 자신을 믿고 내맡겨봐!-85쪽

백은 즐겁게 내 말에 귀기울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내 말에 귀기울이고, 그에게 내가 무언가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굉장한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뭔가를 전하고 싶은 고이고 고인 욕구를 실컷 쏟아내는 기쁨에, 인정을 받는다는 기쁨에, 연장자에게서 다소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멋들어진 녀석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 말이 감미로운 독주처럼 영혼 속으로 번졌다. 세계는 새로운 색깔로 불타고 있었다.-96쪽

"너한테 유쾌하지 않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집에 가봐야겠다.-116쪽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123쪽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처음에 겁을 먹고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또한 더 이상 내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에다 바친 것 같은 경건하게 정신화된 숭배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128쪽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지. 그러나 그러면서도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따라 인도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한 대로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자네가 계속 낚아채 가고 커다랗고 알 수 없는 보편적인 힘에다가 하나의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 더해지는 것을 발견하네. 하나의 기관, 하나의 방향 키 말일세! 이건 대단한 거야. 그것이 없다면 그냥 공중에 떠 있을 테지, 미친 사람들이 그러듯이 말이야. 자네에게는 인도를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보다 더 깊은 예감이 주어졌어. 그러나 거기에 맞는 열쇠와 상향 키가 없어. 바닥없는 곳으로 솨악 빨려들고 있지.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싱클레어, 자네는 그 일을 하고 있어!-144~145쪽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현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어.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152쪽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힘들었어요" 내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힘들었어요. 꿈이 올 때까지는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꿰뚫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190~191쪽

처음에 나는, 총격의 선정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실망했다.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217쪽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원(原) 느낌, 가장 거친 느끼들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218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1-07-1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미안, 중학교 때 필독도서로 읽은 후 다시 읽은 기억이 없는데...이참에 읽어봐야 겠어요.
님의 밑줄긋기를 따라 읽다보니, 오히려 어렵게 읽었던 '싯다르타' 마저 이해가 되려하고 있어요~^^

꿈꾸는섬 2011-07-20 00:29   좋아요 0 | URL
저도 중학교 때 필독서로 읽고 이번에 조카랑 읽으려고 다시 읽었는데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희망찬샘 2011-07-20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 책을 정말 많이 읽었더랬어요. 근데, 아쉽게도 다 문고판 도서라... 일종의 요약본이었던 거죠. 그래도 그거 읽었다고 어디 가서 책 읽었네... 하고 아는 척 할 수도 있던걸요. 이제는 제대로 된 책들도 찾아 읽어 보아야겠네요. 아, 데미안~ 입에 침 튀기면서 이야기 하던 울 큰 언니 때문에 읽었었는데, 왜 그리 어렵지... 했던 책!!! 이 책 덕에 갑자기 중학 시절로 잠시 떠나 보았습니다.

꿈꾸는섬 2011-07-21 12:26   좋아요 0 | URL
희망찬샘님도 문학소녀셨군요.ㅎㅎ

후애(厚愛) 2011-07-2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못 뵙고 가게 되어서 너무 서운하네요.
올해 꼭 뵈려고 했었는데... 죄송해요.
다음에 기회가 오면 꼭 만나요^^

꿈꾸는섬 2011-07-21 12:25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국 계신 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 후회없이 다 하고 가시길 빌어요.^^
이제 몸은 많이 좋아지셨나요? 건강하게 계시다가 돌아가시길......
다음에 만날 기회가 생기겠죠.^^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람이 메말라 까실까실하고 이슬이 깨끗하여 투명한 것이 음력 팔월의 멋진 절기다. 물은 힘차게 운동하고 산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 북한산의 멋진 경치다. 개결하고 운치 있으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두세 사람이 모두 멋진 선비다. 이런 사람들과 여기에서 노니니 그 노니는 것이 멋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역시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날이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 단풍도 멋지고 바위도 멋지다. 멀리 조망하여도 멋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멋지다. 부처도 멋지고 스님도 멋지다. 비록 좋은 안주는 없어도 탁주라도 멋지다. 절대가인이 없더라도 초동의 노래만으로도 멋지다.
  요컨대 그윽해서 멋진 것도 있고, 상쾌하여 멋진 것도 있고, 활달아여 멋진 것도 있고, 아슬아슬하여 멋진 것도 있고, 담박하여 멋진 것도 있고, 알록달록하여 멋진 것도 있다. 시끌시끌하여 멋진 것도 있고, 적막하여 멋진 것도 있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197~199쪽 중) 

