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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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에 집단 폐사한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갈매기때의 사진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그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힘차게 날고 있는 은빛 날개의 갈매기때. 여섯시간여의 비행끝에, 바다에서 청어때를 발견한 우두머리 갈매기. 하강을 지시하고, 모두는 120미터 상공에서 꽂히듯이 바다로 퍼덕거리며 잠수한다.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들어가서 나올때는 한마리씩 통통한 청어를 입에 물고 있다. 그렇게 포식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에 비상이야. 모두 나와라" 날카로운 경고가 있다. 깊이 잠수해 있어 경고를 못들은 갈매기 켕가는 물위로 떠 오르자 자기 혼자만이 남아 있는걸 깨닫는다.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쭉 폈지만, 커다란 파도가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가까스로 물 위로 떠오른 켕가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젖혔지만, 눈앞이 칠흘 같은 어둠에 휩싸인듯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바닷물의 기름 탓이라는 사실을.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기름 덩어리 중심부에서 벗어나고, 잠수해서 눈가의 기름을 씻어내고, 꽁지털을 거의 다 뽑아가며, 날 수 있도록 끈적거리는 기름들을 떨쳐낸다. 마지막의 힘겨운 비행 끝에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가 쉬고 있는 발코니에 불시착한다.

작가는 루이스 세뿔베다.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 이나 '지구 끝의 사람들'  등의 작품들에서 보듯이, 작가는 그린피스나 유네스코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파괴되는 환경에, 멸종되는 동식물에 대해 경고한다. 어느날 작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인간이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빚어지는 폐해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갈매기가 나오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고양이들이 나오며, 침팬지도 나오는 색다른 동화를 씀으로써 약속을 지킨다.

죽어가는 켕가는 구할 방법을 물어보려 가려는 소르바스를 잡고 세가지 약속을 한다. 알이 부화되도록 잘 품어줄것. 보호해줄것. 나는 법을 가르쳐줄것.

이 책의 앞면 삽화는 아주 예쁘다. 검은 고양이가 평화롭게 자고 있는 갈매기를 품에 안고 눈을 감고 있다. 열린 문으로 보이는 방안에서는 다른 네마리 고양이들이 뭔가를 열심히 의논하고 있다. 몇페이지 건너 있는 삽화들은 작품에 대한 몰입을 돕는다. 책을 다 읽고 이 대단한 삽화를 보기 위해, 삽화가를 찾아보고 '이억배'라는 우리 나라 사람임을 알고 무척이나 놀랐다. 이국적이고, 강렬한 삽화는 이 책과 너무도 어울렸다. 고양이 소르바스가 처음 알을 품고 잠이 든 모습이나, 고양이들이 갈매기를 묻어주고, 달밤에 송가를 부르는 모습, 하리의 전시장에서 고양이들이 모여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있는 모습등 '우와, 이건 대단하잖아'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삽화들은 루이스 세뿔베다가 예상치 못한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이다.

갈매기는 죽고, 소르바스의 고양이 친구들은 세가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마침내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은 약속을 지켜낸다.

갈매기가 날고 싶어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린 고양이들은, 마침내 갈매기가 자기도 날고 싶다고 하자, 다들 기뻐서, 비행술을 가르치고자 한다. 몇번의 시도끝에 고양이들은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고, 결국 갈매기는 비가 오는 어느 날, 날개를 쫙 펴고 날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소르바스는 말한다.

" 그래요, 아기 갈매기는 이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 그게 뭔데?"

" 오직 날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죠."

그렇다. 오직 날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날 수 있다. 세뿔베다는 마지막으로, 망쳐져 가는 환경을 지켜보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 없고,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만이 깨끗한 지구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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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1-1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이 별다섯개를 주셨으니 보관함에 안 넣을 수가 없군요.

하이드 2005-01-1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책 좋아요. 근데, 저 별 디게 헤퍼요.
 
말더듬이 주교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7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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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

라는 당연한 사실에 궁금증을 느끼고, 페리 메이슨은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자신이 멜로이 주교라고  하며 의뢰하는  22년전의 과실치사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한다. 상대는 백만장자 은행가 렌월드 가문이다.

