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복형제들
이명랑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5월
품절


"두 사람이 한 장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반드시 '언어'가 필요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그런 말을 유포하고 다니는 작자들은 뻔한 인간이지. 그런 인간들에게는 대체로 꿍꿍이가 있는 법이거든. 그런 인간들은 죽기살기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고 들지. 혼자 지껄일 수야 없으니까. 일단 관계가 성립되고 나면 그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혀 속에 감춰두었던 무기를 꺼내드는데 그 무기는 당연히 '언어'지. 그들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은 거야.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정성 들여 자신의 '언어'를 갈고 닦았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매끄럽다 못해 휘황찬란하지. 그러면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그만 주눅이 들어서 그들 앞에서는 비루한 노예가 되고 마는 거야. 단지 자신의 언어가 그들이 구사하는 그, 휘황찬란한 언어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34~35쪽

휘황찬란하다 못해 제대로 마주 볼 수도 없는 춘미 언니의 언어가 압정처럼 내 얼굴을 찔렀다. 나는, 어쩌면 이 언니야말로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는 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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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1-1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내 가슴도 압정에 찔린 듯 뜨끔했다. 나 역시...소통이 아닌 과시의 방편으로 '언어'를 갈고 닦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우맘 2004-11-1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 바꾸기를 위해 태그 p를 썼더니만, 같은 글이 두 번 떴다. 게다가 중간엔 블루 스크린까지 한 번 떠서 심장을 덜컥이게 하고... 밑줄긋기 공간은, 아직 좀 불안정한 모양이다.

chaire 2004-11-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랑의 언어는 참 신랄하고 휘황찬란하군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 책과 연대기를 아무리 달달 외운다 해도, 그 당시, 그 거리, 그 사람들의 사는 냄새를 맡을 수는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 자전적인) 작가들의 성장소설은 가장 생생한 역사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프랜시의 삶을 엿보지 못했다면, 20세기 초 브룩클린 거리를 내가 어찌 느낄 수 있었으랴. 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그 나무를, 반품된 빵을 헐값에 파는 빵공장을, 웨이터 일을 하던 아빠의 일회용 칼라를. 무엇보다도 그 마음...시대를 관통해서 느껴지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알 수는 없었을게다.

아름답고 현명한 엄마, 역시 근사한 외모에 재능 있는, 그러나 인생에서 잠깐 헛디딘 발을 거두지 못하는 술주정꾼 아빠, 그리고 프랜시와 닐리. 배고픈 삶이지만 매일 읽는 성경과 세익스피어, 아빠의 멋진 노래, 엄마의 피아노 소리가 버무려진 그들의 일상은 그리 비루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베티 스미스 특유의 문장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그녀의 글을 조용한 허밍같아서, 슬프고 아픈 일도 부드럽게 갈무리해준다. <사건> 안의 <마음>을 엿볼 수 있도록.

누구의 것이든, 유년은 들을만한 이야기거리이다. 어느 시절 어느 토막이든 듣는이를 매료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난 여전히, 성장소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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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천사의 시 - 이라크 전쟁으로 두 팔을 잃은 소년 알리 압바스 이야기
제인 워렌 지음, 김영선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5월
품절


"그 날 거기에는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 젊은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미국인들이 거기서 뭘 하는지 알고 싶어했어요."-139쪽

자부심 강하고 굴욕감을 맛본 적이 있는 그 성난 젊은이들은 미국인들이 자기 동포를 돕고 있음을 알고는 더 큰 좌절감을 느꼈으리라는 거였다. 자유를 가져다준다며 그들을 다치게 한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이 무심히 상처 입힌 사람들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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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1-1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대신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더불어 마냐님의 리뷰에 대한 지원 사격.

이도 저도 아니게 서성거리다가 끝나는 이 책, 그 모호함의 이유가 위와 같은 모순이 아닐까?

진/우맘 2004-11-1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에서 불편한 점 두 가지.

줄 바꾸기가 안 되는 것. 그리고 추가를 누르고 나면 책을 다시 등록하고 카테고리도 한 번 더 선택해야 한다는 것. ㅡ.ㅡ;

mannerist 2004-11-10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 바꿀 타이밍에서 줄바꿈 테그(앞뒤로 꺾쇠 p)를 넣어보세요. 방명록에서 줄 바꿀 때 이렇게 쓴다지요. 핫핫핫(비웃음 절! 대! 아님!!^^;;; 비웃을까 하다가 목숨 귀한 줄은 알아 몸 사리는 매너... 쿨럭;;;;;; )

다연엉가 2004-11-1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 생소해..그런 기능도 생겼네 한 번 해 볼라고 하다가 포기.^^^^

水巖 2004-11-1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등록 할때는 영문이 먼저 나오는것도 불편하네요.