아, 정말 멋지다! 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느 글 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이 같으면 코가 다르고, 코가 같으면 입이다르고, 입이 같으면 얼굴빛이 다르고, 모두 같으면 키와 체구가 다르고, 키와 체구가 같으면 자세가 다르다. 나한들은 혹은 서고 혹은 앉고, 혹은 숙이고 혹은 옆의 것에 붙고, 혹은 왼쪽을 돌아보고 혹은 오른쪽을 돌아보고, 혹은 남과 이야기하고, 혹은 글을 보고 혹은 글을 쓰고, 혹은 귀를 기울이고, 혹은 칼을 지고, 혹은 어깨를 기대고, 혹은 머리를 떨어뜨리어 근심하는 듯하고, 혹은 생각하는 듯하고, 혹은 기쁜 듯 코를 쳐들고 있다. 혹은 선비 같고, 혹은 관리 같고, 혹은 아녀자 같고, 혹은 무사 같고, 혹은 병자 같고, 혹은 어린애 같고, 혹은 늙은이 같다. 천 명이 모인 모임이요, 일만 명이 모인 시장 같다. (107~108쪽) 

  지금 내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병을 들어 찰찰 따르면 마음이 술병에 있고, 잔을 잡고서 넘칠까 조심하면 마음이 잔에 있고, 안주를 잡고서 목구멍에 넣으면 마음이 안주에 있고, 객에게 잔을 권하면서 나이를 고려하면 마음이 객에게 있다. 손을 들어 술병을 잡을 때부터 입술에 남은 술을 훔치는 데 이르기까지, 잠깐 사이라도 근심이 없게 된다. 몸을 근심하는 근심도, 처지를 근심하는 근심도, 닥친 상황을 근심하는 근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술을 마심으로써 근심을 잊는 방도요,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109쪽) 

   조선후기 문인 이옥과 김려의 글은 지금 읽기에도 손색이 없는 글이다. 문체반정을 통해 힘든 삶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짓누룰 수 없었다. 양반의 자제임에도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고, 유배 생활을 하였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글쓰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글쓰기는 무엇이었을까?  

   ......박학으로 이름을 날리는 자를 만나 질문을 해 보면 독 속에 들어앉아 별을 세는 꼴이고, 글 잘 짓는다고 소문난 자의 글을 읽어 보면 남의 글을 흉내 내고 훔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문과 과거 문장을 잘 쓴다고 해서 읽어 보면 허수아비가 시장에서 춤추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시에서 명성을 날리고,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살아서는 과거 시험과 관직에서 명성을 얻고, 죽어서는 글이 목판에 새겨지는 영예를 누립니다. 몸은 죽어도 문장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낮은 것도 그들이 쓰자 높아지고, 자잘한 것도 그들이 쓰자 크게 됩니다. 모두들 제 글의 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유독 나만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경전이 술이라도 되는 양 탐닉하고, 서책이 여자라도 되는 양 푹 빠져 보기도 합니다. 눈과 귀가 놓친 것이 있을까 싶어 손으로 베껴 써 보아도 그 누구의 칭찬도 듣지 못합니다. 칭찬은커녕 마을의 아이들마저 나를 놀려 댈 뿐입니다...... (188쪽중) 

  '몸은 죽어도 문장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하고 그가 썼다. '그것때문에 경전이 술이라도 되는 양, 서책이 여자라도 되는 양' 빠져 살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그들이 글을 썼다면 과연 이런 멋진 글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들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글을 썼기에, 그들에 대한 감동으로 책을 읽는내내 울컥했다. 

