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
궈징 지음, 우디 옮김, 정희진 해제 / 원더박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

오늘 새벽 2시경에 자다가 받은 전화 한 통으로 코로나로 인한 무급휴가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라지만, 지난 번의 경험을 돌이켜볼 때, 계속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우한에 간지 한 달만에 코로나로 인한 봉쇄사태를 맞이하게 된 20대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1월 21일부터 3월 1일까지 쓴 일기이다. 그렇게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제목의 ‘밤마다 수다’ 도 일기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는 매일 밤, 채팅으로 전국 각지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연대하고, 지지한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SNS나 블로그를 떠올리게 했다. 느슨한 연대,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의 근황을 알고, 소식을 전하고, 남긴다는 면에서. 그들이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 무거운 이야기들이 닮아 있다.

반면에, 일기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현재의 의미를 찾는 기록이고, 온라인 공개를 함으로써, 우한에서의 소식을 알리는 저널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글쓰기로 치유하고, 그 글을 본 사람들이 또 치유 받고, 처음도 아니지만, 마지막도 아닐, 역병 한 중간에서의 기록으로, 살아남아서,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낫기를 바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계속 일기를 써 나가기가 쉽지 않다. 일기 쓰는 습관도 없고, 이 나이 먹도록 일기 한 권을 끝까지 다 써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일기를 쓰지 않은 지 이미 여러 해이고, 써도 특별한 일들, 감정적인 기복 같은 거나 기록하는 정도에다 밑도 끝도 없이 끄적인 것들이 많아서, 나중에 다시 보면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나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일상생활이라는 게 결국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지루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록한 일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던져 준다고 생각한다.

어제 저녁밥은 우렁이 쌀국수였다.”


“ 어제저녁에는 아스파라거스 상추 고기 볶음과 죽을 먹었다. 밤의 채팅에서 한 친구는 낮에 고양이에게 먹이를 줬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동네 어귀 검문소에서 당직 서는 사람에게 음식을 사서 보냈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사법 고시 영상을 봤다고 했다.

우리는 충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충돌하는 걸 아주 두려워했는데, 특히 폭력적인 충돌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충돌 속에서 느껴지는 통제 불능의 느낌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

온라인의 이웃이거나 이웃의 이웃이거나의 근황으로 이미 락다운을 겪어 본 이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읽었다. 락다운을 겪었고, 겪고 있는 해외가 아니라도 우리나라의 큰 도시들에서도 단계를 오가며, 다양한 단계의 격리와 봉쇄를 겪고 있다.

서울의 다섯배 크기에 인구 밀도가 낮아, 아직 두자리수를 유지하고 있는 (언제까지 갈지..) 지역에 살고 있다보니, 마스크를 하고, 공공기관 개폐 유무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외에 (이것도 이미 작지 않고) 상대적으로 덜 위협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사회를, 세계를 뒤덮은 역병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코로나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이 사회에 산재한 많은 문제들을 빠르고, 거칠게 드러내고 있다는 글을 봤다. 이미 저마다의 작은 전쟁들을 매일 치루고 있는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그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를 거치면 분명 더 단단해지겠지만, 이 시기의 내,외상을 치료하는 시간과 자원들을 생각하면 암담하다.

이 글을 읽으며, 집 밖의 누군가도, 나와 같이 이미 치루고 있던 전쟁들 속에서 매일 하던 것들을 함으로써,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고, 버티고, 나아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잘 먹고, 햇볕을 쐬고, 관계를 다지는 등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야기가 일기에 나와 좋았다.

매일 야채와 고기를 볶아서 밥이나 죽과 함께 먹는 이야기를 한 것이 인상적이어서, 한 달여만에 간 마트에서 나도 셀러리와 고기 간 것을 사버렸다. 고립도, 봉쇄도 아니지만, 새로 이사온 곳에서 자발적 고립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저자가 생존음식이라고(무 장아찌 등) 하는 것들, 사치 음식이라고(요거트!) 하는 것들을 나도 좀 사봤다.

