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건 이 번데기 과정을 미술가라 불리는 사람들만 경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이 과정 속에 있다.
운동을 하든, 노래를 부르든, 발명을 하든, 사업을 하든, 장사를하든, 요리를 하든, 글을 쓰는, 춤을 추든, 말을 하든,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이 과정은 진행 중이다.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무지한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누군가는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영영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를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내가누구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 번데기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 번데기 속에서 누군가는 자기만의 해답을 발견해 껍질을 찢고 나와나비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실패하기도 한다. 물론, 거듭된실패에도 굴하지 않는다면 끝내 나비가 될 수도 있다. 애벌레가번데기 껍질을 까고 나와 나비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는 온전히 애벌레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 지금 우리는 그 과정 어디쯤에 있을까?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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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똑같은 반복은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공교롭게도 우리의 삶도 매일 반복된다. ‘오늘‘ 연작 작업을 평생 반복한 화가의 삶처럼, 더 나아가 연월일만 반복하는 ‘오늘‘
연작처럼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반복한다. 매일 자고 또 일어난다. 매일 씻고 밥을 먹는다. 이런 생리적인 행위만 있을까? 매일반복하는 일과가 있다. 학교에 가거나 일터에 가거나 혹은 어떤일을 하거나, 그 일과를 한동안 매일매일 반복한다. 수년간 모종의 일과를 반복해 마치고 나면, 또 새로운 일과를 만들고 그것을매일 반복한다. 일상의 생리적 행위부터 사회적 일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평생을 걸고 무언가를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삶은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관성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어떤 일을 처음 경험할 당시에는 분명 아주 새롭고, 너무 소중하고, 정말 감사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하루 이틀, 한 달,
1년, 3년, 10년이 반복되다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처음 느꼈던새롭고, 소중하고, 감사했던 그 모든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무감각해져 그 어떤 것도 음미할 수 없게 된다. 분명 내 삶속에, 내 곁에 있지만 사실상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가 보고 있는 것도, 만나고 있는 것도, 하고 있는 행위도, 하고 있는 일도,
모두 다. 그렇게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시들어간다. 어찌보면, 온카와라의 ‘오늘‘ 연작은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이면에 숨겨져 있던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혹시 온 카와라의 ‘오늘‘ 연작에서 우리 자신의 일상이 거울처럼 비쳐 보이지는 않는가?


화가 이우환은 어릴 적 어머니와의 대화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소년 시절 그는 쌀을 씻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매일 똑같은 쌀 씻기를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즐거우실 수 있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똑같은 쌀 씻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 일을 할 때마다 매일 다르게 느낀다고 어떤 때는 시원한 물이 생기를 주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홍이 오르기도 한다고. 쌀과 물과 손이 하나가 되어 잘 움직일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어 매일 쌀 씻는 것이 항상 새롭다고, 어린우환의 눈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쌀 씻기는 지루하기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쌀 씻기는 매일,
매 순간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예술적 행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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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김정금 지음 / 델피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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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을까.

소설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이야기 진행이 빠르고 마지막에는 플래시백처럼 인물의 시점이 바뀌며 사건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어서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물론 소설에 담겨있는 내용은 결코 사원한 느낌으로 날려보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만.


보험조사원 김지섭은 고객이 밀어넣는 돈봉투도 마다하지 않고, 공정성을 담은 조사 보고서가 아니라 보험금 지급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역시 거리낌이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손해보험회사의 위임을 받아 보험사고를 조사하는 지섭의 급여는 수임받은 건 당 수임료를 받는 형태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짧은 시간에 많은 수임건을 받아 해결하는 것만을 목표로 업무처리를 하고 있는 지섭이다. 그런 그에게 빨래를 널다가 아파트 9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상해를 당한 박연정의 보험료 지급 건이 배당된다. 고객 면담을 위해 연정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간 지섭은 연정과의 대화에서 뭔가 부조리한 느낌을 받기 시작하는데......


