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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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기 중에 갑자기 전학 온 아이.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거나, 딱히 내 주의를 끌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신경쓰이는 아이.
특출난 편도 아니건만 온몸에서 개성이 발산되어, 자꾸 나를 가져다 비교하게 만드는, 그리고는 씁쓸해지게 하는, 그런 아이.
'너에 대해 샅샅이 알아내고 말겠어! 뭔가 결점이 있을 거야. '하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지켜보게 되는, 그러면서 어이없게 자꾸 빠져드는, 미워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당혹감을 주는, 한 아이.

아멜리 노통은 나에게 그런 작가이다. 그녀의 어떤 점이 물렁한 내 속의 오기를 건드렸는지, 다른 책을 쌓아두고도 자꾸 그녀에게 집착하게 된다. 작가에게 이런 <애증>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다. (아니, 생각해보니 무라카미 류에게 비슷한 느낌을 가져본 것도 같고...)
그러한 도발도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기묘하고 강렬한 매력이다.

주인공인 플렉트뤼드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의 유아기를 거쳐 <사랑의 파괴>인 유년을 지난다. 주인공의 성격이 전작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하는 지적은, 어쩐지 노통 앞에서는 추레하고 소심하게 느껴진다. 글쓰는 것 밖에 할 줄 아는게 없어서 소설을 쓴다는 이 작가는, "그러면 어쩌라고? 아는 것을 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소설을 위해 모르는 사실을 꾸며대라는 건가?"라고 태연하게 되물어올 것만 같다.
그리고 사실, 그런 기시감이 작품을 읽는데 어떤 위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노통 소설의 여느 주인공과 별 다를 것이 없는 플렉트뤼드이지만, 앞머리에 위대한 탄생설화(?)까지 부여된 그녀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해서, 읽는 이가 딴청을 피울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그 엉뚱한 결말이라니. ㅋㅋㅋ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는 어엿한 부제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내가 둔감했던 것일까? 여하간, 그 둔감함 덕분에 결말은 내게 제법 유쾌한(?) 반전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더 읽어봐야 별 볼일이 없을거라고 주문처럼 되뇌이며 매번 책을 집어드는 나. 그런 나를 조롱하듯 노통은, 꼭 그만두지 못할 만큼의 매력, 기대를 접지 못할만큼의 새로움을 감질나게 보여준다.
그런 그녀가 너무 밉다. 미워하지만 이미 얼마간은 숭배에 가깝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당혹스럽다.

정말이지, 기묘하고 강렬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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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06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묘하고 강렬한 리뷰로군요. 아멜리 노통에 대한 솔직한 심사가...^^

진/우맘 2004-11-06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기로 깡으로 노통 전작주의...이제 적의 화장법과 앙테크리스타만 남은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4-11-0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서점에서 아멜리 노통의 책을 봤어요. 이젠 아멜리 노통하면 진/우맘부터 떠올라요. 진/우맘은 노통 파파라치..크하..

sweetmagic 2004-11-0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통..얄미워요 영악하고 민첩하고 교활하지요. 남들은 영민하고 천재라고 그러지만 전 이 시거방진 기집애가 싫어요. 앙테크리스타에서도 말이죠 허고많은 사진중에 자기 옛날 사진을 내 걸건 뭐랍니까 ? 그 사진이 꽤나 이쁘다고 생각하나보죠 ? 지금 모습보니까 팍삭 삭아서 별 볼일도 없드만... 하여간 독자를 이용해 먹을 줄 아는 재주하나는 탁월합니다. 쳇. 웃기네 그래 이번엔 얼마나 잘난 척했는지 두고 보자 하는 궁금증을 만들어내서 꼭 보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전 노통, 책 안사고 봅니다. 제가 뭐라도 된 양 까부는 꼴이 정말 보기 싫어요 흥 !! 이 기집애 뒤통수 한방 치고 싶지만 여자라서 봐줍니다. 흥 흥 흥 !! ------------ 웬 심술 모드람 ~ ㅠ.ㅠ;

진/우맘 2004-11-07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매직님도, 싫어싫어얄미워! 하지만, 어쩐지 끌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0^

복돌성님> 아멜리 노통 = 진/우맘이라....헤헤, 스스로 생각하기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은데.^^;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매일 오후 네 시, 당신의 집에 원하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온다면?"

아멜리 노통은 문득 떠오른 이런 질문에 치열하게 덤벼든 것이 아닐까? 그녀라면, 집요하고 명민한 그녀라면, 일상 속의 짧은 의문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 할 수 있을 성 싶다.

