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문학이 가능한가. 대량 학살을 예술화하는 것은 정당한가. 문학 연구는 역사와 이데올로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수용소 문제를 두고 다시금 서구에서 역사적, 미학적, 문학적 논쟁들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 인류를 충격에 빠뜨린 유대인 학살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미학적 형식화를 시도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사실 차원으로 보존하려는 기존의 입장이 그 어느 때보다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예술은 존재한다고 보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다방면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유대인 학살 문제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듯한 문제로 보이지만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예술 전반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와도 멀지 않은 문제임을 인식시키는 것도 이 책의 목적이다.제1장 "글쓰기를 통한 역사에의 질문"에서 저자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쓸 수 있을까를 묻는다. 바로 여기에서 생존자들이 들려주는 '체험담'의 고전적 문제와, 전례 없는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이 대두된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이 대학살이라는 소재를 결코 다루어본 적이 없었던 까닭에, 아우슈비츠는 인간, 그리고 역사를 재현함에 있어 유례없는 단절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쇼아(Shoah,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말)는 예술 형식에 대해서 매우 본질적인 의혹을 제기하고, 과거 역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예술계의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제2장에서는 수용소 문학의 연구 현황과,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엘리 위젤, 프리모 레비, 로맹 가리, 솔제니친 등, '수용소의 증인들'이라 할 만한 작가와 수용소를 문학의 허구적 소재로 다루는 작가들을 대별하여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수용소에 대한 문학적 해석을 둘러싼 텍스트 내외적인 문제들도 살펴보며, 결론적으로 수용소 문학에 대한 모든 관심은 전례 없는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와 어조를 찾아내고, 미래를 향한 전망을 시도하는 문학 자체의 성실한 노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영화 분석을 통해 증언을 현재화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를 심도 있게 논한다. 이 영화는 한국에도 인권사랑방 등을 통해 소개되어 여러 분야 예술인들의 호응을 끌어낸 바 있는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실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당시의 학살 현장을 증언하는 형식을 담고 있다. 현재 이 영화는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가 보여주는 미학적 상상력과는 달리, 실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감독과 유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미학적 또는 문학적 입장을 중시하는 입장에 매우 불편한 작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역사, 이데올로기, 정치와 예술 사이의 관계가 제기하는 근본적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란츠만의 시도는 두고두고 높이 평가받는다.
제4장에서는 유대인, 유대교, 유대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나치로 하여금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학살을 가능하게 한 배경과 인종주의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이해를 시도하는 까닭은 유대인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수용되고 거론되는 유대 문제에 대한 관점들을 교차 비교해봄으로써 총체적 조망이 가능해지리라 기대한다. - 엘리 위젤, 프리모 레비, 로맹 가리, 솔제니친 등, '수용소의 증인들'이라 할 만한 작가와 수용소를 문학의 허구적...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
런던·광주·카셀·브뤼셀·오스나브뤼크·잘츠부르크·파리에서
뿌리 없는 자들의 흔적을 만나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 분할과 식민지 쟁탈전 이후, 전 세계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은 채 태어나 자란 땅을 뒤로 했을까. 더욱이 그들 디아스포라들은 옮겨간 땅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다. (……) 이 글은 ‘나’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려 한 시도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가 근대 특유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대문자로 쓰면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 민족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 노예해방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중국인 노동자들(쿨리),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이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 등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한 사람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이들 디아스포라 탄생의 배경에는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대전,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등의 근대 역사가 놓여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국민국가라는 견고한 틀 안에 갇혀 이러한 역사의 총체를 사유하지 못하고 현상의 단편만을 본다면 근대의 억압적 정치체제를 강화해 계속해서 뿌리 없는 인간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어떤 종류의 지배와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소수자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진정한 모습을 보기 위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가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바라본 예술·인간·시대
서경식은 일제시대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본에 건너간 할아버지 대부터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이다. 본명을 사용하며 교토의 조선인 밀집지역에서 자라난 그는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차별과 억압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저항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력에 눈을 떴고, 저항적 민족의식을 키웠다. 하지만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에 참여하고자 염원하며 한국으로 유학을 온 그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은 ‘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 17년의 옥고를 치렀다. 서경식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던 꿈이 좌절된 그 순간부터 형들의 옥바라지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흘려보내야 했다.
그의 글이 소수자만이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진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 때문이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 과거에 자기 민족을 지배한 자의 언어를 모어로 삼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은 왜 남들과 다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불안하고 예민한 정체성을 그는 ‘디아스포라’적이라고 부른다. 그가 여행길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작품들, 사람들, 장소들은 이렇듯 불안하지만 예리한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인 윤이상,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 슈테판 츠바이크뿐 아니라 조양규, 니키 리, 데이비드 강, 시린 네샤트, 자리나 빔지 등 낯선 디아스포라들의 일화는 예술과 인간과 시대에 대한 가려진 진실들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 미국 아카데미에서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이 수입되면서부터다. 그 사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등 다양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논의가 소개되기는 했지만,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흡수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그렇게 수입된 언어들은 우리의 경험을 담아내고 성찰하기에는 너무 아카데믹했다.
하지만 서경식의 글은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시작해 결코 난해하거나 현란하지 않은 언어로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의의를 근대의 정치체제와 연관해 해명한다. 이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이산이나 해외입양의 문제를 근대의 억압적 정치체제와 연관해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우리 사회에서 시사점이 크다.
