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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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김밥과 라면이 먹고 싶었다. 라면이야 항상 먹고 싶지만 김밥은 대체 왜 먹고 싶지?했다. 그러다 어제는 대왕 돈까스가 먹고 싶었다. 🐽

희안하게도 썩 맛있지 않은 익숙한 것들이 먹고 싶었다는 것.. 이를 테면 “공장에서 제조된” 듯한 따분한 맛의 소스가 끼얹어져 있는 대왕 돈까스라든가, “들기름 참기름 반반” 발라서 착착썰린 김밥이라든가, “차갑게 식어서 탱탱불은, 그래서 밀가루 냄새가 쌔하게 올라오고 국물의 짠맛이 가신” 라면이라든가.

맛없는 대왕 돈까스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이것은 분명 만들어진 식욕이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뭐지뭐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진원지는 읽고 있던 김금희 짧은 소설집이었다.

....소설 속 선미가 포장마차에서 먹던 김밥 + 칼칼한 멸치육수의 오뎅국물, 주용이 좋아하는 불은 라면 등등.... 먹고 싶으니까 먹어야지! 점심으로 분식집 김밥+라면을 시켰다. 생각해보니 꽤 오랫만의 메뉴. 항상 먹는 그맛이지만 얌냠! 🤤

<나는그것에대해아주오랫동안생각해>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사건이 시작되고 해결되기엔 분량이 너무 짧다.) 그래도 착착 감겨 읽히는 까닭은 너무 소소한 이야기이기에 내 이야기 같아서.

돈까스에서 자각한 후 다시 책을 뒤적이니 이 책.. 김밥에 에그머핀, 규카츠, 수프, 돈까스, 햄버그스테이크에 맥도날드버거, 미역국까지 참으로 오만 음식들이 등장한다. ........이 정도면 ‘나는 그 맛에 대해 생각해’로 했어야 하는거 아녀? ㅋㅋ

작가는 머릿말에 “사람의 사사로운 기억을 ‘사사롭지 않게’ 기록해두는 건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러므로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라고 썼다. 끄덕끄덕.

특별하지 않은 사사로운 하루들-맛있지 않은 일상적인 음식들-그닥 예쁠것 없는 주변 사람들-은 서로 딱붙어있어서 셋중 하나를 생각하면 나머지들도 함께 떠오르게 마련이다. 나에겐 만나면 꼭 쏘맥을 말아먹게(?)되는 동네친구와 모기업의 치킨이 먹고 싶을 때 그리운 사람들과 그 치킨에 딸려오던 떡꼬치와 떡꼬치를 함께 주는 최근 뚫은 치킨집과 연관검색어처럼 연동되는 치킨 파트너 동생, 한때는 좋아했던 로제파스타를 쳐다도보기 싫게 만든 어떤 분이 있다.. 하하하ㅎㅎㅎ

일상에서 만난 아무럴 것 없는 일인데 문득문득 머물러 오랫동안 생각하게되는 소재들. 보통은 휘발되어 날아가는 그것들을 김금희는 꺼내서 참 가지런히도 썼다. 그래서 난 소설속 등장음식(?)들이 먹고 싶어졌나보다.


40
아침에 일어날 때면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기보다 마치 밭에서 무 같은 것을 뽑아올리듯 무언가가 자신을 이불 속에서 끄집어낸다는 느낌이었다.

68
파리 살롱을 다시 찾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불현듯 추위를 느끼고 혼자임이 실감된다면 어디든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가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따뜻한 것, 아주 따뜻한 것을 먹겠다고.

177
국민돈가스는 정말 크기가 쟁반만 했고 아주 진하고 풍미가 강한, 그래서 아마도 공장에서 제조된 제품을 쓰지 않을까 싶은 흥건한 소스가 끼얹어져 있었다. 돈가스를 잘라서 우걱우걱 씹다 보니 그 소스는 지긋지긋하고 막막하고 따분했던, 선명한 분노와 어긋남의 결이 있었던 할아버지와의 동거를 떠올리게 했다.
햄버그스테이크가 있는 테이블에서 맡았던 카레 가루 냄새가 여기서도 나는구나, 그러니까 그런 건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마치 공장의 제조 소스처럼 일관되고 표준화된 추억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건 어떤 이별에 대한 뒤늦은 실감이자 그리움 같은 것이었고 동시에 미안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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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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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다 덮고,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간 경애의 마음과 상수의 마음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몇 분 동안 마음이 있음직한 품에 책을 가만히 안고 있었다. 🥺 너무 오랫만의 소설. (올해 처음 읽은 소설인거 실화입니까?...)