  사료가 바탕이 되었기에 이 소설의 구성과 완성도는 탄탄하다. 그러하기에 읽는 재미와 더불어 정조의 문체반정은 심술맞은 임금의 질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을 읽는 것을 행복해하고, 글을 쓰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게는 개성있는 나만의 글을 써야한다는 교훈까지 안겨주는 책이었다. 나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해한다면 어떤 글쓰기를 하여도 상관없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훨씬 글쓰기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내 느낌과 생각대로 나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선물해주신 ㅇ님 고맙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나무집 2011-06-3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옥 김려를 멋진 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설로 이끌어낸 설흔이란 작가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꿈꾸는섬 2011-07-04 16:01   좋아요 0 | URL
소나무집님 이 소설 정말 너무 매력적이더라구요.^^
 
<만화로 교양하라>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만화로 교양하라 -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의 가로질러 세상보기
이원복.박세현 지음 / 알마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만화로 교양하라>를 받아들고 처음엔 이런 책도 나왔구나 했다. 만화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만화와 관련한 소식이나 이야기의 정보는 남들보다 늦은 편이다. 학창시절에나 간혹 재미삼아 만화책을 보긴 했지만 만화를 제대로 섭렵한 사람들에 비하면 소소하기만 하다. 그래도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만화책은 워낙 유명했고 이웃나라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몇편은 사서 보았다. 만화로 보니 쉽고 재미는 있지만 깊이있게 읽을 수 없다는 단점때문에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모두 사서 보진 않았다.  

<만화로 교양하라>는 이원복과 박세현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각 나라에 대한 대담 형식이 1부, 이원복 만화에 대한 박세현 저자의 논평(?)이 2부로 구성된다. 그러다보니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책에 대한 이해와 만화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이 책을 계기로 나에 대한 오해가 조금은 풀렸으면 합니다."라고 이원복 만화가가 말한다. 그에 대한 오해는 아마도

<먼나라 이웃나라>의 미국 대통령 편에서 앤드루 잭슨의 부정적인 측면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빗대어 비교한 것, 일본 식민주의의 상흔과 위안부 문제를 미래라는 명목 아래 청산해야 한다는 것,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것, 엘리트주의에 입각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상고 출신임을 폄하한만평을 서울대학교 동창회보에 실은 것, <자본주의.공산주의> 같은 만화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와 대기업 친화적인 의견 등이 이원복을 '보수주의자'로 여기게 만든다.(241쪽) 

대단한 판매부수를 기록한 이원복의 만화에도 명암은 존재한다. 북한 등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관심이 열려 있는 반면, 자본주의와 성장 제일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보수적인 정치성이 만화에 드러난다. 역사의 파란과 지형적 조건 때문에 생긴 각 나라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서구화나 세계화에 대한 예찬을 결코 숨기지는 않는다. 미래를 위해선 과거의 희생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세계 역사를 꿰뚫고 있지만, 그 역사에서 소수자의 이야기는 부족하다. 때로는 기득권이나 권력자의 입장이 녹아 있다.(257쪽)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이원복 만화가에 대해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사는 중년의 아줌마는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가난한 청년기를 보낸 만화가가 그림을 통해 돈을 벌고 그것이 밥벌이가 되고 학비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만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즘도 TV나 책을 통해서도 '성공'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 책장에도 <부자들의 자녀교육>이라는 책이 꽂혀 있다. TV에서는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대부분 부자들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공이라는 말은 곧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말이 된 것처럼 사용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셋째형이 돈을 벌어 차비를 부쳐주어 유학길에 오른 넷째형, 넷째형이 다시 돈을 모아 이원복 만화가에게 돈을 부쳐주어 유학길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난하지만 공부를 해서 성공하고자하는 형제들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가난했기 때문에 절약 습관이 몸에 베었다는 말씀도 그냥 웃어 넘어갈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았는가를 알 것 같다. 

 가난했던 청소년기를 보냈던 나였기에 이원복 만화가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화가는 우리나라에 대해 "개천에서 용난다."고 표현한다. 물론 본인의 이야기이다. 가난해서 돈을 벌기 위해 만화를 그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밥을 먹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려냈을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만화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우리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돈이 있었으면, 내가 배우고 싶어하던 것들을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시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스스로 노력해서 뭔가를 이뤄내고자하는 열정이 내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건, 늘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한가지씩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볼 생각이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가 말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 우리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그녀가 말했다로 시작하는 이 책, 가슴이 뭉쿨해지도 하고 감성을 울려 하루종일 우울하기도 하게 만든다. 때론 아, 그땐 그랬어. 하고 추억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런 책이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은 한참동안 붙잡고 잠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랑했던 순간들, 이별했던 순간들 혹은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들까지 그녀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읽기 위해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밤삼킨별님의 사진들은 여린 감성을 함께 자극했다. 