“ 의료용 마스크가 도착했다. 한 상자에 100개가 들어 있었다. 원래 두 상자 사려고 집어 들었는데, 점원이 한 상자에 198위안(한화 약 3만 4천원)이라고 해서 조용히 한 상자를 내려놓았다. 계산할 때 보니까 한 상자에 99위안밖에 하지 않아서 후회가 됐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더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결핍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특히 이렇게 생사가 갈리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구매 목록
-생존 마지노선 : 쌀, 국수, 짠지, 소금에 절인 달걀 등 (반드시 구비해 두어야 하는, 생명을 유지해 주는 음식물들로, 아주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기본 생활용 식자재 : 감자, 당근, 양파, 셀러리, 마늘종, 고기 등 (일상적으로 밥을 할 대 필요한 식자재들로, 상대적으로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사치품 : 마른 멸치, 말린 두부, 육포, 꿀, 요거트 등 (결핍감을 어느 정도 줄여 줄 수 있는 식품들로, 그저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이 책을 읽던 밤에는 지금처럼 3차 위기로 들어가기 전인 안정세로 보이던 시기였음에도, 봉쇄의 이야기가 나의 좀비병(좀비가 창궐하면,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고민)을 자극해서 이것 저것 샀는데, 3차가 되어 버렸다.

이 책의 해제는 정희진이다. 정희진의 해제가 책보다 실망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지만, 이 책만은 좀 더 젊은 세대의 궈징과 같은 세대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에게 맡겼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 점이 아쉽다.

함께 수다를 떨고, 매일 일기를 쓰고, 살자, 살아남자.

수많은 페이페이가 부모와 함께 산다. 심지어 생활에 필요한 걸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들의 삶의 방식에 사회에 대한 일종의 소극적 저항이 담겨 있다고 본다. 사회적으로 계층이 고착화되면서 기회를 차단당한 탓에, 젊은이들이 실패를 경험조차 해 볼 수도 없게 되엇고,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기를 성장시킬 공간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노력해 봤자 쓸데없다’는 젊아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 P188

어제저녁에는 마늘종 고기 볶음과 죽을 먹었다.
어젯밤에는 방에 전기스탠드 하나 달랑 켜 놓은 채 어둠 속에서 친구들과 채팅을 했다. 채팅에선 "한 며칠 입맛이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런 거지 입맛이 없던 건 아니었더라고." , "봉쇄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반년은 지나간 거 같은 느낌이야." 같은 잡다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연인이 이전 애인에게 협박이나 험담, 폭력, 스토킹, 성관계 동영상 유포 같은 이별 폭력을 휘둘렀다면, 그 행위가 우리와 관련이 있는 건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P205

집에 돌아와서 창밖의 햇살을 바라보는데, 문득 내일은 책 한 권 들고 내려가서 햇볕 쬐면서 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이 생각이 떠오른 순간, 속으로 몰래 나를 칭찬해 주었다. - P231

극히 수동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주체적인 삶을 찾아 나선다.

어느 날 인터뷰를 보고 감동을 받은 일이 있다. 일선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늘 뭐라도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료진만 이렇게 생각하는게 아니다. 많은 자원봉사자가 같은 생각을 한다. (..)

적십자에서 구호물자를 막아서고 나서자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성공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다.

희망이 있어서 행동하는 게 아니다. 행동하니까 희망이 생기는 거다. -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김보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휘리님의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표지는 이 책의 첫인상이기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사랑! 거창한 것 같지만, 결혼을 앞둔 평범한 남녀간의 사랑이다.
사람은 모두 각각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 있다. 이 책에 정말 어울리는 말이다. 지구가 멸망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이야기는 이야기인데, 김보영 작가의 글이 좋다.
얇은 책이고, 이야기가 끝나고, 작가의 말 후로도 아직 페이지가 많이 남아서 궁금해하며 마저 읽었다. 


이 이야기를 둘러싼 이야기가 멋져서, 작가의 말과 독자들의 말이 멋져서 눈물이 찔끔 났다. 작가는 글로 사람의 일생에 이처럼 중요한 일에 함께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글과 글 바깥의 이야기가 이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을 보는 것은 각각은 흔한 이야기이지만, 굉장히 멋있게 흔한 이야기여서 감동받아 버렸다. 다시 읽으면서도 눈물 찔끔했다고.

