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꽃
아마노 세츠코 지음, 고주영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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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불륜'과 '복수'의 키워드는 재미를 어느정도 보장한 키워드이다. 거기에 '살인'을 더한다면?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자존심 센 쿄코는 대학때 만난 타케쿠치와 12년째 결혼생활중이다. 아기가 생기지 않은 것이 유일한 약점이라면 약점이지만, 아이 없이 둘 만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싱가폴 출장중, 전화를 한 통 받는다. 마유미라는 이름의 여자는 남편과 2년간 만나왔고,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며, 남편이 출장에서 오는대로 이혼을 요구할꺼라고 거친 목소리로 말한다.

흥분한 교코는 전화를 끊지만, 다음날 마유미의 주소와 이름이 발신인에 적혀 있는 편지를 한 통 받는다. 타케쿠치의 필적으로 쓰여진 모자수첩과 타케쿠치와 마유미라는 여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모자수첩'에 흥분한 쿄코는 주소에 있는 마유미의 집으로 가서 농약을 냉장고 안 오렌지 쥬스에 넣어 마유미를 독살한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시작이다. 범인이 알려진채 진행되는 도서추리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쿄코를 쫓는 형사 토다의 추리가 좀 억지스럽고 비약이 지나친 것이 좀 걸리고, 그렇게나 중요한 정보들을 지닌 목격자들이 너무 많이 나와 사건을 진행시킨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쿄코, 아마도 작품의 '얼음꽃'을 실현하는 인물인 여주인공 쿄코의 아름답고, 범접할 수 없어 보이지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언제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와 같은 위태로움은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하고, 사건의 긴박함을 더한다.

읽기 전에는 이것이 '미스터리'이긴한가. 싶기까지 했지만, 읽고 나니, 꽤 괜찮은 미스터리이다. 어쨌든. 쿄코뿐만 아니라 집착 강한 토다(이 캐릭터는 좀 비약이 강함)나 남편, 마유미, 그리고 친구에 이르는 캐릭터의 설정은 그럴듯했다.

이렇게 아침드라마 소재같은 이야기로 제법 괜찮은 미스터리를 써 낸 저자 아마노 세츠코는 이 작품이 데뷔작이고, 데뷔시 그녀의 나이는 무려.. 60이었다. 성공적인 데뷔작은 드라마로까지 제작된다.(왠지 우리나라 막장명품드라마가 얼핏 생각났다는;;)  500페이지가 넘는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마도 그녀, 얼음꽃 쿄코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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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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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젊은이적 망상이 폭발하는 대사로 시작하는 이 책.으로 4차원 작가라는 모리미 도미히코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뭐랄까, 이 책의 작품성이라던가, 플롯이라던가, 캐릭터라던가 그런걸 논하기에는 이 작가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만담인지 헷갈리는 그것이 나의 머리를 과하게 휘저어 놓았다.

첫페이지에는 이것의 정체가 굵고 짧은 '수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독자는 속지말지어다. 이 작품은 '제15회 일본판타지노벨대상'의 수상작이다. '우리 일상의 90퍼센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에 50%라도 공감 가는 사람이 이 책을 읽어야 이 책을 읽었다.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교토대의 '휴학중인 5학년생'이라는 대학생 중에서도 상당히 질이 안 좋은 부류에 속해 있는 나는 '젊은이의 고뇌 따위는 흥미 없다' 고 말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젊은이의 고뇌를 적나라하게 까발려주고 있다. 짧게 요약하면 미즈오라는 여성을 사랑했다 차이게 된 그와 그와 비슷하나 각기 다른 폭발하는 개성을 지닌 사내즙 물씬 풍기는 동기/선배/후배들이 교토에서, 연애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정신없는 반어와 은유와 농담인지 진담인지 만담인지 헷갈리는 한 줄, 한 줄을 슬슬 읽어나가면 가볍다.여겨지겠지만, 그와 같은 재치인지 악취미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을 하나씩 곱씹어보기를 좋아하는 (아.. 나도 왠지 이 무리들과 비슷한 점이 하나라도 있는 것 같아 순간 흠칫;) 나로서는 분량에 비해 꽤 오래 책을 붙들고 있었다.

