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누운 밤 창비세계문학 39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박병규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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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홀리오 꼬르따사르의 단편집이다. 아르헨티나 작가의 환상문학이라고 하니 보르헤스, 마르케스, 요사 뭐 이런 작가들을 떠올렸다. 번역되기 전부터 워낙 대단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대단한 작가를 만났다 싶다. 


추리소설을 처음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나를 끌어줬던 것이 에드 맥베인과 미야베 미유키였다면,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때의 나를 끌어줬던건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였다. 중남미 소설들을 좋아해서 번역된 작품들은 다 찾아 읽었던 것 같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워낙 다양하게 나오니 놓치고 있는 작가들도 많으리라 생각되지만, 중남미 소설에 대한 애정을 되살려주는 작품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와 꼬르따사르의 '환상문학'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전자가 '마술적'에 방점을 둔다면 환상문학은 좀 더 현실이 중심이다. 현실의 반대는 '환상'이 아니라 '비현실' 이라는 관점에서의 환상문학. 써놓고 보니 좀 이상하지만, 뒤에 해설도 잘 나와 있고, 흥미진진하다. 해설에서 옮겨보면 "꼬르따사르 작품에서 환상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점 약해지는 현실(또는 현실적인 요소)과 점점 강해지는 비현실(또는 비현실적인 요소)의 간섭 상태에서 발생한다."  


해설까지 끌어와 언급해 두는 것은 이건 '판타지'도 아니고, '마술'도 아닌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비현실'이 끼어들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리고, 독자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과는 꽤나 다른 형식이었어서 그런다. 


뭐? 뭐? 뭐? 뭐?! 이러면서 읽게 된달까;; 


작가가 여성작가인가 찾아볼만큼 문장이 섬세하다. 현대적이고, 때때로 귀엽기까지 하다. 이야기는 엄청 풍부하다. '마술적 사실주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마술적 사실주의'가 점점점점 압도당하는 신화?설화? 마술? 이라면, 꼬르따사르는 '환상특급' 과 같은 일상의 비현실.이라고 할까. 


꼬르따사르는 외교관인 아버지로 인해 벨기에에서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다. 벨기에,파리 등지의 유럽이 아르헨티나와 함께 배경으로 많이 나온다. 모두 단편이고 마지막의 '추격자'만이 중편이다. '추격자'는 조니라는 시대의 장을 넘긴 천재(?) 알토 색소포니스트와 그의 전기를 쓰고 매니저 역할도 하는 재즈 칼럼니스트 브루노의 이야기인데  조니가 천재 작가인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즈칼럼니스트인 브루노에게서도 작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며 읽었다. 뒤에 보니 '찰리 파커' 를 모델로 한 글이라고 한다. 


단 두 장의 짧은 단편을 포함해 짤막한 단편들인데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한데, 뭔가 해석의 여지가 많아 재미나다. 이런저런 설들도 있나본데, 작가는 그런거 없다.고. 하지만, '소설'이라는게 작가의 의도 포함 시대성과 독자의 경험성이 모두 포함되어 해석되는 것이 맞지 싶다. 


첫 단편인 '점거당한 집'부터 압도적이다. 홀리오 꼬르따사르가 긴가민가 한다면, 몇 장 안되는 첫 단편 '점거당한 집'을 읽어보고 재미있겠다! 싶으면 계속 읽어나가면 된다. 이런류의(?) '집' 이야기를 읽으면 자동적으로 셜리 잭슨이 떠오르니 병이다. 첫 단편까지는 재미있겠는걸 싶지만 아직 이 작가만의 특색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면, 


두번째 단편인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 부터는 ...응? 뭐라고? 하며 읽게 된다. 단어나 문장이 귀엽고 적절해서 천재과의 작가가 술술 써내리는 모습이 상상된다.


우리 두사람은 상호공존이라는 단순하고도 흡족한 계획을 세웠으므로 당신이 9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면 나는 다른집을 구해야 하고... 그러나 지금 그 일로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토끼 때문인데, 당신도 알아두는 게 좋을것 같습니다. 또다른 이유는 내가 편지 쓰기를 좋아하고, 어쩌면 지금 비가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뭔가 되게 소녀소녀한 분위기의 글이다. 중남미 작가의 환상문학이라기보다 일본 여작가의 글같은?