다시 읽으니, 지구멸망이 더 다가온다.
지구멸망이다. 아니, 인간 멸망이고, 지구는 다시 살아나지. 늘 그랬던 것 처럼.
그리고, 이 아름답고 뻔한 이야기 속에

“내가 여기에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이제 알 것 같아. 그건 혼자 산 것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누군가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치워 갔고 정화조를 비워 주었어.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선을 연결하고 가스를 점검하고 물통을 갈고 하수관을 청소했어. 어느 집에선가 면을 삶고 그릇에 담아 배달하고 다시 그릇을 가져가 닦았어. 나는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살 수 있단 말야?

그저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 P50

왜 살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왜 죽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더라. 아니, 더 생각해보니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는 거더라고. 그 도시처럼. 뭔가를 해야만 살 수 있는 거야. 의지를 갖고, 지치지 않고. - P60

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하루가 다 필요해.
하루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나. 하염없이 늘어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생이 끝나리라는 예감을 해. - P79

나는 나이를 먹었어. 하루에 하루씩, 한 달에 한 달씩, 한 해에 한 살씩, 시간을 몸에 쌓으며 살았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야. 10년 전보다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어. 몇백 년 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어.
내일은 하루만큼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내년에는 또 한 해만큼 그렇게 될거야. - P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 바이러스 예견 어쩌구로 마케팅 엄청 하길래, 한 번 사봤더니, 글쎄.. ‘우한’ 말고는 접점이 없다고.

여튼, 나는 바이러스가 퍼져서 세계 대위기!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어서, 초반에 나오는 으시시한 분위기에, 공포소설인가 싶어 그제야 리뷰들을 찾아봤다. 책 속의 티나처럼 나도 처음에는 폴터가이스트 현상들을 공포로 읽었지만, 시간 지날수록, 주인공에 이입해서 힘 내!. 하게 되었다.

딘 쿤츠의 초기작이라고 하는데, 단숨에 읽을만큼 재미 있었다. 특히 좋았던 것은 여성 캐릭터 묘사였고, 티나와 엘리엇의 티키타카도 다른 어떤 로맨스보다 재미있었다.

아들이 죽고 슬퍼하는 엄마이자 성공한 제작자인 티나는 물론이고, 잠깐 등장하는 비비안의 캐릭터도 남자 작가가 이런 캐릭터를 쓴 것이 좀 믿기지 않다가, 주변에 딱 티나 같고, 비비안 같은 사람이 있었을거라 결론.

이런 묘사들

다른 아이를 대니로 착각하며, 혹시 대니가 살아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되자
“그녀는 이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제껏 스스로를 강인하고 유능하고 침착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기든 잘 대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대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에 마음이 그저 착잡했다.”

티나의 전남편 마이클은 잘생긴 개쪼다고, 그에 맞는 비중과 앤딩을 가지고 있다.

라스베가스 쇼 댄서로 자부심을 가지고 성공적이었던 티나는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 되었을 때 현실을 깨닫는다. 운이 좋아도 쇼 댄서로는 기껏해야 10년밖에 남지 않았고, 서른여덟에 허무하게 일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결심 후, 다른 능력을 발휘해 새로운 일, 안무가를 시작한다. 싸구려 호텔 라운지에서 공연하는 짧은 뮤지컬 안무가로 시작해서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다 라스베가스의 큰 손인 조엘을 만나 천만달러 예산의 큰 쇼를 제작하게 된다. 대니가 죽고, 그녀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되고, 쇼는 대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티나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강인함과 회복 능력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묘사들이 꾸준히 나온다. 사실, 이야기는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좀 멋대로지만, 나는 장르소설의 멋대로 설정에 너그럽기에 멋진 여주인공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초반에 잠깐 나오는 청소부, 76세, 비비안에 대한 묘사도 좋다.
대니의 방에 지독한 장난같은 일이 벌어져있는 걸 본 티나는 그녀 외에 집에 들어온 사람이 비비안밖에 없음을 알지만, 비비안이 “이런 말을 칠판에 썼을 리가 없다. 그녀는 상냥한 할머니였다. 혈기가 왕성하고 독립심이 강했지만 이런 잔인한 장난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고 티나가 말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비비안은 정말 용감하고, 독립적이지!