재일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스탈린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구소련의 고려인(카레이스키), 오늘날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코리언 아메리칸, 1960년대 당시의 서독 정부가 받아들인 이주노동자의 자손으로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수만 명의 코리언,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추진해온 국제 입양의 결과 현재 20만 명이 넘는 코리언 입양자들. 이 전부를 합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수는 대략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코리언 디아스포라들을 ‘우리’라는 틀 바깥으로 밀어내며 이루어지는 민족의 역사는 그것이 아무 저항적인 것이라 해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를 사유한다는 것은 근대가 낳은 전 세계 디아스포라들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그러한 이해를 전제로 민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편적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계승하면서,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공허한 상호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이 글은 정치·사회·사상·문학·예술 등 종래의 장르 구분을 넘어선다. ‘디아스포라’라는 주제 자체가 종래의 사고나 담론의 틀에 고분고분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소수자의 경험과 보편적 언어 사이, 또 다양한 장르들 사이, 또 암울한 현실인식과 강렬한 희망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욕망에 기대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인 윤이상,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 슈테판 츠바이크뿐 아니라 조양규, 니키 리, 데이비드 강,...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1990년대의 일본 사회를 회고할 때 이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까?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가 증인으로 출현한 이 시대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라는 마이너스의 역사를 청산하고 동아시아의 각 민족과 진정한 화해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일본에 있어 '증언의 시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동시에 '반동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도록 일본 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 배타적인 국가주의의 흐름이 지금처럼 노골화 되지 않았고, 반동적인 강한 상황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신 가이드라인 관련법(1999)은 매우 큰 전환점이었고, 미국의 9.11 사건이 있은 직후 곧 만들어진 '테러대책특별조치법'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현재 악화 일로에 있다. '괴선박' 격침사건에 대해 거의 어처구니없게 현실로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현실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일본 자본주의가 '번영'을 구가한 1980년대, 일본에서는 무르익은 소비 문화 속에서 현실 긍정 기분이 만연하였고, 사회적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낡아빠진 것이며 촌스럽고 볼품없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안락한 생활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쾌하고 '시끄러운' 것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일본 사회에 대한 서로 바라본 관점이 다른 두 사람의 대담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고, 이것이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어떻게 부추기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 서경식씨가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에게 이끌렸던 이유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으나, 그 “참담한 기억의 망각”에...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문학에 반영된 망각을 조명하고 그 의미를 문화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책. 저자 하랄트 바인리히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망각이라는 현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 책에 따르면, 문명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망각의 대가였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역사에 반영된 ‘망각’에 관한 방대한 문화사
“그 일은 깨끗이 잊어버려” “그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거 잊어버리지 마”, 우리가 평상시에 자주 주고받는 말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망각과 일상적으로 마주치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망각이 삶에 얼마나 큰 힘을 미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망각론이란 있을 수 없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자극을 받아 이 책을 쓰기 시작한 바인리히는 기억술, 기억론이 있다면 망각론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특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망각이라는 현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에 주목한다. 호메로스, 단테, 괴테, 프루스트 등은 문학작품에서 망각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플라톤, 니체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반영된 망각은 어떤 의미로 읽을 수 있을까? 문명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인물들이 전하는, 망각에 얽힌 일화와 망각의 기술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책에서는 망각을 다루는 기술은 물론, 그에 대한 비판의 문제를 문학작품과 역사 속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논의함으로써, 망각의 강 레테에 관한 총체적인 문화적 지형도를 완성시켰다.
국내에는 최초로 소개되는 저자 하랄트 바인리히는 오늘날 독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명망 높은 인문학자로 독문학, 불문학, 언어학뿐만 아니라 학제간 연구,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연구의 깊이와 관심의 폭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 해결할 수 없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화학적 주제를 폭넓은 시각으로 아우르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책은 1997년 독일에서 출간되었을 당시부터 크게 주목받았으며, 이미 미국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헝가리 등에서도 번역을 서두르고 있다.
왜 망각인가?
21세기 정보홍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각종 매체에서 시시각각 쏟아내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도서관이나 컴퓨터를 통한 기억?저장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정보를 섭렵하고 기억해야 하는가. 여기서 바인리히는 “이성에 근거한 정보 거부 능력”을 갖춘 ‘망각의 기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훌륭한 기억력이라기보다는 정당한 망각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망각의 대가들과 그들의 문학작품이나 철학사상 혹은 삶 자체에서 발견해낸 망각의 사례들은 흥미로움과 성찰의 계기를 동시에 제공할 것이다. - 망각과 벌이는 투쟁 -프리모 레비
탄광 속 카나리아의 노래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으로 잘 알려진 재일조선지식인 서경식이 9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시론·시평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기존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글들이 모두 예술비평, 기행문, 성장기 등 에세이로 분류될 수 있는 글들이었던 데 반해 이번에 소개되는 글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재일조선인의 역사, 민족주의와 국민주의, 일본 우경화 문제 등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정리한 글들이다. 지난 10년 동안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정치적·역사적·철학적 사유와 성찰의 궤적을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1부는 본격적인 시론과 시평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의 정치적 관점·윤리적 감수성의 뿌리를 보여주는 짤막하고 강렬한 에세이들을 모았다. 2부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과 역사,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다루는 글들로 구성된다. 이는 일본 우경화 문제, 근대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3부는 국민국가·근대 정치의 폭력에 희생당하거나 그에 맞서 싸우다 간 사람들에 대한 추도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탄광 속 카나리아’와도 같은 절실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근대 국민국가 너머의 진정한 ‘조국’을 노래한다. 저자에게 조국이란 국경이나 혈통, 문화에 의해 특정한 집단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별과 지배를 함께 극복해낸 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냉전체제에 희생된 채 오늘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경험과 사유를 일치시키려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몸부림
저자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이다. 본명을 사용하며 교토의 조선인 밀집 지역에서 자라난 그는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그의 형제들은 저항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식민주의의 폭력에 눈을 떴고, 저항적 민족의식을 키웠다. 60년대 말 와세다 대학의 프랑스문학과에 입학해서도 정통 문학보다는 폴 니장이나 프란츠 파농과 같은 반제국주의 사상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것으로 조국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를 염원하며 한국으로 유학 온 그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은 ‘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 17년의 옥고를 치렀다. 서경식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던 꿈이 좌절된 그 순간부터 형들의 옥바라지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오랜 세월을 방황해야 했다.