카알벨루치님이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조중균이 <경애의 마음>에서는 확장팩으로 등장한다더니 사실이었다. 괴짜같은, 스스로 안에 유폐된. 그러나 세상이 쥐락펴락할 수 없는 자신만의 룰을 가지고서 단호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 부스러진 마음을 가지고 파괴되지는 않았다며, 언젠간 결국 누군가의 곁에 서 있기로 하는 사람. 글쎄, 상수같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아니 있다고 하여도 나는 그를 알아 볼 수 있을까.

“(97) 경애가 이 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 많은 것들이 생장하고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들면 경애는 불현듯 약속을 잡아보다가도 낮이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없어,라고 생각하며 외출을 취소하곤 했다.”
“(307) 버틴 건, 버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멸 속으로.”


나 자신을 내버려둔 적이 있다.
삶의 키를 단단히 부여잡고 휩쓸리지 않겠다고 애를 쓰면서 “이것봐, 나 아주 잘 살고 있고, 잘살아 낼거야.” 증명하던 시간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면 남은 시간 동안은 정말로 나를 방기했다. 술과 잠 혹은 불안과 무기력으로.

나는 버틴다고 생각했었는 데, 그렇게 버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 데. 돌이켜 보면 무엇을 버틴 것일까. 시간이 지나가기를? 세월이 흘러가기를? 가진 것은 시간 밖에 없었으므로 그냥 시간을 무턱대고 펑펑쓰며 하염 없었다.
짧지 않은 이번 생에서 꼭 필요한 시간들이었을 테지만 후회된다. 그렇게 미련하게 오랫동안 버티는 것은 아니지 않았었나. 누구보다- 지금의 나에게, 미안한 것 같다.

“(349)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경애의 마음>에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은 강하지 않은 개성을 가져 강한(?) 주인공들이다. 한 번에 눈길을 끄는 매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읽어 갈수록 이해가 갔고, 어느새 응원하고 있었다. 조금은 못난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대하는 어딘가가 나와 닮은 두 사람을. 그런데 또 나보다는 훨씬 멋진 태도를 가진 인물들을.

자꾸 뒤돌아 보게 되는 상수와 경애를 닮고 싶다. 부스러짐을 직시하지만 파괴되지 않았다고 토닥이는 용기를. 자신의 상처를 마구 휘두르지 않고 고독으로 스스로를 잠그고 유폐된 응시의 시간을 오롯이 견디는 수선스럽지 않은 태도를. 그렇게 조금씩 모은 힘을 막 다 써버리지 않고 아끼고 모아 자신을 가지런히하고 곁의 속도를 기다리는. 가만가만한 조심스러운. 약간은 미지근한 것도 같은 그러나 실은 적당한 온기의 마음을 갖고 싶다.

오랜기간 동안 난 항상 뜨거운 사람이고 싶었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영향을 끼치고 싶어서, 멋져보이고 싶어서, 때때로 특별한 사람이고 싶어서. 언제나 촉수를 곤두 세우고 - 그들이 원하는 입에 발린 좋은 말을 하려했다.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굳게 믿었다. 나의 뜨거움이 여름의 옥수수처럼 관계를 쉽게 상하게 한다고 한들 내 탓은 아니라 여겼다. 돌이켜보면 그 뜨거움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너, 파헤쳐 보면 나. 누구에게 이득이 되었을까. 글쎄. 결국은 누구에게도.

서투르고 미지근한 참으로 느린 그들의 연애(혹은 연대)를 생각한다. 쉽게 끓거나 식지 않는 온도와 더딜지라도 단단한 속도로, 세상을 살아 갈(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다 써버리지 않고 가지런히 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는 진지한 욕망이 생기고 말았다.

“(176) 언니,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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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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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여성이 많아진 다는 것은 “밤낮으로 기르며 고생하는 애정의 헌신”이라는 (남성 저자들이 쓴) 어머니 클리셰를 조각조각 부숴나간다는 것 아닐까.
여성 작가들이 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서사에는 (당연히) 감사와 미안함도 있지만 두려움과 동일시, 애정과 증오가 뒤범벅 되어있고, 그 복잡함을 읽어내리는 나의 감정 역시 뒤죽박죽이 된다.
이 단정치 않은 글들이 좋았다. 소설의 뒤로 숨지 않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쓴다는 아니에르노의 고집은 “어머니”라는 존재(주제) 앞에서 더 고스란해지는 듯 했다.

(19) 이것은 쉽지 않은 시도이다. 내게 어머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 내 상상이 만들어낸 여자, 며칠 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69)
스무 살 때까지 나 때문에 그녀가 늙는다고 생각했다.

(102)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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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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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실검 1위는 조선일보 사장 10살 손녀의 운전기사 폭언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미스 플라이트>속 주인공과 겹쳐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실 속 재벌가의 자제는 너무도 당연히 가진 것을 휘두르고, 소설 속 ‘대령의 딸’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 마저 ‘미안해’ 한다.

