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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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마케팅에 속았다. 책 택배상자에 압사당할 것 같다는 지은이의 경제력이 부러웠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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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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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가 넘는 많은 목소리와 증언을 읽었지만, 가장 인상 적이었던 부분은 이 목소리들을 기록하는 저자-알렉시예비치-의 관점이었다.

“(p.272)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작은 것, 평범한 것, 오류와 나약함, 감정, 일상과 느낌을 훑어내는 그녀의 기록들은 (보다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본질과 비본질 등을 나눠서 생각하기 익숙했을) 소비에트 당국에게는 아쉽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측컨대, 때문에 이 글들은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녀도 권력과 불화하지 않았나 싶다.

“(p.36) ..나는 그저 녹취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작고 연약한 사람을 크고 강인한 사람으로 빚어내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을 모으고 그 자취를 좇는다. 인간이 자라고 성장하는 그곳에서.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더이상 말 못하는 벙어리도,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그 사람의 영혼조차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권력과 갈등을 빚는 이유는 뭘까?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17년후) 옛 일기장을 펼쳐본다.... 일기를 쓸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없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살았던 나라도 이젠 없다.“ 

_

어쩐지 여성과 전쟁이라는 주제보다는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책. 

당국이 그녀의 기록을 재단하는 수준의 경직성을 빨리 쇄신했더라면,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 하려는 욕망(p.188)“을 누그려뜨릴 수 있었다면, 책 속에서 말하는 ‘작은 의문들’을 포용할 수 있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었던 소련의 사회주의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까. 입맛이 썼다. 아쉬워서. 제국주의를 쳐부수자면서 제국주의 만큼의 유연성도 없었던 그곳 혁명가들의 모습이.

그녀의 작업과 초창기 글들에는 (당국의 입장에서는) 문제적인 지적이었을 지언정 분명 애정이 배어있었다. 질문을 용납하지 못하는 검열과 적대가 결국 작가가 애정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만약을 뒤로하고 어쨌든 세월은 흘러버렸다. 그들이 강조하고 싶었던 승리는 물론,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조국마저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삭제시키고 싶어했던 기록들은 남았다. 작고, 사소해서 교훈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증언들은 고스란히 책으로 출간되어 2015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게 된다.

_

그리고, 두번의 역설. 
현실의 사회주의가 삭제되버린 현재의 나는 소련당국이 강조하고 싶어했던 부분-그들의 위업, 이념, 이상, 대의-의 텍스트를  오히려 찾아 읽기 어렵다. 그들이 남기고자 했던 내용들없이 그들이 버리고자 했던 남은 원고 더미를 더 먼저 읽게 된 것이다. 
다행이 알렉시예비치는 성실하게 기록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수집한 증언들에는 작은 것과 큰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나는 (당시의) 큰 목소리를  어렴풋이 유추해보았다.

“(p.317-8)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어. 스탈린이나 레닌을 믿은게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믿었지. 나중에 사람들이 이름붙인 것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어. 그들이 꿈꾸는 자들이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해. 하지만 눈먼 자들이었다는 의견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 절대로! ... 신념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군대처럼 그렇게 강력하고 군기가 센 유럽 전체를 호령한 그런 무서운 적을 물리치지 못했을 거야. ..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공포가 아니라 신념이었다고, 공산당원의 명예를 걸고 당신한테 말할 수 있어. 나는 전쟁중에 공산당에 가입했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산주의자야. 나는 내 당원증이 부끄럽지 않아.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 내 믿음은 1941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

2차대전당시 소비에트 군대에는 무려 백만명의 여성들이 자원입대해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맹목적 선동과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내면화된 국가주의 만을 소녀병사들의 동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에 와서야 허망하게 들리는 어떤 ism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젊음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기실 그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도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_
그래서 조금 복잡해졌다. 그녀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야하는 것 인지.. 그저 가엾게만 여긴다거나, 숭고한 희생이라고 마냥 찬미한다거나, 전쟁을 기념/반대하자 뚝딱 정리해버린다거나, 혹은 모른체 한다거나 - 여타의 쉬운 방식으로 간단히 교훈! 끝! 하는 거야 말로 기껏 듣게 된 목소리를 오독해버리는 느낌이라서. 

작은 것을 작다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없어져 버렸다.
알렉시예비치가 적었듯. “한 사람 만으로도 벅차다.  ... 그 안에서 길을 헤맬 만큼”

“(p.267)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잇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나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저자는 가장 어려운 길을 내놓는다.
사랑. 
그거야 말로 역사보다 전쟁보다 난해한 것 아닌가.

