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출근하는 길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저 표지판을 발견하였다.

과연 이런 소극적인 방법으로 테러에 대비하는 것이 옳은가?

파병 철회라는 적극적인 테러 예방책이 있는데도 왜 그걸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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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6-01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어제 추천했씨유...

조선인 2004-06-01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고맙습니다. 넙죽~
 


마로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지어준 이름...

민들레씨가 바로 비행기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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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5-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진짜 비행기꽃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은 역시 어른의 스승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가을산 2004-06-0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가 화면을 열어보았습니다.
보기좋게 빗나갔네요. ^^ 참 멋있는 이름입니다.

조선인 2004-07-1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마로는 자기가 지은 이름을 그새 까먹었습니다. 이 사진 볼 때마다 연신 비행기꽃을 외치더니... 오늘은 내가 비행기꽃이라고 얘기해줬더니 화냅니다. "아니야, 민들레야~"
 
 전출처 : 진/우맘 > 염색용 색종이

지난 21일에, 전교조 조합원 만남의 날 행사에 가서 제가 만든 면티입니다. 염색용 색종이로 꽤 간단하게 만들 수 있더군요. 살살 손빨래를 하면 꽤 오랫동안 깔끔하게 입을 수 있구요. (지금 입고 있는데...사실은 제가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를 좀 해서, 일부분 갈라졌습니다.-.-;)

에이, 이미지도 올리면서 좀 성의껏 정보제공을 해보려 했는데....방해가 심하군요. 이만 총총.

 


  주의사항 : 다림질시 과열로 인한 화재및 화상을 주의 하시오.

1. 원하는 색깔의 색지를 고른후 디자인에 맞게 오린다. 2. 색지를 종이에 배열한 후 풀로 고정시킨다 3. 담요를 먼저놓고그 위에 천이나옷을 놓고  색지를   붙인 종이를 천 위에뒤집어 놓은후 신문지나 종이를 덮는다.  4. 가장 높은 온도에 예열된 다리 미로 약 20~30초 동안 힘껏다려준다.
5. 덮은 종이와 색지를 걷어내면 염색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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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퇴근길... 문득 생각이 나 지하철역 헌혈의 집에 갔다. 뜻밖에도 손님들이 북적대어 대기할 의자조차 모자르는 상황이었다. 내 앞으로 3명의 순서를 기다려 간신히(?) 문진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헌혈이 언제냐는 물음에 답을 못했더니 컴퓨터 조회를 해준다. 2000년 12월이 마지막이었고, 이번에 하는 헌혈이 11번째라는 걸 그 덕분에 알았다. 간호사 왈 "예전엔 자주 하시더니 너무 뜸하셨네요." 딱히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닌줄 알면서도 주섬주섬 변명을 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임신도 하고, 게다가 애 낳을 때 수혈을 받았는데, 그런 경우는 1년 이상 헌혈을 못 한다고 하길래..." 다행히 간호사가 "맞아요, 잘 아시네요. 1년간은 하시면 안 되죠"하고 넘어가주었다.

그리하여 3년반만에 헌혈을 하다 보니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헌혈하라고 강제로 팔을 이끄는 아주머니들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이어졌고, 어린 여학생부터 중년 아저씨까지 사람들도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간호사 선생님들의 구구한 설명이 없어도 알아서 서류를 작성하고 성분헌혈을 하겠다고 자청하는 걸 보니 다들 헌혈 경험이 여러 차례 있는 듯 하였다.

솔직히 고백하면 울 신랑은 헌혈하는 걸 무진장 무서워하는 터라 여지껏 단 2번밖에 해본적이 없다. 연애할 때 내 꼬임에 넘어가 처음으로 헌혈을 해보았고, 그 후에는 아무리 꼬셔도 꿈쩍도 안했다. 아마 마로 낳을 때 전치태반으로 인해 내가 수혈을 받아야 하지 않았다면 2번째 헌혈은 평생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달라진 헌혈문화를 보면 울 신랑도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 아이 찾는 시간이 촉박해 전혈을 하고 나왔으니 2달후에 다시 신랑을 꼬셔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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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29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저도....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첫경험이 너무 두려워서 안 해봤는데...^^;
혈관이 잘 안 잡히는데다, 초보 간호사인지 바늘을 세 번이나 찌르고...흑, 나중에는 거짓말 않고 손바닥만한 멍이 들었더랬어요.
그래도...해볼까?^^

반딧불,, 2004-06-1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긴거와 다르게 빈혈이 심하다고 몇 번이나 퇴짜였지요.
그러나..몸이 불기 시작한 시점으로 부터^^;;
특히...결혼 후부터는 아예 생각도 안했는데...한 번 가야겠군요.
흑..해야하는데 하면서 생각만 매번이고..두렵습니다.
 

