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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2 - 열두 명이 사라진 밤,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우환이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순희에게 곰탕을 가득 퍼담아주며 꿈꾸듯 행복해했던 것 처럼, 한참 잠들어 있어야할 새벽까지 신나게 읽느라 반쯤 몽롱한 상태로 2권의 푸짐한 전개에 행복했다.

밤을 지새며 읽다니..!! 중학교때 왜란종결자와 드래곤라자, 고등학교 때 해리포터 이후 정말 오랫만이다.잊었던 소설 맛(곰탕 맛에 버금가는 소설 그 자체의 맛!이라고 할까나.. )을 다시 만나게 해준 책! 물론, 비슷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정유정의 소설이 있긴했지만, 장르문학 특유의 쪼는 맛과 시각적(?)쾌감은 곰탕이 한수 위였다고 생각한다. 문장보다는 서사가, 서사보다는 캐릭터가, 캐릭터보다는 장면이 더 오랫동안 기억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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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올해 4월에 난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맛난 것을 나눠 먹을 때 있다. 라는..
그날 이후 (행복추구권을 너무 자주 행사해서 자꾸 살이찌는 것 같긴 하지만,) 행복을 크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보다 난 다섯배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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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작가의 말> 때문에 새벽 4시 25분에 울컥 눈물이 터져서 쫌 울다가 잠들었다.

"(p.365) 작가의 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어머니가 보내주신 곰탕을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맛있게 먹다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뱉었지요. '아버지도 곰탕 참 좋아하셨는데. 시간 여행이라는 게 가능하 다면, 살아계셨을 때로 돌아가 이 곰탕 드시게 하면 좋겠다.'"

그러니까, 시간여행이라는 게 있다고 해도 말이다. 과거에서 오든 미래에서 오든 - 결국 나 자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므로. "있을 때 잘하자. 아끼다 똥된다. 그때 먹을 걸!! 후회하지 말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게 먹자!!" 어떤가. 나의 행복추구론(?)과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 일맥상통하지 않는가ㅋㅋ

우리 각자에겐 서로들을 이해시키기엔 너무 구구절절한 사연과 이상이 있을 테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오늘의 식탁에 앞에 둘러앉아 맛난 음식을 먹이고 먹으면서 - 어떤 설득도 필요없이 그냥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얻어 내는 것.


난 그런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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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

1권 
(p.14)
맛이란 건 좋은 기억 같은 건가 보다. 잊을 수 없는 맛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인가 보다. 이우환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번 저렇게 흥분해서 또 생생하게 말이다.

(p. 156)
할아버지의 이름은 뭔지 몰랐다. 하지만 이종인, 이라는 이름이 맞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든, 이 남자는 이순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의 할아버지가 된다. 이 남자가 싫고 좋고 상관없다. 그냥, 아버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에게 할아버지가 된다. 가족이란 그런 거였다. 이유 없이 정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p.203)
두 사람은 우환이 방금 꿈속에서 본 모습처럼 맛있게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 면 우환은 속이 든든했다. 꿈을 꾸었을 뿐인데도, 둘만 먹였 을 뿐인데도 속이 든든했다. 무언가가 우환을 채워주고 있 었다. 우환은 그 늦은 밤을 좋아하게 됐다. 순회가 혼자 온 밤도, 강회가 함께 온 밤도,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우환은 밤을 기다리는 소년이 되었다.

2권
(p.197)
하지만, 선택하지 않아도 절로 주어지는 유일한 것이 가족인지도 몰랐다.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만, 선택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절로 주어지지 않으면 달리 수가 없었다.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덧, 가족이란 어쩌면. 음식(맛)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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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rly 2018-09-10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이렇게 또 약을 파시면 안 볼 수가 없잖아요 ㅎㅎ

공쟝쟝 2018-09-10 00:25   좋아요 0 | URL
이해하는데 공들이는 책들도 좋지만 요런 단짠단짠한 책들이 독서생활을 지속 시키는 듯 해요 :-) 호로록 읽으시길!
 


엄마가 말해주 길,
내가 태어났던 날 그 한 겨울에도
눈이 아닌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한강은 분명 여수에 여러번 왔다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이 고장의 눈이 대부분 진눈깨비라는 것도, 기차가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땅의 색이 황톳빛으로 붉어진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테니까..

“집이 여수입니다.” 라고 하면 서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아주 먼 곳. 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의~ 끝.

나의 고향은 여수다. 19살때 까지 떠난 적이 없다. 야자시간에는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고, 뒷산에 올라가면 한려수도가 널찍이 펼쳐졌다.
배경음악 같은 뱃고동 소리가 없다는 것도, 산에 올라가면 바다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겨울에 눈이라는 것이 쌓이면 사람이 미끄러져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스무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사는 게 어려울 때,
내가 바다를 그리워 한다는 것도.


<여수의 사랑>
집이, 바다가, 여수가 그리워서 읽었고, 두번 읽었고, 천천히 읽느라 
아직 세편의 단편이 남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바다가 보고 싶다.
요즘, 잘 안풀리나보다, 나..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에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 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 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오게 하고 싶었어요. (p.49)”

피를 내서라도 섞이고 싶은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을 적게 느끼는 편인데,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극단적인 외로움 - 강렬하게 섞이고 싶음- 이라는 감정이 궁금해서 외로워지고 싶더라.
자흔이라는 캐릭터가 으엄청 매력적이었다.
내 팔이 닿는 힘껏, 꽉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_

여수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두드러진 소설이지만, 소설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짧은 코멘트를 달아두고 싶었다.
내 고향 여수는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라고. 눈이 내리다가도 녹아 없어지는 따뜻한 바다가 있는 곳이라고. 그날 자흔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의 바다가 따뜻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고.

