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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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봤을 때 이 여자들도 남자만 잘 만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그럴듯하게 자기 자신을 포장한 페미니스트에 지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삶을 지탱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기로 버티게 해준다.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산다는 뜻이다.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진다면 그것은 자신을 자신이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나오는 바보 세 친구. 혜완, 영선, 경혜는 단지 자신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것을 남자의 탓을 하고, 아버지 탓을 하고, 가정과 사회를 탓하는 것은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나약함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제목이 주는 허망함은 그럴듯한 포장지처럼 느껴져서 작가에게 많이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혜완은 셋 중에서 가장 그럴 듯이 똑똑해 보이지만 가장 자신감이 없는 여자다. 애써 맞서지도 못하고 비켜서서 자신 안에 숨기 바쁘다. 경혜는 속물처럼 나오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진실하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속이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선의 자살은 유치의 클라이막스였다. 만약 남편이 영선을 공주처럼 떠받들었더라면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살을 한다는 것, 자신의 삶의 가치를 남자에게 두고 남자에 의해 상실한다는 것, 이런 발상이야말로 역겨울 정도의 여성모독이다.  

여성이 세상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이 피해자이길 원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아니면 가해자가 될 것 같이 느끼는 이상한 이중성 때문이다. 누구도 모순되고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을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개척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자이기 때문에" 라는 유치한 굴레를 방탄조끼처럼 입고 있기를 원하는 한 여성이 부르짖는 평등한 세상은 요원하기만 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던 자신만의 방이라는 의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다. 여자는 자신만의 방조차 갖지 못하고, 그런 작은 공간만을 원하는 것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페미니즘으로 서구사회는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지만 우리가 나아갈 길이 서구적 페미니즘일지 그것도 의문이다. 아직도 이 정도가 페미니즘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아마존을 형성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런 방조차 갖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한 3000년쯤에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여자는, 혹은 남자는, 이런 기분 나쁜 말없는 세상 말이다.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의 방은 그런 방일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무소의 뿔도 이런 의미겠지. 우리 여성을 벗고 스스로 '나'를 위해 살아봅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숫타니파타 중의 말이다. 다음은 숫타니파타 중 일부분이다. 

동반자와 함께 있으면, 몸을 쉬거나 일어서거나 걸어가거나 여행하는데 언제나 참견하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지 말고, 무엇이든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온갖 고난을 견디며, 두려움을 갖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잘 협조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영민한 동반자를 얻게 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잘 협조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영민한 동반자를 얻지 못하면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듯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인간이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고귀한 경전이다. 비록 이 작품에서는 세 여자의 인생을 이 경전에 비유해서 이 말을 사용했지만 이 말이 비단 여성의 독립과 평등에 대한 추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경전을 읽어보면 말 한 마디 한 마디, 글귀 한 구절 한 구절 와 닿지 않는 것이 없다. 인생이란 혼자 가는 길이다. 동반자가 있건 없건 누구나 혼자 나서 혼자 살다 혼자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기대도 부질없고 원망도 부질없다. 우리는 한낱 뜬구름만 잡다 갈 뿐인 것을. 그러니 모두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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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지음 / 일신서적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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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비상하는 이야기... 고등학교 때 이 작품과 함께 <모모>와 <대지>는 내 삶의 지표였다. 조나단처럼 야망을 갖고, 모모처럼 순수함을 잃지 말고, 오란 같은 여성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은 꿈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은 꿈을 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갈매기 조나단이 실패를 하던 좌절을 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헛된 노력으로 끝난다하더라고 꿈꾸는 동안은 행복하고 인간은 그런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게는 갈매기의 꿈이 그저 꿈으로 끝이 났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에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꿈을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갈매기의 꿈>!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을 알려주는
아주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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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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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과다. 그레고르의 등에 던졌던 아버지의 사과. 그리고 굼벵이를 봐도 변신을 떠올린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깨어보니 흉측한 벌레가 되어 있었다. 굼벵이같은. 그의 소설은 장자와 같은 깨달음을 준다. 마치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가.”와 같은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삶은 어쩌면 이런 변신 같은 것일 것이다. 그렇게 잔인하고 고독하고 항상 애정에 굶주려 있다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꿈같은.

자고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환타지 소설도, SF 소설도 아니면서 인간이 벌레가 된다는 가정을 작품 속에 추구하고 있다. 그레고르가 변신한 이유는 무얼까. 중압감, 일과 가족에 대한? 사회에 대한 움추림? 아니면 그 자신이 자신을 벌레만도 못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가정은 가히 충격적인 효과를 만들었다. 그래도 벌레로서의 소외감, 따돌림, 추방은 견디기 쉬운 것일지도 모른다. 벌레니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당한다면 그게 더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면 그레고르, 카프카는 스스로 이런 변신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이 편이 낫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어느날, 나는 벌레가 되었다.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기서 말하는 벌레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관의 껍데기다. 당신은 어떤 눈으로, 어떤 가치관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가. 그것이 바로 벌레를 만들어내는 본질이 아닐까. 이 벌레는 자신이 만들어내기도 하고 주변인에 의해 만들어 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고 그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재기 때문이다. 그 판단에 부합하지 못하고 잣대에 모자라는 인간은 벌레가 되는 것이다.  

변신은 카프카의 심정과 소시민으로 살아가는데 따르는 불안을 나타내고 있다. 아마 그레고르처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벌레로 변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을 벌레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자학하기도 한다. 또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카프카가 얼마나 고뇌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마치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인간이 기계 문명에 의해 단순한 기계로 전락하는 것처럼 카프카는 산업사회가 인간을 벌레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 시각은 옳았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므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당신 스스로 물어보라. 카프카는 이것을 자신만의 현실적 환상문학으로 만들어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것이다.