그들의 청춘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하긴 누구의 청춘인들 그렇지 않으랴. 돌이켜보면 그렇게 시시할 수 없는 나의 청춘도 당시에는 나름대로의 '비장미'를 감추고 있었으리라.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시카마라는 연애낙오자 집단무리의 대모와도 같은 남자의 하숙집에서 영화를 보는 이야기가 나온다. 청춘 열혈 스포츠 영화고, 주인공들은 때로 반발하고, 때로 도우며 지역대회 우승을 목표로 매진한다. 활활 타오르는 청춘의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름 합숙, 다 같이 지내는 마지막 밤 부원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면 좋으련만' 그 영화를 보던 연애와생활의낙오자모임과 같은 집단은
'바닥에 드러누워 비에 젖은 통나무처럼 굴러다니며 담배를 입에 물고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시카마가 몸을 일으키더니 나지막이 반론했다. "계속되면 견딜 성싶으냐." 우리가 좋아서 시작한 투쟁이라 해도, 때로는 지칠 때도 있다. '

이와 같은 이미 깨달았다면 깨달은 청춘의 헛점들을 보면서 젊은 것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이 세상의 모든 청춘들을 생각해본다. 저자와 이 책의 특징으로 이 책에 드러나는 지역색, 에이잔 전차가 다니고, 태양의 탑이 있는 교토에 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지지리궁상 청춘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판타지노벨이 되는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되고,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책의 제목이기도 한 '태양의 탑'을 찾아보고, 이 책은 나에게 더욱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태양의 탑'은 70년 엑스포 당시 오카모토 타로가 제작한 거대아트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돌연 이차원의 우주 저편에서 날아와 대지에 쿵 내려선 채 고정되어, 이제 우리 인류는 어찌 손써 볼 도리도 없게 된 분위기'로  서 있는 '우주 유산'이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웃기게 생긴 뿔 같은 팔을 달고 있고, 오즈의 마법사스러운 얼굴을 거대한 뿔몸통 중간에 달고 있고, 뿔 꼭대기에는 골든스타, 아니 골든-웃기게 생긴- 달과 허수아비 중간의 얼굴이 달려 있다. 표지 속에 전차를 잡고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그녀는 아마도 이 책에서 사안蛇眼으로 주인공네들을 꿰뚫어보는 우에하라이지 싶다. 우에하라는 '청춘의 망상'에 빠져 있고 싶은 사카마 집단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현실로 끌어내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된다. '망상 vs. 현실'이 가장 큰 파이트를 하는 시기는 아무래도 찌질한 청춘시절이 아니겠는가. '태양의 탑' 역시. ... 와우. 망상의 절정이다. 사진을 찾아보니, 이와같은 조형물이 주변에 있었다면, 아이이건 어른이건 혹은 청춘이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



이곳에 가면 더 많은 사진 

책의 말미의 크리스마스 이브 에에자 나이카 소동은 그야말로 이 책에 어울리는 클라이막스다. 마지막 두 줄은 첫 두 줄만큼 인상적이었다. 아직 이 책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제대로 소화시키고 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밤은 짧아, 걸어 이 아가씨야>와 <다다미 넉장 반의 세계일주>를 읽어봐야겠다. 

* 에에자 나이카 : 아무려면 어때요, 뭐 괜찮지 않겠어요. 이런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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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사랑을 담아 아토다 다카시 총서 1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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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폴레옹광>, <시소게임>에 이어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를 읽었다.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에서 전집을 모두 계약하고 일년에 두권씩 낼 계획이라고 하니 기대해 본다. 실물은 그나마 낫지만, 이미지 상으로나 제목으로나 전혀 구매욕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이 작품집은 '아토다 다카시'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사게 되지 않는 작품집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단편의 거장인 스텐리 엘린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장거리 달리기와 백미터 달리기에 비유했다. '인생의 단면을 선명하게 잘라내는 단편은 전혀 다른 소설 기법으로 쓰여지며 밀도가 높아서 작은 결함 하나가 작품에 치명적인 흠이 될 수 있다' 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추리소설을 이야기할 때, 좋은 작가를 추천하라고 하면, 몇몇의 이름이 금새 떠오르지만, 좋은 추리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 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단편만 써 왔던 보르헤스를 먼저 이야기하고, 영미권의 스텐리 엘린, 로알드 달, 코넬 울리치,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 정도가 잘 알려진 좋은 단편을 써내는 작가들이다. 거기에 요즘 장르 매니아들에게 인기 좋은 오츠 이치 정도가 생각날 것이다. 좋은 단편을 쓰는 작가군에 우리나라에는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아토다 다카시'를 꼭 넣어야 한다. 오츠 이치를 제외하곤,(아직 이 젊은 천재를 평가하기는 좀 이른듯 하다. 작품의 호오도 있고) 언급했던 작가들의 단편들은 그야말로 '흠'이 없다. 단편집에는 분명 적게는 열개 정도에서 많게는 스무개 정도까지의 단편이 수록될 것이다.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에는 열 여덟편의 단편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 많은 단편들에 호오는 갈릴 지언정, 어느 것 하나 빠지는 작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너무 가혹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좋다. 그럼, 한 두개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말 괜찮은 단편들로 모여서 단편집이 나와야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고 이야기한다면, 아토다 다카시는 내가 보기에는 정말 훌륭한 작가다. 세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50편 정도의 단편을 읽었지만, 어느 것 하나 흠잡고 싶은 단편이 없다. 그리고 매 작품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대단하다!' 싶은 단편들이 몇편씩 끼워져 있다. 보르헤스를 제외하곤,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 하더라도, 훌륭한건 훌륭한거고, 장편소설에서처럼 지속적으로 강한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다. 지금 나에게 소장할만한 단편소설 작가를 말하라면 보르헤스와 아토다 다카시정도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나폴레옹광>- 지금 생각해도 이 작품집이 제일 좋다. 단편집으로는 아마 최초로 나오키상을 타기도 했다.- 을 가장 먼저 읽고, 이치에 대한 기대치가 확 높아졌는데, 두번째 읽은 <시소 게임>, 세번째 읽은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까지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라는 말은 통하지 않고, '기대가 컸음에도 만족스러운' 그런 독서였기 때문이다.  

