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를 가려고 하는데

 초등학교 고학년(4학년, 아니면 5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시다가 질문을 하셨던 건데) 너희 집이 언덕 중간에 있고 언덕 위에 가게가 있고, 언덕 아래에 가게가 있을 때, 너는 어느 가게를 가겠냐고? 직감적으로 대답하기 못하고, 그 짧은 시간에 나쁜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 뒤에 가게가 있어 언덕 위고, 아래고 간에, 평소에 생각이 없던 터라. 가만있자, 거리가 같다면 어디를 가는 것이 효율적일까? 사러갈 때는 빈손으로 가고, 돌아올 때 산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오려면..... 그러면 언던 위의 가게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선생님께 대답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때 선생님이 언덕 위에 가게를 가는 바보가 어디 있니? 제가 만약 대답을 했더라면, 완전히 바보가 될 뻔 했습니다. 어른이 되서 생각해 보니, 사람이라는 것이 당장 편한 것을 추구하게 마련이더군요. 가게 목을 보면 다니는 길에서 얼마나 가까운지가 중요하고, 하물며, 2층과 1층의 차이도 매우 크고. 선생님이 하신 말씀, 언덕위에 세워 잘 되는 것은 교회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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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1-1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덕 위의 가게를 가려고 했는데;;뭐 바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바보가 된다는 것이 재밌군요.

비로그인 2004-01-1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언덕위에 세워 잘 되는것은 정말 교회밖에 없나요?? 상업하시는분들...정말 목 좋은곳 찾느라고 수도 없이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니시는것 같더군요..."목 좋은 곳이 바로 성공(대박)의 지름길이다"인가요?
 

 토끼와 거북이

 토끼와 거북이는 누구나 다 아는 동화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는데, 토끼가 앞서 나갔지만, 중간에 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는 사이 거북이가 승리했다. 이 동화가 주는 교훈은 재능이 있다고 또는 앞서 나간다고 자만하고 나태해지면, 꾸준히 노력하는 이에게 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토끼가 이겼다면, 무슨 이야기가 될까. 부잣집 자녀로서의 배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부모님을 원망해야 하나, 아니면 천재적 재능을 내려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원망해야 하나?, 과연 낮잠을 자는 토끼는 얼마나 되는가? 노력하면 무조건 다 성공하는가? 그래서 내린 결론이 더 있습니다.

 동화의 작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성실성외에, 정당한 게임의 규칙과 내가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자 입니다. 토끼와 거북이 공정한 게임은 육상에서 달리기를 한 번 경주하고, 물에서 헤엄치기 경주를 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거북이라면, 잘 못하는 달리기를 연습하느니 보다 잘하는 수영으로 승부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거북이가 사회적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 달리기 경주에 내 몰릴 수 있습니다. 이 때 원망만 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토끼인데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되었다면, 한번 거북이의 입장을 생각해 볼 여유가 필요합니다. 거북이가 게을러서 늦게 뛰는 것이 아니고, 짧은 다리를 비롯한 체형 때문에 늦게 뛰는 것을 이해주었으면 합니다. 공부 잘 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공부 잘하는 사람이 나중에 아랫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가 본인이 쉽게 공부한 경험만 생각하여, 아랫사람을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른이 되어 다시 느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공정한 게임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해’라는 새로운 교훈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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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시절 (어쩌면 중학교)에 다보탑과 석가탑을 비교한 글이 국어 책에 실렸습니다. (현진건님의 불국사 기행)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대로 꾸민 성장미인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미인이라 할까.

 

 

 

 당시 저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실제로 보지 못했고, 그림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림으로 볼 때는 석가탑보다 다보탑이 훨씬 멋있게 보였습니다. 담장미인보다야 성장미인이 낫지. 어떻게 촌색시가 대감집 따님과 견주겠어.  그러나 고등학교때 실제로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고 나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겼습니다. (감동 받은 이야기를 마이페이퍼에 올리지만 실제로 저는 목석같은 사람입니다.) 석가탑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다보탑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다보탑은 돌사자도 깨져 있고 화려한 외양때문이지 풍화작용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당연스럽게 다보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니 석가탑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모두 아름다운 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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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1-08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마립간님은 신라의 왕 다우십니다.섬세함만 보는분은 여성적인 다보탑을 좋아하지만...신라 석탑의 정형인 석가탑은 점과 면과 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알맞은 비례를 가진 석탑으로 힐끗 보면 가벼워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조금만 살펴봐도 빈틈 하나없는 완벽한 석탑일겁니다. 妙相莊嚴......無影塔이라...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부처를 찾는 眞空妙有를 담은 한송이 석조미술의 상좌가 바로 석가탑이 아닐까요?? 문화재적 심미안에 놀라움을 감출수 없군요..
 

 Art is long, life is short/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금언, 명언록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글입니다.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예술가의 인생은 짧지만 그가 남긴 예술 작품은 후대에 길이길이 남는다.

 그런데 이 말을 남긴 사람이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상하다. 미술가쯤이 남겼을 만한 말인데, 어째서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을까.

 이 후 art에 기술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다.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말의 뜻은 ‘배워야할 의학 기술은 너무 많은데, 그것을 배우기에는 인생은 상대적으로 짧다.’입니다. Art를 예술로 번역한 것을 외래문화의 창조적 해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잘 모른 사람이 번역한 것을 뜻도 모르고 (이런 말이 나오된 배경도 모르고) 쓰는 말로 생각해야 하는지. 나 참.

 cf ; 원어 (라티어)Ars longa, vita bre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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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 염정소설이지 사회개혁소설이 아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춘향전은 남녀의 사랑, 신분적 제약을 벗어난 사랑으로 사회개혁소설로 배웠습니다. 춘향전의 형성에 암행어사설화, 열녀설화, 신원설화, 염정설화, 관탈민녀설화, 명경옥지교환설화 등이 바탕이 되었고 배경사상에 인간 평등 사상, 자유 연애 사상, 사회 개혁 사상, 열녀 정절 사상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결혼이전에도 첩을 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도령이 춘향이를 찾은 것이 부인으로 마지하기 위해 사회 신분을 뛰어 넘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남원에서 변사또에게 춘향이를 구한 뒤 서울로 데려와 부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첩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조선시대에 행해지던 일반적인 것이었을 텐데, 어째서 사회개혁소설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위 이야기 중 신분적 제약을 벗어난 사랑이 사회개혁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도령이 변사또를 봉고파직한 것도 암행어사의 신분과 관찰사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마당놀이에는 평민이 양반을 풍자하는 장면이 많은데, 이를 양반이 용인했다고 합니다. 백성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래 계급의 어사가 사또를 문책하는 것은 이와 같은 요소가 작용하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춘향전이 사회개혁소설이라는데 동감할 수 없는데,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요즘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cf ; 조선시대 축첩제도가 있었을 때를 보고 일부다처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았는데, 제 생각에는 일부일처다첩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중국에는 정식부인이 둘 이상으로 있을 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중혼으로 엄격히 규제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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