“(p.160) 누구의 잘못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겠지만, 나는 미안했어요. ... 마지막 날 밤, 나는 아줌마를 안아 줬어요. 아줌마를 안고 아저씨에게 머리 숙여 사과드렸어요. 미안해요. 두 분께. 아줌마는 무슨 소리냐며 나를 꾸짖다 울어 버렸고 아저씨도 울고 있었어요. ”

유나는 운전병이었던 영훈이 안타까워 할만큼 “단 한 번도 뒷자석에 앉은 적이 없”는 아이였다. “너무 조숙”해서 “불쌍하게”까지 여겨졌던 소녀는 자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몇번이고 목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울음을 삼켜야 했다. 유나야, 죽지마, 죽지마, 유나야 안타까워 했지만 유나는 죽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이미 죽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수록 계속해서 멋져지는 그녀의 성장은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어른이되었다로 결말로 이어지지 않았다.

“(p.123)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 조차 없죠.”

모든 성장이 ‘무언가를 더 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 않는 결단’ 또한 성장의 한 종류라면, 더는 상처주지거나 받지 않기 위해 삶을 중단하는 행위 역시 유나에겐 성장(혹은 성장의 결론)일지도 모른다.

이 훌륭하지 못한 세상에서 유나와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자살이란건.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도 부족한 일종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사’ 이지 않을까. 물론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그러고 보면 다들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미 병든지 오래라 새삼 ‘병든’이라는 말을 담기도 어색한 그런 사회에서. 병들지 않기 위해 아프지 않기 위해, 병들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아프지 않은 척 하기 위해. 그래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싸울 에너지도 없고 싸우지 않아도 무력한 이 곳에서.

“(p.30) 저, 대답하지 않았어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갔어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자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전부 잊어버렸습니다. 그 부분이 아예 까맣게 지워져있어요. 그 순간 나를 지워버렸고,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공간의 물성을 전부 지워버렸어요. 단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내 의지와 관계없이 걸음을 멈춰야 했을 때 그곳이 내게는 세상의 끝 같았고, 모서리 같이 뾰족하게 느껴졌다는 것만 기억나요. 늘 가지고 다니던 빨간 통 연고를 꺼내서 천천히 볼에 발랐어요. 마치 의식처럼. B항공의 직원이 되고, 비행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습관처럼 그런 의식을 치르곤 했어요. 마치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듯 물건들에 의존하고 있었어요.”

존엄을 감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이 곳에서 우리들은 대부분 유나처럼 사는 것 같다. 그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물건들에 의존하거나 하면서. 그렇게. 다들. 지겹도록 자신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그조차 가능해지지 않을 때는 누군가를 헐뜯거나, 위해를 가하기도 하고 정근처럼 당연하다고 합리화할 것이다. 합리화는 커녕 아예 들여다 볼 생각도 않는 이들이 더 많겠지만...

*

-릿터 13권, 작가 박민정 인터뷰 중에서-


“(p.93) 영화 <테이큰>처럼 아빠가 딸을 구하는 장르가 있잖아요. ‘피해자 아버지의 서사’라고나 할까요. 그걸 한번 비틀어 다뤄보고 싶었어요. 또하나는 딸이 살아있을 때 신경을 못쓴 아버지를 등장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세월호 이야기를 하게 되는 데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둘러싼 ‘유가족 자격’ 논란이 있었죠. 10년 전 이혼했고 그 뒤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나타나서 유족행세를 하느냐. 세월호 유가족 중 한 아버지가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딸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거다’라고 한 말도 마음에 남았어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아빠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저희 아빠는 오랫동안 저와 사이가 안좋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사고가 난다면? 만약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일기에다 ‘아빠가 너무 싫다.’라고 썼다면? 그렇다고 해도 우리 아빠가 유족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어요. 제가 소설 속 정근에게 동의하는건 아니에요. 정근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여전히 이 사람에게 공감하기 어려워요.”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두가지 생각을 했더랬다. 하나는 아빠 생각. 하나는 세월호 생각.

몇 년 전 ‘딸이 잘못되었다’는 보이스 피싱을 받고 고래고래 악지르며 생존 확인 전화를 했던 아빠와의 통화가 기억났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경찰서로 바로 뛰어갈 정도로 흥분상태였다고. 내가 평소에나 잘하라며 막 웃었더니, 아빠 왈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평소에 그런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아빠가.. 날 사랑하긴 하는 구나. 그동안 몰랐네.”라고 좀 무뚝뚝하게 대답했었다. (그 날은 아빠의 진한?! 사랑을 태어나 처음 느껴본 날 이었습니다...) 참 사람이 얄궂은 것이. 소중한 것을 잃은 후에야, 혹은 잃기 직전에서야 그것을 소중했음을 안다. 사람으로 이뤄진 ‘사회’도 다르지 않은 듯.