세 작품의 특징을 말한다면
<나폴레옹 광>은 환상적이고, 재미있고, 문학성도 뛰어난 상상력이 가득한 단편들이 모여 있다.
<시소 게임>은 가장 문학적이고,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는 가장 무난하다. 추리소설 작가의 단편집을 생각할 때 나올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책 띠에 나온 것처럼 단편 소설들은 '마지막 두 줄의 오싹한 반전!' 이 중요하다. 이건 장편소설의 반전과는 약간 차원이 달라서, 결말을 상상하는 시간이 짧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결말을 예측 못하고 허를 찌르는 반전인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좋은 단편소설이라면, 이 '마지막 두 줄'을 아는 독자에게도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필력과 플롯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반전을 알아버렸으니 이제 시시해.'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좋은 단편소설이 아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성공해서 멋지게 복수하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해서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예상외의 반전'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앞의 '완벽한' 이야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다시 한 번,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집은 소장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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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1-0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언급하신 분들도 훌륭하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제가 참 좋아하는 단편소설 작가에요 +_+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잘 안외워져서 매번 [라쇼몽]을 검색해선, 아 이 이름이었지~ 합니다. ㅎㅎ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들도 좋긴 한데, 좋은 작품은 너무 좋고, 이상한 건 너무 이상해서 모험이기도 해요.

보르헤스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언급될만한 작가라니,
완전 기대됩니다 ㅋㅋ

하이드 2009-01-0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혹은 모르는 좋은 단편소설 작가들은 많겠지요. 사실, 나중에 그걸 떠올리고 '추리소설'로 한정 지었답니다. ^^; 사카구치 안고는 역시나 추리소설로만 접해 보았어요. <불연속 살인사건>이라는 아주 독특하고 개성있는 작품이 동서미스테리에 나와 있습니다.

Forgettable. 2009-01-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 다시 보니 추리 단편소설이네요 ㅎㅎ 저도 [불연속살인사건]을 보려고 여러번 시도해 보았지만, 도서관에서 한 두어번 빌렸는데.. 표지가 정말 안땡기지 않나요 ;0; 것도 그렇고 바쁜일이 겹쳐서 매번 실패했어요- ㅎㅎ
 
빌리 밀리건 - 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다니엘 키스 지음, 박현주 옮김 / 황금부엉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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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본인의 말에 의하면... 계부인 밀리건 씨로부터 항문성교를 포함한 가학적인 성적 학대를 당했다. 환자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환자가 여덟 살이나 아홉 살 경, 1년여에 걸쳐 주로 계부와 단둘이 농장에 있을 때 이런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환자는 항상 계부에게서 '마구간에 묻어버리고 엄마에겐 도망갔다고 하겠다'는 협박을 받아서 살해당할까 봐 두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감정과 영혼이 스물네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버렸다. -242쪽-    

