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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9월
평점 :
"커튼에 난 구멍으로 빛이 든다. 이정도면 사는데 지장없다. 그런데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커튼을 더 찢으려 드는 이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다. 부산스럽고 소란하게 굴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비난했다. 이제 그만좀 하라고 소리를 높였다. 빛이 든 이후에 살기가 좋아진 거라는 말을 주워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실감이 되진 않았다. 결국 요란하게 굴던 이들은 구멍을 조금 키우는데 성공했다. 빛이 조금 더 든다. 조금 더 살만하다. 그런데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야단이다."
커튼에 구멍을 내는 사람, 커튼을 더 찢으려고 부산스럽고 소란스럽게 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막상 커튼을 다 찢어버리고 나면, 그 세상은 지금 작은 구멍에도 계속 놀라고 있는걸 보면, 더 놀라울 것이다. '아는 것' 커튼 밖의 세상을 아는 것.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변화의 필수불가결한 시작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봄알람 출판사의 이민경은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9일만에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썼다.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에 '봄알람'이라는 출판사를 만들고, 두번째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냈다. 봄알람의 세번째 책은 '메갈리아의 반란' 이다.
작년 한 해 다양한 페미니즘 책이 나왔고, 2016년 도서판매 분석 같은 걸 보면, 눈에 띄는 변화가 '페미니즘 도서' 정도일만큼 페미니즘 이슈는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 책을 읽고, 각자의 커튼에 구멍을 찢기 시작했다.
저가가 '계보'를 들고 나온 계기는 민우회 주최 김현미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중 "우리 여성들에게는 계보가.." 라는 말이 나와 당연히 그래, 우리 여성에게는 조국도 계보도 없지. 라고 앞서 생각하고 있던 중에 "존재한다" 라는 말을 듣고 당혹감을 느낀 것에서 시작한다. "계보에 오를 수 없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계보가 있다면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사회학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 여기'를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로 가정하기.
과거 여성의 삶, 지금 여성의 삶, 지금 다른 곳의 여성의 삶, 다음 세대의 여성의 삶.
챕터의 제목에 나온 것처럼 '사회는 흐른다' 더 나아질 수도 있고, 한 보 후퇴할 수도 있겠지만, 두 보 나아갈 수도 있는. 그런 사회의 흐름 속의 '나'를 상상해 보면, 덜 막막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없다고 생각했던, 지워졌고, 우연히 보존, 발견되었던 '계보'를 공부해보자. 고 한다.
읽으면서 울컥했던 부분들이 많은데,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성의 '연대' 가 나오는 부분에서 벅차올랐다. 다양한, 지워졌던 여성운동의 역사가 나온다. '여성운동' 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에서,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에서 여성이 지워진 사례들을 보며 소름끼쳤다. 지워졌고, 알아볼 생각하지 않았고, 모르는 상태로 잊혀지고 있었다. 아이슬란드가 IMF의 위기를 맞아 강한 구조조정으로 성공적으로 회생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때의 총리가 여자이고, 유일하게 벌금을 물지 않은 은행의 은행장이 여자였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여성은 반드시 승리하가? 일단 변화가 일어나면 그 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억압에 휩싸여 있을 때는 그럭저럭 버텼다 하더라도, 한 겹 걷어낸 세상을 맛보고 나면 다시는 그것을 뒤집어 쓸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
다음 책인 '메갈리아의 반란' 에 대해 기대하게 만드는 글이 있다.
"지난 시대의 가부장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조상을 닮았다는 말에 발끈한다. "그것과 이것이 같으냐?" , "과거에는 차별이 있었지만 나는 상식적인 얘길 하는 거다." 뻔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 상식은 누가 만들었는가? 차별과 억압을 받는 입장이 아니기에, 그저 힘이 센 편에 서 있는 이들, 그러다가 우리의 투쟁으로 세상이 조금 변하고 상식 아니었던 것이 상식이 되면 냉큼 거기 올라타 그다음 변화에 어깃장을 놓을 뿐인 이들은 모른다. 계승할 역사도 긍정할 전통도 없이 변화를 막아서는 이들은 그저 미역에 불과하다. 배에 엉겨 붙어 진로를 필사적으로 방해하는 미역"
그들은 그저 미역에 불과하다고. 아, 너무 웃었다.
메갈리아가 왜 후련했는지, 아래 글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당연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나 역시 때로 동조하던 혐오를 똑같이 흉내 내는 방식으로 누군가가 반기를 들었다. 우리를 오랫동안 옭아맸던 침묵의 나선은 그렇게 끊어졌다. 여태까지의 페미니스트에게 기대하던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여성의 목소리가 남성이 독점하던 공간에 발을 들였다. (..) 똑같이 상스럽고 저열하고 의미 없는 언어가 곁에 서자 그 실체가 얼마나 초라한지 여실히 보였다. 여성혐오의 지위는 절대에서 상대로 추락하며 힘을 잃었고, 더 이상 나를 제압할 수 없었다. (..) 또한 나는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제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는 공격할 수 없다. 메갈리안이라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신여성에서 모던걸로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대상만 바꾸어가며 언제나 존재하던 혐오의 불길은 이제 메갈리아로 옮겨 붙었다. 이제 나를 공격하려면 메갈리안이라는 혐의를 씌울 것이다.
메갈리안에 분노한 이들이 스스로가 만든 명분에 갇혀 사상에서 표현으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과정은 산뜻한 승리감을 안겨주었다. 혐오는 거세진 듯 보였지만, 메갈리안 등장 이후 그 범위는 분명하게 축소되었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던 이들은 태도를 전향하여 "진정한 페미니즘"을 긍정하며 메갈리안을 공격했다. 메갈리안이 미러링에 그치지 않고 소라넷을 폐지하고 여성혐오 광고와 랩을 만든 이들에게서 사과를 받아내고, 몰래카메라 금지 법안을 만들어내는 등의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냈지만 그들의 적대적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 이제 누구를 혐오하는지 잘 설명해야 하는 쪽은 그들이다. 내가 겪은 가장 큰 승리다."
이 책의 미덕은 정말 중요하지만, 정말 모르고 있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던 역사 속의 여자들에 대해 알고,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러 미래까지 흐르게 될 여성운동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힘내는 것.
스터디북처럼 질문과 빈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부분이 많은데, 입트페에 이어 이건 좀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 것이 아쉬움. 뭐,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를 것을 예상하고 던지는 질문에 그렇게 큰 빈칸 둘 필요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