*

이 책은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소설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십여년 동안 대체 문학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단은 여성 소설가들이 대거 등장한 것 같다. 그것도 엄청난. 한강, 황정은, 김애란 그리고 (나의 최애~) 최은영까지.

생각해보니 드문드문 한국 소설을 읽곤 하던 십년 전에는 신경숙, 공지영 정도 말고는 여자 소설가 찾기도 힘들었던 것 같은 데..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너무 기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더더 좋은 것은 그들이 써낸 소설들이 10년전의 소설들 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깊어진 느낌이라는 것. 문장이나 서사도 그렇지만, 뭔가 철학적으로!! 그렇다.

내가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변한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십년간.. 우린 이명박그네를 살아 버렸던 것이다. (역시... 고난은 사유를 깊어지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작가님 역시 언급하기 꺼리긴 했지만, 큰 사건도 함께 지나왔다. 바로. 세월호.

어마어마한 큰 슬픔이 지나간 이후 아직 사회외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적어도 영화나 문학작품 세계는 정말 많이 변한 듯. 요즘의 한국 문학들을 읽다보면 어느 페이지에서든 세월호의 흔적들이 보인다. 딸의 죽음의 이유를 찾는 아버지. 이번 소설 역시 그랬다.

유나의 아버지(정근)가 변할 수 있을까. 이 상실과 슬픔을 겪었다는 것이, 우리의 성찰이, 모두의 뉘우침이 ‘유나’와 같은 소녀가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소설은 열린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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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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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주는 것은 악한 의도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상처를 받으면,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편했다.
선악의 틀로 짜여진 나의 세계관 속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젠 안다. 의도치 않게도 상처 줄 수 있다는 것. 나의 위치가, 태도가, 때로는 먹어버린 나이가, 생각과 신념이,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누군가를 해치기도 한다는 것을.

“(p.181 모래로 지은 집)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 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읽으면서 아파서 많이 울었다. 내가 준 상처들을 떠올리면서 미안해하는,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여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너무 안이한 반성은 아닐까하고.

“(p.235 손길)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그러게. 왜 어두운 위치에서서야, 겨우 볼 수 있는 건지.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밝다는 것은 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이 더 짙어져 있다는 것임을. 누군가의 어둠을 질료삼아서 빛나는 것이라면, 모두가 덜 밝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지금의 내가 너무 밝은 곳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 285 아치디에서)
뒤에서 보니 하민이 자꾸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왜 우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다만 조금씩 속도를 늦춰서 걸었다. 그녀가 울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서. “


결국 우리의 상처가 의도가 아니라면,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상처주거나 상처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단편집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슬픔에 너무 쉽게 이입하지 않을 것, 그의 눈물을 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을 것, 다만 조금씩 느리게 걸을 것. 해설에서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이를 “(p.319) 단시간에 빠르게 솟구쳐 상대에게 범람하고 금세 소진되는 열정과 달리, 상대를 손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으려는 배려가 스며있는 거리감”라고 말했다.
아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_


‘쇼코의 미소’ 때만 해도 동세대의 소설가들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게무해한사람’으로 최은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관계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그녀는 어디까지 헤집어서 생각했던 걸까.

더는 누구도 나 자신도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왜와 어떻게를 따져물으며 뒤집고 또 뒤집어 끝없이 적어내리던 29,30살 일기장 속에 두루뭉수루하게 적힌 나의 이야기가- 작가의 세심한 문장과 소설로 적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아주 깊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 받았다고 느꼈다. 두번 읽고 세번 읽어도 좋았다.

결코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없겠지만,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만큼 스스로에게는 당연한 것들을 휘두르지 않도록. 나는 몇번이고 이 소설을 더 읽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덜 유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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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골드문트는 오지 않았다...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1-11-18 16:22 
    월례행사로 산책들 바코드 등록하는 날이다. 이번 달에도 사 제꼈구나. 나여, 넌 월 초에 허벅지를 찌르며 도스토옙스끼를 사지 않았더냐? 양심껏 이번 달엔 줄여야 했던 것 아닐까? 20대 이후 또 다시 상위 0.7%를 찍었다고, 알라딘이 알려준다. 믿기지 않는다. 나는 정말인지 고심하고 고심하여, 한달에 꼬박꼬박 열 권 넘게 절대 스무권은 안되게 샀을 뿐이다. 내 허버진 욕망에 비하면 내가 산 책은 새발의 피도 안된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구매해서 상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