그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포스트 식민주의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였다. 사이드는 지식을 전문화하고 상품화하는 학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에 맞서 건강한 지성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이드의 말을 거울삼아, 서경식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는 글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의 활동은 단순히 저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의 강의, 대중 강연, 대담, NGO 활동 등으로 폭넓게 이어져왔다.
재일 지식인 중에서도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한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에세이스트로서 그가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들은 모두 재일조선인들의 질곡에 찬 역사와 불가분의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식민지배, 고향상실과 이산, 민족분단, 차별과 소외 등 근대 역사를 관통해 이들에게 가해진 고난의 경험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고민은 항상 삶과 밀착해 있고 또 그의 분노와 고통과 슬픔은 더 날카로운 역사적 인식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에, 그의 글은 전문적 용어를 남용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의 사유는 결코 난해한 추상적 논리의 미로에서 헤매지 않고, 거꾸로 그의 슬픔은 결코 개인적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다소 낯선 소수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의 글이 많은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기도 하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사라져가는 시대, 역사적 책임과 소명을 망각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려는 다수자들이 지식의 영역을 장악해버린 시대에, 서경식이라는 이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사유와 성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수자들의 시선이 놓칠 수밖에 없는 맹점들을 추방당한 자의 눈은 지극히 예리하게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 그 역사와 정체성
저자의 정의를 따르자면 재일조선인이란,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결과, 구(舊)식민종주국인 일본의 영역에 남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들”이다. 스스로 선택한 이민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바로 자기 민족을 억압하고 지배했던 구종주국에 살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요건이 중요하다. 저자가 굳이 ‘조선인’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이유는 “부모님이 그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셨기 때문이고 또 일본인들이 그 말을 가장 차별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합’과 그후 계속된 가혹한 식민지배 정책,1945년의 8·15해방,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3년 이후 한반도의 분단체제,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이어진 ‘북조선 귀국운동’,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협정과 협정반대운동, 1980년대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외국인등록증 안의) 지문날인 반대운동, 1980년대 중반 일본이 유엔난민조약을 비준하면서 개정된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등의 상황과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이들 재일조선인들은 제멋대로 국적을 부여하기도 하고 박탈하기도 했던 일본이라는 국가의 횡포에 농락당했을 뿐 아니라 그와 공모해 식민지배의 책임을 모호하게 처리한 한국 정권들에 의해서도 고통받았다. 가령 1970년대에는 모국으로 유학을 온 많은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민주화투쟁이나 통일운동에 관여했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저자의 형들인 서준식과 서승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저자가 재일조선인이 일본의 것이든 조국의 것이든 모든 국가주의의 폭력에 대해 가장 예민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단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2부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새로운 민족관을 찾아서」, 「반난민의 위치에서 보이는 것들」 참조)
재일동포들 중 가장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조선인들조차도 아직까지 일본으로 ‘귀국’하는 데 일본당국의 재입국허가가 필요하다. 이때까지 한번도 선거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들은 국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민이 아니라 차라리 난민이다. 이들이 불만을 제기하면 일본 사회에서는 ‘싫으면 나가라’고 대꾸하고 조국인 한국에서는 이들에게 ‘외국분인데도 우리말을 잘하시네요’라고 칭찬한다. 처음으로 조국에서 생활하게 되어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한국에서는, 주민등록번호가 없고 호적등본을 뗄 수 없다는 이유로 신용카드나 핸드폰을 만들 수도 없고 일본에서 부친 짐조차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얼마 전 혼혈 출신 수퍼볼 스타 하인즈 워드가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을 찾아 온 사회가 떠들썩했다. 국회의원들까지 여야가 힘을 합해 ‘혼혈인차별방지법’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워드에게는 ‘서울 명예시민증’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인종차별과 순혈주의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이 나라가 추방한 모든 난민들, 반난민들을 다시 국민으로 시민으로 편입시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오히려 이들 난민들의 존재양태 자체를 이해하고 긍정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렇듯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을 이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너무도 부족하다. 가령 ‘이진우’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1959년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강간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한 재일조선인이다. 조선인부락의 허름한 판잣집 출신으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던 이 청년은 별다른 물증과 증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절도 경력 2회(자전거를 팔아 책을 샀다고 한다), 여섯 군데 도서관에서 수십 권의 책을 훔친 전과 경력 때문에 유죄를 확정받았다. 또 정신감정 등의 조사에서 유난히 높은 지능지수가 나와 책임능력에 결함이 없다며 정상 참작도 되지 않았다. 체격이 좋았던 조건도 성인 기준의 엄격한 형 집행을 하는 빌미가 되었다. 몇 차례 졸속 심리를 거쳐 사형이 확정된 후에는 이례적인 속도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진우라는 이 이름은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 식민주의가 해방 이후의 일본에서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이자 표상이다.(2부 「괴물의 그림자」 참조)
끝나지 않은 식민주의, 일본 사회의 우경화 비판
최근 일본이 테러 예방을 빌미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의 지문 채취 및 사진 촬영을 의무화하기로 해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지난 10년간 일본 사회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이런 우려할 만한 상황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의 우경화는 예상을뛰어넘어 진전되었다. 1990년대의 일본은 전 ‘위안부’를 비롯한 아시아의 전쟁피해자들과 대면했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이를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민족들과의 진정한 화해로 접어들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1996년 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된 후 일본은 교육기본법을 개정해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헌법 제9조를 개정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변모하고 있다.
