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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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지성사에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카뮈는 그들이 갖고 있는 명성과 명예만큼 그들의 자존심과 사상,사고의 차이로 인해 라이벌을 형성하고 투쟁하며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과정을 삶의 한복판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은밀하게 암시하기도 하고 글이라는 작품을 통해 속내를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사르트르와 카뮈는 태생이 달랐기에 생각과 감정,사고의 유형이 판이하지만 2차 세계대전 속에서 프랑스에 대한 독일 점령기와 해방후 둘이 갈라서야만 했던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마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또한 둘의 공통점은 문학작품으로 인해 찬사를 받고 노벨문학상이라는 명예를 안았지만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락을 거절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카뮈는 전락이라는 작품으로 사르트르는 말이라는 작품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카뮈는 알제리 출생으로 그가 프랑스에서 작가 및 기자로서 활동하던 당시는 알제리는 프랑스령이었고 알제리는 독립을 위한 투쟁과 싸움의 일로를 걷고 있었고,사르트르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던 것으로 보여진다.성격이 민감하고 자존심,낭만성이 강한 카뮈와 부르조아적이고 옐리트 기질이 강했던 사르트르는 서로가 잘 맞지 않을거 같으면서도 1943년 '악마와 선한 신'의 리허설에 첫만남을 시작으로 서로의 입장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우정을 쌓아가고 둘은 독일 점령하에서 레지스탕스로 함께 투쟁하게 된다.카뮈는 콩바라는 잡지사를 설립하고 사르트르는 현대지를 통해 문학의 세계를 일궈 나간다.

1945년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카뮈는 공산당(PCF)으로부터 탈퇴하고 사르트르는 소련 공산당에 호의를 보이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면서 그들이 쌓아 올린 우정은 금이 가고 만다.카뮈는 <반항적 인간>에서 자기만의 역사,부조리를 받아들이고,그것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를 담고 있는 더 치밀하고 더 비극적인 기도를 담으며 사르트르의 교조주의적이고 변절된 이념과 사상에 공격의 수위를 높힌다.즉,사르트르에 대해 역사와 윤리를 저버린 자라고 치부한다.사르트르는 자신이 심취하고 경도된 마르크스주의 및 소련 식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적극적으로 소련과 컨넥션을 갖게 되며 그가 바라는 혁명 투쟁의 목표는 <유물론과 혁명>,<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잘 나타나 있다.그러면서 사르트르는 사회적 책임,참여,자유를 부르짖곤 한다.사르트르가 관여하고 있는 현대지는 작가의 작품활동과 서평,공산주의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소련과 헝가리 침공과 함께 소련에 있는 지인들의 무관심과 헝가리 학살을 고발하지 않고 소련의 관료주의를 이끄는 파당에 대한 우정을 더 이상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이 사르트르가 공산주의로부터 손을 씻는 원인이 된거 같다.반대로 카뮈는 그가 말하는 좌파 지식인이나 실존주의자들이라는 특징을 공유하는 자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개인적,도덕적,정치적 '자아'를 형성하게 되며 냉전시대의 첫 희생국인 알제리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카뮈는 모국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것에 침묵으로 일관한다.이 침묵이 한 민족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둘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별의 수순을 밟은 것은 사르트르와 가깝게 지내던 메를로퐁티가 쓴 <요가수행자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면서 메를로퐁티가 모스크바 정치재판을 정당화시켰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립과 배신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며 분개했으며 역으로 카뮈는 메를로퐁티로부터 반격과 사르트르가 메를로퐁티의 주의 및 견해를 지지했던 점이 커다란 절교 원인으로 보여진다.(1952년)