놀란 마음을 달래려 버번을 마시고,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와인을 마시는 그런 장면들이 두 세 번 나오고, “술을 너무 마시고 있다. 어젯밤에는 버번, 오늘은 와인이라니. 이제껏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술을 마신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술을 제일 먼저 찾았다. ‘매직!’초연을 끝내고 나면 술을 줄일 것이다.” 라는 말을 같이 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비비안으로 말하자면, 니켈 더처스다. 라스베거스에서 가장 싼 슬롯머신만 하며, 다른 어떤 큰 손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버티는 노인들을 니켈 더처스라고 하는데,

“니켈 더처스들은 대부분 남편과 사별했거나 독신이라 종종 모여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누군가가 아주 가끔 커다란 잭팟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서로 축하해주었다. 모임 중 누군가가 죽으면 일제히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들은 기묘하지만 단단한 공동체를 형성했고, 함께 모였다는 소속감은 만족스러웠다. 젊음을 숭배하는 나라 미국에서 소외된 노인들은 어울릴 만한 공간을 찾고픈 마음이 간절하게 마련이다. 많은 노인이 결국 그러지 못하지만, 니켈 더처스들은 찾아냈다.”

비비언 딸이 계속 같이 살자고 하지만, 딸이 사는 동네인 새크라멘토에 몇 번 가보고,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동네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무슨 일이 생기고 시끄럽고 불빛과 흥분이 가득한 라스베이거스를 떠나지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세크라멘토에 살면 더는 니켈 더처스가 될 수 없었다. 더 이상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 될 것이었다. 그저 다른 할머니들과 똑같이, 딸네 식구와 살면서 할머니 놀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고 죽을 때를 기다리겠지. 그런 삶을 어떻게 참고 살라는 말이야.”

그러고보면, 남자 주인공인 엘리엇은 티나와의 티키타카 외에는 그냥 딱 필요한 장면에 딱 필요한 능력으로 등장하는 한편, 조연인 비비안에 대한 묘사가 더 깊다.

비비언이 대니의 방에서 폴터 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에피소드의 결말은 너무 유쾌했지!

티나는 악몽을 꿔도, 집이 폭파되어도, 무서워하다가도 저 개새끼를 죽여야 해. 저 삽으로 때려죽일 거야. 남자를 몽둥이로 패야겠다. 고 생각하고, 내 앞에 있으면 눈알을 파버릴거야. 막 이런다.

그런 티나에게 전남편 마이클은 티나가 일을 계속 하려한다는 이유로 티나를 만난 십여년간 계속 발전하는 티나 옆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티나에게 “여전히 남자 자존심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년이야.” 라고 말한다.

티나는 이전에는 사랑했지만, 이제 굿바이. 미움도 아무 감정도 전혀 없다며 마이클을 떠난다.

티나와 엘리엇의 티키타카
++
엘리엇이 두 번째 잔을 헹구어 건조대에 놓는 모습을 보고 티나가 말했다.
“집안일을 아주 잘하시네요.”
“하지만 전 창문까지 닦지는 않습니다.”
“전 가정적인 남자가 보기 좋더라고요.”
“그럼 제가 요리하는 걸 보셔야겠군요.”
“요리도 하세요?”
“무척 잘합니다.”
“가장 잘하는 요리는 뭐예요?”
“전 다 잘합니다.”
“와, 요리 쪽에도 자신감이 대단하시구나.”
“훌륭한 요리사란 본인의 요리 솜씨에 극단적인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법이죠. 주방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자기 재능을 평가할 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합니다.”
“당신 요리를 제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요?”
“그러면 제 몫에 더해 당신 몫까지 제가 다 먹을 겁니다.”
“그럼 전 뭘 먹고요?”
“제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겁니다.”

.
.

