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의 의식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함정임 옮김 / 현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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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 책 중에서 인쇄되기 전에 당신이 읽지 못한 첫 번째 책이 있습니다. 어쩌면 유일한 책일 것입니다. 이 책은 모두 당신께 바치는 헌정인데,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보부아르의 이름만 보고 사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읽다보니 보부아르의 이야기가 아닌, 사르트르의 이야기였다.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의 마지막 10년을 기록한 글이다. 그렇게 보부아르의 이야기인줄 알고 읽기 시작했던 책은 사르트르의 이야기였고, 보부아르의 이야기로 맺는다. 


책은 1970년에서 1980년 사르트르가 죽는 해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1970년에 이미, 사르트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구들에 자꾸만 부딪쳤다. (...) 아주 조금 마셨음에도 비틀거렸다. (...) 택시에서 내리면서 그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담배를 아주 많이 피웠고,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사르트르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비틀거려서 실비와 함께 부축해야 했을 때, 보부아르는 집으로 돌아와 일기에 쓴다. "집으로 돌아오자, 밝았던 스튜디오 색깔이 바뀌어 보였다. 벨벳 양탄자는 죽음의 의복을 연상시켰다. 살아가는 것이 이런 식이다. 행복과 기쁨의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위협은 머리 위에서 어른거리고, 인생은 괄호 속 여담 같은 것." 


새벽에 일어나 전날밤의 트위터를 보니, 통가 해저에서 일어난 화산폭발로 옆나라인 일본이 쓰나미 경보로 급박한 상황이었고, 섬에 사는 나는 통가의 해저 화산폭발 전에 해저지진이 일어났었고, 그것이 전조였을 것이라는 뉴스를 보며, 얼마전에 처음으로 실감했던 지진을 떠올렸고, 통가와 일본을 걱정하며, 내가 사는 곳에 대한 소식도 함께 찾으며 불안해 했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다음에 어디로 이사갈지, 집들을 구경하며, 바닷가는 좋긴한데, 좀 별로지, 근데, 바다뷰가 좋아보이긴 한다. 생각했던 것이다. "위협은 머리 위에서 어른거리고, 인생은 괄호 속 여담 같은 것" 


이미 여기저기 아팠던 사르트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내가 상상한 것은 사르트르 간병 이야기였으나, 책은 사르트르가 죽어간다는 명제 외에는 전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들로 진행된다. 사르트르와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라벨은 뗄 수 없는데, 그의 몸이 노화와 병으로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의에 항의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책을과 잡지를 만들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가고, 사랑을 하는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노년의 모습이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읽게 되어서 노년에서 죽음까지의 그간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이 마구 흔들렸다. 


나는 늘 내가 내 정신이 아니게 되면 내가 죽는 순간을 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없다. 한 순간에 살아 있는 나이다가 죽어 있는 내가 되겠지만, 온 정신으로 살아가다가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끝이 있다는 것만 알고, 그 끝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무망의 시간들이다. 


정신과 몸 어느 것이 먼저 사그라드는지, 그것은 각자의 기질에 달려 있는 것일까? 살아 온 경험에 달려 있는 것일까? 사르트르는 할 일을 했고,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몸의 이곳 저곳이 제 기능을 하지 않게 되어서도 굳건한 정신이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불타올랐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 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51년간 함께 했고, 부부이되 우연히 찾아오는 사랑 또한 각자 즐기기로 했다. 여름 바캉스와 부활절, 겨울에 늘 여행을 다녔다. 여행 이야기가 병원 가는 이야기보다 많이 나온다. 걸음을 못 걷게 되어도, 눈이 반 실명 되어도 계속 여행을 다니고, 카페를 가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부분이고, 여행의 즐거움 뭘까. 진지하게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사르트르가 아파서 혼자 둘 수 없을 때, 보부아르가 독박간병을 한 것도 아니다. 보부아르의 양녀, 사르트르의 양녀, 그리고, 사르트르의 젊은 여자친구들이 돌아가며 그를 돌보았다. 


책은 사르트르의 병에 대한 기록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행복, 그리고, 여행기로 채워져 있다. 이 세 가지가 같이 간다는 것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기분이다. 


사르트르가 자신의 병과 노화에 겸허하고, 인정 또는 체념하며,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끝까지 인정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시력이다.


++


"내 시력은 영영 회복될 수 없는 걸까?" 그 말이 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찢어놓아서 나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

 

내가 생각하는 나의 노년에서 죽음까지 중, 최악의 시나리오가 정신은 있고, 몸은 안 움직이고,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삶의 재미도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디오북에 익숙해지자고, 오디오북들을 듣는 습관을 기르려고 하고, 제법 좋아지긴 했지만, 역시 종이책이 가장 좋고, 책을 읽는 것을 듣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카테고리이지 않나 생각 들 뿐이다. 사르트르의 눈이 읽고 쓸 수 없어졌을 때, 보부아르가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사르트르는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 


"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오. 난 절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죽음이 온다는 것은 알고 있소." 

