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아.. 책 읽고 울어본게 얼마만인지. 지금도 훌쩍이며 리뷰를 쓰고 있다. 이런 내용인 줄 알았으면, 안 읽었을텐데 말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할까봐 미리 얘기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나의 눈물보를 지금도 터뜨리게 하는건 바로 '플란더즈의 개'라는거. '인어공주'나 '성냥팔이 소녀' 같은 이야기엔 울지 않는다. 어릴적부터.. 지금도.. 제목인 '얼어붙은 송곳니'는 아마 책 속에 나오는 울프독 질풍의 그것이리라.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 호퍼의 '나이트혹스' 일본판 정도일 쓸쓸한 밤의 그 곳에 불이 난다. 불의 원인은 한 남자의 벨트에 설치된 폭약. 자칫 테러로도 여겨질 수 있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다. 두명씩 짝을 지어 수사하게 되는데, 다카코는 다키지미란 땅딸막한 중년의 형사와 짝이 된다.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극소수인 여자형사로서의 다카코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포커페이스를 선택한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불굴의 의지가 있어서, 혹은 정의감에 불타서 그녀가 그자리까지 간 것이 아니란 점이 맘에 든다. 그저 소아천식을 낫게 하기 위해 배운 합기도를 활용하고 싶었고, 제복에 대한 동경도 얼마간 있었고, 책상앞에 붙어서 하는 일은 적성에 안 맞았고 그 정도에서 시작했으나 상황은 그녀를 경시청 전체에 여섯밖에 안 되는 여자형사로 만들었다. 때로는 트로피성 진급이었고, 때로는 그녀의 전보직(오토바이 기동대) 때문이기도 했으니, 운도 있었고, 버틸 성격과 오기도 있었다. 순진했던 경찰 초년병 시절 같은 기동대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그녀만이 형사과로 진급하면서 생겨난 갈등과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후 독립하여 생활하고 있는 그녀는 그닥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트러블메이커인 동생도 있고, 장녀콤플렉스도 있다. 방광염도 있고, 외로움도 많이 탄다. 포커페이스이지만, 속으로는 투덜거릴꺼 다 투덜거리는 어찌보면 귀여운 여자다. 전형적인 중년 남자 형사인 다키지마를 만나 그녀를 무시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그를 황제펭귄이라 부른다.

그녀와 다키지마가 파트너로서 서로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도 이 작품의 볼거리다. 막 과장된 상황설정같은 것은 없어서 더 좋다. 일본 추리소설 중에 이렇게 담담한 책을 읽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경찰소설 하면 과잉감정의 대표주자 요코야마 히데오가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보다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나 J.J 메릭의 '기대온 시리즈' 와 같은 경찰시리즈에 가깝다. 다만 오토바이를 잘 타는 여자형사가 등장하고, 이작품의 소재가 다소 특이한 '개'라는 것이 좀 튀는 점이라면 튀는 점이랄까.

발화의 시점이 된 소사체로 발견된 그 남자를 조사하던 중에 그의 다리에 난 짐승에 물린듯한 상처를 발견하게 되고, 비슷한 시점에 커다란 짐승에 의해 물려 죽은 회사원의 시체가 발견된다. 폭발물과 늑대개로 추정되는 짐승을 조사하는 반이 나뉘고, 다카코네는 늑대개를 조사하게 된다.

작품의 클라이막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내 눈물을 쏙 뺀 장면은 추적신이다. 다카코는 소위 '도마뱀'으로 불리우는 오토바이 기동대 중에서도 특별히 잘하는 사람을 뽑아낸 형사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카코와 오토바이 이야기는 뜬금없이 얘기를 이어가기 위해 툭 튀어나오는 것 아니고, 이야기내내 나온다. 다카코와 질풍의 고속도로 추적신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과 속박감과 안타까움과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개 이야기에 극도로 민감한 나에게만 그런건 아니고, 번역자에게도 그랬다고 하니, 믿어보시라.

기억해둘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만세- 그 이름은 바로 노나미 아사.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  시리즈의 장편과 단편집이 더 있다고 하는데, 인상적인 첫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만큼, 더 나와주었음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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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8-08-2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네여...쯔르릅.

Beetles 2008-09-0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러니 제가 알라딘 로긴하면 하이드님 서잴 걍 못지나친다구염....
 