그녀가 말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멋진 말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집에서 영화를 봤는데 메릴 스트립이 딸에게 그렇게 말하더라고. 사실 그 영화는 오래전에 극장에서 봤던 건데 그때는 그 대사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거든."
......

"얼마 전 나는 문 하나를 닫았어.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 그런데 그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이제 문이 열릴 일이 남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한결 편안해졌어."
......

나는 그녀에게 물어봤다.
"그래, 다른 문이 열린다는거지? 그렇다면 문이 닫힌 다음에 얼마나 기다려야 다른 문이 열리는 걸까? 난 너무 오래 기다려 온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간만큼."  

인생을 살다보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기분일때가 종종 있다. 요새 내가 그렇기도 하다. 쓰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 거침없이 써내려간 글들이 형편없이 느껴져 모조리 지워 버리는 행위를 반복하다보니 도무지 나가야할 길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을 따라가주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들때문에 견딜 수 없이 자학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직은 견딜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게도 곧 또 다른 문이 열릴 것만 같다. 기다리고 기다리다보면 곧 그리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자꾸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글을 읽으며 희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현재의 내 모습에 실망하고 자책하고 나를 자꾸만 갉아먹으려고만 했던 것 같아 스스로가 미안해지려던 참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야겠다. 내게 또 다른 길이 생겨날테니 말이다. 가끔 어떻게 살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뜻하지 않은 일들로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오듯이 내 인생 어딘가에도 분명 그런 날이 올 것 같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시간만큼 지나고나면 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가방 2011-03-3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지만 마시고 쾅쾅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열리지요....^^
아마도 지금 열심히 두드리고 계신거지요..??

꿈꾸는섬 2011-04-01 22:45   좋아요 0 | URL
ㅎㅎ책가방님, 기다리지만 말고 열심히 두드릴게요.ㅎㅎ

양철나무꾼 2011-04-01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기는 하지만,
우리는 때로 닫힌 문 앞에 주저앉고 말죠.
잠시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일 반드시 필요하지만,
숨을 고르고 난 후에는 다른쪽 문을 찾아 나서야 할거예요~

와우~ 그러고 보니 님의 리뷰도, 책가방 님의 댓글도...넘 멋진걸요~^^

꿈꾸는섬 2011-04-01 22:46   좋아요 0 | URL
닫힌 문 앞에서 주저앉지 말아야겠어요. 또 다른 문이 곧 열릴거잖아요.ㅎㅎ

마녀고양이 2011-04-0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섬님, 인용구 너무 좋아요.
문을 닫고 나면, 이제 문이 열릴 일만 남았구나 생각하는거..
제가 제작년 회사 관두고 했던 생각과 비슷해요. 진짜 그렇게 저를 다독였었답니다.

숨통이 당연히 트이지요, 당연히, 분명히. 쪼옥~

꿈꾸는섬 2011-04-01 22:47   좋아요 0 | URL
마고님 문이 닫히고 나면, 다른 문이 열리는 것이 맞군요.ㅎㅎ
고마워요.^^

따라쟁이 2011-04-0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 앞에 있는 문도 열릴는걸까요? 저는 견딜 수 있는 시간을 지난것 같은데 아직도 안열려요. 그래서 자꾸 그 앞에서 좌절하고,, 됐어. 이제 열리지 않는 문따위는 잊어버릴꺼야.. 라고 했다가 다시 열리길 기다리고.. 그러네요..