보험 사기와 관련된 범죄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책을 펼쳤는데 의외로 이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부인이 재판 중에도 남편의 사망보험금 청구 소송을 걸었다는 뉴스를 보며 어이없어 했는데 사망보험금을 노린 살인사건을 검색해보니 정말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 이리도 많았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책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지만 보험금을 받아내기 위해 부모와 자식을 살해하고 애인을 살해하고 노숙인들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세상 현실에 대해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미성년자 성매매, 보험사기, 경찰비리, 노숙인이나 탈북자 새터민들의 생활고와 신분 위조... 이 많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나열되고 있기보다는 굵은 보험사기 사건을 줄기로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 사회의 범죄문제들을 끄집어 내고 있는 소설의 스토리 구성은 책에 빠져들게 하는 짜임새가 탄탄하다. 다만 후반부로 가면서 개연성이 좀 부족한듯한 극적인 상황의 전개와 해결이 좀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 아쉬움을 잊을만큼 이야기의 전개는 빠르게 진행되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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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급여 과잉 진료로 비싼 진료비를 낸 고객들에게 보험금을 내어줘서 적자가 나도, 보험회사는 다음 해에 모든 가입자한테 더 많은 보험료를 거둬서 새어나간 보험금을 메꾸면 그만이야. 그뿐만이아니잖아. 병원의 과잉 진료로 건강보험공단 재정까지 축나서 건강보험료마저 오르고 있잖아."
김 과장이 덧붙여 말했다.
"맞아요. 건강보험료도 오르고, 실손보험료도 오르고, 갈수록 힘들어요."
"국민들만 호구인 거야. 저것 봐. 노른자 땅에 죄다 보험사 빌딩이잖아. 다드림 손해보험에서 일하는 선배 말로는 올해 성과급이 우리연봉 절반만큼 나왔다."
김 과장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병원도 마찬가지죠, 뭐. 환자가 실손보험 믿고 고가 치료도 스스럼없이 받으니 그야말로 ‘장사‘가 잘 되잖아요.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치료의 질을 올리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죄다 병원 건물 리모델링하는 데에 쓰질 않나, 의사들 품위유지비로도…………."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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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의 말 - 제163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다카야마 하네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소명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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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가득 들어찼던 자료들이 가치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미나코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모를 것이다. 미나코는 다만 이 건물에 드나들면서 매 순간 자료 정리에 성실히 임했을 뿐이다. 진실은 그 순간부터 과거의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순간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훗날 필요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145)


오키나와와 관련된 문학작품, 자료실에서 일하는 미나코, 세개의 단어로 유추하는 퀴즈 게임... 이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사실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미군기지가 있어 황페해진 곳이었고 일본 패망 직전에는 자살특공대를 강요해 수만의 오키나와 주민을 말살시켰고, 그 이전에는 류큐 독립왕국이었으나 일본으로 복속이 되어버렸고, 그 이전에는....

그렇게 하나하나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들은 바 있고 그 역사속에 오키나와는 자연발생한 태풍마저 처음으로 맞이하는 섬,이라는 것 역시 우리나라 제주의 역사와 비슷해서 더 관심이 가는 곳이었다. 사실 일제시대때 오키나와가 없었다면, 아니 2차세계대전이 조금 더 길게 갔다면 아름다운 섬 제주는 일제의 병참기지가 되어 더 황폐해졌을 것이다. 강정에 군사기지가 들어서며 구럼비가 파괴되기 전에, 4.3사건이 있기 전에, 일제시대에 이미 산과 들 곳곳을 파헤치고 군사시설을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제주와 다를 것 없는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래서 더 궁금한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간단하게 줄거리만을 놓고 보자면, 오키나와로 이사 간 미나코는 그곳에서 요리 씨가 운영하는 오키나와 도서 자료관을 중학생 시절부터 드나들다가 결국 그곳에서 아카이브 정리를 하고 온라인으로 접속한 이들에게 퀴즈를 내는 일을 맡게 된다. 퀴즈를 풀기 위해 접속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들을 통해 미나코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 집 마당에서 발견한 동물의 정체도 확인하게 된다. 

며칠 전 티비에서 몽골의 축제에서 말의 경주는 어느 말이 빠르냐가 아니라 이쁘게 빨리 들어오느냐가 승패를 가른다는 것을 보면서 웃었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 역시 오키나와의 전통문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류큐 경마는 속도가 아닌 아름다움을 겨루는 경기"(116)라고 하는 설명과 함께 그 화려했던 경마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다. 

미나코의 집 마당에서 발견된 슈리의 말,을 통해 오키나와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싶었지만 계속 읽어봐도 왠지모를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어쩌면 작가도 소설 속 등장인물도 오키나와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에 더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한걸음 떨어져 오키나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데 이것이 역사 속 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실은 그 순간부터 과거의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순간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훗날 필요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145)


도서 자료관 정리라거나 온라인 퀴즈 대결이라거나 태풍이 지난 후 갑자기 등장한 슈리의 말이라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이어지고 있어서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또 등장인물들의 개인사와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또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소설이다. 뭔가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을 것처럼 전개되다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버린 듯한 이야기가 또 쉽게 이해할 수 없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어쩌면 우리 모두가 오키나와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반어적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놀라웠던 이야기는 반다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국경 없는 장소가 마음에 듭니다.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기세 좋게 주먹을 휘두르다 자신이 오히려 뒤로 나자빠지는, 중력에 의한 힘의 세기를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리는 그런 곳 말입니다. 혼자라서 지루하기도 하고 가끔 외로움과 불안감에 짓눌려 미쳐버릴 것 같을 때도 있지만"(100) 그런 곳이 지금의 우리 현실보다 더 낫겠다, 싶은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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