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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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 가던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는 핍박,탄압,착취,수탈 등 암울함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힘없는 백성들은 일제의 공물 착취에 의해 양식을 모두 빼앗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겨우 겨우 해내야만 했고,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독립투사,열사들은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항일독립의 뜻을 불사르면서 의연하게 초지일관 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게중에는 명예와 권력,부를 위해 일본의 앞잡이로 철저하게 둔갑하여 민중들을 더욱 괴롭히고 고통을 주면서 일본으로부터 부와 명예의 보장을 받았던 것이다.그러한 친일에 가깝게 처신했던 사람들이 해방후 이승만 정권에서 현정권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는 세습적인 부와 명예는 천민들에게는 볼썽 사나운 꼴이다.민족의 정기,역사 바로 세우기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국가정체성 고취 차원에서도 절대 필요하고 확립시켜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인식하고 뇌리에 남는 항일독립운동가 및 열사들은 대개 정해져 있다.그들이 학수고대했던 민족과 국가를 위해 중국 만주를 비롯하여 상해,충칭 등지와 미국 등 해외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은 멸사봉공의 정신에 다름 없다.그러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새롭게 찾아 내고,그 독립운동가의 삶의 궤적과 뜻을 밝혀내고 인식해 나간다면 일제강점기의 간난신고의 독립운동의 뜻을 길이 새겨야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본명은 장지락이지만 본명을 숨겨야만 했고, 숙명적이고 절박하게 드라마틱한 짧은 삶을 살다간 김산의 항일독립운동은 저자 님 웨일즈라 의해 그의 삶의 윤곽이 밝혀지고 고귀한 독립혁명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어 건국훈장 서훈 추서까지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니,항일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추가하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발효되던 1905년에 태어난 김산(본명 장지락)은 3.1독립운동을 겪으면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지만 곧장 귀국하여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동휘,안창호 등의 독립지사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으며 민족주의자,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공산주의자로 카메레온과 같은 변신을 거듭해 나간다.그리고 중국 여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기도 하는데,두 차례에 걸친 일본경찰에 체포,공산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중국 국공합작 와중에 장개석을 납치했던 시안 사건을 거쳐 그는 옌안(延安)에서 정치,사회기자였던 미국의 님 웨일즈(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본부인)를 만나 자신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들려 주는데,김산은 일본어,중국어,영어가 가능하고 단테의 『신곡』을 비롯하여 톨스토이즘과 아나키즘으로 나아갔으며 사회주의의 바이블로 불리는 마르크시즘에 이르게 된 지식인이었다.님 웨일즈는 김산의 면모를 통해 참된 사실과 진실 등의 진리를 추구하는 성품을 갖었다고 한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서 살아 남으려면(조선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자로부터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 등으로 살아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그는 님 웨일즈에게 말하기를 "노선을 위해 내가 있는게 아니라,조국 독립을 위해 그런 길이 필요했다"고 한다.

 

결국 김산은 옌안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던 중 중국공산당 사회부장이었던 캉성(康生)에 의해 '일제 스파이(밀정)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이 되었다.그의 나이 향년 34세였다.중국은 뒤늦게 김산의 죽음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의 명예와 공산당원 자격을 회복시키고 복원을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7년 옌안에서 김산을 만난 님 웨일즈는 김산의 행방을 몰랐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에 알게 되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지식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풍운아,김산은 님 웨일즈에게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가감없이 다 털어 놓았던거 같다.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었던 자신과 사회,제국주의 신질서에 대항하려 했던 댓가는 그에게 투옥과 고문,병마,잠행(潛行)의 연속이었던거 같다.독립혁명가 김산이 애타게 기다리던 『아리랑』의 한은 후손들에 의해 길이 남을거 같다.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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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메 그린다 - 그림 같은 삶, 그림자 같은 그림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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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삶 그림자 같은 그림이라는 말이 알쏭달쏭하다.자신이 그림 그림이 자신을 그리고,그 그림이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생각하면 할수록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든다.그림과 같은 짧은 삶도 그림이 되어지고 그림자로 변신해 가지 않을까 한다.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을 환쟁이(狂畵家)라고 할 만큼 이 글에 소개되는 조선시대 15인의 환쟁이들은 그림에 미치고 그림에 살다간 분들이다.