" 그렇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소... 글을 썼고, 살아왔고, 후회할 것은 아무것도 없소." 

" 내가 늙었다는 기분이 안 들어요." 

" 날 흥분시키는 대단한 것이 더 이상은 없소. 내가 조금은 그보다 윗길에 있는 것이오." 그의 말 전체를 통해 드러난 것은, 그가 현재를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과거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아홉시에 자도 아쉽지 않은 하루를 보내자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걸 좀 더 늘리면, 할 일을 했고, 잘 살았고, 그런 과거에 만족하고, 행복하기에 아쉽지 않은 삶이 되는 걸까? 


사르트르의 이야기에 몰입하다, 마지막 페이지의 보부아르의 말에서 이 책은 보부아르의 책임을 기억한다. 

죽음이 임박한 사르트르에게 그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한 회의. 사르트르는 늘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알고' 싶다고 했는데, 보부아르는 그 사실을 숨겼다. 사르트르가 취할 어떤 방법도 없었고, 더 잘 치료받을 수도 없었으며, 그는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몇 해는 임박한 죽음에 무지함으로써 덜 우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부아르 또한 사르트르처럼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 나의 침묵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 


보부아르는 이 책으로 사르트르에게 작별 의식을 치루었다. '작별 의식' 이라는 말은 어느 날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농담처럼 건넨 인사였다. 그 작별의 의식을 이어받아 50여년을 보낸 동료이자 친구이자 연인과의 마지막 10년을 기록하고, "사르트르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하게 될 사람들에게" 헌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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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17 0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력의 노화는 사르트르 같은 이에게는 치명적인 것일듯요. 그가 존재해왔던 이유가 사라지는 일일듯요.
실낙원의 한부분이 생각나네요!

하이드 2022-01-22 15: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앤 패디먼 책에도 아버지가 시력 잃었을 때 실락원 읽어주는 장면 나왔던 것 같아요. 책 읽는 사람에게 시력 잃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곱게 지지 말기로 해
김진아 지음 / 봄알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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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의 코어 커리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코어 커리어를 카피라이터로 잡고 있다. 저자가 해낸, 하고 있는, 할 많은 일들은 단단한 코어 커리어인 카피라이터 업무를 통해 쌓은 분석력과 기획력을 활용하여 뻗어 나가는 일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나의 코어 커리어는 뭘까 생각해 봤다. 많은 일을 했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코어 커리어는 영어와 읽기였다. 이 두 가지로 대부분의 일을 해왔다. 내가 그간 다양한 일을 해왔지만, 좋아하는 것만 했고, 거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었는데, 답을 얻은 기분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코로나로 인해 주 4일제 도입이 빨라지고 시간제, 탄력 근무제 등 노동 유연화가 가속화 되며, 장래희망은 '파이어족' 이지만 경제적 기반이 약해 노년에도 일할 확률이 높은 여성들은 확고한 커리어를 가지고, 배리에이션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몸도 일도 코어가 중요해~ 


같은 세대의 여성 저자가 자기 반성을 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면서 속이 후련했다. 그 여성이 반성에 그치지 않고, 계속 부딪히고 나아가는 여성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여자의 운명이 왜 '여자'의 운명인지 묻지 않은 결과가 지금이라면, 살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긍정의 힘은 기도가 아닌 시도에서 나온다." 


첫 챕터부터, 나한테 하는 얘기인가.. 멍 때리다가 책을 덮고, 두 번째 시도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유학 검색하고, 탈출 꿈꾸고, 계획하는 탈출 전문가. 나도 그랬는데.. 회사 생활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그냥 뭔가 달라 보이고 싶고, 특별하게 보이고 싶었나 싶다. 대신 나는 무슨 날이면 한국을 탈출했다. 생일, 크리스마스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혼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되겠지' '무슨 수가 생기겠지' 같은 방임적 태도 역시 회피의 일종이다. 가부장제 영향력 아래 살아온 여성의 자기 부양자로서의 인식은 남성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 (18) 


여자들이 가장 먼저 놓아야 할 것이 막연한 낙관주의라고 하는데,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 읽으면서, 나의 낙관주의를 생각했다. 아, 나 망하는건가? 망했는데 모르고 있나? 아님, 낙관주의 플러스 알파랄 것이 나에게 있어서 여기까지 왔나? 그렇다면 그게 뭘까? 나는 낙관주의자라서 마지막 질문을 덧붙인다. 다른 기조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낙관주의로 성공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뭔가가 있긴 있을거다. 뭘 알아야 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은 뭔가 새로 계속 알게 되는 경험이었다. 