진/우맘 2004-11-1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그래도 개편되면서, 한글로 치고 있을 때는 한글이 나오는 듯 싶었는데...여긴 아닌가봐요.

책울성!> 뭐야뭐야...뭐하느라 이리 오랜만인거예요!!

매너> 오호라...그냥 해 넣어도 태그가 먹는단 말이지? 그나저나....네가 토요일날 맞을 매가 몇 대인지 아느뇨?!

sweetrain 2004-11-11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때릴 때는 문화인답게 도구를 사용하셔야죠. 기둥뿌리 뽑아 갈께요.=333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망상을 품은 적이 있다.
내게 시간 여행이 허락된다면,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파렴치하지만....소설을 가로채고 싶다고.
지금 발표된 소설 중 마음에 드는 것 한 권을 품고 과거로 날아가서, 한발 먼저 버젓이 펴낸다면. 그 책의 진짜 주인은 속엣말을 하겠지? 
'어...나도, 이런 글을 써보려 했는데....'
처음 그 꿈을 꾸게 한 소설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었다. 훔치고 싶단 말이 무색하게, 지금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ㄷ자 모양으로 앉은 집 모양새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연상시키는 또랑하고 조숙한 소녀의 나레이션만 기억날 뿐이지만.

그리고 며칠 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덮은 후에, 다시 한 번 그런 욕망이 끓어올랐다.  

'이 소설을 훔치고 싶다!'

작가후기에서 심윤경이 서른이 되었다고, 어린 딸 짱아에게 고맙다고 할 무렵에는...뭐랄까, 간발의 차이로 손끝에 뭔가 스친 것처럼, 잡아 가질 수 있었는데 아깝게 놓친 것처럼 어이없는 안타까움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도 했다.
훔치고 싶을만치 ...........한 소설이다. 빈 칸 안에 아름다운, 근사한, 매력적인, 훌륭한...내가 아는 수식어를 이것저것 넣어보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새의 선물, 장석조네 사람들, 한 발 넓혀서는 자기 앞의 생이나 호밀밭의 파수꾼까지. 나는 왜 성장소설만 펴면 이렇게 맥을 못추고 허물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나는, 다 자라 유들유들해 진 나는, 이젠 안개 속처럼 어렴풋한 '유년의 나'를 붙들고 싶은가 보다.
잠시 돌아보면 '유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타인처럼 느껴진다. 과거 - 현재라는 시간의 끈이 아니라, 과거의 그애 / 현재의 나라는 뛰어넘기로 단절되어 있는 타인.
그 애는....이젠 흐릿한 기억 속의 그 애는, 이 책의 주인공 동구와 참 닮았다. 어린 동생의 실수를 덮으려 달걀그릇을 뒤엎는 동구에게서, 아주 오랜 시간 거지같은 날이 계속되는 것이 '절망'이라고 깨닫는 애늙은이 같은 동구에게서 설핏, 내가 알던 그 아이, 유년의 나를 본다.

모순을 품은 말이지만, 유년의 나는 지금의 나를 기른 어머니 같다.
내성적이고, 심약하고, 조숙하고, 속이 깊었던 그 애(유년의 나)는 자신이 상처입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길러 냈다. 유연하고, 쉽사리 상처 받지 않고, 당당한 척 연기를 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지금의 나'를 길러 낸 그 아이는, 어느 순간 힘이 다 해 스러지고 만 것이다. 지금은 가뭇없어...그 기억도 아련하게.

철 없는 동급생들이 빨리 자라서 더이상 자신을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잠든 동생들을 들여다보면 (어미가 새끼들을 바라볼 때 가끔 그러하듯) 괜스러 가여워져서 눈물을 짓곤 하던,
엄마 아빠가 불쌍하니까 자살 같은 건 안 된다고 다짐하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세상에 물들어 뻔뻔한 포커페이스를 갖게 된 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더이상은 슬프거나 괴롭지 않게 단단히 다져진 내 속 어딘가에, 유년의 그 애가 있기는 한 것일까?