 

이 글에 소개된 환쟁이들은 익히 알고 있는 분도 있고 생경하게 처음 듣는 분도 있다.다양한 환쟁이들의 화폭과 당대의 사회상,신분 등을 읽어 가면서 조선 사회의 역사 공부도 되었기에 일석이조의 독서효과를 거뒀다는 자부심마저 든다.그들의 삶의 족적이 점과 선으로 아로새긴 동양화라는 예스러운 맛과 정감을 동시에 안겨 준다.

 

그들이 남긴 삶의 족적과 화폭에 담긴 의미는 그들의 다양한 체취를 풍기고,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는 DNA가 면면히 흘러 가고,호방함과 기예가 충일하며,서자로 태어나 숨소리 크게 쉬어 보지 못한 신세를 울분과 격정으로 치유하면서 우울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도 있으며,조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유배길에서 고독한 영혼을 간결하게 전해 주고 있기도 하며,사부의 그림자에 가려 그 두터운 벽을 넘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환쟁이 15인의 그림들은 15인15색을 자신들의 방식,멋을 그대로 살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림자 속 그림,그림 밖 그림자의 안견,김홍도,장승업,예술혼으로 새긴 삶의 밑 그림자의 이정,김명국,최복,불운의 그림자,인생에 드리우니의 윤두서,이징,김시,심사정,그림은 그린 자를 그리고의 허련,임희지,신윤복,김득신,정선이 소개되고 있다.

 

그림과 관련한 한시(漢詩)가 소개되어 당대 화가들의 심사,울분,우울함,호방함,기예,예술혼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일본 예술의 시대 성과와 맞물렸던 김명국 화가는 조선보다도 일본에서 한류풍을 일으킨 장본인이고,윤두서의 경우에는 숙종 시대 정치 변고와 함께 집안이 쑥대밭이 되다 보니 은거하면서 그 울분을 달래기도 하고,허련은 추사선생을 잘 모시고 받들다 보니 그 그늘의 벽을 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신윤복처럼 화원 가문의 뿌리 깊은 전통으로 아무런 구애없이 그림 그리기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으스대지 않고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 정선은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고 조선 역대 가장 많은 유작을 남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15인의 화가의 일생은 대부분이 중인이라는 신분으로 제대로 대접을 못받았기에 그들의 삶은 주류계층이 아닌 아웃사이더 꼴이 되고 만다.한미한 신분이지만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에 미친 환쟁이들은 당시 사대부계층에 비해 열등한 자신의 신분과 경제적 불평등을 그림을 통해서나마 심리적으로 해소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했다.그림을 그려 푼돈을 모으고 그 돈이 떨어지면 다시 그려 푼돈을 벌어야만 입에 풀칠을 했던 시대의 풍운아였다고 생각한다.그 우울하고 억울한 심정을 그들은 술로 시름을 달래고 영감이 떠오르면 숙달된 솜씨로 세상에 자신을 그리고 그 그림이 그림자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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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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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 미적 감각은 불교와 유교라는 종교색과 국난극치,장인들의 섬세하고 정교한 손재주,인고의 정신,미를 숭상하는 예인의 정신이 하나의 메타포가 되어 한반도 산하에 산재되어 있는 각종 건축물,불상,석탑,금속 공예,목칠.민속공예,토기,청자,분청사기,백자,회화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또한 백의 민족으로 상징하는 한민족의 특성상 화려함보다는 단백하고 은은한 맛이 잘 배어져 있다.