'남자라는 클라이언트' 에서 굉장히 미묘한 친밀한 관계의 남자와 있을 때의 '부자연스러움' 에 대해 나온다. 아무리 친해도 완벽하게 무장해제할 수 없고 완전히 편해질 수 없는 일정량의 긴장을 동반하는 상태, 저자는 그것을 클라이언트와의 그것으로 비유한다. 이거 정말 미묘한 거라서 타인과 이야기해본 적도 없는데, 책에서 읽을 줄 몰랐다. 완벽하게 무장해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여자와 이루었을 때와 비교해보면 된다. 미묘하지 않고, 대놓고 불편한 것도 있다. 딸기를 씻어올 때, 여자와 남자 중 여자가 씻어오면, 여자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고, 남자가 씻어오면, 여자가 해야 하는데, 남자가 해"주는" 것 같다고 나도 세상도 그렇게 봐서 기분 나쁜 것.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새로 태어나서 새로 세뇌당하기 전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길러지고 적응하며 살아온 여성은 관계의 기울기를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여자를 왜 더 쉽게 놔버릴까' 에서는 "자신의 외모를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전시하는 여성이 주위에 있을 때 생성되는 묘한 긴장감, 불안감, 피로감" (36) 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도 정말 잘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뭔지 아는 그거. 잘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텐데, 이렇게 펼쳐 놓다니 대단하다. 


'나는 내게 실망해야 해' 챕터는 짧게 나마 저자의 행로를 봐 왔고, 책을 읽어왔어서 더 와닿는 글이었다. 틀리기 싫어하고, 흠잡히기 싫어서 레퍼런스만 주구장창 찾는 것. 


"문제는 여기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쓴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예상보다 초과였다. 정말 중요한 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결과물을 만드는 단계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몸풀기 시간이 길다는 건 그만큼 이 '본 게임'에 쓸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 나의 기획서를 써 내려가지만 뭔가 시시하다. 새로운 느낌도 없다. 조금 전까지 보던 완성도 높은 사례들과 비교가 되어 더욱 그렇다. 내 실력과 자질에 대한 좌절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의 독특한 취향, 까다로운 안목, 날카로운 비평 의식이 정작 나의 결과물로 연결되지 않다니. 믿고 싶지 않아. 이건 그냥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 속으로 외치며 시간을 더 쓴다 해서 더 좋은 게 나오지는 않으리란 예감을 애써 외면한다." (53) 


아.. 진짜.. 책 읽으며 종종 느끼는 바이지만, 이 책 읽으며 특히, 나한테 하는 이야기로 들려 계속 찔렸다. 


"레퍼런스는 남의 작업이다. 내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정답과 '맞는 말'에는 '나'라는 필터를 통과시켜 나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를 둘러싼 사람, 환경도 변수로 작용함은 물론이다." (56) 

공감. 레퍼런스가 너무나 널려 있는 세상이다보니, 내 것을 말하는 사람이 희귀해졌다. 레퍼런스들은 혼돈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고, 남의 것에 기대기보다 내 것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최적화하려는 욕망은 실패의 최소화와 닮아 있지만, 실패도 실망도 계속 하고, 맷집을 기르고, 나만의 방식을 찾으라는 이야기가 위안이 되었다. 


" '한 달에 200만 원 씩 쓴다면 지금 가진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한 달에 100만 원 씩 쓴다면?' 생명 연장을 위해 월 지출액을 줄여 계산하면 어쩐지 기분은 더 나빠졌다." 


아, 나 이 생각 맨날 하는데, 나는 이거 계산하는거 심지어 좋아한다. 사실 이것은 사라지지 말라는, 옆에 사라지려는 여자가 있다면 붙들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라지지마. 


모든 챕터에 나의 공감을 드리지만, '익명과 크레딧' 도 특히 좋았다. 내가 기성 세대로서 느꼈던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최신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사회가 너무 빠르게 변한다. 이 이야기가 나온 지금보다 더 나빠질지, 더 나아질지, 지금을 글로 박제해두었다. 동시대를 지나며, 차갑고, 동시에 뜨거운 이야기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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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대서양 파도에 대해 살펴본 내용은 대체로 전 세계 풍랑에 모두 적용된다. 파도는 한평생 숱한 사건을 겪는다. 파도의 수명이 얼마인지, 어느 정도 먼 곳을 여행할지,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는 모두 바다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상황에 좌우된다. 파도의 중요한 속성을 하나 꼽으라면 움직인다‘는 것이다. 파도는 움직임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는 것들 때문에 해체 또는 죽음을 맞이한다.
파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바다 자체에 내재하는 힘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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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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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앉아 앞부분을 좀 읽다가 다른 책들을 빌려왔는데, 방 그림이랑 일기 앞부분이 재미있을 것 같아 계속 생각나다가  한참 지나 다시 빌리게 되었다. 웃긴 책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웃기지 않았고, 일상 에세이인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시인의 꿈과 망상이 많이 나왔다. 


