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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망상을 품은 적이 있다.
내게 시간 여행이 허락된다면,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파렴치하지만....소설을 가로채고 싶다고.
지금 발표된 소설 중 마음에 드는 것 한 권을 품고 과거로 날아가서, 한발 먼저 버젓이 펴낸다면. 그 책의 진짜 주인은 속엣말을 하겠지?
'어...나도, 이런 글을 써보려 했는데....'
처음 그 꿈을 꾸게 한 소설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었다. 훔치고 싶단 말이 무색하게, 지금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ㄷ자 모양으로 앉은 집 모양새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연상시키는 또랑하고 조숙한 소녀의 나레이션만 기억날 뿐이지만.
그리고 며칠 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덮은 후에, 다시 한 번 그런 욕망이 끓어올랐다.
'이 소설을 훔치고 싶다!'
작가후기에서 심윤경이 서른이 되었다고, 어린 딸 짱아에게 고맙다고 할 무렵에는...뭐랄까, 간발의 차이로 손끝에 뭔가 스친 것처럼, 잡아 가질 수 있었는데 아깝게 놓친 것처럼 어이없는 안타까움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도 했다.
훔치고 싶을만치 ...........한 소설이다. 빈 칸 안에 아름다운, 근사한, 매력적인, 훌륭한...내가 아는 수식어를 이것저것 넣어보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새의 선물, 장석조네 사람들, 한 발 넓혀서는 자기 앞의 생이나 호밀밭의 파수꾼까지. 나는 왜 성장소설만 펴면 이렇게 맥을 못추고 허물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나는, 다 자라 유들유들해 진 나는, 이젠 안개 속처럼 어렴풋한 '유년의 나'를 붙들고 싶은가 보다.
잠시 돌아보면 '유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타인처럼 느껴진다. 과거 - 현재라는 시간의 끈이 아니라, 과거의 그애 / 현재의 나라는 뛰어넘기로 단절되어 있는 타인.
그 애는....이젠 흐릿한 기억 속의 그 애는, 이 책의 주인공 동구와 참 닮았다. 어린 동생의 실수를 덮으려 달걀그릇을 뒤엎는 동구에게서, 아주 오랜 시간 거지같은 날이 계속되는 것이 '절망'이라고 깨닫는 애늙은이 같은 동구에게서 설핏, 내가 알던 그 아이, 유년의 나를 본다.
모순을 품은 말이지만, 유년의 나는 지금의 나를 기른 어머니 같다.
내성적이고, 심약하고, 조숙하고, 속이 깊었던 그 애(유년의 나)는 자신이 상처입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길러 냈다. 유연하고, 쉽사리 상처 받지 않고, 당당한 척 연기를 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지금의 나'를 길러 낸 그 아이는, 어느 순간 힘이 다 해 스러지고 만 것이다. 지금은 가뭇없어...그 기억도 아련하게.
철 없는 동급생들이 빨리 자라서 더이상 자신을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잠든 동생들을 들여다보면 (어미가 새끼들을 바라볼 때 가끔 그러하듯) 괜스러 가여워져서 눈물을 짓곤 하던,
엄마 아빠가 불쌍하니까 자살 같은 건 안 된다고 다짐하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세상에 물들어 뻔뻔한 포커페이스를 갖게 된 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더이상은 슬프거나 괴롭지 않게 단단히 다져진 내 속 어딘가에, 유년의 그 애가 있기는 한 것일까?
갑작스레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에게 시간여행이 허락된다면, 소설 따위는 훔치지 않을 것이다.
20년 전 나에게로 곧장 날아가서, 힘들어 하는 그애를 꼭 안아줄테다.
걱정 말라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시간이 지나면, 가슴 속 아프거나 슬픈 것들은 다 늙어 바스라질 거라고. 꼭, 말해줄테다.
포옹을 마치고 난 그 때라면, 더이상 성장소설을 읽으며 울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