 

 

오랜 세월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한국미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독특한 감수성으로 빚어 내고 있는 한국미 산책은 건축에서부터 회화에 이르기까지 외견상 보여지는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최순우 선생이 찬미하고 있는 한국미의 찬사는 듣는 사람의 귀를 번쩍이게 하기도 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고양시켜 준다.특히 서양문물이 한국사회의 면면을 도색하고 예스러운 존재들이 산화해 가고 있음을 직시할 때,아직도 그 풍상을 거뜬히 이겨 내고 외세의 오욕도 대쪽같은 선비와 같이 그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고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호국룡의 성격을 띠고 탄생한 석굴암의 본존불(本尊佛)

 

 

 

추상의 아름다움이란 야릇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분청사기조화문편병(粉靑沙器彫花文扁甁)

 

 

 

맑고 조횽한 푸른 빛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

 

 

 

화엄사 사사자(四獅子) 삼층석탑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윤동주시인의 푸른 하늘 -

 

 

최순우선생이 소개하고 있는 한국미의 대표들은 셀 수가 없을 것이다.운이 좋게 최순의선생의 눈에 띈 작품들이 이 글에 소개되었을 것이다.고색창연한 예스러움과 독특한 창작으로 후손들에게 감흥을 안겨 주는 작품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찬탄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는다.

 

 

전통적인 기와집의 구조와 부대 살림살이(장독대,자수병풍 등),불국사,부석사,법주사 등의 사찰의 불교빛이 감도는 형체 및 불상과 석탑,신라의 청자부터 조선의 분청사기,백자의 온유하면서 육감이 돋보이는 살찐 맛,정선,김홍도,신윤복이 보여 주는 조선 산하,일상의 유유자적함 등이 최순우선생의 예스럽고 정교한 해설은 공감과 자부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 배흘림: 원주(圓柱)의 윤곽을 중간쯤에서 밖으로 굵게 만든 미묘한 양식 내지 약간 불룩한 곡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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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사건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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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역사를 놓고 볼 때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과 정치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간에는 늘 대립과 반목,갈등과 회유,척결과 희생이 뒤따랐다.정치라는 것은 말그대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힘과 권력,명예,부의 세습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여겼다고 생각한다.그만큼 정치권력을 쥔 자와 아웃사이더 간은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도사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이다.

 

 

그러한 비근한 예가 해방이후에 등장하는데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정치 거목 조봉암선생 처형,박정희 시대 장준하선생의 의문사 등은 법과 체제를 떠나 지식인의 일반인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으며 아직도 이제 대한 쿨한 사과도 없이 빠져 나갈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역사의 진보를 기대할 수가 없는 점이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권력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얽힌 부류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과학과 기술 문명은 나날이 발전되어 가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생각과 이념,파벌은 아직도 구태의연하기만 하다.

 

 

조선 후기 외세의 개화 압력이 거세지고 개화 세력들이 늘어나면서 봉건적이고 수구적인 왕권사상을 벗어나 선진문물을 받아 들여 조선의 개혁개방을 진보적으로 이끌어 가려던 인물이 김옥균이었다.그는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보여 주는데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교리로 임명되면서 정치적 결사 및 개화당 형성에 진력을 하게 된다.그리고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조사케 한 뒤 그도 일본 근대화 시찰을 통해 이것을 조선에 밴치마킹하려 김옥균을 위시하여 홍영식,서광범,박영효 등과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켜 체제 개혁의 요강을 발표하지만 청군과 민비수국세력에 의해 실패하게 된다.

 

 

김옥균은 정변 주도자들과 일본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은신을 하면서 뜻있는 자들로부터 생활자금 등을 제공받게 되지만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만 한다.도쿄에서 홋카이도,오가사하라 섬 등으로 망명의 설움을 달래다 다시 일본 도쿄로 돌아오면서 그를 죽인 자객 홍종우라는 인물과 접촉하게 된다.자객 홍종우는 민비수구세력이 보낸 이일직의 (댓가성 있는)제의를 받고 김옥균과 동지로 가장하면서 당시 조계지(租界地)였던 일본 소유의 동화양행 호텔에서 외롭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홍종우는 조선인 중에서 프랑스 유학 1호자로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만큼의 능력을 갖은 자였고 김옥균을 살해한 댓가로 그는 홍문관 교리직을 제수받고 사택까지 하사 받은 자이다.청국의 방해로 김옥균은 자신의 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철저한 계획을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착착 진행되고,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홍종우는 제주목사로 좌천된다.그곳에서 탐관오리로 부정부패를 일삼던 홍종우의 말년은 자업자득의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김옥균과 홍종우가 만일 살아 있다면 두 분이 국내외 정치 문제를 어떻게 펼쳐 나갈것인지를 가상 대담으로 실어 놓은 점이 매우 인상적이고 독특하다.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과 증거에 의해 조재곤저자의 유연성과 개연성 있는 상상과 추리로 대담을 실은 점은 당대의 상황을 한층 이해하기 쉬워 역사적 학습과 그들의 심리적,이념적 문제까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주고 있다.

