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적으로(3)  

 

 

 

1.

 

누나야

일년 사이 왼쪽 윗니가 1미리나 넘게 벌어졌어

 

마흔 한 살 아우의 이마와 뒤통수에는 구멍이 다섯 개나 뚫렸다

머리통을 열었다 닫았는데도 술을 마시면 니가 인간이냐

그러고도 담배를 피우면 니가 인간이냐

 

다 내려놓았어

 

하, 아우님아, 내려놓아도 너무 내려놓으셨군요 -

 

 

2.

 

딸아,

너도 이제 그만 다 내려놓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말고 

사는 대로 생각하려무나

되는 대로 살려무나  

 

일흔 세살 아비의 배에는 자꾸자꾸 바늘 구멍이 생긴다 

전나무 소나무 참나무에 뿌리 내려 자라는 또 다른 나무가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지 못하고 주사제가 되어

늙은 아비의 뱃가죽 깊숙이 스며 든다

 

아빠, 배 아프겠어요 -

 

mistletoe, 라는 스펠링에서 첫 t는 묵음임을 분명히 해둔다 

우리말로는 겨우살이, 한자어로는 槲寄生이라는 사실도 덧붙여둔다  

내려놓아도 너무 내려놓고 나니 이렇게 사소한 것이 중요해진다 

 

하, 님아, 이제 그만 내려놓고

좀 주워담으세요 -

 

3.

 

과일 수레를 밀고 가다가 비틀비틀, 어질어질, 갈짓자,

그래도 병원에 빨리 갔으니 망정이지, 

혈압약을 먹으니 한결 좋아, 딱 직립보행이 됐어

나는 이제 명실상부한 호모 에렉투스야

 

내가 니들 때문에 혈압이 빡! 올라가서 -

혈압약 한 알이면 모든 것이 쑥! 내려가

 

하, 어미님아, 참 많이도 내려놓으셨군요 -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그 큼직한 늙은 호박만

딱! 내려놓으시면 금상첨화, 아니, 새옹지마겠어요 

 

4.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새빨간 카네이션을 내려놓습니다

1, 3, 5, 7, 9 반드시 홀수여야 합니다

새빨간, 때론 검붉은 장미꽃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홀수여야 합니다

 

홀수와 홀수를 곱하면 반드시 홀수가 나옵니다

홀수와 홀수를 더하면 반드시 짝수가 나옵니다

반드시 예외가 있는 인생과 달리

수셈은 반드시 반드시의 원칙에 종속됩니다 

수셈이 참 고맙고 갸륵합니다

 

비오는 날, 눈오는 날에는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핏빛 꽃을 홀수로 -  

하, 님아, 실은 반대, 짝수로! 

짝수가 죽음의 수랍니다 -  

 

5.

 

당신의 내려놓음을

애도하고 축복합니다

살아 있음의 명복을 빕니다

 

 

20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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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분식과 두꺼비 닷컴

 

 

1.

 

어, 혹시 <평화분식> 사장님 아니세요? 택시는 부업?

아, 저를 알아보시다니, 그게 아니라 -

 

 

2.

 

10년 전 우리 동네 <두꺼비 분식>. 욕쟁이 할머니는 욕만큼이나 떡볶이가 찰졌다. 여기에 어묵과 순대, 끝! 튀김은 안 하냐고 물었다가 욕쟁이 할머니한테 욕 침만 잔뜩 맞았다.

 

<두꺼비 분식> 맞은편에 <평화분식>이 생겼다. 떡볶이, 어묵, 순대, 아, 튀김! 심지어 라면과 우동까지! 3년 뒤 <평화분식> 옆에 <평화삼겹살>이 생겼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3년 뒤 <평화분식>도, <평화삼겹살>도 문을 닫았다.

<두꺼비 분식>은 여전히 떡볶이, 어묵, 순대를 팔았다. 그사이 떡볶이의 종류가 찬란해졌다. 카레떡볶이, 자장떡볶이,아, 피자떡볶이! 그냥 떡볶이에는 쪽파 송송 당근 톡톡까지! 그럼에도 여전히 튀김은 없었다.

 

3.

 

그게 아니라 -

송파에서 떡볶이와 삼겹살이 잘 팔리니까 

강남에다 인형뽑기 집을 차렸는데 쫄딱 망했어 -

학생, 아직 젊으니 아저씨 말 잘 들어.

사람은 잘 나갈 때 겸손할 줄 알아야 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전 평화 사장님이 

그런데, 정녕 평안해 보였다.

 

4.

 

두꺼비 분식의 메뉴는 내일도 떡볶이, 어묵, 순대. 하지만 이름은 두꺼비닷컴. 살풋 더 늙은 욕쟁이 할머니, 여전히 떡볶이 양념처럼 빨간 티셔츠를 좋아하신다. 튀김은 여전히 없다. 여전히 부조리한 편견이다. 순대와 간과 위장은 먹지만 징그럽다는 이유로 허파와 심장만은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편견은 원래 부조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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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맛

 

 

 

어제는

바닷가에 비가 듬뿍 왔어요

오늘 읍내 마트에서 산

부드러운 황도 복숭아는

삶은 감자 맛이 나네요

 

내 몸이 죽으면 나도 죽는 건가요? 