결말이 살짝 충격이라도 계속 읽어나가면 다음 작품은 '먼 곳의 여자'이다. 이런 작품들이 꼬르따사르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 현실에 끼어드는 비현실. 표제작인 '드러누운 밤'도 그렇고, '맞물린 공원', '키클라데스 제도의 우상' ,'어머니의 편지,'악마의 침' 등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장이다. 


'시내버스'나 '남부고속도로' 같은 작품도 재미있다. 왜 그런지,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주지 않는 불친절함,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점점 고조되는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한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승과 결만 있는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도 빨려들게 만드는 작가의 힘. 그리고 이야기의 어떤 장면을 봐도 재미있게 만드는 힘이기도 할테고. 


여기서 또 옮긴이 해설 중 한 부분을 옮긴다. 


폴 굿먼이라는 사람은 일찍이 소설이란, 가능성에서 시작하여 개연성으로 나아가고 필연성으로 마무리된다고 이야기했다. 줄거리가 전개됨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에서 '그럴듯하다'로. 마지막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독자가 설득당한다는 것이다.꼬르따사르 작품은 이와 정반대로 전개된다고 말할 수있다. 필연성-개연성-가능성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때 필연성이란 작품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가능성이란 새로운 차원의 열림이다. 


해설까지 옮겨가며 좀 길어진 리뷰이긴 한데, 한 작품도 버릴 작품없이 한번도 빠짐없이 매번 감탄하며 읽었다. 이 책만 계속 반복해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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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3-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만 계속 반복해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책이다.˝

아... 멋진 리뷰네요.

오닝 2015-04-09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번역가 최주언입니다. 환상문학에 관심 있으시다면, 제가 이번에 출간 준비중인 판타지 풍 고전 단편집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 댓글 남겨요^^
허버트 조지 웰스의 <눈먼 자들의 나라> 등 세 작품과 로드 던세이니,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까지 총 다섯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출간을 위해 텀블벅에서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www.tumblbug.com/weirdtales (프로젝트 페이지입니다^^)
 
0의 살인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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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에 센걸 기대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사건이 흘러갈갈줄이야. 하야미 교조 경위, 그와 함께하는 기시마치도 맹하고, 동생 둘은 누가 누구여도 상관없는 캐릭터. 이야기는 재미있으나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시종일관 히히덕대는 분위기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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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의 유령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10
존 발리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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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불새 2기로 나와 부활을 알렸던 '최후의 성'은 재미있다. 재미는 있으나 폭력의 수위가 상당히 세고 이야기의 전제가 친절하지만은 않아 두번째 읽을 때 더 재미있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어려웠던 면이 없지 않다면, 두번째로 나왔던 '암흑을 저지하라'  는 로마시대로 타임슬립하는 대체역사물로 타임슬립은 많지만, '대체역사' 그것도 배경이 로마!라면 내가 환장할 요소가 충분하고, 이야기 또한 재미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라면 강력추천하는 책이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로 나온 '캔자스의 유령' 은


존 발리의 단편집 '잔상'을 반으로 나눈(?) 첫번째 권이라고 한다. 나머지 반을 열렬히 기원한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어슐러 르 귄의 전집들을 읽고 있었는데, 어슐러 르 귄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특별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슐러 르 귄같은 작가 전에 존 발리 같은 작가가 있었겠구나 싶다. 


정말 재미있다. 단편 하나하나가 다 끝내준다. 나는 SF 책 번역되어 나오면 사기만 하는 라이트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나마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어슐러 르 귄과 존 스칼지, 조 홀드먼, 로버트 하인라인 정도겠다. 아, 로저 젤라즈니와 레이 브래드버리도. SF는 말그대로 과학소설이고, 뭔가 철학적이고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전 어슐러 르  귄의 글중 '이야기는 포춘쿠키가 아니다. 메세지를 찾지 마라' 는 글을 읽고 느낀바, 부러 막 메세지. 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게 애매하긴 한데, 르 귄의 단편들도 그리고 존 발리의 단편들도 순수한 이야기의 즐거움이 있다. SF 라는 장르 아래 자유로운 설정으로 굳이 SF를 읽는다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관계와 배경을 설정으로 펼쳐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캔자스의 유령'에서는 기억을 저장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직업은 '환경예술가'이다. 이 세계에서 사람은 웬만하면 죽지 않는다. 기억저장소에 기억을 저장하면, 죽더라도 그 기억을 토대로 다시 재생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주인공은 상당히 예외적으로 계속 살해당한다. 자신에게 집착하며, 모든걸 무릅쓰고 자신을 죽이려는 존재와 맞선다. 주인공의 직업인 환경예술가란 날씨와 기상변화를 주제로 대지를 배경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배경과 장치들도 재미있고, 결말까지 깔끔하다. 