한시간 정도의 재미있는 시리즈물 드라마를 본 기분이다. 추리소설이 갖추어야 할 점들은 갖추고 있는 책이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다음 작품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는 의뢰인의 등장과 같은 장치에, 독자들은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사볼지도 모르겠다. 매주 보는 드라마를 기다리듯이.

페리 메이슨의 첫인상은 '거만함'이었다.

["가난한 여자를 위해 백만장자를 상대로 하여 싸워볼 마음도 있습니까?"

 메이슨이 오만한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의뢰자를 위해서라면 악마라도 상대합니다." ]

그런 나의 인상은 뒤에 가서 더욱 더 굳혀졌다.

["블래너 사건에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어. 뭔가 시적(詩的) 인 정의를 느끼게 하지. 가슴을 죄는 듯한 인생의 드라마적 요소를 남김없이 갖추고 있다고. 지금 나는 반드시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기분은 아니야. 다만 내가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기능을 그 시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쓸 작정이야."]

페리 메이슨의 투사 같은 성격이나, 그것을 겉으로 다 드러내는 모습이나, 그의 애인인 비서 델라 스트리트를 거리낌없이 위험으로 내몰아 미끼로 삼는 장면이나, 그런 그를 위해서라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불사하는 비서 델라나 조금씩 조금씩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별로 거리끼거나 한것은 아니 것이, 얼 스탠리 가드너의 이 작품은 '시간죽이기' 용 추리 소설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밍턴 스틸'이나 '제시카의 추리극장' 같은 시리즈물을 볼 때, 우리는 사건 그 자체나 그 사건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비극이나 심리 보다는 우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사건을 해결하고, 어떻게 궁지에서 빠져나오나에 관심을 가진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도 그와 같다고 생각된다. 주인공이 좀 잘난체 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그의 매력이지만) 우리는 그 주인공에 포커스를 맞추어 사건을 보게 된다. 매력적인 주인공과 흥미로운 조연들 . 예쁘장한 여비서와 투박한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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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이윤기 지음 / 동아일보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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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고향부터 묻는지, 왜 출신학교부터 묻는지, 섬기는 종교부터 묻는지, 나이부터 묻는지 나는 그 까닭이 여간 궁금하지 않다. 어째서 상대에게서 자신과의 '동류항'을 찾아내려 하는지, 찾아내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동류 의식을 느낄 수 없으면 견딜 수 없이 쓸쓸해 하닌지, 어째서 동류항을 찾아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동아리가 되면 아늑한 평화를 느끼는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어째서 우습게 보이는지, 어째서 '불출'로 따돌리고 싶어지는지, 그 까닭이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227쪽

1453년 오스만 터키 군을 이끌고 지금의 이스탄불을 장악한 술탄 마흐메드는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 않았다. 술탄 마흐메드는 대성당 옆에 회교 사원식 첨탑을 세우게 하고 그 대성당을 회교 사원으로 쓰게 했을 뿐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아야 소피아에는 성직자들이 문맹에 가까운 동방 교회의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그려 놓은 무수한 모자이크 벽화가 있었다. 그러나 술탄 마흐메드는 그 벽화를 훼손하지 않았다. 그 위에 회를 칠했을 뿐이다. 내가 찾아간 아야 소피아에서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1964년부터 시작된 회칠을 뜯어내고 고생창연한 기독교의 벽화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그러니까 회교도들은 기독교 교회의 벽화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회칠을 한 다음, 500년 동안 자기네 사원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아야 소피아의 , 성모자상이 올려다 보이는 돔을 두고 '장엄한 광경( Awe- Inspiring Generosity) ' 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눈에 보인 것은 오스만 터키의 회교가 지닌 '장엄한 아량( Awe-Inspiring Generosity)' 이었다. 회칠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고대의 벽화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저 놀랄 만큼 관대한 문화적 유연성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제국을 경영할 역량을 가진 자들의 도량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종교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서 나온 것인가?-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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