브로큰 쇼어 블랙 캣(Black Cat) 15
피터 템플 지음, 나선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호주 최고의 하드보일드 범죄 작가...  2007 던컨로리대거상 수상작(구 골드대거상) ... 한편으로 냉혹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장난기 넘치고 웃음짓게 하는... 배꼽빠지게 웃길 수도 있...는 (어디?어디?!)

하드보일드에 혹한 하드보일드덕후인 나는 게다가 두껍기까지한 이 책을 나오자마자 눈여겨보고 냉큼 샀는데
위의 선전들이 귀를 광속으로 팔랑거리게 했던 것은 물론이고, 내 취향과 맞는다고 생각하는 골드대거상 수상작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이 책은 열다섯번째 블랙캣 시리즈인데, 수상작 위주로 출간되는 이 시리즈가 워낙 재미없기로 유명하다.는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다만. 격하게 아끼는 아이슬란드 작가 아날드루 인두리다손의 책이 두개나 끼어 있고, <폭스 이블>, <와일드 소울>, <미션 플리츠>, <캘리포니아 걸>과 같이 좋아하는 작품들이 있기도 한데.. 대체적으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시리즈는 아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호주의 어느 스산한 바닷가 마을이다. 캐신은(주인공 이름때문에 끝까지 감정이입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강력계 형사였다가 현장에서 크게 다친 후, 이 마을로 내려와 있는 중이다. 사고로 여겨지는 마을 유지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수사로 용의자인 원주민 아이들 셋이 죽는다. 워낙 인종차별로 유명한(?) 호주이고, 이 책에서는 원주민 차별의 둔탁한 아우라가 내내 마을과  소설을 감싸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미'없다. 그러니깐, 허접해서 화나는 그런 책은 아닌데, 재미가 없다. 무재미... 책소개에 낚이는건 바보지만, 책소개와는 너무나 딴판으로 재미없다. 500페이지 되는 소설이 한 350페이지 정도부터 슬슬 읽을만하고, 그나마 앞부분 읽느라 들인 시간을 보상해줄만한 대단한 재미도 아니고, 아니, 지금까지 해 온 이야기에서 안드로메다로 흘러가는 결론은 재미는 있으나 좀 황당하기까지 하다. 뻔한 결말도 그저그렇지만, 그렇다구, 갑자기 선로를 뛰어넘는 결말도 별로다. 내내 악당으로 알아온 놈( 진짜 악당 맞는데)의 단죄는 없고, 갑자기 다른 사건, 다른 악당으로 넘어가니, 그 내내 악당으로 알아온 놈이 어떻게 되었는지 찜찜함을 남겨 놓는다. 그런 식의 벌려 놓고 풀리지 않는 찜찜함은 몇개 더 있다.

캐신이라는 이름의 등장인물은 그 이름만은 너무나 독특해서 뇌리에 남겠지만, 캐신도, 그 주위의 인물들도 이렇게나 긴 이야기에서 그 캐릭터의 개성과 존재감이 희미하다. 하드보일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탐정이 때론 비겁하지만, 그 어떤 선은 안 넘는데, 이 캐신이라는 작자는 때때로 가끔 조연으로 등장하는 나쁜 경찰같은 짓을 하며, 사소한 선을 넘는다. 그게 안 사소하고 드라마틱하면, 그걸로 개성이겠는데, 사소하게 인간성 드러내는 선들이라 정이 안 간다.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몰입 실패, 이야기에 대한 몰입 4/5가량 실패.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책소개가 새삼 원망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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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0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낚였다'라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럴 땐 타인의 추천, 신문, 인터넷 지상의 기사들의 포인트가 나와는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이드 2008-08-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소개에 낚이는 제가 바보죠;; 신간들의 경우 특히 더해요. ^^ 좋았던 책도 소개와 영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있구요- 말씀대로 팔리는 포인트와 읽는 포인트가 다르기에 생기는 차이겠네요.

루나 2009-03-0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낚였죠.ㅎㅎ 번역이 잘못됐나 의심하기도 했구요.. 상도 빵빵하고.. 설명도 좋던데...
 