 

 

유교적이고 왕권 중심으로 돌아가던 조선 후기는 풍전등화의 형국이었다.시대의 흐름과 나라의 문명발전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려 했던 김옥균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현대 위정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그리고 김옥균이 죽지 않았더라면 과연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진행되어 갔을지도 의문이다.왕권,신권,사색당파,민란,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김옥균과 같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선지자들의 뜻이 빛을 발할 수 없었던 점은 역사의 후퇴,국치로 이어지는 불운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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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아리랑 - 최범산의 항일유적 답사기
최범산 지음 / 달과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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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체결되고 국권이 일본에 넘어 가면서 나라의 독립의 열망을 담아 독립지사들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에 임시정부 및 항일 독립운동 아지트를 세우면서 일본에 총칼로 저항하기도 하고 일본 경찰 및 밀정,간첩들을 나포하기도 하는 등 항일 독립지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국에서 행했던 공로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독립지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줄기찬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나라에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독립지사들에게 감사함과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항일 유적 답사를 몸과 마음,두 발로 발품을 팔아가면서 항일 유적지를 현장 체험과 세세한 해설,전언 등과 함께 독자들에게 유적 답사의 의미,가치를 전달해 주고 있는 최범산저자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신의주를 마주 보고 있는 중국 단동(丹東)을 거점으로 요녕성,길림성,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항일 유적지를 더듬어 순례해 가는 과정은 기대반 회의반으로 가득차 있었다.사전에 한국 독립운동사를 숙지하고 항일 운동가 및 유적지를 체크하면서 답사해 나가는 과정은 한국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항일 운동 후손들의 현재의 삶은 어떤가? 이승만정권에 의해 항일운동의 의미가 축소되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세세손손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는 상황을 직시할 때 과연 나라의 정기가 제대로 세워지고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친일 세력들의 부는 3대가 먹고 살만큼 유지가 되고 항일 운동 후손들은 3대가 가난을 면치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사실을 놓고 볼 때 형평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권을 유지하려는 위정자들이 과연 역사 인식이 있는지 아연해지기만 한다.이제라도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심정으로 역사를 바로잡지 않으면,민족정기로 빛나던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는 그 빛을 잃어버리고,민족배반의 인물들(친일세력들)이 또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치욕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항일독립투쟁의 봉화를 올린 단동,항일무장 투쟁의 성지 관전현,역사의 도시 환인현의 항일유적지,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의 유적지,남만주 항일투쟁의 횃불을 든 대한독립단,신흥무관학교 유적지,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유적지,육군주만참의부 항일유적지 등이 저자가 답사한 경로이다.중국이 자본주의 시장의 도입과 도시개발,산업화에 따라 항일 유적지들은 크게 훼손되고 도시개발로 인해 일부는 아예 흔적도 없기도 하다.또한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생생한 전언 및 증언도 세월이 흘러 대부분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증언의 내용이 미미한 수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런 와중에 중국은 한국의 고대사 부분을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여 한국의 고대사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입장과 외교채널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유인석장군을 비롯하여 이회영,김구,김동삼,윤희순,양세봉 장군 등이 온몸을 바쳐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끝내 해방의 기쁨과 환희를 맛보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 했어도 그 분들의 넋과 영혼은 조국의 금수강산이 평화와 번영으로 가득차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청소년들에게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항일 유적답사지를 견학 코스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돈과 물질,명예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국가의 역사의 인식을 바로 잡고 다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나 역시 이 글을 읽어 가면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겪었을 온갖 고초,수난과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그 분들께 숙연한 마음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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