꿈꾸는섬 2011-04-06 11:13   좋아요 0 | URL
따라님 앞에 문도 분명 열릴거에요. 좀 더 열심히 두드려보세요.^^
 
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을 읽었다. <사평역>이라는 작품을 읽고 임철우 작가에게 반했던 오래전 기억을 꺼낸다. 소설 <사평역>을 먼저 읽고 나중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었다.  그때의 묘한 감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別於谷,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퍽도 애잔한 이름을 지닌 산골 역.(p.12)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시인을 꿈꾸는 역무원 정동수, 비극적 운명의 끈을 놓치 못하는 신 씨, 일제시대 위안부로 황폐해진 전순례 할머니, 스러져가는 역사 앞에 제과점을 차린 양순지. 그들의 이야기는 별어곡이라는 역 이름만큼이나 애잔하다.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구구절절한 사연에 숨 쉬기가 쉽지 않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밖에 모르던 정동수, 숨을 거두며 어머니가 그를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 사연을 듣는다. 아버지를 끝내 미워하고 증오했던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에 동수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원하지 않는 자식을 열달을 품어 낳고 그가 자라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일때마다 아버지를 미워하듯 그를 미워했다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랑받지 못한 그가 어머니를 향해 아니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가 내게 들리는 듯 했다.  

그런 그의 진실은 거짓이라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양순지. 그의 영혼때문에 자신은 끝내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는 그녀, 그녀가 별어곡으로 들어온 사연 또한 운명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용한 소도시에 제과점을 차리고, 아침마다 빵과 쿠키를 굽고, 실내엔 늘 음악이 흐르게 하고, 틈틈이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스케치북을 펴놓고 연필화를 연습해 보는생활(p.270)을 꿈꾸던 그녀가 어느날 별어곡에 제과점을 차리고 빵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 저편 어린 시절 산 속에서 만났던 정일병을 떠올리고, 정동수를 보며 그의 아들일 거라고 직감한다. 그녀가 믿는 그것이 진실일 수도 혹은 거짓일 수도 있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가 교통하고로 반신불구가 되고, 어느날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그녀 혼자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고, 실업고를 졸업하고 부진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사장의 노리개가 되고, 임신 사실을 반기기는 커녕 수술을 권하고, 이틀 뒤 부도 난 사업체를 버리고 사장은 사라지고, 막상 낳은 아이는 심장 기형으로 인큐베이터에서 숨을 거둔다.  

어떤 사람의 절절한 사연의 무게를 가늠할 수는 없다. 누가 더 힘들었고, 누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비극적 운명의 끈을 놓치 못하는 신씨의 사연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흔히 나쁜 일은 어떤 순리에 의해 찾아오는 듯, 근무해야할 시간이 아닌 시간 근무를 하게 되고, 그가 근무하던 그 시간 열차 사고로 젊은 남자가 죽게 되고, 그 남자의 장례식장을 찾은 곳에서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을 보게 된다. 그 후 별어곡으로 흘러들어온 추레한 모녀를 그가 발견하게 되고, 그때 그 남자의 아내와 딸임을 알게 되고, 평생 혼자 살겠다고 6.25 전쟁통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먼저 보내고, 홀어머니마저 세상을 버렸을때 그는 평생 가족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 그가 애 딸린 젊은 과부를 책임지기로 한다. 그는 아내에게 비밀스러워야만 했고, 절대 아내에게 알려지지 말아야할 이야기를 부둥켜 안고 숨가쁘게 살았다. 소유와 집착의 광기에 휩싸여 애지중지하던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끝내 비밀을 알게 된 아내는 자살을 하고, 딸은 그를 죽이겠다고 반드시 그녀 손으로 죽이겠다는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가슴 졸이며 살았던 그는 심장병으로 고통받는다. 그나마 그에게는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하는 사위가 있어 다행스러웠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했을 것 같다. 