인간의 증명 - 하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쿄 중심부 호화호텔의 레스토랑에서 흑인 남자가 칼에 찔린채 죽는다.
주된 이야기는 이 사건을 조사하는 도쿄의 경찰들.
도쿄의 의뢰를 받고 흑인남자를 조사하는 뉴욕 하렘구역의 경찰이다.
예쁜 아내를 긴자의 술집으로 내보낼 수 밖에 없었던 무능한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게 되고,
정치가인 아버지와 현모양처타입으로 매스컴 스타인 어머니의 장사도구인 아들은 엇나간다.

네군데 장소에서 네가지 사건이 하나로 모이게 되는 장면들은 기가막히다.
끝부분으로 갈수록 한장한장 넘길때마다, '아- '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로서 증명시리즈중 첫번째인 <인간의 증명>을 읽었다. 역시 모리무라 세이치. 라고 말할밖에.
내가 가지는 모리무라 세이치에 대한 기대치는 감동이나 애착은 없어도, 그저그런 추리소설의 두배로 재미있고(두배의 트릭. 여기선 네배?) 처음부터 끝까지 딱히 흠잡을 곳 없는 전개다.
이 책에는 여러가지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부모자식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정부와의 사랑, 배신당하는 사랑  
이야기의 보이는 주제가 이와 같은 '사랑'들이라면, 숨은 주제는 아무래도 '인과응보'

좀 오래된 일본 추리소설치고는 소설에 나오는 뉴욕 하렘의 형사 이야기가 생각보다 위화감이 덜하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는 것은 새롭지 않으나, 이 소설에는 조금 특별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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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8-08-2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증명을 읽으셨군요.사회파 거두 모리무라 세이치의 대표작인 증명시리즈의 첫 작품이지요.증명 3부작은 인간의 증명,야성의 증명,청춘의 증명으로 앞의 두개는 쉽게 찾아 읽을수 있으나 뒤의 청춘의 증명은 80년대에 국내에서 번역된바 있으나 판매가 안되선지 재간이 안돼서 쉽게 구해 읽을 수 없는 책이지요.
인간의 증명을 재미있게 보셨다면 레몬살인(신 인간의 증명)도 한번 읽어 보세요.인간의 증명 후속편과 같은 책으로 주인공 형사가 다시 나오네요.그런데 이책은 80년대 말에 나온 책으로 이후 다른 데서 재간되지 않아서 도서관에서나 찾아서 읽어보실수 있으실겁니다.

하이드 2008-08-20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쉽게 구해 읽을 수 있는 책만 읽는지라 ^^ 증명 시리즈 중에서는 <인간의 증명>이 제일 괜찮다고 들었어요. 드라마 보려고 하는데, 의외로 캐스팅이 화려하네요. <고층의 사각지대>도 나쁘지 않았고, <야성의 증명>도 있긴한데, 제게는 아닉 막 정이 가는 작가는 아닌듯합니다.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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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신화를 알고계세요? 사실, 메데이아 혹은 메데아란 이름은 제게 낯설었답니다. 서양문화 2000년 최고의 악녀라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아르고호와 이아손의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한 모험. 이라고 하면, 아, 하며 끄덕끄덕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아손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아손은 이올코스의 왕인 아이손의 아들인데, 어릴적 이복형제인 펠리아스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왕위를 되찾기 위해 가던 중 누추한 노파로 변장한 여신 헤라를 도아주기도 합니다. 이 때 한쪽 샌들을 잃어버립니다. '한쪽 샌들만 신은 아이손 가문의 남자가 자기를 파멸시킬 것' 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펠리아스는 이아손을 없애버리기 위해 계책을 꾸며 그에게 코르키스에 가서 황금 양모피를 가져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조건을 세웁니다. 이아손은 아르고호라는 배에 그리스의 이름난 영웅들을 이끌고 코르키스에 도착하지만, 코르키스의 왕 아이에테스는 그에게 불을 내뿜는 황소로 밭을 갈고, 거기에 용의 엄니를 뽑아 뿌리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뒷 이야기는 이아손이 아이에테스의 딸이며 마녀인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 양모피를 가지고 귀국을 하고, 그 과정에서 아이에테스왕이 못 쫓아오도록 메데이아는 어린 동생을 죽여 살점을 바다에 뿌립니다. 이런저런 모험 끝에 귀국하게 되나 그 사이 펠리아스가 아이손을 죽였음을 알고,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힘을 빌려 펠리아스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코린트로 달아납니다. 세월이 흘러 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에는 두 아들이 생겼고, 이아손은 코린트 국왕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하여 코린트에서 권력을 잡고자 합니다. 격분한 메데이아는 왕과 신부, 그리고 두 아들까지 죽이고 멀리 달아납니다. 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마녀'로 등장하는 메데이아는 신화속의 또다른 유명한 마녀 키르케처럼 유능한 치료사이고 마법사입니다.
이 책 속에서 키르케는 메데이아의 이모로 나오고, 아르고호가 귀국하는 사이 들러서, 고국을 등지고 새로운 곳을 찾아 도망가는 메데이아의 미래의 모습의 복선과도 같이 비참한 모습입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남자들을 돼지 떼처럼 섬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지.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티끌만큼이라도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도와준 것이기를 내심 바랐단다. 메데이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느냐?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은 정말 사악해질게야. 서서히 사악해져서 종내는 바닷가에 홀로 서서 저주를 퍼부으며 아무도 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할 게다. 그들이 나한테 쏟아 부은 그 모든 사악함, 야비함, 비천함은 물처럼 쉽게 흘러 나가는 게 아니더구나.

