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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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이히, 괜찮지, 나쁘지 않지. 좋아.

정도에서 '이 작은 책'을 읽고 오오,  줌파 라이히시여!!! 가 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마음 뿐이고, 올해도 지키지 못한 계획으로만 남기며 한 해,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나에게, 남에게 말하고 다니고, 이것저것 직접대기도 많이 했으며, 지치지도 않고, 새해의 계획을 세울때면 ,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것이 몇십번이나 반복되어, 계획을 세우는 내 자신도 민망할법도 하지만. 내가 아직 습득하지 못한 외국어를 꼭 계획에 넣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워본 사람, 배우고 있는 사람,배울 사람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외국어 공부 책이 여기 있다. 그러니깐, 학교를 다닌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간 줌파 라이히의 부모님, 그녀는 부모님처럼 뱅갈어를 썼고, 집에서는 뱅갈어만을 쓰도록 강요받는다. 서툰 영어로 유치원에 다니게 되고, 영어를 완벽하게 하게 되고, 영어로 글을 써 퓰리처상까지 받게 된 그녀가 새롭게 배우게 되는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다.

 

작가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가족의 언어 뱅갈어, 그녀가 자라면서 그녀의 언어가 된 영어, 그리고 그녀가 어른이 되어 새로이 선택한 언어인 이탈리아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기존의 언어들을 새로이 이해하고 화합하고, 그리고 새로운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책을 냈는데, 그 과정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그간 읽어왔던 줌파 라이히의 소설들 중에 설레는 로맨스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로맨스에는 계속 설레였다.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작가중 하나가 된 안토니오 타부키의 글로 시작한다.

 

    나는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정감 있고 성찰이 담긴 언어를 원했다.

           

            안토니오 타부키

 

 

어떤이들은 책을 읽을때 목차를 꼭 읽으라고 목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냥 흘리는 편이다. 이 책에서는 목차 또한 아름다워서 그냥 흘릴 수 없다.

 

'건너기' - '사전' - '번개에 맞은 것처럼' - '추방'- '대화' - '거부'- '사전을 가지고 읽기'- '단어줍기'- '일기' -'단편'- (단편) '변화'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 '불가능'- '베네치아' - '불완료과거' -'털이 부승부승한 청소년' - 두 번째 추방' - '벽'- '삼각형'- '변신'-'탐색하다' - '공사 가설물' - (단편) '어스름'

 

차례의 제목들을 옮겨 적으며, 책을 다시 읽는것처럼 그 내용들이 사르르 떠오른다.

 

처음 책소개와 작가 이름을 보고, 영어권 작가가 이탈리아어 공부하고 이탈리아로 글썼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작가도 언급하지만, 러시아 작가가 완벽하게 영어로도 글을 썼던 나보코프나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베케트 등의 예를 들고, 유럽권 작가들이 번역도 많이 하고, 두 언어 이상을 하는 것이 새로운 광경도 아닌지라 줌파 라이히도 비슷한 경우인가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이탈리아를 배우는 과정' 에 있고, 그녀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었고, 이 책은 그 사랑의 첫번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으며, 상상해본 적도 없다.

 

이탈리아에서 일년 정도 살면서 이탈리아어만을 듣고, 말하고, 읽던 중에 문학 축제에 초대받고 '승자와 패자' 라는 주제에 대해 짤막한 글을 써 줄 것을 요청 받는다. 영어권 작가들과 이탈리아권 작가들이 만나는 자리이고, 영어와 이탈리아어 두 가지 언어로 글이 소개된다. 줌파 라이히는 여기서 이탈리아어로 글을 써보기로 결심하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자신의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번역하게 되는데, 새로운 언어로 써 낸 글을 기존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을 받게 된다.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책상 위에서 서로 맞붙었지만 승자는 벌써 명백하다. 번역 글이 본래 텍스트를 잡아먹고 그 위에 올라서고 있다. 이 치열한 싸움이 축제의 테마, 내 글 자체의 주제를 예시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탈리아어를 지키고 싶다. 그래서 갓난아기처럼 이탈리아어를 품에 안았다. 품에 안고 쓰다듬고 싶다. 아기처럼 이탈리아어도 잠자고 먹고 커야 한다. 이탈리아어에 비해 영어는 다 큰 청소년, 털이 부숭부숭하고 냄새나는 청소년같다 저리 가, 난 영어에게 말하고 싶다. 네 동생을 귀찮게 하지 마, 자고 있잖아. 네 동생은 뛰어놀지 못해. 너처럼 독립적이고 아무 근심 없이 활기차게 뛰어놀 수 있는 소년이 아니라고.