이 위험한 움직임에 대해서, 일본사회의 아카데미즘, 매스미디어, 시민운동 등은 이렇다 할 제동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대응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우경화의 견제 세력으로 일정한 기능을 담당했던 시민파 자유주의 세력은 내셔널리즘적 정서, 자기중심주의, 냉소주의의 경향이 강해졌다. 그 배경에는 냉전구조가 붕괴되고 시장경제의 전지구화가 진행됨으로써 그들 다수가 이념의 좌표축을 상실해 버렸다고 하는 현실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한편으로 확실히 최근 들어 재일동포들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의 기제들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고, 재일동포들 중에서도 일본 귀화자가 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다문화 공생론’(혈통에 얽매이지 않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자는 논의)이나 ‘시민사회적 재일론’(일본인이나 재일동포나 모두 시민사회의 일원이라는 입장에서 공생을 호소하는 입장)이라는 논의가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대두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무시하고 생활감각으로부터 떨어진 ‘관념적인 조국지향’이 재일조선인 사회의 미래상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일본 사회와의 공생을 방해해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는 재일조선인 해방의 문제가 다른 이문화 집단 사이의 ‘공생’의 문제이기 이전에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문제임을 명확히 한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치인들이 전 위안부들의 소송에 대해 ‘돈 때문이다’, ‘나가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일본 학생들은 식민지시기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잃어버린 채 ‘더이상 조선인, 중국인들에게 사과하는 건 넌덜머리가 난다’고 말한다. 또 조선인들에 대한 직접적 차별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무섭다’, ‘감정적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일본의 과거를 추궁하는 것은 사실 돈이 목적이다’ 등 새로운 형태의 편견이 자라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아직 식민주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진정한 ‘공생’이란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부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희망에 대하여」, 「역사와 시」, 2부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저울질하지 말라」참조)
민족주의·국민주의에 대한 동시대 담론들을 넘어서
저자는 1990년대 일본 사회에서 동시에 나타난 두 가지 경향을 주목한다. 한편으로 ‘국가’·‘국민’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려는 전형적 내셔널리즘이 복권되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상상된 것,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국가주의·국민주의 비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원칙적으로는 ‘국가’·‘국민’의 자명성을 해체하려는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이런 논의가 갖는 문제점은 그것이 다음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전혀 고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국가, 국민의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잘못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편적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계승하면서,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넘어서야 한다는 방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공허한 상호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아스포라들
『디아스포라 기행』에 이어 이 책에서도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삶과 죽음이 기억되고 애도된다. 특히 이 책의 3부는 윤이상, 프리모 레비, 펠릭스 누스바움, 파울 첼란, 카임 수틴,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과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에대한 추도로 구성되어 있다. 또 이 책의 1부 「방황하는 노파」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난민성을 살려 세상을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즐거운 상상과 함께 펼쳐지기도 한다.
그가 규정하는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정착할 땅을 잃고 방황하는 유대인을 의미하지 않고, 또 모든 이산 민족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가 보장하는 안락함, 그것이 아무리 기만적이고 허황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약속에서 배제된 모든 자들이 디아스포라라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허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내부의 추방당한 자들이야말로 디아스포라다.
그런 점에서 그가 우크라이나의 봄즈(노숙자들)를 찍은 미하일로프의 사진에서, 또 총살당하기 직전 시신이 가득히 쌓인 구덩이 위에서 옷이 벗겨진 채 사진 찍힌 유대인 일가의 모습에서 디아스포라의 원형을 보는 것은 우연이나 오류가 아니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그려 보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온몸이 불타는 듯한 수치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렬한 수치의 감각이 바로 소수자, 추방당한 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윤리적 감수성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 삶과 죽음이 기억되고 애도된다. 특히 이 책의 3부는 윤이상, 프리모 레비, 펠릭스 누스바움, 파울 첼란, 카임 수틴,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과...
『해바라기』는 저자 시몬 비젠탈이 자신이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사건을 서술하며 책의 뒷부분에서 독자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하며 묻는 회고록이다. 1976년에 출간되었으며, 토론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널리 교재로 사용되었다.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나치스 친위대원을 '용서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하는 저자의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은 다양했다.
이 책은 원작 『해바라기』와 비젠탈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엮은 것이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1부는 1997년에 개정 출판된 원작의 번역본이 수록되어 있다. 2부에서는 저자의 질문에 대해 달라이 라마를 비롯, 전세계 각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저명인사들의 답변을 싣고 있다.
남민전 사건으로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홍세화,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윤미향, 광주민중항쟁 당시 한 쪽 눈을 잃고 지금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김태헌 등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의 비극 속에서 고통 받았거나, 고통의 연장선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함께 다루고 있다.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에 따른 전 세계 각계 저명인사들의 답변은, 지은이가 던지는 질문이 단지 과거사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0년 전 저자가 던진 화두는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해바라기>의 출간 의의
광복 60주년의 화두 ‘용서’와 ‘화해’를 담아낸 책!
정부는 2005년 2월 2일, 총리실 산하에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범국민 축제분위기 조성과 국민 대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50여 가지 국제교류 및 문화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만든 위원회다.
1995년의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이 ‘역사 바로세우기’였다면, 60주년 기념사업은 미래에 초점을 둔 것으로, 지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 속에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용서와 화해’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명확히 한 조치다.
이 책 <해바라기>는 바로 이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삼아, 역사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에 대해 우리들에게 ‘용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역사 속 사건에 대한 현재 우리의 태도를 되새겨 보도록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2.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속 사실들에 대해 우리의 자세를 묻는 책!
