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존 딕슨 카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겨울에 나온 신간 중에 묘한 표지와 제목의 책이 있다.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셜록 홈즈의 이름을 딴 책들이 나오는 것은 그닥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저자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시 한 번 눈이 가게 된다. 바로 존 딕슨 카와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이 이 책의 공동저자이다.
 존 딕슨 카의 책은 우리나라에도 꽤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의 특징은 밀실살인사건과 기괴한 분위기이다. 영국에서 활동했던 그는 그 자신이 베스트셀러 추리작가이자 셜로키언으로 <아서 코난 도일의 생애>를 쓰기도 한만큼 셜록 홈즈에 대해서 전문가라 하겠다.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은 코난 도일의 막내 아들로 유작관리자이자 '아서 코난 도일 재단'을 설립할 정도로 아버지의 작품에 전문가이다. 사실 나는 재능에 관해서만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없고,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이 비록 그의 아버지가 창조한 '셜록 홈즈'라는 역사에 남는 걸출한 탐정의 이름값에 빚지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재능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열두편의 미공개 사건집을 읽고 나니 의외로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의 작품들이 재미로 앞서고, 존 딕슨 카의 작품들은 조금 더 홈즈스러웠다.

 나는 자칭 미스터리 매니아다. 척박한 도서 시장에 장르문학팬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은 꽤 쉬워졌다. 읽는 것보다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이 더 많으니 말이다. 미스터리 매니아와 미스터리 매니아가 아닌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추리소설이란' 이란 질문을 던진다면, 누구라도 셜록 홈즈를 한번쯤 떠올리지 않을까?  나는 내 자신이 대단한 셜로키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추리작가의 이름을 죽 나열해본다면 아서 코난 도일은 아마 저 뒤에나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하다. 셜록 홈즈는 특별하다.  

열두개의 단편들은 기존의 셜록 홈즈의 작품들에서 한두줄로 언급되고 지나갔던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시리즈물의 미덕은 시리즈의 주인공과 주인공을 나타내는 소소한 장치들이다. 공인된 셜로키언 둘이 쓴 책이니 홈즈와 왓슨에 대하여 셜록홈즈 팬들의 욕구를 흠잡을데 없이 채워준다. 그리고 이야기. 추리작가로 존 딕슨 카는 이미 거장이고,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 역시 만만치 않음을 책을 읽고 나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이 겨울의 선택은 바로 '셜록 홈즈'이다.
남은 겨울에는 셜록 홈즈나 복습해 보아야겠다.

"범죄는 어디로 갔을까, 왓슨? 불가사의한 일, 상식을 벗어난 기괴한 사건이 없다면 세상 살아가는 맛이 모래나 마른 풀 씹는 것 같지 않겠나? 사건은 영원히 사라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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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반쪽 2008-12-16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이어요^^

하이드 2008-12-1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판형도 독특해서, 더 즐거우실꺼에요- ^^
 
종이의 음모 1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 이것이 내가 자네한테 경고했던 사악한 짓일세. 우리가 상대해야 할 진짜 적은 종이돈에, 채권에, 주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이야. 종이 위에서 범죄가 저질러지고, 종이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피해자뿐이야."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데이빗 리스의 작품이다. 커피상인에서의 소재가 선물, 풋옵션 등이 복잡하게 얽힌 추리소설에 그닥 등장하지 않는 금융소재였는데, 데이빗 리스의 데뷔작이자, 에드거 알랜 포우상 수상작인 <종이의 음모Conspiracy of Paper> 역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영국 최초의 주식시장 붕괴를 소재로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해회사의 주식시장 버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주식거래, 국채, 복권의 개념은 모두 당시에 신개념이었고, 데이빗 리스는 은화에서 '종이'로의 가치전환이 막 이루어지는 시기의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광기를 작품 속에 잘 녹여 내고 있다. 