갑작스레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에게 시간여행이 허락된다면, 소설 따위는 훔치지 않을 것이다.
20년 전 나에게로 곧장 날아가서, 힘들어 하는 그애를 꼭 안아줄테다.
걱정 말라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시간이 지나면, 가슴 속 아프거나 슬픈 것들은 다 늙어 바스라질 거라고. 꼭, 말해줄테다.

포옹을 마치고 난 그 때라면, 더이상 성장소설을 읽으며 울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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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1-0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쓴 리뷰는, 참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도....그 과잉이 진짜 나겠지...싶어, 내버려둔다.

참, 리뷰 쓰고 있는 동안 자동 로그아웃이 되어, Ctrl+C 해 두지 않았으면 다 쓴 리뷰를 날려먹을 뻔 했다. 아찔~~~

책읽는나무 2004-11-0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의 야(夜)한 시간에 적는 리뷰가 더 땡기는게 왜일까요?..ㅎㅎ



저도 심윤경작가의 책을 무지 읽고 싶은데..나또한 이책들 앞에 작가의 싸인을 받고 싶은 욕심에 구입하기를 저어하고 있습니다요..ㅡ.ㅡ;;

나도 그때 마태우스님의 이벤트에 참가할껄? 후회하고 있습니다...ㅠ.ㅠ



님의 리뷰를 읽고 있자니..또 망설여지는군요..^^

잘 읽고 갑니다.^^.......님의 애틋한 마음에 추천한표!..^^

하얀마녀 2004-11-0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훔치고 싶다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미완성 2004-11-0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싶은 리뷰였어요..으흙 ㅜ_ㅜ

진/우맘 2004-11-0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님, 고마워요. 그런데 어쩌죠? 손수건에다 코 풀었는데.^^

마녀님> ^^ 정말, 훔치고 싶었어요.

책나무님> 달의 제단도 좋았지만, 요 책 앞에 서명을 받았다면 더 좋았을걸 그랬어요. 참, 이건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거예요.

마냐 2004-11-22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케, 이런 리뷰를 놓쳤답니까..저 말임다.......이게 야밤의 힘입니까, 리뷰 대상이 된 책의 힘임까...뒷북 추천은 열배로 안 쳐준답니까.

진/우맘 2004-11-2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놀러 갔다 와서 두루두루 제 서재를 살펴주시다니...흑흑, 감동입니다. 뒷북 추천은 스무 배로 쳐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LAST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4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냉혹한 사채업자의 제안에 다리가 오그라든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와 큰딸을 밤새도록 윤간하고 사창가에 팔아버리겠다고 한다. 그게 싫다면 자살로 보험금을 타던지.....그 섬뜩한 문장에 심하게 긴장한 근육은, 한동안 노력을 해도 힘이 빠지질 않았다.

막바지에 몰린 일곱 인생, LAST는 이렇게 심한 충격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반의 전율로 내성이 생기자, 이어지는 어지간한 사건에는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가계 파탄을 막기 위해 성매매를 택하지만, 변태도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LAST JOB의 경우는 도리어 핑크빛의 행복한 이야기로 느껴질 정도 였다.
모든 작품이 다양한 이야기 속에 일본의 현 주소를 신랄하게 보여주는데, 옮긴이의 말마따나 그것은 정말 남의 일 같질 않다.

이시다 이라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글을 써내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 시사프로그램의 한 토막을 떼어낸 듯 익숙한 소재건만, 그의 손을 거치자 숨 돌릴 틈 없이 재미있다. 재미? 궁지에 몰린 일곱 인간을 구경하는 것을 '재미'라 표현해도 된다면.

문득, 이 작품이 이시다 이라의 손에 의해 씌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무라카미 류 였다면? 더 충격적이고, 어질어질할만큼 리얼해서 일말의 역겨움을 피할 수 없었을것이다.
이시다 이라는 <일본의 현실>이라는 쓰디쓴 가루약을 매끈한 정제에 담아 독자에게 먹였다. 어차피 약효가 같을 거라면, 좀 더 넘기기 쉬운 편이 낫겠지. 이제, 뱃속에서 녹아 온 몸으로....과연, 두고두고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련지.
읽기는 수월했는데, 그냥 쉽게 잊혀질 것 같지가 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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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1-08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료하네요. 읽기는 수월했죠....근데, 그 여운이 넘 길고 독해서, 어찌할바 모르고 손톱만 깨무는, 그런 책이었던거 같습니다. 님의 리뷰, 제목도 정말 딱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