_
정말로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가? 
쉬웠으면 좋겠다, 단순했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뭉툭한 생각이 어떤식의 폭력으로 비화되기도 하는 지를 되짚는 요즘이다. 
나는 조금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서도 애시당초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라서 이해할 수 없음을 끌어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_
아아, 결론내지 않겠다. 
당분간은 결론내지 않음을 견디는 연습을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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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07-01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읽으셨구나

공쟝쟝 2022-07-01 10:42   좋아요 1 | URL
또 읽을 겁니다. 이 때의 저와는 다릅니다 ^^
 
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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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선선해지고 목 뼈가 제 궤도(?)를 찾으면서 요즘 책읽기에 다시 속도가 붙었다. 어느 정도냐면, 분량으로 쳤을 때- 하루에 너끈히 한권은 해치우는 듯?!?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는 편이므로 정확하지는 않다..)

책을 읽다보면 책을 엄청나게 더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 이거 읽는데 저거 읽고 싶다. 그거도 읽어야 하는 데..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처럼 읽고 있으면서 읽고 싶은!? 들뜬 마음이랄까.
이럴 때는 요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서 잠시 배를 부르게 만든다. 마치 예전 부모님 세대 배고픈 아이들이 물배를 채우는 것 처럼. 헛배라고 해야하나. 진짜로 허기를 채운 것은 아니지만, 빵빵 배가 불러져서 순간적으로나마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북튜버로 유명한 겨울서점의 ‘독서’에 관한 책이다. 가독성이 매우 좋아서 좀 놀랐다. 도서관에서 절반쯤 보다가 집에와서 침대에 누워서 안쉬고 한번에 완독. 이는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의 영향도 있지만 김겨울씨가 의도한 대로 책의 무게 자체가 가벼웠기에 이뤄낼 수 있는 쾌거!!!라고 생각한다.

“(p.38) 뭐니 뭐니 해도 책의 무게가 가장 원망스러울 때는 누워서 책을 읽을 때다. (...) 누워서 책을 읽으려고 들면 정말 온갖 포즈를 다 시도하게 된다. 오른쪽으로 누워서 왼쪽 페이지를 읽다가, 왼쪽으로 몸을 돌려 오른쪽 페이지를 읽다가, 이도저도 불편해서 엎드려서 책을 읽다가, 팔과 허리가 아파서 누워서 책을 읽다가... 이걸 반복하고 있지면 아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것이 무슨 시지프스의 고난이란 말인가 싶어지는 데, 책을 읽느라고 그 생각을 어느 새 잊게 된다.”

초 핵공감. 심지어 누/워/서 읽으려고 전자책 산 것까지 나의 마음 당신의 마음 ❤️

북튜버라는 작가의 직업답게 책의 물성에 민감한 모습이 좋더라. 난 곳곳에서 비슷한 코드를 발견하며 흐뭇했는 데 - 이를테면, 표지의 디자인을 넘어 내지의 줄간격과 자간. 각주 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책의 무게와 판형, 심지어 사용하는 종이에 따라 독서의 쾌감이 달라짐을 언급한달지, 그런 부분들. (책은 역시 미색모조지ㅋㅋ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

게다가 그녀의 책사랑은 단순히 모양에서 끝나지 않았는 데, 책의 냄새를 언급하며 에틸벤젠 어쩌고하는 화학분해 작용과정까지 언급할 때는 ‘역시 아무나 북튜버가 되는 건 아니었나보군’ 리스펙 하기로 하였다.