-조용한 전원생활을 즐기러 귀향한 주인공 부부에게 매일 오후 4시에서 6시, 불쾌하고 접대하기 힘든 불청객이 찾아온다.-
가끔 느끼는 바이지만, 어떤 종류의 '뛰어난 작품'들은, 그 줄거리를 요약해서 쓸 경우 비참할만치 초라해진다. 문장과 구성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탁월한 조미료가 뿌려져 있기 때문에, 그 내용만을 건져내면 마치 어항에서 건져올린 열대어처럼 보기 흉해지는 것이다. 노통의 책도 그러하다. 줄거리만으로는, 내 부실한 감상문으로는 이 책이 주는 느낌을 다 표현해내기가 벅차다.
사실, 에밀(주인공이다)이 베르나르댕씨(불청객이다)에게 적응해보려 장광설을 늘어놓는 즈음에서는 스티븐 킹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개연성이 부족한 상황에 미덥고 현란한 요설을 동원하여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이 스티븐 킹의 특기, 그라면 이 묘한 상황의 지루함을 숨막히는 스릴러물로 둔갑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베르나르댕씨의 부인이 등장하면서 작품은 노통 특유의 흡인력을 발산한다.

특이하지만, 놀랄만치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일상을 침범하는 이해하기 힘든 폭력(기실, 따지고 보면 폭력이라 이름붙이기도 모호한)이라는 점에서는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앙리 프레데릭 블랑)이 떠올랐고, 갑자기 나타나는 불쾌한 불청객이란 소재에서는 <소설을 훔친 남자>(스티븐 킹)가 연상되었다.
사실, '새롭다'라는 조미료가 빠지면, 아멜리 노통의 소설은 얼음을 넣지 않은 콜라 같아진다.
여전히 짜릿하지만, 이전에 접한 작품 중 일부처럼 "죽인다~"는 탄성이 절로 나올만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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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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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다>는 것은 참 끌어내기 힘든 결과다.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는, 생각컨데 쉽고 재미있는 것 보다 두 배는 힘들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제,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인데다 매우 독특하기까지 한 책을 한 권 만났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알라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탄성이 아니라면, 절/대 집어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수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무용담인냥 떠드는 일화 중 하나를 밝히자면, 백 점 만점에 5점도 받아본 일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의 수학은 내가 알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딱딱하고, 지루하고, 정확하며, 차가운'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박사가 사랑하는 수학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많은 여지를 품은 인간적인 것이다.
쓰다듬기 좋은 평평한 머리, 루트라니. 그 지긋지긋하던 기호가 이렇게 근사한 별칭이 될 줄이야...
서로의 약수의 합을 두고 마주 선 우애수, 자신의 약수의 합이 그 자신인 완전수, 박사가 그토록 사랑한 소수들의 변덕스러운 매력! 새로이 발견된 '수학'이, 외롭고 병든 노박사와 미혼모 파출부, 그의 아들이라는 묘한 가족 구성원 속에 부드럽게 스며있다. 수학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 그것은 일상 속에 노곤하고 흡족하게 녹아든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인물설정이 돋보인다.
교통사고로 47세에서 기억이 멈춰버린 노 박사. 80분 밖에 기억이 유지되지 않는 병. 수학과 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배후에 깔린 형수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까지.
나의 부족한 문장으로 펼쳐놓으니 도저히 한데 버무릴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되건만, 작가는 여유있고 부드럽게 모든 것을 소화해 냈다. 박사는 그렇게나 독특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웃집에 살고있을것만 같은 생생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그런 박사와 맞물리는 파출부와 루트 또한 더할 나위가 없다. 조금은 허무주의자 같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파출부, 또 조숙하고 명민한 그녀의 아들은 박사에게 운명지워진 우애수인 것처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맞아떨어진다.

휘몰아치듯 읽게 되거나 눈물을 펑펑 쏟을만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갓 나온 따끈한 식빵을 뜯어먹는 것처럼 수월하게 책장을 넘기고 나면, 어쩐지 뱃 속이 든든해지는...공기 중에 고소한 냄새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 그런 재미를 준다.
보드랍고 배부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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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1-0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보관함에 넣어 놓았는데.....다음 번에 사게 되면 진우맘님의 땡스 투를 눌러야지^^

진/우맘 2004-11-0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ㅣ ~~~
부~~자 되겠당.^^

숨은아이 2004-11-0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땡스투 세 번이나 눌렀어요~ 아니, 네 번짼가? ^______^ (책을 사야지 책을! --;) 그런데 보관함에 담으면 확인 창 뜨잖아요. 거기 "보관함 바로가기"에 "보관함 바로기기"라고 돼 있더군요. ㅋㅋ

진/우맘 2004-11-0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낮은 포복으로 기어야 할까요, 네 발로 기어야 할까요? ^^;;;

플레져 2004-11-10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빵같은 책! 추천추천~

파란여우 2004-11-1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축하....음.내가 추천한 책은 선택받는 사실을 잊지 마셔요.알라딘의 숨은 손(어머머....큭) 암튼, 연우가 감기까지 걸려서 울적해 하는 울 진우맘님! 리뷰에 당선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기운내고 나으 축하를 받아주오!!!!!!!^^

진/우맘 2004-11-1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그런 비밀이! 파란여우님, 고맙습니다!!