주인공인  벤자민 위버는 유대인이고, '유다의 사자'로 알려진 유명한 권투선수 출신이기도 하다. 엄격한 유대인 집안에서 검은양이었던 그는 집을 나온 후 이런저런 '밝히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다가 자신의 신체적 특기를 살려 도둑잡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도둑잡이마저 사기꾼이자 거리의 좀도둑, 매춘부, 배우들의 왕인 조나단 와일드의 등장으로 위태로운 지경에 벨포라는 사내로부터 의뢰를 받게 된다. 벨포의 아버지는 자살로 죽었고, 위버의 아버지는 마차사고로 비슷한 시기에 죽었는데, 그 두 죽음이 실은 연결되어 있고, 살인이라는 것이다. 위버는 이 조사와 함께, 준남작인 오웬경의 '연애편지' 를 찾는 일을 해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금융시장의 가장 큰 두 축인 잉글랜드 은행과 남해회사 사이에 끼게 된다. 두 커다란 금융회사의 거물들 자신의 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겼던 블로스웨이스트와 영 꺼림찍한 남해회사의 에이들먼의 사이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종이의 음모'를 밝혀 나간다. 소재가 지루하다고 이야기까지 지루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벤자민 위버의 유대인 신분은 당시 시대의 갈등의 도화선과도 같았으며, 벤자민 위버는 유대인 사회의 이단아여서, 자신의 과거와 밀접하게 연관된 지하세계를 이용하여 밥벌이를 한다. 그의 경쟁자격인 조나산 와일드는 지하세계의 왕이고, 위버는 자신의 정직성과 자신은 미처 모르는 '사업의 재능' 을 이용해 자신을 차별화한다. 18세기 런던의 뒷골목에서 귀족들이 다니는 살롱까지 종횡무진하는 위버의 활약. 암코양이 같은 매춘부와 닳고 닳은 술집주인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과부와의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맞고, 때리고, 찌르고, 총질하며 쫓고 쫓기는 긴박한 장면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에서도 그랬지만,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위버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엘리아스로부터, 그리고, 당시 증권거래의 중심이었던 커피하우스에서 귀동냥을 해가며 주식거래, 국채 등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독자 역시 그 배움에 함께 한다. 금융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개념들이지만, 역시나 이 소설의 백미는 '처음으로' 종이쪼가리들이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혼란과 두려움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광기와 탐욕이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데, 각 인물들은 각각의 개성을 넘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구름 위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주인공인 벤자민 위버부터가 일반적인 영웅 캐릭터와 거리가 멀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 하나하나에도 숨을 불어 넣는 데이빗 리스의 솜씨에는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0년도 더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꼈던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시에 처음으로 등장한 각종 '가치 있는' 종이들로 인해 첫 버블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면(이야기는 패닉에 빠지기 전 혼란기와 부흥기까지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금융위기 속에도 200여년전 소설 속에 나왔던 혼란과 두려움, 광기와 탐욕이 현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종이의 음모는 현재진행형이다.

*번역된 작품으로는 이 작품의 2탄격인 <부패의 풍경>이 남았는데, 제목만으로도 재밌을 것 같은 <whiskey rebels>나 <ethical assasin> 도 빨리 번역되길 바래본다.

** 베텔스만에서 두권으로 분권씩이나 해서 나오면서 원서 뒤에 있는 '리더스 가이드'를 실지 않은건 정말 창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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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영향, 그리고 우연?
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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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공모전에서 떨어진 경험이 바탕이 되어 공모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멋들어진 소설이 나왔다.
제목도 기가막히다. 도착과 도작은 둘 다 일본어로 '도사쿠'로 같은 발음이라고 한다. '도작의 진행-도착의 진행- 도착의 도작' 으로 이루어지는 목차도 다시 봐도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소제목들인 것이다. 서술트릭이라고 하면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와 <살육에 이르는 병> 등이 떠오른다.  기가막힌 반전이나 탐정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결하면서 열독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반전의 한줄을 읽고 나면 '당했다' 라는 느낌과 '비겁해!' 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벚꽃..> 과 같은 작품에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반전의 결말이 찜찜했고, <살육에 이르는 병>은 결말의 반전을 짐작했다고 하더라도, 흥미롭게 읽었고,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다. 그러면, 이 작품, <도착의 론도>는?