치매에 걸린 70대의 할머니가 무거운 가방을 끌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해본다. 그 할머니의 사연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동네를 저벅거리며 찾아가는 별어곡역, 100원짜리 동전을 내밀고 표를 받아드는 할머니 전순례. 우리가 기억해야만하는 역사의 피해자, 가녀린 그녀, 짓밟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끝내 살아준 그녀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전순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전쟁의 피해자는 늘 어린이와 여자라고 했던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가난한 농촌의 딸, 아직 달거리도 시작하지 않은 그녀는 단돈 350원에 팔려갔다. 중국의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하얀 쌀밥을 매일 먹게 해준다는 말에 늘 배고프던 그녀도 흔들렸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남자를 받아야내야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개다. 소다. 닭이다. 고양이다'라고 자기를 동물이라고 주문을 거는 그녀, 머리채를 잡히고 두들겨 맞아 뼈가 으스러지고, 매독에 걸려 독한 주사를 맞고, 온종일 피를 쏟아내도 멈추지 않는 짐승들의 광기를 고스란히 이겨낸 그녀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흐른다. 그 험한 곳에서도 마음을 주고 받던 오빠같은 남자 하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위로가 아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위안부를 떠나 남으로 내려오는 여정에서 만난 처참한 죽음들, 일본군에 못지 않은 소련군의 횡포, 공포스러운 날들을 정말이지 어찌 보냈을까 싶다. 죽어가던 그녀를 살린 소달섭씨,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도 낳았는데 1950년 전쟁을 맞는다. 남편은 징집되고, 어린 아이와 피난길에 나선 그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그녀의 젖은 마르고, 아이의 몸도 차갑게 식었다. 이런 상황에 온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지옥같은 삶을 살게 된 그녀의 삶을 뭐라고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간신히 찾아간 고향, 가족들은 빨치산이 된 장남때문에 몰살당하고, 그나마 남은 피붙이 조카를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전순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내 가슴 한켠이 휑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다. 

   
 

  "가만, 저게 누구지?"
  저만치 노파 바로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 첫눈에도 옷차림이 무척 희한하다. 무릎 높이의 검정 치마에 샛노란 한복 저고리. 요즘도 저런 옷이 남아 있었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필시 앳된 소녀인 성싶다. 생뚱맞은 단발머리에 검정 고무신, 게다가 놀랍게도 소녀는 양말도 신지 않은 맨살 종아리 그대로다. 세상에, 이런 지독한 추위에 맨발이라니! 누굴까? 저 이상한 여자애가 언제 불쑥 나타났을까?
  동수는 홀린 듯이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소녀는 노파의 바로 두어 걸음 앞에서 춤을 추듯 깡충깡충 뛰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노파와의 거리는 여전히 그대로다. 샛노란 저고리 소매와 옷고름이 팔랑거린다. 한겨울 눈밭 위, 소녀의 모습은 난데없는 한 마리 노랑나비처럼 화사하다. 그 사이 소녀와 노파의 뒷모습이 길모퉁이로 사라졌다. 동수는 잰걸음으로 급히 모퉁이를 돌아선다.(147쪽~148쪽)

 
   
 
임철우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웃음이 머금어진다. 결이 참 고운 분이시다. 인자하시고, 버릇없는 학생들에게도 성을 내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며 성정이 고운 분이라는 걸 언제나 느꼈다. 잔인하게 슬픈 이야기를 세밀하게 쓰셨지만 마치 한편의 시를 읽는 듯, 어느 한 문장 버릴 것이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별어곡 사람들의 슬픈 사연에 가슴이 서늘해지긴 했지만 소설 속 팔랑거리는 나비들을 생각할때면 마음 한켠에 봄이 오는 것 같았다. 연약하지만 꽃을 찾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가진 나비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동수, 신씨, 전순례 할머니, 양순지. 그들의 곁에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참으로 비정한 세상이지 뭔가. 빠른 것, 새것은 무조건 선이고, 느리고 오래된 건 모조리 악이 되고 말아. 이런 간이역들은 이 땅에서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철도 공무원 36년에 수만은 역을 돌아다녔네마, 어째선지 난 이 도토리 깍지만 한 역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네."(308쪽)  
   
 
신씨의 입을 빌려 선생님은 말한다. 참으로 비정한 세상이라고, 빠른 것, 새것은 선이고, 느리고 오래된 것은 악이 되고 마는 세상이라고 말이다. 
   