이야기 속의 가장 큰 갈등은 현재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옛관습을 악용하고 시민을 선동하는 권력자와 자신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광포하게 구는 시민들과 메데이아, 코르키스의 강한 여인, 치유자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Medea, Stimmen>으로, <메데이아, 목소리들>로 번역됩니다  <...'악녀'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이야기하는 정반대를 가르키고 있어 찜찜합니다만, 원제의 '목소리들' 이 나타내듯 '목소리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메데이아-이아손-아가메다-메데이아-아카마스-글라우케-로이콘-메데이아-로이콘-메데이아' 각각의 목소리들은 일반 소설의 챕터역할을 하고, 챕터의 제목인 등장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책의 첫페이지에 이와 같은 방식을 '아크로니 :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사건들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배열하는 이야기 방식. 비시간적 서술' 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어려워보이고, 처음 읽을때는 낯설지만,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점점 더 메데이아에 몰입하게 됩니다.

메데이아라는 소위 '악녀' 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에 나오는 진짜 악녀로는 메데이아의 제자였던 아가메다가 있습니다. 메데이아를 증오하는 그녀는 ... 왜 그토록 메데이아를 증오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메데이아가 사랑을 덜 줘서? 메데이아에게 열등감을 느껴서? 라고 짐작하지만, 그 증오의 깊이가 너무나 깊습니다. 다시 정독해볼 일입니다. 아무튼, 그녀는 메데이아를 파멸로 이끄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예리한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코르키스에서 온 사람 중에 유일하게 코린토스에 집요하게 적응한 여인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로 듣는 그녀는 꽤나 정떨어지는 여자입니다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것만은 아닙니다. 굉장히 시니컬한 그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과 우리의 관심이 일치하기 때문에 자신과 우리를 경멸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걸 안다는 것을 아카마스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차츰 밑도 끝도 없는 것이 되어 가고, 그래서 정말이지 신명이 난다. 명쾌한 관계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메데이아와 아가메다 외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인은 등장부분은 짧지만, 그만큼 강렬한 등장과 퇴장을 하는 코린토스 왕의 딸 글라우케입니다. 어릴적 경험한 일로 인해 트라우마가 있고, 심리적 불안감은 종종 발작으로 드러납니다. 깊은 내면 속에 묻어둔 '기억'은 약한 그녀의 몸과 마음을 억압합니다. 메데이아를 만나 한때 그녀를 억압하는 사슬이 느슨해지나, 운명은 그보다 더 강해, 그녀를 비극으로 몰고갑니다.

섬세한 영혼과 지성을 지닌 아가메다와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글라우케는 내내 메데이아를 증오하지만, 그 증오 아래에는 강렬한 애정과 경외와 질투와 시기가 있습니다.  극도로 복잡미묘한 그것은 남녀관계따위의 복잡함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 한눈에 반하고, 이아손 역시 메데이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빠집니다.
이아손의 이야기는 이아손의 목소리로 들어도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는 원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그. 뭐, 어쨌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메데이아니깐요.