<해바라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던 지은이(유대인)가 겪었던 경험(SS대원이 자기에게 용서를 구한 일)을 적고 있다. 또 2부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비롯, 전세계 각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저명인사들에게 지은이의 경험(1부)을 보여주면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물어, 그들이 답한 내용을 싣고 있다.
책에는 나치의 폭력에 희생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던 일은 물론이려니와, 60~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희생, 그리고 가깝게는 지금 드라마로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는 5공화국의 탄생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종족말살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유대인들 못지않은 큰 희생을 강요당했음에도 우리는 아직 그 어느 가해자로부터도 정직한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사과는커녕 일본의 경우 오히려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침략과 침탈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해바라기>는 정부가 발전적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광복 60주년의 화두로 내세운 ‘용서’와 ‘화해’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홍세화’ 등 우리 역사의 피해자들이 직접 의견을 피력한 책!
<해바라기>는 미국을 비롯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모두 조금씩 다른 것이 특징이다. 책을 펴내면서 각 나라의 유명 인사들로부터 새로운 글(용서와 화해에 대한 의견)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치의 탄압으로 인한 유대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 보스니아 인종 학살 사건 등에 대한 유명 인사들의 ‘용서’에 대한 견해를 싣고 있다.
국내 판에서는 남민전 사건으로 오랫동안 프랑스 망명생활을 했던 홍세화,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사무총장, 광주민중항쟁 당시 총에 맞아 한쪽 눈을 잃고 지금도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김태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 등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고난을 겪었거나, 지금도 고난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은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 그들의 현재의 생각을 함께 담아냈다.
직,간접적인 피해를 당한 이들이 ‘우리 역사 속 가해자들을 용서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피력한 각자의 생각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원천적인 ‘용서’와 ‘화해’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4. 미국에서 30여 년간 논술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책!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에 따른 전 세계 각계 저명인사들의 답변은, 지은이가 던지는 질문이 단지 과거사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는 이 책은 정의와 동정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난 76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논술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까지 토론 수업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해바라기>는 미국에서 97년에 개정출판된 것을 번역본으로 삼았다.
5. <해바라기>의 내용
■ 1부의 내용
제2차 세계대전 중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어느 날 나치 군인들이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이동병원으로 강제노동을 나가는 도중 나치 군인 묘지 위에 한 그루씩 피어난 해바라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밝은 해바라기 꽃 위를 옮겨 다니는 나비는 무덤 속에 있는 나치 군인들에게 세상의 소식을 전해 주는 전령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막한 자신의 무덤 위에는 해바라기도 없고, 나비도 날아들지 않아 세상과 단절될 것이라며 죽은 군인들을 부러워하는 지은이는 언젠가 다시 한 번 해바라기를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해바라기는 지은이의 마음속에 이미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동병원에 도착한 비젠탈은 한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죽어가는 어느 SS(나치스 친위대)대원의 병상 앞에 서게 된다. 젊은 SS대원은 난생 처음 보는 유대인에게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참회한다. 부상을 당해 하루하루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범한 그 끔찍한 범죄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 털어놓음으로써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용서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를 동정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지은이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지은이의 마음속에서는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한 것일까?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비젠탈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자기 마음속 질문, 즉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며 우리에게 질문을 넘긴다.
■ 2부의 내용
<해바라기>의 2부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계 저명인사들이 비젠탈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는 달라이 라마, 해럴드 S. 커슈너 등 세계적인 종교인, 고도산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이른바 신좌파에 지대한 영향력을 준 허버트 마르쿠제 등 저명한 철학자들의 의견이 실려 있다.
또 영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인공인 디트 프란,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19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해리 우 등,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캄보디아 등지에서 벌어진 또 다른 대학살의 생존자들의 ‘용서’에 대한 의견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홍세화, 김태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 등 우리 시대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피력한 우리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함께 실었다. - 프리모 레비(Priomo Levi) [작가, 이탈리아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후 500여 년 간 인류가 축적해온 근대적 지식의 발견의 순간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책. 익히 들어 익숙한 뉴튼, 갈릴레이, 아인슈타인, 퀴리 부부의 연구기록 뿐 아니라 리처드 파인만, 칼 세이건 등 총 102개 인간 근원의 지식 발견의 순간들이 담겼다. 천재 과학자들이 그네들의 지식 발견의 첫 순간을 직접 기록한, 말 그대로 ‘원전(原典)’ 모음집이다. 이미 알려진 세상의 지식들이 어떤 동기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결과로 이어져 왔는지, 그 최초 발견자의 직접 기록을 통해 왜곡 없이 독자들에게 전달해준다.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향해 때로는 정신나간 얼간이로 치부당하면서도 목표를 향해 끝까지 나간 이들의 연구는 르네상스 이후 세상을 뒤바꿔버린 것들이다. 개인적 생활사 속에서 라듐의 발견 순간을 풀어간 퀴리부인 이야기, 문명의 우열론을 가리며 진화를 설명해가는 다윈의 기록, 도킨스의 유전자 에세이, 소금 한 알갱이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논하는 칼 세이건의 기록 등 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를 책 한 권을 통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일반 독자들도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문헌을 골라 과학을 우리 바로 옆에 끌어앉혔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의 지성사에서 건져 올린 102개의 황금 원전들
세상에는 ‘지식’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지는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한다. 살아가면서 당연하다고 일컬어지는 상식도 있지만,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지식들도 무한히 널려있다. 전깃불로 세상이 밝아지고, 작은 물질을 크게 확대해서 보고,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지구와 태양을 벗어나 더 멀리 무엇이 있는지도 알아내고야 만 세상의 모든 지식들!