카뮈는 자신이 살던 지방에서 파리로 향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고 우정과 투쟁의 긴 역사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사르트르는 추도사를 읽으면서 카뮈에 대한 좋았던 회상과 우정을 되새기게 되는데 사르트르는 사회적,사교적 지위도 어느덧 노쇠함과 더불어 퇴색되게 되고 사르트르의 곁을 지키던 부인 보부아르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사르트르와 카뮈와의 관계,우정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들려주고 있다.20세기 지성계의 두 거장이었던 사르트르와 카뮈는 사상과 철학,문학작품으로 일세를 풍미하고 각자 독특한 개성과 신념에 의해 우정을 쌓기도 하고 기회에 따라선 변절의 과정을 거치며 서로를 비난하며 대립과 배신이 이어졌지만 진정 사회를 대표하는 공인(公人)으로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의 구조 및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책임과 참여,자유란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는 시간이 되었다.또한 두 거장을 통해 그들이 남긴 우정을 비롯하여 상호간의 영향과 증오,수많은 주제들의 흔적을 살필 수가 있었으며 지난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음미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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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글쓰기 강의 - 30년 경력 명강사가 말하는 소통의 비밀
바버라 베이그 지음, 박병화 옮김 / 에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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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글쓰기에 대한 정규과정과 수업,연습이 거의 없었던거 같다.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어 생각과 사유의 틀을 넓혀 갔던 독서인도 아니었기에 뒤늦게 나마 편독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과 함께 하고 있는 요즘이 나름대로 인생과 우주,타인과 사회,국가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워갈 수가 있어 다행스럽기만 하다.가정과 일,부양을 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책읽기는 때론 부담과 서평이라는 기한에 밀려 한쪽에선 지청구를 늘어 놓기도 하고 나는 나대로 책읽기라는 기대와 희열에 사로잡혀 틈을 놓치지 않고 다독을 하면서 덜익은 생각과 사유를 조금씩 채워가면서 튼실한 인격과 지성의 세계를 넓혀 가려고 한다.책읽기와 병행하여 글쓰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초,중,고교 시절엔 문예반에 가입만 하고 제대로 활동을 하지 않았던거 같다.내 생각과 감정,느낌을 진솔하게 펼치고 누군가 읽어 주는 사람이 있어 관심과 애정으로 공감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해 본다.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글을 잘 쓰고 유명한 작가가 되어 세인들의 관심과 애정,편달이 있기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사념이 통합이 되고 몇 차례의 수정과 가필을 거쳐 세상에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글을 잘 쓰고 세상의 세인들과 공감과 소통을 잘 이루어가는 분들에겐 특별한 기질과 소양이 있겠지만 그들도 보이지 않은 생각의 고통과 정리된 사념들이 밀가루 반죽이 얽히고 섥혀 향기와 운치가 넘실대는 각양각색의 빵으로 탄생되듯이 한 편의 멋진 글이 탄생되기까지는 보이지 않은 작가의 혼연일체가 살아있어야 할 것이다.

평소 글쓰기에 대해서 전문지식은 없지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며 많이 써보는 연습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잘 쓰고 공감과 소통이 잘 되는 글을 어깨 너머로 훔쳐보고 흉내내보는 과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리라 생각한다.같은 글을 읽고서도 인간의 마음과 감정은 수천,수만갈래이듯 쓰는 사람에 따라서 개성과 문체,글의 경중도도 상이하고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잘 쓰는 글은 분명 뭔가 색다른 감각과 공명(共鳴)을 자아내게 한다.잘 쓰는 글을 보노라면 나도 흉내내고 싶어질 때가 있다.어떻게 해서 그 글이 탄생했으며 주제와 소재,상상력과 관찰,기억과 전문지식,잠재의식과 호기심,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글을 읽으면서 눈치챌 수도 있고 흔히 말하는 감으로 알 수도 있다.어떠한 작가는 삶의 일상에서 소재를 모으고 모아서 삶을 우려내고 공감을 자아내게 하며 타인(독자)으로 하여금 대리만족과 위무를 안겨주기도 한다.또한 어떠한 작가는 발품을 팔면서 자료를 모으로 탐사여행 속에서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역사의 뒤안길을 탐문하고 캐내어 인문(人紋)을 오롯이 인문(人文)으로 승화시킨다.아직까지는 멀고 멀게만 느껴지는 글쓰기의 여행과 체험이 즐겁고 재미있어 하는 여정으로 삼고저 한다.