추리소설 공모전에 작품을 보내는 예비작가 야마모토 야스오의 필생의 역작 <환상의 여인>을 친구 기도가 공모전 마감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에 잃어버리게 된다. 공모작 발표에서 신인상을 타고 웃고 있는 '시바타 료'라는 작가의 사진을 보고, 자신이 잃어버린 작품과 똑 같은 제목, 똑 같은 내용의 <환상의 여인>을 보게 된 야마모토 야스오는 복수에 불타게 된다. 이 다음부터는 도작한자와 도작당한자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악의적인 방식이 못내 유치하기까지 하지만, (아마, 이 부분에서 너무 가볍다고 여겼을 수 있다.) 각각의 물리고 물리는 플롯은 대단하다.  독자들이 읽기 쉬운 글을 쓰고자 한다는 오리하라 이치여서인지, 표현은 단순하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살아서 꿈툴거린다. 약간 쪼다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인물들이 서로의 꼬리와 머리를 물고 돌아가는 이야기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내려놓기 힘든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서술트릭의 빅 팬이 아니고, 아이리쉬빠인 내가 <환상의 여인>보다 나은 어쩌구.를 언급하는 것에 빠심이 발동하여 이 책이 지닌 기발함과 재미에 심드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만, 그 와중에도 나를 불태우는 것은 이 작품은 시리즈라는 것. 근간으로 <도착의 사각>과 <도착의 귀결> 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일명 '도착 시리즈' (arrival 이 아니라 perversion이다.) 몇가지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리즈' 와 '도착' 이라는 소재(어쨌든 제목에 들어가니깐) 만으로도 다음 작품들을 즐겁게 기다릴 자신이 있다.  

그나저나 표지는 에셔의 'bond of union' 에서 영향, 모방...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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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8-12-1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갠적으로 우리 표지가 좀 더 나은데요? (노란색보다는 흑백이 더 좋아보이긴 하지만;;;)

암튼 그 악의적인 발상이 유치하다는데 동감. 글고 서술트릭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책읽다말고 '내가 잘못읽었던가?'라거나 '인쇄가 잘못됐나?'싶은 찜찜함으로 책을 읽다가 끝부분에 가서야, 그것이 바로 서술트릭,이라고 깨닫는 무지몽매함이란~ ㅡ,.ㅡ

하이드 2008-12-1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표지 후져요. -_-;
우리 표지는 에셔 작품에서 따왔는데(이걸 따왔다고 해야하는건지, 뭐라고 해야하는건지)유명한 작품 따 오는건 뭐라고 하나요, 패러디? 카피? 표절은 아니겠지요?

그나저나 치카님 오랜만! ^^

Apple 2008-12-1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헤헤헤 이 소설 재밌죠?^^ 작가 은근히 센스있는듯...도착, 도작이 번갈아나올때는 오타인지 아닌지 계속 확인해보고 있었어요.^^; 저도 빨리 다음시리즈 기다리고 있어요!!! 요즘은 기다리는 시리즈도 별로 없는데 요것만은 기대가 되네요.^^

하이드 2008-12-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전 소설이라니, 대단해요.
 
임페리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4 로마사 트릴로지 1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앞으로 내가 부르게 될 노래는 권력과 그 사내에 대한 얘기다. 권력이란 정부에 의해 개인에게 부여된 공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뜻하며, 우리는 이를 라틴어로 임페리움이라 칭한다. 공화국의 역사상, 권력을 획득할 자원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재능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키케로는 독특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메텔루스나 호르텐시우스와 달리, 그는 명문 출신도 아니며 선거 중에 끌어들일 정치적 우군도 없었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처럼 입후보를 뒷받침해줄 강력한 군사력도, 크라수스처럼 앞길에 뿌릴 엄청난 부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목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웅변으로 바꾸었다.

이야기는 키케로의 정치생활의 시작을 함께 하고, 끝까지 함께 했고, 그 후로도 오랜동안 살아남았던 노예이자 키케로의 심복비서 티로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제국인 로마,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카이사르의 시기가 배경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잘 알려진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는 아니다. 역시 잘 알려지긴 했지만, 그 옆에서 '비열하거나' '교활하게' 묘사되곤 하는 정치가 명변론가, 철학자이자 로마의 최연소 집정관이었던 키케로가 로마 3부작의 주인공이다.  

1부는 키케로의 원로원 입성 이야기이고, 2부는 집정관이 되기 까지의 이야기이다. 보잘것 없었던 한 사내가 '목소리' 하나로 로마 시대 공직을 사는 만인의 이상이었던 '집정관' 이 되기 위해 겪어낸 투쟁의 일기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에서 뻔하게도 영웅적인 키케로의 모습을 볼 것이라 예상한다면, 그렇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했듯이 음흉한 정치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영웅시 하지 않는다. 그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가 주인공이었다면, 아마, 그들의 영웅적인 면이 부각되고, 제왕의 탄생을 보면서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을지도 모르지만, 키케로가 주인공인 이 책에서 카이사르는 똑똑하나 교활한 뉘앙스, 폼페이우스는 용맹하나 오만한 모습이다. 티로가 '임페리움'이란 말을 떠올릴때 항상 생각나는 인물이 폼페이우스이기도 하다. 그는 거인으로 묘사되며, 키케로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그의 편에 서게 된다.