두번째로 나오는 '공습' , 이 이야기는 엄청난 박력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다른 단편들도 각기 나름의 포스가 대단하다. 근데 이 이야기는 더 박력있다고 말해도 아마 이견은 없을 것 같은데.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이므로 줄거리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박력있고 스피디하게 진행되면서 펼쳐지는 결말의 임팩트가 대단하다. 


'역행하는 여름' 의 이야기도 굉장히 새롭다. 달에서 수성으로 온 누나와 동생의 이야기. 이야기마다 다르긴 하지만, 존 발리의 세계에서 우주인(?)들은 엄격한 산아제한으로 1명당 하나의 아이를 낳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여기서도 그런데, 주인공은 어떻게 누나가 있는 걸까. '수성'이 배경인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 읽는데, 이제'수성'하면,  어느 여름날. 과 같은 뜨겁고 아름다운 행성과 남매의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다. 


'블랙홀 지나가다' 는 만약 이 책의 표지를 만든다면,  이 이야기에서 따온 이미지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는 내내 영화 '그래비티'가 떠올랐다. 조지 클루니와 산드라 블록이 연인사이였다면? 산드라 블록은 그 나름으로 씩씩한 서바이버이지만, 조지 클루니의 희생이 있었다면, '블랙홀 지나가다'에서는 여자가 더 주체적. 


그러고보니 여기 나오는 단편들 모두가 여자가 주체적이고 주도적이다. 재미있어. 

마지막 단편인 '화성의 왕궁에서' 는 표류하게 된 화성탐사단 이야기. 여기서는 존 스칼지 이야기들이 많이 떠올랐다. 


현재의 SF 작가들이 영향 받고 빚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6-70년대의 SF들이라서 지금의 세련되고 유머러스한 작푸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다. 


마지막 단편을 읽고 나면 근래 들어 가장 짠한 '불새출판사'의 발간후기와 '살아남기 게임' 에 대한 숙고와 결과가 나와있다. 누구도 이 사람이 열심히 하고, 몸을 불 살랐다는 것에 대해 이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불새의 책들은 알맹이가 정말 괜찮다면, 그 외의 것들은(가격, 표지/편집디자인, 교정, 책만듦새 등)  모조리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좋은 예시이다. 삐까뻔쩍하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엄청 재미있으니깐,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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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사나 2015-03-1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 브래드버리가 바로 나오네요 sf작가였군요 ^^)

하이드 2015-03-10 20:47   좋아요 0 | URL
네, 고양이를 좋아하는 ^^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 - 가장 인상적인 세계 명작 속 요리 50
다이나 프라이드 지음, 박대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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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리죽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이 들어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오트밀을 먹으면서 리뷰

책소개를 보고 대충 기대했던 것 이상의 책이다. 여기에는 역시 개인적 경험이 들어가서 더 그렇기도 하지만. 

음식 책인데, 왜 개인적인 경험이냐고? 그렇지, 내가 이번생에 요리와 먹는 즐거움을 포기했다고 매일 노래하니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음식이 우리 삶에 빼놓을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심지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먹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 그러니깐 책은 마음의 양식. 내가 마음의 양식은 그 누구보다도 쩔게 먹고 있어요. 


그래서 그동안 문학과 음식을 콜라보레이션한 책이 엄청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더 맘에 드는건,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양식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지. 그동안은 후자에 포커스를 맞춘 책들이 대부분이었거든. 적어도 이런 음식 사진 나오는 책들은 99%라고 생각하는데.



사진을 밤에 작업실에서 찍었더니, 노란불빛이 작렬. 여기서 노란불빛 제거하고 봐주세요. 설마 조명 때문에 검정색이 금색으로 보이고,파란색이 흰색으로 보인다거나 하는건 아니겠지? (아, 나는 파검파) 




첫번째 나오는 사진부터 맘에 들어. 그래, 이 책에 사진은 무척 중요해. 