30년간 하버드대에서 글쓰기 명강사로 경험과 에피소드를 묶어 글을 좋아하고 잘 쓰기를 위한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이 도서는 글쓰기의 요체는 주제에 맞게 내용을 잘 전개하고 독자들과의 시원한 소통을 제시하고 있다.맞는 말이다.글쓰는 사람이 처음 품었던 마음 속의 주된 내용을 수미일관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의미전달이 잘 되고 모호한 해석과 오류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학술자료와 연구조사가 아닌 순수문학을 하는 글쓰기는 특히 독자의 감성과 공감을 주안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글을 아무리 잘 썼다고 자화자찬해도 읽는 사람이 아무런 관심과 흥미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도로무공(徒勞無功)이 될 것이다.또한 이 글은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아마추어적이고 글쓰기ㅣ의 초심자를 위한 지침서이기에 글을 잘쓰기 위한 요령과 목표의식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독서이력과 충분한 사유능력의 함양,수많은 프리라이팅의 중요성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왕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제대로 된 글을 쓰려면 우선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도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새겨 볼만한 대목이어서 인용한다.

* 자신의 과제를 파악하라
* 과제의 계획을 짜라
* 내용을 발전시켜라
* 필요하다면 제로 드래프트(초안)을 써보라
* 청중과 목표를 고려하라
* 전달하라
* 분명하게 밝혀라 P315 인용

작가에 따라선 아침형 글쓰기와 저녁형,새벽형 글쓰기의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생각과 사념이 많이 요구되는 글쓰기의 지난한 작업은 때론 뇌를 쉬게 해주어야 하고 때론 골똘히 생각하여 뇌의 흐름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마음자세도 중요하리라 생각한다.처음부터 잘 쓰기를 바라는 것은 뱉새가 황새걸음 따라가려는 무모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모든게 단계가 있고 그 단계를 하나씩 넘고 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청중들과 소통을 하게 되고 소기의 글쓰기 목표가 달성되리라 믿어 본다.글을 쓰려다 문득 생각이 막히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공원길이나 숲이 우거진 오솔길이라도 호젓하게 걸으면서 생각의 충전을 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생각과 사유가 넓혀지고 자신감이 붙으면 그땐 막힘 없이 글쓰기가 진행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잘 쓰는 글보다는 진솔한 지성과 지혜,감성이 잘 어우러지고 글쓰는 이의 유머,위트 등이 가미된다면 읽는 사람은 지친 삶 속에서 삶의 위안과 기쁨,활력소를 찾지 않을까 한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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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심리학 - 이성을 마비시키는 점술, 유령, 초능력의 진실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김영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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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가사의와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참으로 많다.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생활과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보니 인간의 마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일어날 때도 있다.물론 종교와 신의 힘을 빌려 그에 의지하고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들도 있지만 '혹시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하면서 점성술에 의지하여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를 들려주는 점술가의 말에 현혹되기도 하고 전적으로 믿으려는 사람들도 있다.자신의 힘과 노력,능력으로 세파를 해쳐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테지만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고 나약하기 이를데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이럴때 나타나는 법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었던 불가사의하고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있는데 주로 점보기,염력,독심술과 최면이다.불교를 믿는 어머니는 주로 사월 초파일에 불공을 드리고 가끔은 점쟁이에게 식구들의 안위를 묻기도 한다.지금은 거의 가지 않지만 일이 안풀리고 액운이 끼고 대학교,결혼을 앞두고 점집에 다녀온 기억이 있다.물론 맞는 부분도 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것에 전적으로 매달리면 안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다.또한 초2때 시골 초등학교에 최면술을 갖고 나타난 최면사가 학급동료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간단히 최면술의 취지를 설명한 다음 한 학생을 불러 내더니 눈을 지긋이 감고 최면을 걸었다.한 학생이 의자에 앉고 몇 분이 흐르자 그는 최면에 걸린듯 최면사가 말하는 데로 운동장 한 바퀴를 돌고 원위치로 돌아왔던 희미한 기억이 있다.그는 최면사가 말하는 것처럼 온몸에서 에너지가 넘치고 환상을 느꼈다고 말했던 기억도 새롭다.