 

이제 이탈리아어와 내 관계를 다른 식으로 설명해야겠다고, 새로운 은유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와 이탈리아어의 관계는 늘 낭만적인 것이었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사랑에 빠진 관계였다. 이제 나 자신을 번역하면서 나는 내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어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은 '연애소설'이라고 해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다 읽고 덮자마자, 내가 그 동안 직접거리기만 했던, 언어들. 가까이 가고 싶어 정말 몇십년째 매 해 다가가 문을 두드리지만, 날씨 인사 정도밖에 못하는 일본어, 사랑보다는 의무로 만나 가까워졌지만, 그 이상 깊어지지 못했던 영어, 한때는 친했지만, 소원해진지 오래인 독어,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만나는 동안 좋았고, 늘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당장 꺼내어 이번에야말로 꼭 붙들어 내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장에서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아무거나 꺼내어 단어줍기라도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책에는 이탈리아어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지만, 이탈리아어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십대의 마지막 생일에 맞춰 조르바를 보러 크레타 섬에 갔고, 크레타섬에서 이탈리아의 바리로 가는 지중해를 건너는 페리를 탔다. 바리 공항에서 런던으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는데, 바리에서 하루를 묶게 되었다. 공내 인생에 단 하루, 그렇게 이탈리아땅에 발을 디뎠는데, 그 때 기억나는건, 묵었던 호텔앞 광장, 그리고 공항에서 본 모델같은 이탈리아 남자, 그리고, 바리 공항의 서점이었는데, 그 서점에 있는 책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책들을 쓰다듬어보며 읽지도 못하는 이탈리아어로 쓰인 칼비노의 책을 한 권 사서 왔다.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텐데. 그 짧은 순간 아름답다 감탄만 하지 않고, 사랑에 빠졌다면, 이탈리아어도 만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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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에게 고한다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0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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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슷한 내용인지, 아니면 원작을 드라마화한건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범인에게 고한다' 이 부분을 일드에서 보고 엄청 오글거렸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책에서도 클라이막스라면 클라이막스인데, 책에서는 좋은 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부분들이 너무 좋았어서 클라이막스가 별로 클라이막스로 느껴지지 않았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고, 과거에는 두 권으로 나누어서 나왔던 책이다.  주인공 경찰의 외모는 별로 상상 안 하려고 하는 편인데, 마키시마는 좀 궁금하다.와시 사건 전의 마키시마와 와시 사건 후의 마키시카 둘 다.

 

첫문장부터 재미있겠다! 싶은 경우가 있는데, 그 느낌이 끝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김이 새버리는 경우도 있고. 이 경우는 전자였다.

 

형사 일을 하다 보면 문득, 자신이 쫓는 범인에게 왠지 모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았다!

 

주인공인 마키시마도 좋지만, 주변 캐릭터 중에서 쓰다 경위가 나는 정말 좋았다.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 아닌데, 쓰다가 나오는 모든 장면이 좋았고, 비정한 미스테리에서 보기 힘든 신선같은 형사였고, 별로 나오지 않지만, 딱 처음 나올때부터 이놈 뭔가 하겠구나 싶은 어리버리 오가와도 좋았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캐릭터들 다 등장하는 시리즈물 나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렇게 한 권으로 끝내기 너무 아깝다.