김진숙 동지 추도사

인간으로 태어나 노예로 살던 자의 부끄러움.
그걸 깨우쳐준 전태일. 그분을 열사라고 부르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 분의 죽음에 책임질 일이 없었고, 자책할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함께 했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냥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때때로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다짐들을 담아 떠올릴 수 있는 바위 같고 산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박창수와 11년, 김주익과 19년, 재규 형님과 15년. 군사독재에 치를 떨며 숨죽여 오르내리던 용두산 공원이 있고, 민주노조 세워보자고 새우깡 안주를 놓고 밤을 새우던 다대포 바다가 있습니다.

밤새 등사기로 밀어낸 유인물을 테이프로 감은 채 정문을 통과해야 했던 안전화가 있고 화이바가 있습니다. 번갈아 가며 면회를 오고가던 감방이 있고, 한진노조 때문에 세배로 늘려야 했던 영도경찰서가 있습니다. 시장 아주머니들이 싸다준 김밥을 최루가스에 비벼먹던 6월 항쟁의 거리가 있고, 멸공의 횃불아래를 부르며 침묵의 공장을 해방의 광장으로 만들어가던 대투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착하다는 이유로, 너무 말이 없어 깝깝하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재단하며 때때로 미워하기도 했던 애증의 세월들이 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주익씨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그 큰손을 붙잡고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았는데 이제 어디에다 그 얘기들을 다 해야 합니까?

85호 크레인의 달력은 129일의 시작 6월11일에 동그라미가 쳐진 채 멈춰지고, 그 칠흑 같은 밤으로부터 비는 참 그악스럽게도 내렸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늦은 밤, 011-554-1469.
이제 다시는 받을 일도, 걸 일도 없는 전화번호 하나.
저녁은 먹었어요?
예….
비가 많이 와서 어떡해요?
비야 맨 날 오는데요 뭐….
전 그때까지만 해도 용건이 궁금할 따름이었습니다. 용건이 없는 전화는 겉도는 얘기가 몇 마디 더 이어지다 그럼 수고하시라는 잔인한 인사를 그에게 남긴 채 끊어졌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그 황소 같은 사람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곰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단 한 발짝도 내려설 수 없는, 땅보다는 하늘이 가까운 그 꼭대기가 얼마나 아득했을까. 얼마나 내려오고 싶었을까. 봉다리에 매달아 크레인까지 밥을 끌어올리던 그 밧줄에 목을 걸어야 했던 그 처절한 절망을 이제야 헤아리는 이딴 게 무슨 동지입니까.
죽을 각오로 올라갔으나 그는 살고 싶었던 겁니다. 9월 9일 유서 한 통을 써놓고 기다리고, 10월14일 또 한 통을 서놓고 목이 메이게 간절하게 기다려보고. 단식도 해보고, 삭발도 해보고, 수 십 번 집회도 해보고, 태풍도 혼자 견디고, 추석도 혼자 견디고, 아버지 제사도 혼자 견디고, 이제 더는 올라갈 곳도 없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해볼 것도 없었던 그 처절했을 절망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백만 번을 생각하고 천만 번을 생각해도 아까워서, 사무치게 아까워서 미치겠습니다.

다른 애들 다 가진 힐리스 한 켤레 사들고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애비.
아빠 얼굴을 몇 개나 그려놓고 일자리 구해줄 테니 돌아오라고 했던 10살짜리 딸내미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더 그 딸내미를 어루만지고 안아보고 싶었을 애비.

129일의 아빠의 부재로도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는 일곱 살 막내가 이제는 영영 아빠 없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애비가, 그 아이들을 그 올망졸망한 새끼들을 기어이 상주로 만드는 세상.

10월17일 그 날 이후 크레인과 눈이 마주칠까봐 하늘을 올려다 볼 수조차 없는 아저씨들. 너나 없이 '미안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정작 미안한 건 우리가 아닌데도 그 한마디가 인사가 돼버린 고통의 시간들.

재규 형님도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때 "형님이 뭔 죄가 있습니까" 그 한마디를 못한 게 또 이렇게 남습니다. 재규 형님은 그렇게라도 지회장을 따라가서 그 한마디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
다. 저들은 유서가 없으니 단순 추락사랍니다.

김주익 지회장이 빤히 내려다보는 4도크에 피로 써내려 간 유서. 얼마나 더 처절한 유서가 있어야 합니까? 바로 그 4도크에 매어있던 배를 새벽에 잠수부까지 동원해서 빼내가고, 배가 출렁이던 자리엔 조합원들의 한숨과 패배감이 넘실거리고, 그 넓은 도크바닥을 종이 삼아 몸 뚱아리를 붓 삼아 써내려 간 얼마나 더 처절한 유서가 필요합니까? 안기부와 한진자본이 죽인 박창수 위원장은 유서가 없어 13년 동안 의문사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답니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노무현, 문재인, 그들은 민주화 됐습니다. 도둑놈도 살인마도 그들이 집권하는 순간 민주화가 완성되는 거 한 두번 봤습니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누가 지 입으로 내 독재자요 합디까. 누가 내가 도둑놈이요 내가 살인마요 합디까. 도둑놈도 정의사회 구현이요, 도둑놈의 애비들도 위대한 문민의 정부요, 국민의 정부였습니다.