그러나 이렇게 상식화된 지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파편화되거나 결과화된 지식만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무슨 원리로, 어떤 과정들을 거쳐 이 당연한 지식이 발견되었는지는 대충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지만, ‘이것은 요렇게 된다’는 결과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지식화된 사람이라 생각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A의 원리와 B의 원리를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만 C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있음에도, 많은 이들은 A와 B와 C를 각기 상관이 없는 지식들로 인식하고 만다. 제각기 조각나버린 파편화된 지식의 범람 속에서 진정한 ‘앎의 희열’을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무려 820페이지에 달하는 지식교양서 『지식의 원전』이 출간되었다. 책 표지에 제목과 함께 씌어져 있는 ‘다 빈치에서 파인만까지’라는 수식어처럼, 르네상스 이후 지금까지 500여 년간의 지식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초의 原기록’들을 한데 모으고, 이를 옥스퍼드대 영문과 존 캐리 교수가 해설을 붙여놓은 책이다.
육중한 책이라 하더라도 한 권의 도서 안에서 여러 지식을 근본부터 설명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파편화된, 혹은 결과만을 들추어내는 위의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해소해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이 책의 메인 컨셉이자 장점인, 지식 발견의 주체자들이 직접 쓴 최초의 원전 기록을 그대로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점이다. 후대 과학자들이 대신 설명하고 있지도 않고, 과학저술가들의 재해석도 전혀 끼어들 수가 없다. 최초 발견자들의 원 기록들은 그 원리를 궁금해하던 애초의 상황에서부터 중간 시행착오 과정, 그때마다의 정신적 단상, 그리고 마침내 발견의 순간을 이룬 희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담담히 풀어가는 명석한 이론 설명을 포함해, 독자들에게 최대한의 정확성을 발휘해 지식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너무나 광범위한 단어에 의문이 들 것이다. 물론 이 책 속에 실린 각 원전들의 기록자, 혹은 각 원전이 담고 있는 내용은 거의 지식 중에서도 ‘과학 지식’이 기본 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이 어찌 ‘자연과학’이라는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곧 인류 사회와 연계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육중한 책 속에는 과학을 중심으로 삼되, 기술의 발명과 인류 미래 제시, 과학자가 지닌 휴머니즘 세계관, ‘생물’ 범주가 아닌 생명체에 대한 단상에 이르기까지 과학을 뛰어넘는 다양한 각도의 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파편화된 지식, 결과만을 논하는 지식은 가라
인간의 신체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내는 다 빈치의 간단한 기록에서부터 이 책의 1장은 시작되어, 지나친 문명 발달로 인해 인류가 위협받는 현 세태를 개탄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기고문을 102장으로 하여 책은 끝마치게 된다. 500년이란 시공간을 두루 거치는 동안 세상을 놀래키고 발견의 주인공이었던 한 학자의 마음을 울렸던 102개의 지식 이야기, 곧 102개의 원전 기록을 한 권의 책에 담아, 과연 독자들은 무엇을 얻고 어떤 의미를 남겨둘 수 있을까.
태산 같이 쌓인 500여 년간의 지성사 원전을 읽으며 그 중 추리고 또 추려 102개의 꼭지를 엮게 된, 옥스포드대 영문학 교수인 이 책의 편저자는 그 의의에 대해서 말한다.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쉽게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기 바란다’는 간단한 이유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지식교양서들이 모두 이 단순한 목표를 의도로 삼아 책을 내고 있지만, 필자 한 사람의 주장과 정리 개념으로써 씌어진 한계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책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과학자도 아닌 한 영문학자가 특별한 ‘주의’나 ‘주장’은 배제한 채 지식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최초의 발견 기록들, 그 순수한 최초의 원전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원전 속에서 몰랐던 원리들을 배워가고 이해해가는 과정을 일반 독자들이 직접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마치 중간의 강사를 거치지 않고, 최초의 발견자(학자)가 직접 독자에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편저자가 서문에서 설명하고 있듯, 그는 이곳에 소개한 원전을 고른 기본 조건으로 ‘흥미롭고 잘 씌어져 있는지’와 더불어 ‘깊이 있는 지적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들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인지’를 중요시하였다.