 

겐지라는 아이가 유괴된다. 경찰신고 없이 몸값을 전달하려다 막판에야 경찰에 연락하게 되고, 마키시마의 팀이 사건을 맡게 된다.

 

마키시마는 거실로 돌아가 가족에게 겐지의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를 납치하다니 용서할 수 없군... 그런 감정을 북돋우고 사진을 돌려줬다. 그것이 작위적인 감정인지 본심인지는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절차의 하나로 기계적으로 한다는 인식이 없지만은 않았다.

 

이부분부터 좋았다. 대부분의 형사,경찰, 탐정 주인공들은 가족이 없거나, 가족보다 일을 우선하거나 하지만, 가족이 있는 경우, 누군가의 아들보다 자신의 가족이 소중하고, 매일같이 보는 험한 사건들에 가족들처럼 감정이입이 되기 힘들고, 감정이입해서는 안 되고 직업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키시마는 비포 앤 애프터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다른 캐릭터가 되어 나타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조직에 잘 적응하고(위에 아부하고 그런건 아니지만, 대체로 상부의 지시를 잘 따르고), 그러면서도 건조하고, 좀 더 현실적인, 현실에 있을법한 캐릭터이다.

 

 유괴범과의 줄다리기 끝에 몸값 전달은 실패, 범인 검거도 실패하고, 아이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 그 과정에서 책임을 떠맡게 된 상사 대신 마키시마는 기자회견을 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을 해버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아이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섯살에서 일곱살 사이의 남자 아이들이 죽는 사건이 일년여간 네 번이나 일어나게 되고, 경찰은 사건 해결의 실마리 없이 압박을 받게 된다. 새로온 출세지향주의자 소네 본부장은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검거율이 가장 높은 곳에서 수사관을 빼오는데, 6년전 겐지 사건때 실패했던 마키시마다.

 

6년여간 마키시마는 좌천되었으나 계속 형사로 일했다.

 

사건 이후의 처신이 타당했는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좌천된 시점에 일을 그만두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은 일종의 도망이었고, 연연하며 달라붙는 것 또한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다. 어차피 마음속에 그 사건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자신은 그런 방식으로밖에 살아가지 못한다는 심경이었다.

 

굴욕적으로 좌천당했지만, 보기 좋게 사표를 내지도 못하고, 달라붙어 있지만, 그 역시 각오가 필요한 일이라 말한다. 폐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패배했지만, 어쨌든 계속 직업으로 수사관으로서의 일상을 이어간다는 것.

 

육 년 전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은 변해 버렸다. 그만큼 크나큰 업보를 떠안고 말았다. 가족이 행복할수록 죄악감이 스멀스멀 고개를들었다. 그럼에도 이 행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그런 삶밖에 모를뿐더러 그러는 편이 자학적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좌천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임무에 몰두해 온 것도 그안에서 일종의 자학성을 느끼고,그것이 간신히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임무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에 잡아먹혔던 자신이 다시 텔레비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학 행위 이이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아동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특별본부로 불려온 마키시마는 살인범을 인간쓰레기라고 했다가 살인범의 편지를 받은 방송국아나운서가 이끄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공개수사를 하게 된다. 이부분이 중심 이야기. 일년이나 끌어온 사건을 티비에서 설명하고 제보를 받고, 범인을 자극해 실수를 유도한다. 는 계획이다. 너무 드라마틱해보일 수 있는데, 아무리 경찰들이 발품을 팔아 목격자 제보를 받는다고 해도 두 번 가서 못 받은 걸 세번째 받기도 하고, (그말은 두 번 가면 못 받았을),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어 이야기 안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꺼림칙하게 남아 기억은 잘하는 그런 목격자들을 찾기 위해.라는 등의 디테일이 잘 설정되어 있고, 마키시마가 처음에는 사람들한테 인기를 끌다가 애초 계획에 따라 '범인을 잡기 위한 것'에만 집중하여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갈수록 욕 먹는 부분도 드라마틱하면서도 현실적인 전개라고 생각된다.