서문이 재미있는데,


책은 2년쯤전,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의 작은 디자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내가 읽은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음식들을 요리하고, 디자인하고, 사진으로 찍을 생각이었다. 사진기와 곧 망가질 것 같은 삼각대 하나, 홀푸드 상품권, 그리고 짝이 맞지 않는 접시들로 가득한 찬장이당시 내가 가진 전부였고, 프로젝트 마감일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첫번째 사진들로 '올리버 트위스트', '호밀밭의 파수꾼', '모비딕',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그리고 '용 문신을한 여자'를 찍고 나서 완전히 그일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저자는


책 덕분에 내가 늘 즐겨 하는 일상 활동 한 가지, 즉 상 차리는 일을 마음껏 할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일의 성격이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 즐겁고도 강박적인 보물 찾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품을구하는 일이 나의 삶과 내 은행계좌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친구들과 친척들의 찬장을 강탈하는가 하면,중고품 할인점이며,벼룩시장, 이베이, 엣시, 그리고 미심쩍은 마당 세일까지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완벽한 식탁보나 버터 나이프, 혹은 소금통이나 플라스틱 장식품을 찾느라 늘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모비딕'에 꼭 맞는 큰 백랍 맥주잔을 입수하기 전에는 그 책의 사진을 찍지도 않았으니, 책에는 그것이 나오지 않는데도 왠지 사진에 꼭 그게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소위 항공샷이라고 하는 위에서 내려찍기. 

그 백랍잔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만, 서문에서 저자의 열정이 느껴진다. 살면서 한번쯤 홀딱 빠져서 자나 깨나, 아침에 눈뜨자마자,밤에 자기 전에, 뭘 봐도 그 생각만 나고 그런 일이 있다는건 멋진 일이다. 내게는 좋은건지 나쁜건지 (나쁜면은 위에 저자가 말했듯 계좌강탈) 그런 일이 주기적으로 찾아오기에 저자의 기분이 느껴져 공감의 웃음이 지어진달까.


역시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디자이너이고, 디자인적인 관점으로 소품을 모으고 테이블세팅을 했다. 요리꾼들이 만든 책과는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껴진다면 그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시피가 없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생략'과 '상상'의 묘미가 있어서 나는 좋았다. 


롤리타에 


늘 그랬듯이 태양이 집 주위를 돌면서 오후도 무르익어 저녁으로 접어들었다. 술 한 잔을 마셨다. 한 잔 더, 또 한 잔 더. 진과 파인애플 주스를 섞어 마시면 늘 기운이 샘솟는지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다. 제멋대로 자란 잔디밭을 돌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관심'이다. 민들레가 잔뜩 자라있고 지긋지긋한 개 한 마리가 - 나는 개를 싫어한다 - 해시계를 올려놓았던 평평한 돌을 더럽혀 놓았다. 대부분의 민들레는 이미 해님에서 달님으로 변해 있다. 진과 롤리타가 내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접의자 몇 개를 치우려다가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핏빛 얼룩말들! 


이 정도의 문장이 나와 있다. 



파인애플 주스와 섞인 진 칵테일과 함께 안주 땅콩도 같이 놔준다거나 

요리가 하나 언급되어 있으면 옆에 마실것도 같이 놔준다. 책에 안 나온 음료는 무슨 음료인지도 (게다가 위에서 찍어서 더 )알 수 없지만, 이런 상상력이 재미있다고 느껴진다. 


대단하게 꾸미고 찍은게 아니라 소소하게 주변에서 힘써 찍었다는게 글로도 사진으로도 드러나는데, 그게 또 소박하니 맘에 든다



걸리버 여행기는 귀엽고 



앞에보면 세팅하는 사진도 들어가 있다. 세팅들이 진짜 소소하다. 걸리버 여행기 대각선 위에는 아마 로빈슨 크루소 찍을때 사진인가보다. 갈매기가 엄청 많았다고 회고하는 부분이 들어가있다.



향수병에 흙을 먹는 '백년동안의 고독' 




코맥 맥카시의 '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먹었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복숭아 통조림과 배통조림 





보봐리 부인. 음식 위에 장미나 인형은 세팅인줄 알았는데, 책에 나온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귀리죽'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오트밀과 비슷. 물론 내 오트밀에는 시나몬 계피 설탕이 들어있지만.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먹다남은 음식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50가지 문학작품 속의 문구를 읽는 것도 즐겁고, 저자의 상상력에 동참해 책 속의 주인공들이 먹었을법한 요리와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겁다. 