플레져님, 고마워요.^^

기다림으로 2004-11-1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이 기세를 몰아서 남은 2004년이 즐겁게 끝맺음되시길 바랄께요. 음..네, 이상 축하인사였습니다. (^^)(__)(^^)v

진/우맘 2004-11-12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기다림으로님! ^^

비연 2004-11-13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 리뷰 당선...축하드려요~^^

진/우맘 2004-11-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비연님^^

책읽는나무 2004-11-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어머 어머~~

진우맘님..드디어 타셨군요...??

타다니?....당첨?....뽑히셨군요..^^

서재질을 잠시 쉬엄쉬엄 했더니 언어표현력 또한 낮아지네요..이론~~

암튼..축하드려요..^^

알라딘에선 왜 진우맘님을 항상 제외시키는지 의아스럽더니만..^^

축하해요..^^


진/우맘 2004-11-1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고마워용~~~
 
풍뎅이 동쓰의 즐거운 꽃밭 느림보 동화 5
손정혜 지음, 김복태 그림 / 느림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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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참 나빠요.
수학문제 잘 푸는 어린이는 금방 알아보면서, 시들어 가는 화분에 물을 주는 착한 마음은 잘 알아보질 못해요. "누가 교실 바닥에 물 흘렸니!"하고 야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요.
어른들은 참 나빠요.
구구단 잘 외우는 것은 칭찬해 주면서, 동물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해요. 아침 등교길에 집 없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자꾸 돌아보다간, 지각했다고 혼쭐이 나기 십상일걸요.

사실은 나예요.
그 나쁜 어른이, 나예요. 왜 나는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요? 길 가에서 이야기를 걸어 오던 꽃 이파리를, 억울하게 야단 맞고 슬펐던 일을, 그래서 마음붙이던 비밀 장소를... 
그런데, 이제 조금은 기억이 날 것 같아요. 풍뎅이 동쓰와 정혜의 이야기를 읽고 나자, 봄 흙에서 새싹이 돋든듯, 어린시절의 고 마음들이 비죽비죽 고개를 들지 뭐예요?

작가는 참 재치 있는 입담을 가졌어요. 동쓰에게 못되게 굴던 그 꽃삽아줌마, ㅋㅋ, 복실이가 한밤에 와서 커다란 똥 덩이를 하나 싸주었지 뭐예요?
참 예쁜 눈도 가졌어요. <들어가지 마시오> 표지판 위에서 동동거리는 참새는, 아저씨 힘들까봐 어깨를 주물러 주는거래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근~조근 보드라운 목소리의 소유자예요. 에이, 책에서 무슨 목소리가 들리냐구요? 한 번 읽어봐요. 그럼, 그런 말 못할걸요? 난 예전에 <신기한 eye 여행>의 짤막한 글에서부터 진작에 눈치 챘다구요.^^

딸아이가 얼른 자라면 좋겠어요. 욕심 부려 일 이년 쯤 후면, 이 책을 혼자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그 전엔, 잠자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줄거예요.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보다, "내 다리 내놔라~"하는 무서운 이야기보다, 풍뎅이 동쓰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왜냐면, 엄마가 먼저 이 이야기를 읽고, 퍼석했던 마음에 새싹 몇 개를 갖게 되었거든요. 조금은 보드라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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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1-0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열 네 살로, 오늘은 일고여덟 살로,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4teen_포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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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열 세 살 무렵까지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다. 생활기록부에 '교우 관계의 폭이 좁다.'고 기록되던, 새학년이 되면 도시락을 같이 먹을 단짝 하나 구하는 것이 굉장히 피곤한 일이던...그런 아이.
그러던 내가 평생지기가 될 친구들을 만나고, 성격 또한 180도로 바뀐 것은 열 다섯 살 때였다. 열 다섯 살의 나는 친구들의 고민상담과 연애편지 대필, 수정에 하루가 짧던 바쁜 아이였다.
그렇다면, 열 네 살은?
열 네 살의 나는 어땠지? 급격한 변화가 열 네 살을 지나가며 이루어졌다는 결론이 나오건만, --------- OFF. 암전. 다시 태어나기 위한 치열함이 벅찼던 것일까? 피곤하고 힘들었던 열 세 살도, 즐겁고 유쾌했던 열 다섯 살도 생생한데, 유독 열 네 살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때의 나는, 도대체 어떤 아이였을까?

