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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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먼저 쓴 편지)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 退

 

(기대승이 이황에게 보냄)

() 삼가 건강이 어떠신지 여쭙습니다. 그리운 마음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근근히 지내고 있습니다.

병도 다 낫지 않았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면신례를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치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여러 사람의 핍박을 면할 수 없어서 무턱대고 나아가 일을 마쳤습니다. 이는 곧 저의 식견이 높지 않은 허물 때문이니 다시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이런 사건에서 세상 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사람들의 놀림과 배척을 면하지 못하고, 끝내 몸이 위태로워지거나 뜻을 억눌러야 하는 데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선생님께서 제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십시오.

저는 늘 말하기를,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했습니다. 이 말의 뜻이 어떻습니까? 제가 드린 말씀을 살펴서 비판해 주시기 바랍니다. -- 조언을 구하는 부분

평생 우러르며 그리워했는데, 단지 두 번 뵙자마자 곧 서둘러 이별했습니다. 그리하여 제비와 기러기가 오가는 것처럼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제가 근심하고 선생님을 깊이 그리워함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종이를 대하니 아득해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다시 올립니다.

8월 보름, 후학 대승이 머리를 숙입니다. 기운이 약해 간신히 썼습니다. 두렵고도 부끄럽습니다.

 

 

() 기정자 명언에게 답하는 글 (이황이 기대승에게)

이른 봄에 편지 한 통을 멀리 남쪽의 인편에 부친 다음 곧 동쪽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서울 소식도 자주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호남은 천리 밖에 있으니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그사이 그대가 서울로 왔음을 물어 알고서 편지를 적어 나의 뜻을 전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대는 바야흐로 신임 관리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릇 벼슬에 나아가고 들어가는 거취는 마땅히 스스로 결정해야지, 내가 남을 위해 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또한 남이 나와 함께 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호강후(胡康候)의 견해는 뛰어나서 본받을 만합니다. 다만 평소에 이치에 정밀하지 못하고 의지가 굳지 않으면, 스스로의 결정이 혹시 시대의 도리에 어둡거나 또는 바람과 그리움이 앞서게 되어, 그 마땅함을 잃을 뿐이라는 점이 걱정입니다.

그대는 편지에서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이 말은 진실로 간절하고 지극한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제가 헤아려 보건대, 그대의 높은 학문은 크고 넓은 점에서는 볼 만한 것이 있으나 세밀하고 오묘한 정수를 꿰뚫지는 못했으며, 마음을 두고 행동을 다스림에 있어서 사방으로 터져 자유로운 면에서는 얻은 것이 많으나 오히려 몸과 마음을 거두어 들여 굳히는 공부는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말이나 글은 뛰어나지만 더러 들쭉날쭉 모순되는 병페를 면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위한 계획이 비록 보통 사람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나 오히려 여기에 두었다 저기에 두었다 하고,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는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큰 일을 맡아서 큰 이름을 걸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처신하자면 어찌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종이를 앞에 두니 마음에 불안해 글이 잘 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춥고 얼음 어는 철입니다. 시대를 위해 자신을 소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거듭 삼가 절하며 아룁니다.

기미 1024, 병자 황이 절합니다.

제 편지에 환란을 염려하는 말이 별 까닭도 없이 많은 듯하지만, 늙은이가 세상일을 겪은 날이 많기에 자연히 염려가 이에 미쳤으니, 괴이쩍게 여기지 말기를 바라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일은 평생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공부해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것인데, 첫발을 내디디면서부터 헛된 명성이 먼저 세상에 퍼진다면,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늘 생기는 환란이니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이처럼 말할 수 있지만, 그대가 권력을 잡고 우뚝하게 드러난 날에는 벼슬도 없는 제가 이런 한가로운 말로 편지를 주고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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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 - 작가 55인의 은밀한 독서 편력
패멀라 폴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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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책이 다 있담,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읽고 있는 중이라서 꼼꼼한 리뷰는 못 쓸 것이다. (뭐 언제는 완독한 책의 리뷰를 꼼꼼하게 썼다고)