색다른 얘기인데 오촌당숙벌되는 분이(지금은 작고 했지만) 어릴 적 몸이 아파 자리에 오랫동안 드러누웠던 적이 있다.그 분은 집 앞이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는데 평소 면소재지의 주막에서 술을 자주 드시고 집까지는 거의 4키로를 걸어야 당도했는데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왼편에 저수지를 끼고 네모진 돌들로 만들어진 돌다리를 3.4백미터를 건너야 집이 나오는데 취기에 정신이 몽롱하고 심약체질이었기에 저수지 한 쪽에서 유령과도 같이 하얀 소복을 입고 희미하게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진다는 것이다.그 유령이 손짓을 하고 그 쪽으로 오라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무심코 발걸음을 옮기려다 보니 그 유령은 온데간데 없고 무성하게 자란 수초와 각진 돌틈 사이로 헛디뎌 그만 뒤로 넘어지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했다는 것이다.나 또한 나를 애지중지해 주시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해에 혼자서 자취를 하던 시절,한 여름이었는데 모기장을 치고 방문과 부엌문을 열고 스르르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부엌문을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성큼성큼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등골이 오싹하고 두려운 마음에 헛기침을 하고 냉수를 마신 다음 부엌문과 방문을 닫고 불을 켠 채 오지 않은 잠을 청해야만 했던 기억도 아직도 서늘하게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다.

이 글에 나오는 갖가지 신비하고도 비현실적인 불가사의한 세계는 때로는 흥미를 갖어다 주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점치기,염력,폴터가이스트(유령과의 대화),독심술과 최면 등은 청중과 대중의 부주의와 부집중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고도의 심리전술이라는 생각이 든다.흔히 매직이라고 하는 마술의 경우를 보더라도 청중의 눈에 보이지 않게 뒤에서 조작하는 기술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럴듯 하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연출하는 놀라운 마력을 갖고 있다.순진하고 비판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그대로 믿고 놀라워하며 탄성을 짓곤 한다.이렇게 점치기,염력,독심술,유체이탈,마술,예지몽 등이 심약한 인간의 본성과 존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착하고 순진하며 남의 말을 잘 듣고 따라주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신기하고도 기묘한 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세계가 순간적으론 재미와 흥미,미래의 예측,마음의 위로를 안겨줄 수도 있지만 온전히 쏠려서는 안될 것이다.그러기에 이러한 세계에 마음을 조종당하지 않으려면 '문간에 발 들여놓기'를 통해 책임과 헌신을 넘어서 요구의 수위가 높아지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물리칠줄 알아야 하고,자신을 반대 의견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조직을 조심해야 하며,종교와 같은 조직의 지도자가 치유나 예언 등 불가사의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야 하며,조직이 고통스럽고 힘들거나 굴욕적인 입회식을 요구하는지도 따지고 물리칠 줄 아는 차가운 지성을 갖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종교의 세계는 나약한 인간의 심성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기에 때론 그 조직의 지도자(일부이겠지만)의 교리와 강론이 자기기만이나 사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여지기에 그 조직에 휘말려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유약한 존재이다.또한 삶의 기간도 그리 길지 않기에 살아감에 무수한 세계를 접하면서 몸과 마음이 현혹되어 이성과 논리를 혹세와 같은 세계에 갇히게 되면서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 수도 있다.초현실적이고 초능력의 소유자도 겉으론 강건하고 완벽하게 보이지만 과연 강건하고 완벽한 존재인지를 꼼꼼히 살피고 분석하며 옥과 티를 가릴 줄 아는 현명한 자세와 지혜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인간은 마음이 가는데로 간다고 했듯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지각 체계를 무너뜨리는 세계는 스스로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물리치고 발을 떼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할 것이다.인간의 나약하고 능력의 한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기만과 사기를 일삼는 일부 몰지각하고 개인주의에 치우친 자들은 밝은 사회에 어둠을 던지는 행위이므로 조심하고 경계하며 무관심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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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연쇄살인범이 되었나
슈테판 하르보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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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혹자는 오죽하면 죽였겠냐고 항변하겠지만 내 목숨이 소중하면 타인의 목숨도 소중한 법이기에 사람을 죽일 당시의 정황이나 감정을 추스르고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조금만 더 참았다면 살인이라는 처참한 상황과 뒤늦은 후회는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대개 흉악한 연쇄살인범이라고 하면 흔히 남성을 연상케 하지만 이 글에 나타난 연쇄살인범은 주로 여성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읽어 가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도 있고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겠다라는 동정심도 일지만 희생된 자들은 무방비 상태와 연약하고 기력없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살해를 했다는 점에선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크게 분류하면 살인의 경우엔 치정에 의하고 궁지에 몰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막다른 골목,중산층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물적자유를 누리기 위한 방편으로,때로는 (간호사로서)환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냥 일체화하여 안락사시키는 빗나간 사랑은 결국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남는 것은 죄값과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옥살이를 통해 깨우쳐야만 할 것이다.

