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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레이몬드 카버는 일상을 다루는 연금술사다. 그리고, 문장을 다루는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평범한 하루, 보잘것 없는 단어들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달라진다. 그냥 표면의 먼지를 털어내고 쓱쓱 문질러 빛을 낸 정도가 아니다. 그의 단편 속 일상과 문장들은, 원소배열 하나까지 속속들이 바뀐 듯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매력,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커버의 단편들을 거치면서 나의 '소설 읽는 법'이 조금은 바뀌었다. 소설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나는, 주로 그 '재미'를 결말에서 찾았다. 급박한 반전이나 포근한 해피 엔딩, 눈물을 실컷 쏟게하는 통렬한 비극...소설은, 멋진 결말과 그것을 끌어내기 위한 (부수적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있던 것 같다...라는 모호함은, 내가 그렇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카버의 단편들을 읽으며 소설 읽는 법이 바뀌기 이전에, 나에게 특정한 소설 읽는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러나, 카버의 소설에 내가 이전에 알던 결말은 없다. 어느 저녁, 어느 하루, 어느 한 달, 어느 한 계절....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인생의 한 토막을 대충 눈짐작으로 툭, 잘라내어, 그것을 글로 쓰면 소설이 되는 식이다. 보통 사람의 평이한 일상에 '소설같은' 결말은 없다. 신데렐라처럼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되는 아가씨도 없고, 알고보니 친한 친구가 범죄자였다는 반전도 없고, 급작스러운 불치병으로 병들어 죽는 아내도 없다. 일상은, 그리고 인생은 계속 그렇게 흘러갈 뿐.
부양해야 할 가족들의 하소연에 지친 가장은 거칠게 운전하는 동료의 차에 동승해 출근길을 내달리고(코끼리), 알콜 중독으로 치료소에 있는 한 남자는 전처(혹은 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집어들며(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는 제과점에서 빵을 씹으며(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이야기가 끝난다. 소설은 끝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다른 소설에서는 결말에 몰리는 재미가, 그의 단편들에서는 과정에 몰려있다고나 할까? 그 별반 색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와 주인공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 그렇게 동화되어 우리 모두의 평범한 삶 속에 숨은 비범한 찰나(가끔, 너무 빨라서 미처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를 느끼게 하는 그 힘이 바로 카버의 소설이 주는 '재미'이다. 그 재미는 어찌나 강렬한지, 무덤덤하게 열린 결말을 거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가슴에 진하게 각인되어 남는다.
레이몬드 카버가 훌륭한 문장을 쓰는 위대한 작가라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대체 그의 어떤 점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논리정연하게 정리할 재간이 없다. 다만, 그의 단편들은 요란한 결말 없이도 하나같이 재미있으며, 그의 문장들은 어려운 단어 없이도 살아숨쉬는 듯 명쾌하다고 느낄 뿐.
기억에 남지 않는다며 단편소설을 싫어하던 나에게, 그 참맛을 가르쳐 준 작가. 그에게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