각설하고.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나는, 열 네 살, 그 무렵의 남자아이들이 싫다.
출근길 마을버스에 바글바글 들어 찬 중학생 소년들은 불균형, 혹은 어떤 부조리의 표상들 같아 보인다. 아직 어린 몸에서 겉도는 양복 스타일의 교복, 잘 씻지 않기 때문인지, 요동치는 호르몬 때문인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체취, 입만 열면 게임 얘기, 뇌 전부를 컴퓨터 하드웨어에 심어 놓고 온 듯한 그들의 대화.
하긴, 만원의 마을버스 안에 몰아 넣으면 소년 아닌 그 어떤 존재도 그리 매력적으로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어리지도 않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시기의 그들에게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정말, 각설하고.

여기, 괜찮은 네 녀석이 있다. 조로증으로 입원한 친구녀석을 위해 원조교제 하는 소녀를 선물하는 것이 '괜찮은' 일이라면. 아, 맞다. 그 녀석들은 폭력서클에 잘못 빠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한데 뭉쳤지 않은가? 의리 있는, 괜찮은 녀석, 맞다.
게다가 더 이상 완벽할 수가 없는 구성이다. 뚱보, 비실이, 뿔테 안경의 똑똑이에 '평범한' 화자까지. 이제껏 봐 왔던 책, 영화, 어린이 드라마에서 수 없이 되풀이되었던 진부한 구성이 전혀 지겹지 않고 신선하기만 한 것은 왜일까?
아마도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열 네 살의 평범한(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닥 평범하지만은 않은) 일상은 묘한 흡인력이 있어서, 순간순간 독자를 자신의 열 네 살로 끌어내린다. 
열 네 살의 그들과 나는 실상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지고 혼란스러워 한다. 그들 나이의 두 배가 넘는 나. 나는 그 의문들을 모두 해결했나? 그 혼란들을 다 정리했나? ------- NO.
그 의문과 혼란은 해결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들과 항상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 졌을 뿐.

열 네 살, 그들은 순수하다. 포르노 잡지를 달고 살고, 유부녀와 바람이 날 뻔, 동급생과 섹스를 할 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순수하고 정의롭다.
'웃음, 눈물, 감동과 재미' 진부한 영화의 선전문구처럼 모든 것을 겸비한 그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을 일깨운다. 그리고 책을 덮은 순간, 내겐 불가해하고 매력 없던 열 넷이, 4teen, 마법의 숫자로 변모했다.

버스 안의 소년들도, 식별 불가한 교복 깃 그 안에 생생하게 날뛰는 가슴을 가졌다고 믿고 싶어진다.  

암전상태였던 나의 열 네 살, 그 때의 나도 이토록이나 생생하게 날뛰는 가슴을 가졌다고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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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2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1-02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4-11-03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신기해요.......4teen의 마이리뷰들은 다 멋지구리해요. 책이 어떤 바이러스를 전염시킨건가?....쪽팔리지만, 저두 가끔 제 리뷰 돌아보면..어, 이건 정말 꽝이네, 혹은 괜찮군..하는게 있는데...4teen 리뷰가 그래요...마음에 드는 거.....근데 정말 다들 유난히 이 책 리뷰는 반짝거린다니까요..............그나저나..댓글(2)라고 나오는데...제 눈엔 안보이니..이건 속삭도 카운트한건가요, 혹은 다른 에러?

진/우맘 2004-11-0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속닥거린 분이 두 분 계십니다요.^^
속닥님2> 고맙습니다. 부끄럽사와요.^^
속닥님1> 내가 볼 때는, 매우 좋은 현상 같은데요? 다음에 만나면 진지하게 논의(?)해 볼까요?^^

뎅구르르르~~ 2004-11-0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그시절을 기억 못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구만.

중학교 1학년때가 나도 암흑의 시절이었던듯.. 무슨일인지 친구들이고 선생님이고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아. 뭔가 방방 것도는 느낌. ;;;



첫 수학 수업.. 모두들 교집합, 공집합.. 이런걸 배우잖아.

무시무시하게도 난 그 정확한 원리를 고등학교 1학년때 깨우쳤다우.. ㅡㅡ;;;;

진/우맘 2004-11-1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뎅굴양, 일곱 살에 학교 간 이 언니는, 열 넷에 중2였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