 

우리 집에는 커튼이 없어요

원래부터 없었어요

잠이 들면 커튼을

열었다 닫았다, 걷었다 쳤다,

그런 꿈을 꾸곤 해요

 

 

2020.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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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꿈 밖에서 식물이 자라고

 

 

 

아이의 꿈속에 들어갔다. 깊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아이는 노랑 로봇 로디와 꼬마 공룡 크롱과 놀고 있었다. 크롱, 고기만 먹으면 응가가 나오지 않아! 크롱, 크롱! 나는 지상 우주에서 놀러온 친구 역을 맡았다. 삐삐뽀뽀, 삐뽀삐뽀, 뽀삐뽀삐. 외계인이 아픈가봐, 우리가 고쳐주자. 아이의 말에 노랑 로봇 로디가 추임새가 넣었다. 그래, 그래, 우리가 고쳐주자. 아이가 친구들과 신나게 놀도록, 나는 아이의 꿈속을 나왔다. 

 

한밤의 어둠이 내린 가운데 방울 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무럭무럭, 쑥쑥, 쑥덕쑥덕. 초 단위로 싹이 푸르러지고 줄기가 굵어졌다. 음란하고 왕성하고 아름다웠다. 

 

바람아, 멈추어다오!

삶아, 멈추어다오!

 

바람과 달리 단 일초도 멈추지 않는 삶을 피해 다시 아이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꿈속에서 아이는 한바탕 젖을 빤 아기처럼 새근새근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가 푹 자도록, 나는 다시 아이의 꿈속을 나왔다.

 

rien.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일이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을 했다. 

 

아이의 꿈 밖에서 오이와 호박이 담 넘어가는 구렁이보다 더 유연하게 초록빛 사지를 뻗고 있었다. 하늘하늘, 쭉쭉, 으쓱으쓱. 음란하고 왕성하고 아름다웠다.

 

 

 

*

 

rien. 사르트르의 <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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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가계, 1981

 

 

 

1. 덕유산

 

아비는 농부였다.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미도 농부였다. 새벽 같이 논밭으로 나갔다. 두 딸은 고추모종처럼 알콩달콩, 올망졸망 잘만 자랐다. 살을 도려내는 칼바람이 부는 날, 셋째가 태어났다. 팔순을 코앞에 두고 술에 취한 할배가 돌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갓난 아들의 탯줄을 끊기가 무섭게 젊은 아비와 어미는 덕유산을 등졌다.   

 

 

2. 황령산

 

아비는 노동자였다. 운동화를 받칠 고무 밑창을 만들었다. 어미는 분식집 아줌마였다. 등에는 항상 코흘리개 막내가 업혀 있었다. 달동네 산동네 단칸방에서 두 딸은 아침바람 찬바람을 불렀고 귀한 종이에 귀한 색연필을 칠했다. 기찻길 옆, 게딱지처럼 닥지닥지 붙은 음습한 오막살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소리소문없이 죽어갔다. 

 

 

3. 덕유산 황령산

 

아비는 노동자였다. 부전시장에서 청과물 트럭을 받았다. 어미는 노점상 아줌마였다. 하루 종일 볶은 보리와 옥수수를 팔았다. 삼남매는 콩나물 시루 속 콩알처럼 물만 먹고도 무럭무럭 자랐다. 너무 잘 자란 1번 아이는 덕유산 밑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조금 덜 자란 2번, 3번 아이는 시장바닥에서 배추와 무 잎사귀를 먹고 자랐다.

 

 

4. 황령산

 

전포국민학교 4학년 몇 반 반장 김연수에게는 귀염둥이 여동생과 개구쟁이 남동생이 있었다. 다섯 식구는 구덩이 오막살이 단칸방에 살았다. 아이들 몸에는 곰팡이가 피고 이끼가 자랐다. 빈지하에서 기어 올라왔을 때 김연수는 고등학생, 김연희는 중학생, 김형우는 국민학생이었다. 지상살이만도 고마운데 2층집의 2층이었다. 호젓한 다락방도 딸려 있었다. 전화기가 생겼고 탈수기와 냉장고가 생겼다. 1991년의 일이다.  

 

 

5. 관악산

 

산 너머 산. 우리나라에는 산이 참 많다. 산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산에 산다. 관악산 옆에는 꼭대기에 헬기장이 있는 청룡산이 있다. 산자락에 경찰서와 소방서와 초등학교가 얹혀 있다. 요즘은 산골에 살아도 감자도 먹고 물고기도 먹고 별도 따먹는다. 더 이상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된다, 아무 산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세상, 좋다!

 

*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라고? 그냥 사는 대로 살고 생각해.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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