“대단한 로펌을 세운 일을 이야기할 때는 상당히 겸손하시면서, 요리에는 아주 자부심이 넘치시잖아요.”
엘리엇이 웃었다.
“제 변호 솜씨보다 요리 솜씨가 더 좋기 때문이죠. 자, 제가 정장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칵테일을 좀 만들어주시면 어떨까요? 5분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진정한 요리 천재가 작업하는 모습을 곧 보게 되실 겁니다.”
“작업이 잘 안 되면 우리는 언제든 차를 타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러 갈 수도 있겠죠.”
“왜 이렇게 절 괴롭히시죠?”
“웬만한 요리는 맥도날드 햄버거보다 맛있기 힘들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를 곱씹게 될 테니.”

소설, 뭐 있냐. 술술 읽히고, 등장인물들 캐릭터 좋고, 해피앤딩이면 좋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실이 없는 시대가 온다 - 디지털 시대,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존 카우치.제이슨 타운 지음, 김영선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인지 모르고, 제목만 보고 사서 이제 읽었는데, 저자가 애플 교육담당 부사장이었다. 

디지털이 아이들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고, 최근에 소셜딜레마에서 

소셜미디어 그룹 고위층들은 아이들에게 소셜미디어 제한한다는 내용도 봤어서 좀 찜찜하게 읽기 시작했다. 


교육에 뜻을 둔 저자지만, 판매자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고, 애플과 스티브 잡스에 대한 반신격화? 느낌이 강해서 교육서적으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궁극적인건 교사와 학생의 1:1 수업이라고 하는 (교사가 아닌) 비전문가의 이야기인데, 그게 참.. 싶은거지. 그래서 그 간격을 '기술'로 메꿔라. 라는 결론. 사람들은, 국가는 교사에게 전문가가 아니라 신이 되길 바란다는 그런 현실파악은 좋았다. 


애매한 포지션으로 읽긴 했지만, 컴퓨터 회사에서 컴퓨터로 어떻게 교육 잘 시키는지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책이었다.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모든 사람은 다르다. 신체만이 아니라 학습 방식과 속도에서도 그렇다. 또 사물을 보고 정의하는 방식도 다르다. 물론 사전이 일반적인 정의를 제시해줄 수는 있지만 제가각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독자들은 이 말을 경제적 성공과 동일시할지 모르지만, 나는 경제적 이익과 무관하게 어떤 사람이 특정한 분야에서 갖는 영향력과 동일시할 수 있다. -64- 


"교육이란 들통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불을 지피는 일이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에릭슨이 전문과의 성과에 관한 연구에서 내린 결론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타고난 재능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연습의 결과다. 이 말이 너무 빤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함정은 습관적 연습 regular practice이 아니라 의식적 연습deliberate practice 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의식적 연습은 '반복과 주입'이나 암기 훈련 같은 게 아니다. 이들의 유용성은 극히 제한적이다. 필요한 건 현재 수준을 넘어서기 위한 반복된 시도라고 에릭슨은 말한다. 이런 시도에서 실패할 때마다 무언가를 배우고 난이도가 매번 높아진다. 비디오게임에서 한 레벨을 통과하면 캐릭터가 더 강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 89


학습에 관한 한 실수는 처벌받을 만한 잘못이 아니라 귀중한 피드백이자 기회로 여겨야 한다. 예를 들어 애플에서는 초기에 실수가 나오지 않으면 충분히 혁신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신이 교육에서도 일반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와 교실에서 직접 해보는 학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여기에는 조직, 재정, 통솔력 등과 관련한 많은 이유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학생들이 산을 오르도록 돕는 데 쓰이는 산꼭대기형 공간, 말하자면 메이커 공간,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기회 등이 없기 때문이다. - 128- 


이런 이야기들은 개발자 마인드 같고, 좋아하는 이야기. 실수는 귀중한 피드백이자 기회. 


"미래가 도착했다. 하지만 그것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 윌리엄 깁슨


애플은 컴퓨터와 핸드폰과 태블릿 등을 파는 회사다. 코로나 시대에 아이패드와 아이북의 매출이 훅 뛰었다고 하고, 주변에는 아홉살, 열살 아이들이 최신형 아이패드를 들고 공부를 하고 있다. 애플사람이 이런 책 쓰면 당연히 위화감 들지!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중요하거나 기초가 되는 것이어서 학생들이 배워야 하고, 따라서 졸업 요건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교과목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거의 항상 수학, 과학, 읽기다. 이 세 교과 아래에는 두 번째 단계의 교과들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흔히 '필수'이지만 세 교과보다 훨씬 덜 강조된다. 역사, 사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아래 단계에는 어느 한때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훨씬 덜 강조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택 과목으로 격하되기도 하는 교과들이 있다. 여기에는 물리, 미술, 음악이 포함된다. 현재 컴퓨터공학, 기술, 코딩은 대부분 이 맨 아래 단계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 214