 

조직과 미디어, 대중을 견디며,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을 하고, 죄책감은 자학으로 갚아나간다. 찌질한 범인도, 내부의 적도 다 있을법한데, 오직 쓰다만이 신선처럼 중간중간 나와서 독자도 마키시마도 유가족들도 힐링해준다.

 

범죄나 희생자보다는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특별한 사명감이 필요한 직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고민은 보통 사람들의 고민과도 닿아있다.  쓰다의 이야기가 좀 더 많이 나왔다면, 이 책에서는 좀 제일 허접해보이는 범인에 대한 어떤 '이해' 에까지 다다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옳고 그름의 답도 내리지못한 채 이번 일을 하고 있어."

쓰다는 딱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마키시마를 바라봤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몰두해도 속에 품은 마음 자체가 그러하니 문득 정신을 차리면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약한 모습을 그대로 내비치자 쓰다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섬세하시군요."

"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섬세해질 만도 해.'

"글쎄요.....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의외로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사회 속에서 다들 자신만의 결론을 찾기 마련입니다."

"달관인지..... 무책임인지....."

"양쪽 다겠죠. 뭐든 다 제 갈 길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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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걸스
로렌 뷰키스 지음, 문은실 옮김 / 단숨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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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걸스의 주인공들은 제목처럼 '샤이닝 걸스' 빛나는 소녀들.이다.

이 책은 곱씹어볼수록 맘에 드는 여자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책인데, 저자는 이런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들과 그들이 매력적인 여성으로 자라 사회생활에 막 발을 디디는 모습을 상당히 공들여 묘사하고, 시간을 넘나드는 연쇄살인범 하퍼를 통해 가장 잔인하게 그들을 죽인다.

 

이보다 더 잔인한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이야기들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기가 유독 힘들었던건,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소녀들은 각각 매카시 열풍이 부는 시대에 건축가의 꿈을 가지고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공동주택의 꿈을 꾸지만,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하는 미래의 멋진 건축가이기도 하고, 전쟁에서 남편이 죽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가장 돈을 많이 주는 용접공 시험을 보고 용접공이 되어 열심히 일하는 엄마이기도 하며, 방사능 라둠을 몸에 발라 반짝이며 돈을 버는 당당한 쇼걸이기도 하다. 험한 지역으로 이사가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사회복지사로서 사랑을 받는 소녀이기도 하고, 식물학자의 꿈을 키워 연구소에서 식물밖에 모르는 과학자가 된 그녀이기도 하다.

 

각각의 여성 캐릭터들을 잘 살렸다면, 그녀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연쇄살인범 하퍼에 대한 묘사는 무미건조하다. 그는 이 세계의 '악'을 담당하는 시스템처럼 '하우스'가 바라는대로 '빛나는 여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다닌다.

노숙자였던 하퍼가 '하우스'라는 정체 모를 폐가같은 곳에 들어가 시간을 오고가는 열쇠를 손에 얻게 되고,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오가며 여자들을 죽이는데, 유일한 생존자가 있다.

 

개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커비 마즈라치. ( 이 부분은 정말 읽기 힘들어서 빨리 빨리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그녀는 신문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자신의 사건을 가시로 썼던 범죄사건 기자였다가 스포츠 기자로 밀려난 댄 벨라스케스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와 댄이 만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댄은 정의롭고 집요한 범죄기자였지만, 경찰의 부패와 맞서다가 협박 받고, 스포츠로 밀려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작가가 캐릭터 묘사도 좋고, 문장들도 좋으며,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씬'을 만드는 능력도 좋다. (주로 댄과 커비가 엮였을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퍼를 그렇게 드라이하게 표현한 것 또한 눈여겨볼만 하다. 시카고의 20년대에서 90년대까지가 나와 있는 것들도 참 좋았는데, 건축가가 나왔던 부분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나 반 데 로에가 언급되는 장면들은 '맞아, 여기,시카고지'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다. 건축의 도시. 수많은 건축가를 배출한 시카고.