로버트 해리스가 그리는 키케로는 멋지다. 아마 역사 속 실존 인물들중 '말'로만 순위를 매긴다면,키케로는 분명 순위에 들어갈 것이다. 작가는 하버드에서 출간한 29권의 키케로의 연설과 편지들을 참고로 하여, 이야기 속에 적절히 그의 명연설들을 끼워 넣었고, 그 장면장면들은 때로는 소름이 끼칠정도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준다. 클라이막스인 '인 토가 칸디드' 연설과 1부의 클라이막스인 베레스를 기소하는 연설 등이 그렇다. 그렇다고 그는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처럼 앞에 나서는 영웅이거나 혁명가가 되지는 못한다. 죽음과 폭력을 싫어하는 성정이었다.  군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앞서말한 두 장군들의 것이고, 키케로는 타고난 정치가로서의 면모. 그의 강력한 지지자인 평민들과의 친화력, 그가 갈고 닦은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야망과 집념이 바로 그의 무기였다. "티로, 나는 내 재능을 한 치인들 남기고 죽을 생각은 없다. 내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끝 가는 데까지 가고 말겠다. 그리고 이 친구야, 나와 함께 그 길을 가는 것 또한 네 운명이야." 실패조차 야망의 연료로 만드는 키케로. 그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씨니컬한 재치문답을 일삼으며,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도 하고, 그렇게 하기 전에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자 하며, 최선이 안된다면, 차선을 선택하는 사나이였다. 타고난 연설가이자 연기자였고, 그것을 갈고 닦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줄도 백도 없는 한 남자가 능력만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이야기다.

독자는 분명 키케로보다는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대한 지식이 더 많을 것이다. 키케로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이 책에서 그들이 절대 양념이라거나 들러리라던가 한것은 아니다. 그들 외에도 폼페이우스의 라이벌이었던 억만장자 크라수스는 키케로의 천적이었고, 키케로를 물심양면 도와준 동생 퀸투스나 루키우스도 있고,키케로 전에 명변론의 일인자였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의 호르텐시우스가 있다. 키케로가 사면초가일때 힘을 주는 아내 테렌티아( 그녀는 악처에 가까우나, 키케로와 그녀의 동맹은 깊어지고, 유익한 쪽으로 흐른다.), 키케로의 심복이자, 성공의 열쇠가 되기도 했던 이 작품의 화자 티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로마 정치판의 암투는 현란하기까지 하다.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아 보였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아쉽다.  내년 상반기에 나오게 될 <컨스피러시>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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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하루하루가 쉽지가 않습니다.
결혼은 정녕 인생의 무덤?

알링턴파크에 사는 다섯 여자, 그들의 이름은 주부입니다. 의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밀도 깊게 꾹꾹 눌러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링턴파크는 '런던'의 배드타운bedtown입니다. 계급이 확실한 영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이름을 가진 그들이 사는 곳이지요.
 
결혼한 여자들의 자아상실을 다룬다고 해서, 결혼한 여자들만 우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과 결혼한 남자들에게도 분명 남자들만의 이야기가 있을테니깐요. 육아와 집안일에 시달리며 자신을 잃어가는 여자들만큼이나 회사에서 영혼을 팔아 여자와 자식을 먹여살려야 하는 남편들에게도 분명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겠지요. 이번에는 여자들만의 이야기들이지만, 다음번에는 남자들만의 이야기가 나올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알링턴파크에 사는 '여자들' 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로 합니다.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의 줄리엣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자는 알링턴파크의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특출났던 어린시절, 그리고 학교 다닐적에도 무언가 멋들어진 직업을 가지고 알링턴파크를 떠나 '난 사람' 이 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와 자신의 야망이 있었던 그녀지만, 나고 자란 그 도시의 선생님이 되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흡사 비 맞은 잠자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멜라니 바스처럼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입을 벌리고 자신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뱉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의 몸은 납덩이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돌진하는 시간 앞에서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거울 뿐이었다. 그녀 안에는 온통 지나간 날들의 찌꺼기만 가득했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경멸했던 그녀 어머니의 삶이'조금 황폐해진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금요일의 문학반 수업만이 그녀의 황폐한 삶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핏줄과도 같습니다. 그날 하루가 그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연약하게 충전해주고 있지만, 실상은 그 수업마저도 그녀의 몸부림에 그칩니다. 요즘 아이들, 영국이나 여기나, 요즘 아이들이 어디 '폭풍의 언덕'과도 같은 작품을 진지하게 읽으려 하나요. 어릴적부터 허리까지 긴 그녀의 머리는 남들도 그녀 자신도 '특별'하다고 생각해 온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자릅니다.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면서. 줄리엣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요?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어멘다, 그녀는 완벽한 삶을 꿈꾸며 알링턴파크의 가장 좋은 위치에 가장 좋은 집을 공사해서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그녀의 집을 안 팔리는 작품을 들여 놓은 큐레이터같은 심정으로 만들줄은 몰랐습니다.
 