가장 노련하고 재능 있는 교사도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허우적거린다. 모든 학생이 자신의 결함과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줄 적절한 학습 활동을 찾아 준비하고 배치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시간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교육자들은 마지못해 효과보다는 테일러적인 효율에 의지해, 존재하지도 않는 평균의 학생을 위해 가르칠 수밖에 없다. 이는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 있는 학생들, 다시 말해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뿐 아니라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또한 잃는 결과로 이어진다. - 229- 


오늘날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려면 전문지식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마우스로 클릭하거나 손가락으로 두드리거나 문지르기만 해도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 오늘날에 딱 적용되는 말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는 콘텐츠 전문가인 교사보다는 맥락context  전문가인 교사가 더 필요하다.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맥락 속으로 확실히 들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 236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린다 2020-11-03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앞으로 당연히 생각해야 할 문제라 여겼지만 코로나로 인해 더 빨리 변화하는 느낌이에요 국가에서 굉장히 중요한 교육제도가 어떻게 변해갈지 두려움반 설렘반이네요

하이드 2020-11-03 18:09   좋아요 0 | URL
네, 안 그래도 변화하고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변화가 급격해졌어요. 어른의 일도, 아이의 공부도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기를, 그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지요.

모든것이좋아 2020-11-03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기성세대는 잘 모르는 것 같고 아이들이 개척하리라 믿기엔 불안한 현실이네요.

하이드 2020-11-03 18:10   좋아요 0 | URL
이 책에도 반복해서 나와요. 교사가 아이들보다 더 기술적으로 모른다는 거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가르치는 한계 같은 걸텐데, 생각해볼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조선인 2020-11-04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해보는 학습이 점점 줄어든다는 건 진짜 공감해요. 편의성, 비용, 윤리, 안전 등 다양한 이유로 실습 교육이 줄어들고 있는데저 다닐 때보다 지금이 오히려 실습 수업이 적다는 데 분개하고 있어요. 특히 안전사고 문제로 과학 실험이 줄어도 너무 줄어서 따로 과학반 활동을 하지 않는 한 실험실습이 거의 없다는 게 충격적입니다. 해부학 실습도 윤리상의 문제로 더 이상 안 한다는데 해부학 실습을 좋아했던 저로선 너무 아쉬운 대목이에요.

하이드 2020-11-04 17:12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나오는 프로젝트 수업들 정말 부럽더라구요. 지금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기술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꼭 실습수업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닌데, 올해는 이래저래 많이 힘들고, 많은 도전이 필요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 건 아닌데, 이 책은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다.

첫 단편인 ‘11분의 1‘을 읽고

˝혜정 씨, 보고 싶을 거예요.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진짜 가끔씩 정세랑 너무너무 좋다. 고 소감 남겼는데, 모든 단편이 다 좋다. 표제작인 ‘목소리를 드릴게요‘만 보통으로 좋고, 나머지는 다 너무 좋다.

거대지렁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읽고, 진짜 좋아서 계속 곱씹고 다녔는데, 마지막의 ‘메달리스트의 좀비시대‘ 좀비 이야기라니! 나의 ‘좀비떼가 나타나면- ‘ 병을 재발 시키는 훌륭한 단편이었다.

정세랑 작가가 ‘극단적 환경주의자‘라서 너무 좋고,
작가의 말에 이 책이 2020년 1월에 나와서 어울린다고 했는데, 불과 몇 달 후, 이 책이 정말 이 시대에 걸맞는 책이 되어버릴 줄 몰랐겠지.

책을 읽는 동안 거대지렁이와 블루필과 좀비떼가 나타난 후 리셋 되어 7교시 수업을 들으며 과거 21세기의 야만을 돌아보는 정세랑 유니버스에 푹 빠졌다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