1977년 빌리 밀리건은 네건의 성폭행 및 강도 용의자로 체포된다. 관선 변호인이 정해지고,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빌리에게 정신감정을 받게 한다. 정신감정을 받던 중 빌리 안의 어린이 대니 캐릭터는 겁에 질려 빌리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캐릭터들에 대해 말하고 숨어 버린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변호사들과 의사는 빌리 안의 '다중인격'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빌리의 과거와 빌리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인격들과 대화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스물 네개의 인격이 있다고 알려져있고, 빌리의 인격은 열여섯살 이후 다른 인격인 영국식 억양을 쓰는 논리적이며 지적인 아서와 보호자역이며 유일하게 폭력행사가 가능한 래이건에 의해 재워진다. 이들은 빌리 외에도 빌리와 그 몸을 쓰는 다른 모든 사람들(인격들)이 피해받지 않고, 살아나가게 하기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인격들을 불량자로 분류하고 잠재워 놓는다.  

픽션 같은 논픽션을 읽을때면, 이것이 분명 실화라는 것을 알고 읽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느 정도 극화된 것임을 감안하고, 각 인격이 바뀌는 모습을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다중인격에 회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중인격을 확신했다는 이야기는 주관적이라고 우길 수 있을지 몰라도, 꾸밀 수 없는 팩트들이 제시는 빌리 밀리건의 '다중인격'을 의심하기 힘들게 한다. 

이와 같은 다중인격, 해리성 인격장애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의 학대로 인해 생긴다고 알려져있다. 빌리는 어릴적 계부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구타에서 언어폭력, 직접적인 성폭력에까지 이른다. 자신을 엄마와 동일시 했던 빌리는 계부에 의해 어머니가 당하는 폭력에까지 제가 당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이로 인한 방어기제로 또다른 인격을 창조해냈고, 그것은 각각의 역할을 지니며 스물네 개의 또 다른 사람들/인격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들 인격은 아서에 의해 조정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와 아서가 콘트롤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란기를 가지고, 빌리 밀리건은 그로 인해 정신병원과 구치소를 들락날락거리게 된다.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 안에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병으로 치료되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은 '기억상실'의 여부라고 한다. 다른 인격이 나왔을때의 일을 주인격이 기억하지 못하거나, 여러 부인격이 서로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신병으로 치료받아야 할 일이다. 이와 같은 '기억상실'은 빌리의 정신상태에 더욱 악순환만을 가져다 주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둘러대다 보니, 주변에서는 교활하다거나 거짓말장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다중인격임을 진단받기 전까지, 그의 인생을 충분히 힘들게 했을 것이다.

빌리의 인생이 쉽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빌리 밀리건의 다중인격들을 발현 시킨 것은 정신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강력한 방어기제일 것이다. 각각의 인격이 지닌 특출한 능력들- 아서의 지적 능력, 스와힐리어와 아랍어를 유창하게 하고, 생물학과 의학에 뛰어난 소견을 보이며 무섭게 논리적이다. 래이건의 신체적 능력- 각종 무기에 해박하고, 다루는 것에 능수능란하며, 초인적인 힘을 지녔고, 싸움을 잘한다. 인간의 신체적 구조를 연구하여 사람을 팬다. 유고슬라비아 억양을 사용하고, 슬라브어를 한다. 타미의 탈출, 전기에 대한 재능 등- 은 그들이 치료를 받으며 빌리라는 한 사람으로 합쳐질 때 그 능력들은 빛이 바래게 된다. 필요에 의해 극단까지 개발된 능력들이 하나의 인격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능력이 정신분열/다중인격과 함께 발달되고 쇠퇴되는 의미 또한 연구대상일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인격의 통합이라기보다, 각각의 인격들이 포기하고 잠들어 버린듯한 양상이다. 빌리의 경우에는 '병'으로 진단 받았지만, 다중인격 그 자체가 나쁘지 않음을 생각할때, 치료 후의 그의 인생이 더 궁금해진다.

'통합된' 인격이 다중적 인격보다 반드시 더 나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다중성은 적응하려는 반응이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대처하려고 뇌가 만들어낸 똑똑한 방법이다. 오늘날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문화적 변화와 모순적 상황을 견뎌야 하므로, 다중적 '풍경'을 발달시킨 사람은 항상 하나의 얼굴로만 세상을 대하는 사람보다 유리한 셈이다.그러나 다중성이 지나칠 때도 있다. 인격드링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더는 소통하지 않는다면(이런 상황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예가 다중성 인격장애 해리성 정체장애이다). 우리는 정상적인 세상에서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는 최소한의 연속성과 일관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 리타 카터 <다중인격의 심리학> 中 -

작품의 말미에 나오는 작가 이야기, 옮긴이 후기, 출판사의 덧붙임에 의하면,  '1982년 애슨스 정신건강센터로 이송된 밀리건은 1991년 법원과 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정신장애를 겪지 않는다고 인정받아 마침내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밀리건은 영화제작사를 운영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다중인격장애(해리성정체장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고 한다.