알링턴파크라는 곳은 알 수 없는 곳입니다. '도심이 아니고 교외였고, 커다란 베드타운에 불과했지만' 삶의 위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 나름대로의 단단한 현실, 억누를 수 없는 보편적인 현실, 소유욕, 자기 주장, 사물들간의 위계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곳이죠. 알링턴파크가 그녀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이 평범한 교외의 도시가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고 읽으면 될 것입니다.
 
런던에서 온 메이지가 있습니다. 그녀가 오고 싶은 곳이 알링턴파크는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런던이 아닌 곳' 으로 가고 싶었고, '런던에서의 자신이 아닌 다른 자신'을 찾고 싶었지만, 사람은 장소를 떠날 수는 있지만, 그곳이 어디건 자신을 떠날 수는 없지요. 그녀는 그런 사실들을 깨닫고, 적응해 나가려합니다.
 
남는 방에 외국인 학생을 들이는 솔리는 그녀의 남은 방에 오는 대만의 베티, 일본학생 가츠미,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온 파올라까지를 보면서, 자신의 삶과 그네들의 삶을 비교하게 됩니다. 이미 충분히 지루하고, 너덜너덜한 일상에 젖은 그녀에게 그들의 삶은 반짝반짝 빛나보입니다. 자신보다 두살 어릴 뿐인 변호사 출신의 파올라를 보며 그녀는 모너집니다. 파올라가 집을 비운 동안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물건들을 봅니다. 천상의 향기를 풍기던 바스 오일 병, 레이스 달린 속옷, 단추나 리본이 달린 속옷, 가터벨트와 거미줄처럼 올이 듬성듬성한 스타킹, 작은 가죽 상자 안 흰색 새틴 천 위의 진주 귀걸이 한 쌍.
 
' 그런 물건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날카로운 것들에 찔린 듯 아팠다.' ... 그런 물건들에 비하면 자신이 입고 있는 해진 청바지나 염주 같은 목걸이는 뭐란 말인가? 그건 지워져 버린 흔적, 비참할 지경으로 초라해진 자신의 여성성이었다. 솔리는 자신에겐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크리스틴, 그녀에게 알링턴파크에서 사는 것은 신분상승을 의미하고, 그것을 지키고, 거기에 어울리기 위해 독할정도로 안간힘을 씁니다. 독한 말을 하고, 독한 생각을 합니다.
 
 
책의 표지에는 아마도 알링턴파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야기하는 여자들, 혼자인 여자들, 장보는 여자들, 아이보는 여자들. 제목은 음각으로 꾹꾹 눌려 써 있습니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라고요.
 
'완벽한 하루'라는 말은 굳이 '운수좋은 날'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아도 불길해보입니다. 책을 읽고나니 차라리 안심이 됩니다. 평범한 일상은 이미 지옥과 비슷하고,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것의 반어가 '완벽'이라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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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2-12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있어 별 넷은 거의 완벽의 경지인데 하이드님의 별 넷은 어느 정도의 선인지 궁금해요. 암울하고 칙칙한 이 책이 전 무척이나 발랄해 보이는 새벽 세 시 만큼이나 좋았거든요. 아, 이런 일상 때문에 뭔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면 저도 위기의 주부일까요? 결혼이 인생의 무덤은 아니에요. 그것으로 인해 나는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떤 이들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결혼은 확실한 그 무엇이었어요.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위험하게 발견한 것은, 모성에 대한 것이었어요. 자기 아이가 만약 저 쇠꼬챙이에 걸려 푸줏간에 진열되어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그런 장면이요. 그건 마치, 모두가 얌전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데 나 혼자 벌떡 일어나 유리창을 깨는 것과 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좋은 리뷰에요, 잘 읽었습니다.

하이드 2008-12-1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셋은 보통보다 모자람. 별 넷은 보통보다 좋음. 별 다섯은 아주 좋음. 이 정도요? 별에 후한편이죠.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책이었죠. 쉬이 읽어내려가지지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