내가 법의학자도 아니고 심리상담사도 아니지만 여성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는 상실과 굴욕이 누적되어 더 이상 삶을 버텨나가기가 힘들때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만 간호사의 경우처럼 중환자의 남은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야비하고도 교활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동기가 어떻든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다.중환자를 다루고 간호하는 간호사는 무슨 약을 처치하는지를 일반인은 알지를 못한다.글에서처럼 중환자가 심장마비가 온 거처럼 꾸며 치명적인 약(카타프레산)을 정맥주사하고 염화칼륨까지 투여했다고 하니 공분(公憤)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의사의 처방없이 자의적으로 환자에게 약물 주사를 놓았다는 점이다.한국에서도 의료사고가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간병인과 간호사,의사들이 고의든 비고의든 실낱같은 생명을 조금이나마 연장하려고 병실에 있는 환자를 가볍게 생각하고 본분을 망각하여 치사에 이르는 행위는 자세한 경과검사와 함께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주로 2차세계대전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일어났던 여성 연쇄살인사건과 살인범의 심리상태,살인 동기 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제 갓 태어난 영아 유기 사건 및 살해사건이다.이 글에 나오는 장본인처럼 남편이 잠자리를 요구할 때마다 들어주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태아가 생기고 자라나지만 범인은 남편에게 폭행을 다할 공포와 남편이 사회생활하는 데에 불이익이 갈까 두려워 수도 없이 화장실 변기통에 태아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 이를 수족관 밑에 유기했다는 것이다.영아살해사건의 경우는 중국과 인도에서 역사적으로 빈번히 일어났고 영아가 여아인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고 혈통을 중시했던 봉건적 사고방식에서 (안타깝지만)여린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처참하고 싸늘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또한 간병인의 경우를 보면 환자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고도의 지능을 발휘하여 돈을 갈취하고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든지 병이 깊어지면서 저절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허위조작을 한 사건도 비일비재하다.아무튼 돈과 물질중시,인명 경시,직업정신 망각 등에서 빚어진 연쇄살인 사건은 어떠한 변명과 동기도 용납할 수가 없다.