“(p.287) 그러니까 이건, 몸부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활자 시대의 종언을 듣고 싶지 않아 저 멀리 떠나는 영상 세대에게 보내는 구조요청인지도 모른다. 아직 활자는 살아있다고, 그러니 데리고 가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보기에 나는 활자를 지나치게 사랑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미래가 죽음이라 믿는 이는 없다. 그래서 미래가 책에게 그리 잔인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사람들은 계속 책을 읽을 것이고,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처럼 머리는 식히고 배는 불리면서 빠르게 완독했음!
북튜버로서, 책덕후로서 이제는 저자로서 김겨울씨가 품고 있는 이상에 나도 동감하게 되었다. 그녀가 승승장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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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 달러 베이비 [dts]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힐러리 스웽크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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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는 핑계로 복싱장을 한달을 빼먹었으므로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다니려는 맘을 먹고자, 복싱 영화나 한 편 때려야지🎶 마음으로 봤는데... 헐.. 심장이 아파서 한시간 째 뒤척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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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보호가 먼저야. 규칙이 뭐라고? 자신부터 보호하라.” Always protect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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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가해오는 공격 앞에서 나를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려줄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
좋은 스승을 만나더라도 치명적인 순간에 권고는 덧없이 빗나가게 마련이다.
도통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건 써먹히지가 않는다.
무언가를 정말로 가르쳐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은 배웠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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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두살의 나는 서른 두살에 늦깎이 꿈을 가진 매기에 감정이입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꿈을 이루려는 주인공 보다는 .. 꿈을 찾는 사람에게 조언하는 노인의 마음에 더 동일시가 되었다. (늙었나봐.. 흑흑)
_
배우는 것은 열과 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만,
가르치는 것은..가르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매우 두려운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프랭키에게서 느껴지는 후회와 두려움.
제자의 성장을 진심으로 돕는 스승을 영화로나마 본 것이 좋았다. (실제 세계에서 스승과 선배들의 가르침이란 나르시시즘인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한다..또르르)
매기 역시 좋은 제자였다.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 외에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참 생각 많아지는 영화였다....
_
그런 의미에서 모처럼의 꼰대모드로.
아마도 계속해서 빗나가겠지만, 누군가는 기억했으면 싶은 마음을 담아.
있잖아요, 그렇답니다, 여러분, 언제나 자신을 먼저 지키세요.
Always protect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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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물론 나 스스로는 프로복서가 될 생각이 눈꼽 만치도 없기 때문에 커버링은 일도 신경안쓰고 내일도 잽 연습만 열나 하고 있을 것 같다. 복싱장 다니는 목적 = 잘 때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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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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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할 때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자라서 결국 공부가 업이 되어버린 저자 엄기호의 책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망가지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하느라 바빠 공부를 잊어버린 오늘의 우리에게 자신과 화해하는 ‘공부’를 당부하는 책.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보다, ‘자신을 배려하는 일에 서투른 사람’이나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p.18) 그렇기에 공부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자유와 해방의 도구이자 과정이다. 다만 이때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데 집중하느라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점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아니,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록 더 나락에 떨어진 세상이 만들어진다.

엄기호씨 책답게 우리가 무심히 넘겨오는 단어들의 개념 -공부, 배움, 겪음, 자아실현, 자기배려, 다룸, 한계, 자유, 기예 등등-을 엄밀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읽다보면 왜 한 말을 또 하나 싶을 때가 있지만, 그 한 말을 또 되풀이 해서 읽는 동안에 그동안 내가 안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단지 내가 ‘안다고 믿은 것’들일 뿐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읽는 이가 모른다는 것-한계-을 알게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일지도.

*

거칠게 감상을 적자면, 나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단,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워 깨닫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라는 것은 두루뭉수루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래서 이책 저책 뒤적이고 기웃거리는 걸지도) 젊었을 때의 난 어떤 물음표들이 다가왔을 때 골똘히 생각할 줄 몰랐다. 불안해 하지 않으면서 혼자일 줄 몰랐고, 멈춤의 시간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세상 속에서 살기도 했으니까. 공부에서 느꼈을 기쁨의 순간들은 내게서 익어갈 충분한 시간을 부여받지 못함으로 인해 어떤 결실로 연결되지 못했다. 성과없는 배움을 쳐주지 않는 사회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할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즉, 나는 배웠으나 배우지 못했다.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 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핑계를 대자면 과정을 생략해버린 사회에서 무언가를 ‘익힐’ 충분한 시간이란 - 곧 비용이었고, 비용이 없으므로 용기내기 어려웠다.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인간.
무언가를 제대로 익혀본 적 없는 인간.
자유를 모르는 인간.

“ (p.241) 익힘의 과정이 부재하므로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어진다. 대신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오로지 외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문제만 해결되면 자기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기예의 문제를 조건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배움을 넘어 익힘을 통해서만 연마되는 기예가 늘 리 없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 교육이 처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조건만을 탓하게 된 불만쟁이.
안타깝지만 그게 지금의 나다.

그러니 이제라도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자아실현이 목적이 아닌, 자기배려가 출발점인 저자가 촉구하는 그 ‘공부’ 말이다.
먼저는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p.178) 그러므로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모르는 존재, 타자로 대해야 한다. 모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시작도 않아놓고 다소 섣불리 언젠가를 다짐하자면... 늦으막에 시작한 나의 ‘공부’가 마지막 당부대로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자기배려에서 안주하지 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_

덧, 엄기호씨 책은 역시 재독-삼독 해야 빛이 나는 거 같다. 세번째 읽고나니 텍스트가 새롭게 보였다. 책 자체에서 저자의 공부 흔적이 역력하다.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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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8-2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 않고 꽂아만 둔 책인데,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공쟝쟝 2018-08-28 21:58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어보세요. 정말 좋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