인간의 불안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나타낸 작품일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끊임없이 읽혀지는 것 같다. 현재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불신, 사회의 부조리, 불안한 세상.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라면 미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레고르의 변신을 통해 사회와 가정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한 인간이 사회와 가정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소외되는지, 그레고르의 변신은 역설하면 사회와 가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을 만드는 것은 가정과 사회다. 개인은 벌레와 다르지 않다. 가정과 사회를 벗어나거나 소외되는 순간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레고르의 심정을 나는 얼마만큼이나 공감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본다. 만약 그레고르처럼 어느날 내가 벌레로 변한다면 우리 가족은 그레고르의 가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레고르의 아버지처럼 혐오감을 담아 사과를 던지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오늘 날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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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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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아버지와 함께 간 헌 책방에서 책을 몇 권 샀었다. 펄벅의 <대지>는 아버지가 읽어보라고 권하신 책이었고 내가 고른 책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을 고른 이유는 난장이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인 줄 착각했기 때문이다.  

"뫼비우스의 띠"라는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그 책을 모두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분노했을 때처럼 억울하고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광장>이 50년대 분단의 비극과 사상의 단절을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6,70년대 가난의 비극과 사랑의 단절을 그린다.

그때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노동문학이 무언지도 몰랐던 당시 이 책은 내게 노동문학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비극을 다룬 작품으로 느꼈을 뿐이다. 난장이와 그의 자식들의 결코 변하지 않는 삶. 그리고 가진 자의 횡포. 그 극명한 대비가 우리의 슬픔이었고 현실이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난.쏘.공에서의 사건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더욱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지 모르겠다.  

한국 노동문학의 대표작! 난장이 아버지와 그의 자식들의 가난한 삶, 70년대의 착취하는 고용주와 끝없이 일해도 나아지지 않고 착취당하기만 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학생시절 운동권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아가면 어떤 얼굴로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변하지 않도록 이 책을 위해 우리 사회는 절대 달라지지 않겠다고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니 인간 사회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인냥 오늘도 세상은 그들을 내몰고 있다. 우리 또한 그들이 되지 않기 위해 버둥대고 있을 뿐이고.

이 작품을 보면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고 그 길이 그 길인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살아가는 다람쥐일 뿐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느낄 뿐이다. 출세하지 못하는 사람은 밟혀도 소리내면 안 되는 것이다. 난장이가 작은 공을 쏘아 올린다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대답은 없다. 사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약자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만을 만들고 그 메아리에 상처 입는 것은 약자 자신일 뿐이다. 약자로 남아 하늘에 주먹을 휘두를 것인가, 아니면 강자로 편입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인가. 길은 둘 뿐이다. 아니면 외면하고 묵묵히 살던가.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분노는 그저 분노일 뿐이었다. 이 작품을 많은 사람이 읽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강자의 편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강자가 되고 싶어한다. 약자는 좋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전진하고 나아진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환상을 품고 살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상음 깨지고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래도 난장이는 작은 공을 쏘아 올릴 수 밖에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니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 그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언제까지 책꽂이에 꽂아 두고 기억할 수 있을지. 하지만 달나라는 여전히 멀고 그곳에 발을 디딘 자들도 행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의 사랑은 환상인 듯 하다. 요즘은 처음 이 책을 잡았을 때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고 느껴진다. 이 책은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환타지를 다룬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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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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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그루누이라는 살인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쓰고 있다. 불행한 아이 그루누이가 냄새가 없는 불길한 아이로 태어난 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의 엄마는 매독에 걸린 매춘부였고 어쩌면 그것은 엄마의 잘못에 의해 잉태된 업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해지고 그로 인해 그의 엄마는 영아 살해 죄로 처형당한다. 냄새가 없다는 것은 형벌과도 같았다.   

살인자 그루누이! 엽기적으로 25명의 어린 소녀를 살해하고 그들의 체취로 사람의 냄새가 나는 향수를 만든 향수 만드는 천재. 갓난아이의 살 냄새, 젖 냄새는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그 어떤 향기보다 좋은 것이 어린아이의 살 냄새다. 그런데 그런 좋은 냄새를 풍기지 않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엄마는 겁이 나서 아이를 버렸다. 자라면서도 그는 아무런 냄새를 맡게 하지 못했다. 자신의 냄새를 가지지 못한 사람. 그의 불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냄새란 무엇인가. 가끔 옷안으로 코를 박고 내 살 냄새를 맡아본다. 코끝을 스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난다. 땀 냄새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젓 살 냄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맡아 왔던 추억이 기억을 더듬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아무런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루누이에게 어린아이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엄마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를 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일을 되풀이 시켰다. 그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소외된 사람은 쥐스킨트의 작품을 이루는 코드다. 그루누이에게 살인은 그저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본능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루누이는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그를 조금만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면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란 남의 다른 점은 죽어도 인정을 못하는 족속들이다. 자신들과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비슷한 색깔의 피부를 갖추고 비슷한 냄새를 풍겨야 비로소 동질의 사람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살인을 해서라도 사람의 냄새를 가지고 싶은 그루누이의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향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말하고 싶은 편견의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의 코끝을 스치는 갖가지 냄새에 얼마나 현혹되는 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무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냄새가 없다는 조금 다른 상황이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지독한 편견이다. 어쩌면 편견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에는 그루누이라는 냄새 없는 인간 외에도 우리가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중세의 향수를 제조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장미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의 장미가 필요하며 어떤 기름을 사용해서 얼마의 향수원액을 추출할 수 있는 지하는 얘기는 호기심을 뛰어넘어 신기하기까지 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역량이 돋보이는 대작이다. 이 책 한 권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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