생명의 원천인 여성성과 모성애를 중시하기에 여성이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그것도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상습적으로 자행했다는 점에서 통분을 금할 수가 없다.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것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특히 힘없고 기력이 쇠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해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개인의 심리상태도 문제이지만 인명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라고 생각한다.인간을 인간답게 바라보고 대할 줄 아는 사회풍토 조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는 국가가 개인 및 사회가 건전하고 밝게 움직여질 수 있도록 분위기 쇄신과 인명숭상 정책도 필요한 때라고 보여진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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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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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가 제게 "왜 책을 읽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지식과 지성,지혜를 다양하게 얻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솔직히 학창 시절 책다운 책을 많이 읽지를 않았다.주로 참고서와 얇팍한 흥미 위주의 책으로 만족하고 세상을 바라보려 했던 어리석음이 어른이 되고 인생의 중반이 되고 보니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세상의 정보와 지혜의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우리글에는 수많은 한자어와 외래어,예스러운 말들이 뒤섞여 쉽게 다가가기도 어려운 글들도 있고,나라마다의 전해내려 오는 신화와 전설 속의 다양한 인물들의 활약상과 교훈,시와 같이 짧으면서도 촌철살인하는 함축된 언어,세상의 몽매를 밝게 깨우치고 횃불마냥 밝게 비춰줄 잠언서(箴言書) 등을 접하면서 그간 생각없이 살아온 내게 다소나마 위안을 안겨주고 부족한 내면을 채워주기도 한다.특히 고전의 경우에는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거대한 진리가 함축적으로 담겨있고 카프카가 말한것처럼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 주기도 한다.독서는 다독,정독,통독 등이 있지만 제 경우는 2,30대 못 읽은 한을 풀기라도 하듯 신간,베스트셀러,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저 나름 부지런하게 읽고 있는 중이다.읽고 눈에 띄는 대목은 밑줄을 긋기도 하고 노트에 적어 보기도 한다.

저자는 광고인으로서 '책 들여다보기'의 강의를 정리하여 책과 인생이라는 주제에 어울릴 법하게 그가 읽고 감명을 안겨준 대목과 생각,느낌을 담담하고도 편안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탐사와 직접 체험을 통해 군더더기 없는 멋진 글을 보여주는 김훈,이성간의 진정한 사랑의 힘을 쏟아내는 알랭 드 보통,인간과 사물이 하나가 되어 세상을 낭만으로 이끄는 고은,햇살과 지중해,가볍지 않은 사랑을 담은 카뮈,장 그르니에,니코스 카잔차키스,밀란 쿤데라,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 준다는 톨스토이 등을 통해 짓눌린 생기를 되찾아 주고 삶의 의미,썩지 않는 영혼,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음미해 볼 수가 있었다.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기도 하고 문득 돈오(頓悟)와 같은 순간 깨달음을 통해 삶의 지표를 바꾸기도 하는 등 인간은 신체적으론 나약하지만 글이라는 존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꾸어 갈 수 있는 행복의 울타리에 갇혀져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글 속에서 행복을 찾아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글을 왜 읽냐는 주체적인 물음 속에 스스로 답을 구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즉 스스로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해 글을 읽고 있다는 자각을 갖고 읽다 보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만들어질 것이고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밤의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고,그것을 행복하게 대하는 삶의 자세야말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행복은 추구하는 대상이 아닌 발견의 대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소소한 사물의 모습을 보면서 해맑게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경이와 찬탄을 발하기도 하는 등 일상의 삶 속에서 약간의 여유를 갖고 바라보고 느껴본다면 지금까지 행불행으로 몸이 닳아 왔다면 그 순간부터는 세상을 조금 더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인 지혜를 쌓아 갈 수가 있으리라.행복은 발견하는 힘이 커질수록 몸과 마음이 리듬감이 쌓여 가고 대처하는 힘도 길러지리라 판단된다.

또한 글을 통해 서사적인 힘도 기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사실,낭만,민족적인 색깔을 띤 시를 쓰시는 고은의 시에서 느껴지는 서사적인 풍경은 소와 사람이 갖고 있는 느낌과 감정이 일체가 됨을 알아 차리게 된다.말을 못하는 소일지라도 비맞고 있는 소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시선을 거두는 꼴이 된다는 것도 감지해볼 수 있다.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서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책을 읽는 목적은 단순히 사회 생활에서의 수단과 목적을 위한 방편이 될 수도 있지만 글을 쓰는 작가나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 수많은 시간 속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해 가며 반복수정하기를 수없이 했을 것이다.글 속에서 단순한 지식을 찾기 위한 노력보다는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작가의 문체와 내용,전해 주려는 심상과 지혜의 덕목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는 노력이 진정한 독서인의 자세이고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행복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리라 생각한다.또한 독서를 통해 작가의 마음을 훔치고 건전한 모방을 통해 멋진 창의력이 개발되고 음울하고 각박한 세상에 행복의 밀알을 뿌려나가리라 생각한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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