수능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아이들 차례입니다.
집이 강남도 아니고, 수백만원짜리 과외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노동자의 아이들이 어차피 실업자 아니면 비정규직으로나 살아가게 될 아이들이 차례차례 옥상에서 뛰어내릴 차롑니다. 영등포 경찰서장 짝 날까봐 내놓고 말은 못해도, 아이들의 잇따른 죽음엔 전교조의 기획의도가 엿보인다고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입들이 한둘이 아닐겁니다.

강남의 집 값이 1주일에 7억이 오르고, 야당이 한 자본에게서만 100억을 받고, 철도에서, 부안에서, 전교조에서 정부가 했던 약속들이 손바닥처럼 뒤집어지고, 어느 것 하나 정상인 게 없고 어느 구석 하나 상식이 통하는 게 없는데도 용케도 정권이 유지되는 그리고 언제나 비슷한 행태가 되풀이되는 유일한 힘.

경상도에선 자본가도 1번 노동자도 1번, 전라도에선 자본가도 2번 농민도 2번. 이 희한한 연대가 유지되는 한 아무리 피터지게 싸워도 세상은 안바뀝니다.

노동자가 죽고, 농민이 죽고, 노점상이 죽고, 장애인이 죽고, 아이들이 죽어도, 그때마다 다시는 울지 말자 수백 번을 맹세해도, 죽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죽었으면, 그 아까운 생목숨들을 그만큼 바쳤으면 영남대승론, 호남필승론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필승론이 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제발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자금을 쌓아놓기 위해 빌라 한 채가 통째로 금고가 되는 시대에, 한푼 두푼 모았던 돼지저금통이 아직도 감개무량하십니까? 자본가에게서 나온 검은 돈으로 정권을 사는 대통령이 노동자 편이기를 바라셨습니까? 조중동의 입이 곧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체제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셨습니까? 효리에게 알몸을 보여달라는 스포츠신문들을 돈 내고 사보면서 세상이 바뀌길 바라셨습니까? 삼성해복투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도 라이온스를 응원하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울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줄줄이 개죽음을 당해도 현대 호랑이 축구단이 이기는 날 축배를 드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우리는 저들의 손바닥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남호만 나쁜 놈입니까? 김문기만 죽일 놈입니까? 착한 자본가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자들만이, 남의 눈에서 쏟아지는 피눈물을 달게 마시는 자만이 자본가가 될 수 있고,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월드컵경기장으로 가는 게 애국이 아니라 효순이 미선이를 위해, 핵폐기장 반대, 파병반대를 위해 촛불을 밝혀드는 게 애국이요, 대∼한민국을 외치는 게 단결이 아니라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게 계급적 단결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생산해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영남·호남의 연대가 아니라 농민·여성·이주노동자·장애인·노점상, 그들과의 연대가 진정한 연대입니다.
철도 동지들, 화물연대 동지들, 쓰라린 만큼만 다시 일어섭시다. 한진중공업 동지들, 세원테크 동지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동지들. 우리가 흘린 이 피눈물만큼만, 꼭 그만큼만 다시 갚아 줍시다.

전국에서 오신 수많은 동지들. 그리고 하도 오래 싸워서 이제는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또다시 맨몸으로 이 시린 겨울을 맞설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 작은 노조라서 신문에 한 줄 안나고, 집회 한번 뽄때나게 안되던 수많은 투쟁사업장 동지들.

돈 없고 권력 없는 노동자들이 몸뚱이로 써내려 왔던 피눈물의 역사. 목숨으로 노동해방 횃불을 밝혀왔던 노동자들의 처절한 역사. 그 역사의 승리를 위해 이제는 검은 머리띠말고 노동해방의 붉은 머리띠를 다시 맵시다. 숨쉬는 것조차 죄스럽고, 지금은 죽을 만큼 힘들어도 기필코 살아서 단결 투쟁 노동해방으로 총진군합시다.


김주익 열사는 지난해 10월 17일 한진중공업 투쟁 도중 돌아가신 분입니다. 한진중공업 회사는 작년 3월부터 '인력체질개선'이라며 약 650여명(조합원 138명)의 노동자를 강제사직시켰었고, 지회는 강제사직을 중단하고 원상복구 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했으나, 회사쪽은 지회 간부 20여명과 조합비에 대해 7억 4천 4백여만원 손배·가압류, 지회장 등 14명 업무방해·폭행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20명을 징계하는 등 탄압으로 일관했습니다. 김주익 열사의 죽음 이후... 한진중공업에서는 손배가압류 소송을 취하했으나...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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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5-2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난쏘공을 읽은터라.....
이글이 가슴이 아프군요!!...ㅠ.ㅠ
예전에 저희 시댁이 영도쪽이어서...한진중공업을 자주 바라보곤 했었습니다...
대기업들은....언제쯤 노동자들의 말에 귀기울여 줄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