 
   '별어곡(別於谷)' 
  도토리 깍지만 한 역사 지붕에 걸린 그 낡은 간판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역 건물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합판으로 못질 된 창문들, 칠 벗겨진 벽체와 지붕, 잡초 무성한 화단.....그날 먼지 수북한 대합실 나무 의자에 나는 한참을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 그 간이역이 다시 보였다. 역사는 말쑥한 모습이었고, 대합실엔 흰옷 입은 낯선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기억해줘."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그 버려진 역이 나한테 말을 걸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그 간이역이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애틋한 이름을 지니고 태어나쓰나, 이젠 모두에게 잊힌 채 홀로 흔적 없이 스러져가고 있는......(작가의 말중)
 
   

 다시 선생님을 뵙고 싶단 생각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기억 저편 아스라히 사라져가는 것들, 이제는 사라진 간이역, 역사의 피해자 정신대 할머니들, 워낙 고령이라 죽음 가까이 다가서신 분들, 죽음만이 아니라 기억조차 혼미해진 그분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빠르게 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2-1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한편의 에세이같은 리뷰를 읽었네요.

음악 틀어놓고, 처음 올려주신 사평역이라는 시를 가만가만 되뇌어봅니다.
침묵하는 때,,,,, 목감기로 목이 계속 타들어가는 지금, 멍하니 그렇게 침묵해야 하는 때.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걸까요, 감기란 놈은 사람의 무기력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바이러스인걸까요.

산골의 기차역, 톱밥 난로, 예쁜 심상.
꿈섬님... 좋은 하루되세요.

꿈꾸는섬 2011-02-10 12:03   좋아요 0 | URL
곽재구 시인의 시와 임철우 작가의 소설에 빠져 살던 때가 문득 떠오르네요.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시인도 소설가도 어쩜 이리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는지 감탄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소설도 뒤적여봐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1-02-1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글 넘 좋아요.
님의 글이 한편의 산문시 같은걸요.
시와 소설과 산문의 멋진 조화.

아사다 지로도 생각나는 것이요~^^

꿈꾸는섬 2011-02-11 20:37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의 칭찬에 부끄러워하고 있어요.ㅎㅎ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읽어보질 못했어요. 영화 철도원 원작자라고만 알고 있지요. 광범위하 지식의 소유자 나무꾼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사다 지로의 소설도 언젠가 찾아 읽어야겠어요.^^

아이리시스 2011-02-11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 이 책,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 하고 있는 참인데,
오늘 KTX가 탈선했어요, 흑흑.
낭만기차가 너무 빨리빨리 달리려고만 해서 천천히 가라는 메시지인지 원,,
인명피해 없는 게 다행이예요, 그래도 손해야 이쪽저쪽 이만저만이 아니지만요.

시 너무 좋아요. 저도 <사평역에서> 참 좋아하는데..^^

꿈꾸는섬 2011-02-11 20:35   좋아요 0 | URL
너무 좋아 점 찍어둔 책이었죠. 사실 임철우 작가님을 흠모한답니다.
아이리시스님 서재에서 리뷰보고 역시 너무 좋다고 생각했었어요. 땡스투도 제가 보냈는데 ㅎㅎ

너무 빠른 것에 익숙한 우리들이에요. 조금 천천히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아요.

소설 <사평역>이 <사평역에서>를 읽고 너무 좋아 쓰신거래요. 근데, 정말 좋죠. 시골 간이역의 정겨운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하잖아요. 시도 좋고, 소설도 정말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1-02-11 21:4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땡쓰, 미투. 아하하.
저는 아직도 가끔 땡쓰투 적립금 보면 너무 신기해요. 감사할 따름이구요.

그럼 꿈섬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사평역>에서를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저는 본 게 이것 뿐이라서 꿈섬님이 예전부터 좋다고 하신 거 관심 있었어요.
예전에 제 리뷰 읽어주셨잖아요.^^

꿈꾸는섬 2011-02-11 23:00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리뷰 참 잘 쓰신단 생각 종종해요.
20대 청춘이라기엔 생각도 넓고 깊은 게 느껴지구요.
<사평역>, 아직 안 읽으셨다면 꼭 읽어보시길, 너무 좋아요.^^
지금도 아이리시스님 리뷰 열심히 본답니다. 댓글을 안 달때가 많아서 그렇지요.ㅎㅎ 댓글을 열심히 달도록 노력할게요.^^

아이리시스 2011-02-12 19:14   좋아요 0 | URL
넵. <사평역>에서 찾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