남은 주요 등장인물로는 아카마스와 로이콘, 그리고 왕들.이 있습니다.
왕들은 어째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쁜 마법사에 홀린 상태의 로한의 왕과 같은 포스입니다. 권력이라는 마법에 홀린.   
아카마스와 로이콘은 둘 다 코린토스의 실세였으나, 아카마스는 권력지향으로 남았고, 로이콘은 권력의 뒷켠으로 물러났습니다. 아카마스는 아가메다와 관계를 맺고 메데이아를 제물로, 희생양으로 파멸로 몰고가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아카마스의 심리는 단순한 신화 속의 악당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이지요.

로이콘은 이 모든 일을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어쩌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이니 미워할 수 없습니다.

저기 나의 별자리들이 다시 튀어나온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 일들은 얼마나 증오스러운가. 전부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내 말에 귀기울여 줄 사람도 없다. 외롭게 홀로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별들의 궤도를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보고,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예전에는 인간이 무엇을 감내하고 사는지 미처 몰랐다. 이제 여기 앉아서, 인류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 가며 목숨을 부지하고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능력, 이 진저리 나는 능력 덕분에 존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구경꾼으로서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불행이 가슴을 찢어 놓지 않는 한, 결국 구경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입니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빼고 여기서 리뷰를 마칩니다.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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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7-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별명이 안붙었으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봤을까요- 책 다 읽고 뒷편보니 불과 몇개월 전에 산 책인데, 2005년 초판이더라구요;;
이런 책이 ㅠㅠ 이렇게 묻혀버리다니!!!!
그래도 전 하이드님 덕에 정말 좋은 책 많이 읽습니다- 항상 고마운 마음^^;

마음이 정말 말 그대로 무겁네요. 책장 넘기기가 참 힘들었어요.
 
마술사가 너무 많다 - 귀족 탐정 다아시 경 2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9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다아시경 시리즈 2탄이자 유일한 장편이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라는 이름이 낯익다면, 런던 후작이라는 몸 움직이기 싫어하고, 앉아서 사건을 해결하려들며, 본 트리옴페(영어로 번역하면 굿윈 정도?) 라는 왓슨 비스무리한 부하가 있는 등장인물이 낯익다면, 당신은 미스테리 매니아.

그렇다. 제목과 책 속의 런던 후작은 대놓고 렉스 스타우트의 <요리사가 너무 많다> 와 네로 울프와 굿윈의 패러디. 그 커플(?)의 팬인 나로서는 제목부터 반가운 일이다.

이 시리즈는 SF로 분류되지만, 내용은 홈즈식 정통 추리소설에 가깝다.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런던인데, 마술사가 있다.
여기 나오는 마술사는 마술사 하면 떠오르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식의 마술사라기 보다는 과학자라거나 기술자라거나 변호사라거나 CSI라거나... 하는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은근히 까칠한 다아시경과 만만치 않은 성격의 그의 파트너 마술사 숀은 이중첩자의 죽음과 마스터 마술사의 죽음을 해결하게 된다. 각각의 사건으로 여겨졌던 두 사건은 연결되어 있고, 다아시경과 숀은 단순살인사건이 아니라 국가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숀이 런던탑에 갖히게 되고, 숀을 이용해 다아시경으로 하여금 공짜로 사건해결에 뛰어들게 하려는 '네로 울프'를 연상케 하는 음흉스런 런던 후작, 거기에 대응하는 재치있는 다아시경의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한 사건의 연속이다.

제목처럼 마술사가 많이 나오는데, 사건의 배경이 마술사 대회가 열리는 호텔이어서이다.
서 어쩌구 하는 마술사들의 서를 거의 끝까지 西로 알았다는.. 그래서 東이나 南으로 시작하는 마술사는 안 나오나 기다렸다는 멍청한 독자도 있다. (오즈의 마법사의 서쪽나라 마녀, 남쪽나라 마녀가 잠재의식 속에 있어서라고 하면 너무한 핑계인가?)

서는 물론 Sir다. 다아시경이 lord  니깐 sir랑 구별해서 sir를 '경'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서 제임스 즈윈지, 서 라이언 갠덜푸스 이런식으로 나오는 이름의 서를 써ㄹ~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읽고 나서 괜히 억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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