나는 이십년쯤 매 년 일기장을 샀지만, 일기든 플래너든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2022년의 다이어리들을 잔뜩 사두고,이제나 저제나 2022년을 기다리는 중에 좋아하는 작가님이 10월 26일부터 1년 다 쓸지도 모르는데, 그냥 2022년 10월 26일부터 일기를 쓰겠다고 한 것을 보고, 오, 좋은 생각! 하고,10월 26일부터 내년의 나에게 일기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쓰고 있고, 비결은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를 쓰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닝페이지와 같은 느낌으로 저녁의 나에게, 그리고, 내년 오늘의 나에게 일기를 보낸다.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기운 남아 있으면 저녁 일기를 쓰기도 하고, 기운 없으면 안 쓰기도 하고. 길게 쓸 생각 안 하고, 한 줄이라도 쓰자 하고 앉으면 한 줄 보다는 더 쓴다. 만년필로 쓰기 때문에 잉크가 마를 동안 그대로 펴고 하루를 셧다운 한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면 펼쳐진 일기를 한 장 넘겨 그 날의 아침 일기를 쓴다. 아무리 골골대더라도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번은 일기 쓸 기운 정도는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보통은 아침과 저녁 두 번 다 꾸준히 쓰고 있다. 내년에도 아침과 저녁에 쓴다면, 한 페이지에 2년간의 아침 저녁 일기가 있는거다. 내년은 아직 안 와서 모르겠지만,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만 써도, 아,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여! 하게 된다. 


아침에 이런거 저런거 해야지. 써 두었는데, 일기 쓰고 고양이 화장실 치우다가 허리를 삔다거나. 그렇게 허리를 삐끗하고, 한 주일동안 허리 보신하고, 남은 인생 허리를 위해 살겠다 결심하게 될 줄 모르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아침의 일기를 보면서 저녁의 일기를 쓰는 마음. 아침에 이런거 저런거 쓸 때에는 전혀 몰랐지. 오후에 지진이 나서, 건물 밖으로 튀어나오게 될 줄 알았겠냐고. 그런 뭐랄까,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를 아침 저녁으로 느끼게 되니, 인생관이 조금 바뀌는 것 같다. 아니, 원래도 현재를 잡아라. 카르페 디엠의 인생관이었는데, 더욱 강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 책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아침형 인간과 새벽형 인간을 오가는데, 저자는 밤형 인간이다. 새벽 5시에서 6시경 잠들고 오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새벽 시간에 나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그 시간이 좋은 것 뭔지 안다. 나도 그렇게 살아 봤으니깐. 지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거 제일 좋아. 11시 전에 자서 일곱시간 이상 자는 것이 매일의 목표인 사람이 되었지만, 내가 밤의 시간들에 깨어 있었던 것은 전생 같고, 남의 이야기 같다. 저자는 밤동안 방을 탈출하거나, 방에 갇혀있거나, 아무튼, 방 이야기와 방 그림이 많이 나온다.  도서관에 매일 가고, 하루에 두 번 가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도서관 다니는 작가들 이야기를 많이 보는데, 나도 도서관에 출몰하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알은 체 하지는 않겠습니다. 묵혀 두었던 옛날 시들을 읽고, 거친 재능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도 좋았다. 


" 나에게 나다운 것, 때 묻지 않아서 오히려 잘 쓰던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처음 썼던 나의 시들이 너무 구려서 기뻤다.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어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거친 재능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애당초 그런게 있었던 적이 없으므로. 나는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 


나는 요즘 아주 조금씩 글쓰기가 좋아지고,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나자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의 글이 조금 더 좋아졌다. 이 책은 '매일과 영원' 시리즈 첫번째 책으로 두 번째 책은 강지혜 시인의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 라는 책이다. 이어지는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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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21-1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하이드 2021-12-17 19: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돈키호테 1~2 (리커버 특별판 + 박스 세트)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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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등 분리. 6개월만에 새 책 펼쳤는데, 6개월만에 확인되어 교환도 환불도 안 됨. 이 책 구매자분들 중에 책등 분리 겪으신 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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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24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속상하시겠어요 ㅜㅜ

하이드 2021-09-24 20:25   좋아요 1 | URL
저 지금 지지난 주 주문한 책도 다음주에 받을거 같다고 연락 받은 터라 부글부글한데, 이런 일도 겹치네요.

붕붕툐툐 2021-09-2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하이드님, 책도 아직 안 왔는데 이런 일까지! 교환, 환불이 안된다니...!!ㅠㅠ

Admin 2022-02-2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속상하셨겠어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