빌리 밀리건에 대한 영화 제작은 2008년에서 다시 2010년으로 미루어졌으며, 감독은 아직까지는 그대로 조엘 슈마허이다.
빌리 밀리건 자신은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힘을 쏟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배우가 어떻게 연기할지, 연기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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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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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커스단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세상에 있을까?
주인공인 제이콥의 인생은 그렇게 180도 변했다. 

  캐멀이 나를 돌아보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러고는 한 단어 한 단어 음미하듯 천천히 말한다.
"이 자식아, 네가 탄 기차는 그냥 기차가 아니야. 이게 바로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 기차, 그중에서도 비행단 기차라고." -54쪽-  

제이콥은 그의 특기를 살려 동물들을 돌보며 동시에 막일을 한다. 그곳에서 그는 말레나라는 서커스단의 스타에게 홀딱 반하게 되고, 특별한 코끼리 로지를 사랑하게 된다.

이야기는 아흔살이 넘은 제이콥의 좌절감 가득한 요양원 일상과 스물세살 기차에 뛰어오르고 난 후 겪었던 파란만장한 서커스단에서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흘러간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서커스 기차가 다니며 서커스를 하던 시절에 대해 충실히 조사한 작가는 소문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서커스단의 실화들을 책으로 끌어들였다. 기차 서커스라는 큰 스케일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였고, 서커스단에 몸 담은 이들, 동물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로서의 서커스 이야기도 쏠쏠하니 재미나다.

주요 인물은 제이콥을 중심으로 배우들과 일꾼들로 나뉘는데, 제이콥은 수의사로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 있다.
동물감독이자 조련사인 오거스트라는 매력적인 나쁜놈(책을 읽을 수록 '매력적인' 보다 '나쁜놈' 쪽으로 기울어 마지막에는 천하에 때려죽일놈이 된다.)과 그의 아내인 서커스의 스타 말레나가 있다. 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오거스트와 1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말레나 부부와 함께 다니며 제이콥의 갈등은 자라난다. 서커스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엉클 엘이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단장이 있다. 보잘것 없는 인물에서 전국의 망하는 서커스단에서 이것저것을 떨이로 사 모아 지금의 서커스단을 만들었다. 최고의 서커스단을 꾸리고 싶어하는 엉클 엘은 이제 수의사.를 가지게 되었고, 코끼리도 가지게 된다. 코끼리의 이름은 로지. 제이콥은 부전자전으로 모든 동물들을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처음 본 코끼리 로지를 사랑하게 된다.  
광대인 난장이 월터와 그의 개 퀴니. 제이콥의 룸메이트이다. 원수처럼 이 박박 갈다가 진짜 친구로 거듭난다.

각각의 사연들보다 더 볼만 한 것은 당시의 서커스 이야기들이다. 중간중간에 꽤 많은 서커스 사진들이 흑백으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서커스쪽 이야기는 시종일관 박진감 넘치고, 아흔살 노인의 이야기는 지나간 파란만장 과거와 대비되어 엄청나게 색이 바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 과거의 유령들이 내 텅 빈 현재에 들어와 분탕질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과거의 유령들이 현재를 제집처럼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유령과 싸울 만한 강력한 현실이 현재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유령들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금 유령들은 나의 현재 속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는 중이다. 어서 와, 얘들아, 너희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지내. 아, 미안해- 벌써 들어와 살고 있구나. 빌어먹을 유령 놈들. -29쪽-  
 
꽤나 속상한 이야기도, 꽤나 통쾌한 이야기도, 가슴 두근두근한 이야기도, 이런저런 회환들도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몇가지 굉장히 기묘한 이야기들이 실화라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코넬대학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며, 마지막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던 그는 수의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게 남겨진 것은 빚뿐이다. 마지막 기말시험을 보던 중, 그는 충동적으로 교실을 나가게 되고, 하염없이 걷다가 기차에 올라타게 된다. 
부랑아와 같은 몰골의 남자들에게 다시 기차 밖으로 던져질뻔하나, 캐멀이라는 남자가 그를 구해준다. 그리고, 제이콥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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