책 인용 아래에는 사소한 것들,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다만, 저자가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메모해뒀을법한 것들이 트리비아로 적혀져 있다. 요리의 유래라던가, 작가 이야기라던가, 책 속의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레시피가 어디 처음 나왔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즐거움을 줬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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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mi 2015-03-1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기대하고 있었는데 제 예상과 다른 부분이 많네요. 특히 작가의 이미지 메이킹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은 과정샷이 흡사 소설의 메타내러티브처럼 낯설게 느껴지네요. 작가분이 노력하신 흔적은 보이지만 사진 촬영 기법과 소품들도 생각 보다 너무 현대적인 것 같고..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네요.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흙은 심지어 고급 차tea 같아요) 뭔가 좀더 묵직하고 회화를 보는 듯한 옛스러운 고전적인 느낌을 원했는데 너무 큰 바람이었군요.ㅜ
자세한 후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이드 2015-03-13 14:29   좋아요 0 | URL
문학을 디자이너 입장에서 접근해서 `요리`로 풀어냈다는 점이 기존의 비슷한 주제의 책들과 달라서 좋았어요. ^^

cocomi 2015-03-1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선한 시도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문학과 요리를 붙여놔서 반색했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봐요.
 
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미야베 미유키의 모든 작품이 다 좋은건 아닌데, 그 중에서도 초능력물은 별로 맘에 안 들고, 현대물 짧은 것들도 읽을때는 술술 읽혀도 그닥 기억에 안남는다. 

'형사의 아이'는 초기 작품이고, 현대물, 수사물에 그리 길지도 않고, 소년법 이야기한다고 하니깐 역시 별로일 것 같아서 패스할까 하다가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다. 


미야베 미유키 책들 중에서 '정말 재미있다' 고 생각하며 읽은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 정말 재미있다. 는게 미야베 미유키의 최대 미덕이 아님을 밝혀둔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여전히 '이유'나 '외딴집' 같은 책들)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이 재미도 있고, 다른 추리소설들과 구별되는 따뜻한 시선이 있기도 하고, 이야기도 흥미진진한데, 내가 추리소설, 스릴러 볼 때 가장 매력을 느끼는 점 중에 하나인 '캐릭터' 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작품은 기억나도 애정하는 캐릭터가 거의 없고, 아니, 애초에 기억나는 캐릭터도 거의 없다. (시대물의 경우에는 반복해서 나오는 캐리거들이 있지만, 앞에 '오'자 붙는 비슷비슷한 이름에 나는 이름 외우기 포기. 이름도 못 외우면서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근데, 여기 나오는 준, 하나, 미치오는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특히 형사의 아이인 준과 옛날식 가정부인 하나 할머니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다. 준은 영화 마니아이고 하나도 만만치 않은데, '콜렉터'부터 '알렝 레네 감독의 부조리 영화까지..아놀드 슈왈츠 제네거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까지 툭툭 튀어나오는 걸 보면 그 상황상황과 미야베 미유키가 이런 귀여운 장치를 더 귀여운 준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 정말 ..귀엽다!


이야기의 플롯과 복선과 그 복선들을 주워담는 방향도 딱 떨어지고,사회파 소설 작가의 선두답게 '소년법' 을 이야기하는 부분과 도고라는 화가를 통해 과거의 일본대공습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이야기같지 않기도 하고, 미야베 미유키 같기도 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다. 


토막살인의 시체가 발견되고 범인은 예고장을 보내기까지 한다. 

도고라는 유명한 화가가 은둔하는 동네에는 형사 미치오와 아들 준,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가정부 할머니 하나가 있다. 

도고가 집에 여자를 묻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중에 '도고가 살인범이다' 라는 투서가 준네 집에 도착하게 된다. 


사건에 어린 준을 끼워주는 장면은 좀 어색하지만, 씩씨하고 똘똘하고 감수성 예민한 영화광에 요리와 집안일을 좋아하고 잘하는 준과 그런 준을 돌봐주는 든든한 하나할머니의 조합은 최강이다. 


이 작품에서 후에 나온 '솔로몬의 위증'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솔로몬의 위증' 의 아이들이 너무 애어른들이라서 위화감 들었다면, 준은 애같으면서도 추리소설의 주인공 같아서 어떤면에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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