여수같은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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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7-08 0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서 20살 가까이 나이먹은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뒷산 바다‘의 애수..... 크- 부럽습니다.
당최 뭐가 부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요 ㅎㅎㅎ

공쟝쟝 2018-07-08 09:22   좋아요 0 | URL
바다를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게 제 자랑입니다. 저두 당최 그게 어떻게 자랑인진 모르겠지만요 ㅎㅎ^.^
 


소설의 중간까지 읽었다.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밑동터진 쌀가마니 쌀들처럼 줄줄 흘러나온다. 

그때를 생각한다. 유난이 억세고 지기 싫어했던 이층집 셋째 딸 아이와 그의 막내 남동생. 호호 게임팩을 불면서 종일 슈퍼마리오를 해도 좀처럼 제지하지 않으셨던 그 아이들의 엄마. 자기들끼리는 양보하지 않는 게임턴을 가끔 내게 넘겨줄 때면 게임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게임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거의 매일 놀러갔다. 몇판째의 6-1을 깰 때 쯤이면 정작 그집 아이들은 관심도 없는 공부방 책들을 꺼내 읽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린이 과학만화 같은 것들. 종래에는 게임보이말고 책들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책은 커녕 준비물 살 돈을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집은 곤궁했다.

그집의 억센 셋째 딸은 동갑내기인 내 동생과 종종 다투었는 데, 얼굴에 손톱자국이라도 나서 올라치면 엄마는 “지는 게 이기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생이 스물여덟살쯤에 울면서 그랬다. 엄마가 자꾸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 해서, 자기 자꾸 지기만 하고 이겨본 적이 없다고. 매번 먼저 사과하고 참고만 살았다고. 

그리고 나는 또 그 때의 엄마가 생각난다. 새학기에 받은 열몇권의 교과서를 낑낑대며 들고 왔고, 엄마가 남산만큼 커다랗게 부른 배를 하고 분홍색 임부복을 입고 학교가 파한 나를 마중나와서, 무거운 새 책들을 들어주었다. 다른 애들은 다 부모님이 데리러 왔는데, 난 집까지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가지? 서럽지 않으려고 씩씩한척 하면서도 몇걸음에 한번씩 쉬면서 하염없어 하는데 엄마가 마법처럼 학교에서 멀지 않은 백화점 앞에 짜잔 하고 나타나줘서, 행복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나는 정말 외로웠고,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아들을 꼭 낳아야 하는 엄마는 몇년째 항상 배가 불러있었다. 난 동생이 싫다고 그만 낳으면 안되냐고 물어봤었단다. 

3학년 때 부터는 제대로 언니 노릇이 시작되었다. 동생을 학교 안에 있는 유치원에 통학시키는 것까지 내몫이 되었다. 동생이 귀찮고 싫고 미웠다. 특별히 예뻐서 더 그랬다. 청소하러온 고학년 선배들에게 동생이 둘러싸여 예쁘다고 구경당(?)하고 있던 기억이 난다. 데리러온 나한테 언니냐고 물어보았다. 동생이 예쁜 언니는 언제나 곤란하다. 기대치가 있으므로 더 못생기게 느껴진달까. 난 못생겨서 부끄러웠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서 생각하느라 잠마저 달아나더라.

좋아하는 걸 해보지는 않고 구경만 하는 것.
원하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딸려오는 묘한 죄책감.
서럽지않기 위해서 더 씩씩해지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만들어진 성격은 많은 부분 그대로이다.
외로울 때마다 눈이 시리도록 구경했던 하늘과
외로운데도 귀찮았던 동생들이 생각났다.
유치원이 끝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보다 더 방치된 어린 동생의 녹색 유치원복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그저 귀찮아 하는 나에게 영문 모를 사과를 하며 같이 가자고 하는 두 걸음 뒤의 동생과 어쩐지 대답하기 싫던 어린 내가.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왜 그때 더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걸까.

열살이 안된 아이에게 사랑과 돌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또 생각한다. 나에게 사랑과 돌봄이 충분했다면, 동생이 덜 미웠을 거라고.
그때의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했었다. 어쩌면 엄마 자신 보다 더.

어떤 부분에서 세상은 더 나빠져왔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주희와 윤희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가슴이 뻐근할 만큼 고통스러운 즐거움(p.98)”으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른이 된다.
가슴 아프게 추억할 수 있는.
미안해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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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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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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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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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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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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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하루키.
언제부턴가 일본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았는 데, 책의 만듦새가 너무 예뻐서!! 사서 읽었다.

“네가 좋아. 미도리, 봄날의 곰만큼.” 그리고 “삶은 비스킷 통이야.”“딸기 쇼트케이크”같은 유명한 대사의 출처가 다 노르웨이의 숲이었던 것.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왜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이 번역되었는지 알 것 같더라.(신의 한수라고 생각 한다)
20대의 무렵 상실을 경험하고 난 뒤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 자체를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잘 처리하지 못한 상실의 감정은 어느 날이고 문득문득 발목을 잡는다..

소설은 알려준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것. 슬픔을 다 슬퍼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 견딜 수 없다면 때론 누군가와 함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 잘 이별하기 위해 잠정적으로라도 슬픔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529)”

소설 속 나와 레이코씨가 나오코를 애도하기 위해 그들만의 장례식을 하는 부분에서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구나. 지금까지 보아온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많은 장면들 중에 베스트는 노르웨이숲의 장례식으로 꼽게 될 듯.

레이코가 연주한 쉰곡의 기타연주곡으로 예상되는 음원을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서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나오코 처럼 살아있을 때 꼭 좋아하는 노래 하나쯤은 선정해 둬야겠다고. 훗날 나를 잃은 내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건 어디서건 그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연주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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