과학자들은 상대편의 지적능력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전문가이며, 주로 동료 전문가들과의 대화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지난 5년 간 나는 과학자들이 쓴, 겉보기에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나 글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일반 독자층이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곧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수학공식이나 골치 아픈 기술적 내용으로 가득 차버려 독자들을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서문’에 있는 글처럼 편저자는 지식 책이라는 명목으로 출판된 기존의 책들이 대중을 은근히 외면하며 전문가끼리의 담론에 머물렀다고 비판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적 수준이 높은 몇몇 소수를 위한 지식교양서가 아니라 철저히 대중교양서를 지향하고 있으며, 일부 전문가들의 향유물이 아닌 수많은 독자가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원전 기록에 의한 최초의 발견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 어느 탄소원자 이야기 - 프리모 레비
우울은 인간 역사와 함께했지만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분명 현대성의 결과다
프로작이라는 녹색 알약은 우울증을 경험한 수백만 미국인들의 삶 속에 들어와 이제 아스피린만큼이나 흔한 약이 되었다. 아티반에서 졸로프트까지 시장에 기분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약이 널린 사회. 우울증의 추적은 바로 현대인의 정신세계로의 여행이다. 현대인의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소외감은 더욱 커지고 수면 시간은 짧아지고 있다. 현대인의 점증하는 스트레스는 우울증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미국인의 3퍼센트(약 1900만 명)가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 중에서 어린이가 200만 명이 넘으며 조울증 환자는 230만을 헤아린다. 우울증은 또한 젊은 여성의 경우 두 번째, 젊은 남성의 경우 세 번째 사망 원인이다. 질병부담률로는 우울증이 심장병 다음인 2위다. 우울증은 알코올 중독에서 심장 질환에 이르는 여러 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제1의 사망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신 장애 가운데 우울증의 비율이 가장 높다. 2003년 10월 대한우울조울병학회가 서울에 거주하는 20-60세 주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5퍼센트가 경증 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사회적인 심각성은 우울증의 발병률이 특히 어린이들 사이에서 증가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우울증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는 전체 우울증 인구의 6퍼센트에 불과하며, 자신의 우울증을 인지하는 경우는 4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반면 슈퍼모델의 등장이 비현실적인 기대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한 것처럼, 즉각적인 이미지와 반응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복잡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적인 슈퍼모델처럼 자신의 정신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관리하려는 경향을 띠면서 증상이 가벼운 우울이나 격한 슬픔을 못 견디고 쉽게 프로작을 쓰기도 한다. 인간의 자의식과 우울증은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우울증 환자의 증가는 분명 현대성의 결과다. 삶의 속도, 기술 혁신이 초래한 혼돈, 소외와 고독, 전통적인 가족 구조의 붕괴, 믿음 체계의 와해가 불러오는 파국의 결과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살아간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해방의 공간을 마련한다
자신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저자 앤드류 솔로몬은 1998년 '뉴요커'에 “멜랑콜리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후 천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 솔로몬은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할 말이 많은 주제는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저술 동기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인터뷰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과학, 철학, 역사, 정치, 문화 전 분야에서 “멜랑콜리”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우울함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졌으나 결국 빠진 것은 종합이다. 그 결과 혼돈의 영역이 되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공감이며, 두 번째 목적은 질서다.” 단순한 일반화가 아닌 경험론에 기초한 질서. 솔로몬이 이 방대하고도 난해한 작업을 독자에게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려줄 수 있었던 힘은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나온다. 우울증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작업이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있다. ?한낮의 우울?은 먼저 저자 자신의 우울증에서 시작하여 타인의 유사한 우울증, 타인의 색다른 우울증, 그 다음에 전혀 다른 환경의 우울증의 순서를 따라 접근한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할 것이 없던 저자에게 우울증은 모든 논리를 거부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 그 다음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 찾아오는 차분한 절망감.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탄생한 ?한낮의 우울?이 전하는 희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고통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책은 없지만 나는 그 고통의 범위를 보임으로써 우울함으로 시달리는 이들의 해방을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나치 수용소에 대한 글을 남긴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석방의 시간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에 대해 여러 억측들이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가? 시민들은 국가의 폭력, 사회의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있는가?
법률은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제함으로써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가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길 때 사회의 정의는 무너진다.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검찰과 법원의 권력, 변호사 사무실의 높은 문턱 앞에서 헌법은 분노하고 있다. 헌법 정신의 수호자여야 할 법률가,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권과 평등의 버팀목인 법률을 팔아 특권계급이 된 판?검사, 변호사들. 검사 출신 법학자가 통렬하게 고발하는 법률 귀족들의 일그러진 초상.
<검사 출신 법학자가 용기 있게 써내려간 한국 법조계의 반헌법적 현실!>
군사독재 정권들이 머물고 간 상처 위에서, 폭력의 지배를 대체할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법(法)뿐이었다. 법을 알아야만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법은 여전히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저 멀리 ‘전문가들의 세상’에 존재하는 ‘그림의 떡’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헌법과 민주주의, 절차적 정당성 등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법을 우리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탄핵 소추 이후 넘쳐났던 방송 토론에서 자주 나오던 말이 있다. “이제는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고 좀 기다리자.”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법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놓고 시민들은 그저 생업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에는 전문가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뛰어난 존재라는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은 법률가들이다. 전문가의 탈을 쓴 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모르면 조용히 하라.”라는 한마디로 모든 비판을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전문가들의 그 한마디에 주눅 들어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시민들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이 쌓여 법에 대한 엄청난 불신의 벽을 만들어냈다. 그게 우리가 처한 오늘의 법 현실이다.
