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과 작약 꽃대를 보듯 책을 보며 살았다.
요즘들어 많이 하는 생각이 내가 '산' '시간'의 가격이다.
아직까지 내 인생에 휴일을 뺀 매일을 시간을 지켜 어딘가에 가서(학교,회사,가게) 시간을 보내고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날들이 더 길다. '저녁 늦게'에서 잠깐 멈칫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저녁 늦게 귀가했던 것이 맞다.
돈 없는 나날들을 보내는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아빠'다. 제주에 내려가 아빠와 이야기하면서 내 마음이 더 정리가 되었는데, '아빠, 나는 돈 없는 것에 그렇게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아요.' 라고 여러번 말해야 했다. 물론 '결혼해서 애 있고 그러면 모르겠지만' 이 덧붙여 지긴 한다. '부양고양이'!는 있지만.
사람이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돈을 좀 세이브해놓고 있어야해. 라는 말이 와닿는건 잔병치레 없고 병원에 거의 가지 않는 나의 미래를 위해서라기보다(이것도 생각해두긴 해야겠지만) 고양님들 정기검진 비용이라던가 (특히여덟살 된 말로) 혹시 모를 병원비를 세이브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 정도다.
얘기가 곁길로 샜는데, 평소 생각하던걸 말로 뱉어버리고 나니, 서울 와서는 그에 대한 생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뻗어나간다.
예를 들어 ... 회사 다니던 나에게 '노보텔 슌에 가서 일식부페 먹을래, 월요일 오후 출근할래' 라고 묻거나, '샤넬백 살래, 주4일근무할래?' 묻는다면, 난 기꺼이 월요일 오전에 쉬거나 주4일 근무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맛있는 것 좀 덜 먹고 (애초에 몸에 좋은걸 몸에 넣고 싶은 정도를 제외하고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은 거의 없다. 거기에 더해 돌아다니는 거 귀찮음) 옷,구두,가방,화장품 좀 덜 사고, 미용실 덜 가고, 네일도 안 하고 산 시간에 나는 수요일 아침 여덟시지만, 출근 걱정 없이 사과 한 쪽 깨 먹으며 물끓여 뜨거운 커피 마시고,책 읽으며 평온하게(?) 끄적거리고 있는거다. 라는 생각이 몸과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인데,'시간'의 가격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이렇게 비싼 돈에 시간을 사서 누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시간을 사는 것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단지 아침 출근시간에 여유로운 것만은 아니고, 의,식,주처럼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무엇.인데 결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좋은 글을 읽어서 쓰기 시작한 페이퍼다.
표지가 과하게 예뻐서 이거 뭐야, 하고 봤더니 현암사 책이어서 급수긍해버린 장석주의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는 지금까지 읽었던 장석주의 책들 중 가장 좋아서, 와, 표지만으로도 완전 멋져서 안에 백지라도 돈 하나도 안 아깝겠는데, 책도 좋아. 라는 모드로 이렇게 반나절이 멀다하고 계속 글 남기고 있다.
위에 다 잡설. ㅎㅎ 이 이야기를 옮겨두고 싶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인간을 성과주체라는 괴물로 만드는 피로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사회는 외부적인 무엇이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성과주체는 어떤 기구나 조직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는 자가 아니다. 누구의 예속도 받지 않는것은그들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고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이 성과주체들은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 존재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피로는 긍정성의 과잉이 불러온 피로인데, 이것은 삶에서 모든 것을 고갈시키고 파괴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속에서 시들어간다.
우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착취자로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다.우리는 여전히 활동의 과잉으로 내몰리고 있다. 과제는 "활동적 삶"이다. 우리는 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노동의 절대적 명령에 포획되고,결국은 노동-기계로 전락한다. 이것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이고, 시간과 세게 상실의 위기다. 근대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흐르며, 그 가속화로 밀려가는 시간 속에서 "삶은 더 이상 지속을 수립하는 질서의 구조나 좌표 속에서 자리 잡지 못"한다.
사색이 없는 노동에 내몰리는 분주한 시간들이 평면화하는 것은 삶에서 "어떤 사건, 형식,진동은 오직 긴 사색적 시선에만 모습을 드러낼 뿐,일하는 시선에는 숨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빠질수록 오늘의 삶과 미래의 기획을 지향성 없는 공간에 부려놓는다. 그 공간의 대표적인 예가 지향성이 없는 웹 공간이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수많은 연결 가능성, 즉 링크들로 짜"인 세계이다.
우리는 의미를 소유하고 향유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주어지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머무름의 능력, 정적에 기대어 고유의 삶을 관조하고 누리는습관,사색적 삶, 시간의향기를다 잃어버렸다. 그대신에 지나친 분주함,조급성,활동적 삶에 자신을 내어준다. 시간이라는 주권을 잃고 빠듯한 시간 속에서 표류하며,늘'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염려의 대상에 분주하게 매달리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염려의 대상으로 인해 자기시간을 잃어버린"자다.
시간 부족은 "우리가 시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기 자신을잃어버린 사람의 특징은 의미의소실 속에서 삶의 메마름을 겪어낸다는 점이다. 그들은 늘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자기시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기 대문이다. 반면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는, 말하자면 늘 시간이 있다.그가 항상 시간이 있는것은 시간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잃고 불연속적 흐름으로 변질한다. 일과 효율성이 삶의 한가로움을 삼켜버린다. 우리는 노동의 분주함에 여유와 한가로움을 자발적으로 헌납한다.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자는날마다 일어나는 일상의사건들 속에서 제 자아를 흩어버리는 자이고, 그들은 결국시간의 지속성을 거머쥐지 못한다. 이 시간의 쪼개어 흩어짐.늘 목적과 목표를 향한 분주함에 매달림. 분주함 속에서 수습되지않는 산만은사색적으로 자기 안에 머무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쁜 자들은 "공허한 지속으로 늘어진 시간"을 사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시간은 장력을 갖고 응집하거나 묶이지않고, 부서지며,흩어지는 것으로, 아무의미도 맺히지 않는"점적인 현재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시간 속에서 삶은 비루해지고,죽음은 불시에 다가와 삶을 무자비하게 끝내버리는 폭력이다. 지나친 분주함으로 "활동적 삶"을 채우는 것은 붕괴하는 시간이며, 위기의 시간이다.
한병철은 이것을 좋은 삶으로 대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이데거의 시간 전략을 소개한다. 그것은 "다시 시간의 닻을 내리는 것,시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받침대를 마련하는 것,시간을 다시 역사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시간이의미 없이 연속으로 흩어져버리지 않게 하는것"이다. 좋은 삶은,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가 온존하는삼ㄹ. "오직 일만 하는어리석음"에 맞서는 지혜로운 삶. 바로 느림과 지속성을 거머쥐는 "사색적 삶"이다.
한병철의 책은 늘 좋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음 물론이며, 큰 틀 안에서의 나, 사회 안에서의 개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의 현재.를 돌아보게 해준다. 매우 얇고 작지만, 가장 묵직한 책, 현대인의 필독서다. (-> 아, 흔한 말이지만, 이 말 안 쓰고 참을 수가 없다)
아,그러니깐, 장석주가 이야기하는 한병철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