댄이 야구 기자다보니 시카고컵스 얘기도 빠지지 않고, 사회복지사가 일했던 악명높던 시카고건축사업 같은 것 등의, '시카고'라는 도시 역사의 한 부분도 캐릭터와 함께 잘 녹아나고 있다.

 

댄은 커비를 좋아하게 되는데, 댄의 어수룩하고 농담따먹기 하면서 커비를 도와주는 캐릭터도 참 좋다. 하퍼를 찾아 쳐들어가기 직전의 '베트맨과 로빈' 장면도 내가 꼽는 명장면.

 

커비는 생존자다. 엄마도, 경찰도, 댄도 모두 말리지만, 끝까지 4년여에 걸쳐 모든 관련 자료를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뒤지고, 찾는다. 죽었다고 오보가 날정도로 심하게 당했지만, 살아남아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진짜 멋진 캐릭터다. 그렇게 생존자인 커비가 모든 빛나는 소녀들과 함께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끝까지 맞서고, 끝을 맺는 것도 커비이다.

 

dog people 들에게 미리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에는 읽기 힘든 장면이 나온다. 그런 장면들에서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긴한데,커비를 생각하며 읽었다. 책을 읽고나서 곱씹을수록 '커비'는 훌륭하다.

 

근데, 모두가 피해야할 이 책의 한 부분은 바로 '옮긴이의 말'이다.

이런 소설에서 옮긴이는 왜 반짝이는 소녀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다니는 하퍼를  '21세기 최고로 매력적인 살인자' 라고 하는건지 궁금하다. 한장  조금 더 되는 옮긴이의 말이 온통 하퍼 얘기인걸 보면, 하퍼에 제대로 감정이입한건 알겠다.

 

리뷰에서 계속 썼듯이 이 책은 '덱스터'도 아니고 '한니발'도 아닌, '샤이닝 걸스',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어째서 소녀들 목 따고, 내장 꺼내서 전시하는 연쇄살인범을 '최고로 매력적'으로 느끼는건지. 궁금증을 유발해서 책선전 하려고 한거라면 역겨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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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9-24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terribleminds.com/ramble/2013/06/06/ten-questions-about-the-shining-girls-by-lauren-beukes/

와, 작가 인터뷰 찾아보니깐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위에 적은 `베트맨과 로빈`이다. 역시!

WHAT DO YOU LOVE ABOUT THE SHINING GIRLS?

The women. All of them, how they’re sharp and bright and curious and ready to set the world alight in some small way, and if they’re scared, they find a way to push through that. Especially Kirby. And I love her relationship with Dan. The love unfolding, if only she’d let it, if only she hadn’t let her whole life be derailed by her obsessive quest to find the man who did this to her.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시카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다 잘 읽었어요. 작가님!

하이드 2015-09-24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댄과 만나는 장면, 그리고 댄하고 같이 차에 앉아서 베트맨 로빈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샤이닝 걸스
로렌 뷰키스 지음, 문은실 옮김 / 단숨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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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말 진심으로 토나온다. ` 21세기들어 가장 매력적인 살인범` 이라니. 책 잘 읽고, 옮긴이말 읽고 홀딱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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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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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개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주로 분노)가 주여서 저자에게는 쓰는 과정이 도움이 되었길 바라지만, 책에 나오듯 `남의 가족 이야기`는 재미 없다. 저자의 케이스를 통해 `가족이라는 병`을 돌아볼 수 있지만, 기대했던 분석글을 찾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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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3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3 1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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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3 1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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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3 18: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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