이 책은 그 벽을 허물어보려는 야심찬 시도이다. 이 책은 먼저 정의(正義)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동안 승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까닭에 표면상 평온해 보이는 사회를 ‘법의 지배’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탈을 쓴 폭력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란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에 시민이 당당한 주체로서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국가, 법, 법률가, 인권의 문제이다. 헌법과 법률의 목적은 흔히 오해하듯 국민을 통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 권력의 괴물화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이 권력 통제라는 제 기능을 다하도록 돕는 일차적 책임은 변호사, 판사, 검사를 비롯한 법률가에게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률가들은 청지기라는 본래의 소명을 저버린 채 자기 집단과 권력자를 옹호하는 데 지식과 능력을 악용해온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법률가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왜곡된 법조 문화와 그 결과로 주인을 잃고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 시민의 기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이란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편안하지만 깊이 있는 법학 교양서>
이 책은 법은 어려운 것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 시민들을 위해 쓰여진 법학 교양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헌법 정신, 결코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기본적 인권의 문제, 피의자?피고인이 유일하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인 말하지 않을 권리, 앞으로 법률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차별받지 않을 권리인 평등권 등 일반 시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헌법과 법률의 내용들을 딱딱하고 권위적인 법률 전문가의 말이 아닌 친절한 친구의 목소리로 흥미롭고도 구체적으로 전달해준다. -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의 말처럼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 적어서 큰 위협이 되지 못하며, 정말로 위험한 존재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관료들"인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발견과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콧의 이론을 통해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인 승화를 소개하며, "남성들이 만든 정치적·사회적 구조가 소녀의 승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손상시킨다"는 저명한 페미니즘 정신분석가 크리스티앙 올리비에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여성에게는 승화의 능력이 없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비판한다. 아울러 인류는 승화라는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수많은 문화와 문명을 창조해 왔으며,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된 승화가 대학살 같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 사이코 시리즈 4차분 발간
사이코 시리즈는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엄밀하고도 간략한 이론적 설명이면서,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심리 상태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과 어린 시절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처리하는 방식이 성인이 되었을 때 특정한 증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특정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단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감정이 수행하는 기능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다양한 감정적 경험들을 견디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사유, 정서, 행동은 인간의 본능과 유아기의 감정적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무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무의식의 정체와 그 작용을 밝혀내려는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본능이 발현되는 방식, 인간의 감정적 경험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러한 본능과 경험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프로이트나 클라인 같은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각각의 저자들이 상담치료 과정에서 마주친 다양한 사례,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예술 작품과 영화까지 사례에 포함시켜 무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사이코 시리즈 4차분에서는 승화, 자유 연상, 거세 콤플렉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의 흐름을 지배하는 유년기의 정동과 감정에 대해 다룬다. 『승화 Sublimation』에서는 인간의 성적인 본능을 예술적인 창조 행위의 동력으로 치환하여 충족하는 "승화"의 작용 기제와 그것이 인간의 창조성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며, 『자유 연상 Free Association』에서는 환자의 증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정신병적 징후의 근원을 발견하는 정신분석가와 환자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살핀다. 『거세 Castration』에서는 유명 운동선수와 영화, 미술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의 실체와 그 영향을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감정 Affect and Emotion』에서는 유년기의 감정 상태를 조절하는 능력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피며,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부모의 역할을 강조한다. -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은, 그것이 대량 학살이든 모성이든 우정이든, 우리의 인간성을 손상시킨다. 프리모 레비의 시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의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135라는 구절이 생각 없는 독자들에게...
타자를 통해 자아에 이르는 길
‘타자성’의 문제는 현대 서구 철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 스캔들 중의 하나이다. 근대 서구 사상사와 주류 문화를 이끌어왔던 합리적 ‘이성’의 신화, 즉 타자를 자기 안으로 흡수시키고 동화시켜온 동일자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늘 이성의 그늘로 황급히 모습을 감추어야 했던 ‘타자’가 해명해 내야 할 수수께끼로 당대 사상사의 무대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커니는 타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정상성(normality)을 구성하고 그 범주 안에 ‘나’와 ‘우리’를 포함시키기 위해 어떻게 ‘그들’, 즉 타자를 만들어내고 배제시켜왔는가를 추적해 들어감은 물론, 현대 주요 사상가들의 타자성에 대한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서구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신화 및 종교, 인류학, 문학, 철학의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비나스 · 데리다 · 리오타르 · 크리스테바 · 지젝 · 하이데거 등이 수행한 타자성 연구의 성과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들 사상가들의 선배 격인 칸트와 프로이트도 등장한다. 커니는 타자성 연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이들 독창적이며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매우 능숙하고 노련하게 다룬다. 현대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와, 우리로 하여금 타자가 재현되는 방식을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몸소 체험하게 해줬다고 할 만한 미국 뉴욕에서의 9 · 11 테러 사건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벗어나지 못함은 물론이다.
서사적 이해의 필요성
저자는 우리가 제대로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사, 즉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자로서의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존재이자 선과 악, 신성과 악마성의 경계에 선 자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계에 서 있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구성하고 설명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저자는 특히 타자성의 주요 키워드로 이방인 · 신 · 괴물을 드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 인간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모습들의 투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방인 · 신 · 괴물의 모습을 서사적 이해의 방식으로 접근하여 그 이면에 감추어져온 타자성의 ‘진실’을 해석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타자성의 수수께끼를 풀어 바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사적 이해는 서로 적대적인 양극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사닥다리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고자 저자는 고대 신화와 종교에서부터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셰익스피어의[햄릿]과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등 고대와 현대의 희생양 서사들을 망라하며 자신의 논의를 이어간다. 이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도의 길로서의 ‘판별의 해석학’
타자 혹은 타자성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크게 레비나스 등으로 대표되는 절대적 외재성과 크리스테바 등의 접근방식인 완전한 내재성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극단적인 양자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길을 통해 타자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중도의 길로 제안하는 것이 바로 판별의 해석학이다. 저자는 고대 미노타우로스에서 중세의 괴물, 그리고 포스트모던한 이방인들까지 흥미로운 예들을 통해 인간의 자아 그 자체가 자주 기괴한 요소들을 담고 있음을 논의한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는 이방인과 신, 괴물이 단지 신화나 판타지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문화의 무의식의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타자가 어떻게 깊이 반향하는지 더 잘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공포와 욕망이 외부 세계에 어떻게 명백하게 드러나는지 이해할 수 없고, 또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배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열쇠는 우리의 괴물들을 죽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괴물들이 결국 스스로와 화해하고 타인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멈추게 만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누구라도, 그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아포리즘에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괴물을 포용한다는 것이 그들을 우리의 평온한 저녁식사에 초대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환대’할 필요가 있는 괴물들도 있지만, 그 괴물들은 다른 이들의 투쟁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할 대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부해야만 하는 악은 분명 존재하며 따라서 그러한 악을 판별해 내는 것은 타자성을 다루는 모든 연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차이’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 프리모 레비(Primo Levi)*나 엘리 비젤(Elie Wiesel) 같은... 아우슈비츠의 극악무도함을 또 다시 이야기하는 의무야말로 프리모 레비의 말마따나,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