하필 이렇게 바쁜 시국에 내 눈에 들어 오다니 ( 눈앞에 산적한 탑처럼 쌓인 그것을 피해 도피처를 찾아 눈을 휘번덕거린게지), 하기는 비슷한 류의 책을 많이 갖고 있어서,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의 집, 작가의 방과 같은 류-  봤어도 눈에 안 들어왔을 수도 있다. 저기서 나온 작가가 여기서 나올 것이고, 아마도 인터뷰이의 질문 의도 방식에 따라 답변이 달랐을수야 있겠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을테니까.... 하고 보니, 옮긴이가 정혜윤이다. (아아아.... 그래서 내가 곁눈으로 책 표지를 보고 흘렸나보다. 전에....)  정혜윤 작가?피디? 아..님.. 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한 10년에 침대와 책 이런 책을 정말 좋아했던 내가 맞나... ) 이 작가는 그 피디님이 아니었다. 다른 정혜윤 번역자 님.

 

그런데 이 책은 작가들 본인의 독서 습관과 성향을 묻는 것이니까, 완전히 다르다거나 에두르지 않고, 독서라는 장르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간 주제라고 봐도 되겠다. 게다가 선정한 작가들도 이언 메큐언 같은 대작가 두엇만 중복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대다수가 모르겠거나 다른 분 서재에서 이름만 걸출하게 들어봤거나 한 사람들이다. 특히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썼다는 캐서린 부나  빵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는 고요한 삶을 쓴 애너 퀸들런, 저주받은 사람들을 썼다는 조이스 캐럴 오츠 등은 인터뷰 내용만 보고 반해 버렸다. 세상엔 여성 위인이 적다지만 작가군에서는 꽤 되는 듯도 하다. 황금방울새를 썼다는 도나 타트 라는 작가도 좀 달라 보인다. 피하는 이야기 종류는요? 라는 질문에 저는 이 시대의 미국에 관한 리얼리즘 소설에는 관심이 없어요. 결혼, 자녀 양육, 도시 근교에 사는 이야기, 이혼, 뭐 그런 것들 말이지요. 왓.우.

도로시 파커의 작품을 읽으며 눈물날 정도로 웃었다는 작가도 있는데, 당최 검색이 안 된다. 도시 파커라는 작가는...( 내가 몰랐던 그러나 읽고 싶은 작가와 책의 목록이 엄청 불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음)

 

 알랭 보통이 어릴 적에 독서보다는 레고를 취미로 갖는 비문학적인 소년이었다는 데에 실낱같은 희망을 느끼는 나라는 사람은 뭔가! ( 책과 안 친한 우리 둘째 아직은 안심을 해도 되는 건가요?)

목차를 보니, 재미 작가도 있다. 영원한 이방인의 그 이창래다. 우아! (뿌리는 토착 환경에서 내리지 않았기에, 그를 한국인이라 볼 수야 없겟지만ㅠ)

 

작가들에게 나가는 질문은 80프로가 고정 질문이고, 작가군(역사 계열이냐, 추리 계열이거나 과학 에세이를 쓰는 (동물학자) 부류냐,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특수하냐) 에 따라 특별한 질문이 나간다. 고정 질문 중에 우문 같았던 질문 " 웃게 하는 책이 더 좋으세요, 울게 하는 책이 더 좋으세요? 교훈적인 책과 낯선 곳으로 데려가주는 책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시나요?  " 대부분의 작가가 현답을 하는데, 그 대답을 듣고 보니, 그 질문이 우문(웃음과 눈물과 감동과 교훈은 대개 좋은 책 한 권에 다 들어 있으므로)만 은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또한 실망스럽거나, 과대평가되었거나, 신통치 않은, 좋아해야 마땅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안았던 책이 있냐는 물음에 열이면 둘 정도의 작가만 이 질문에 대답하고, 대부분 요리조리 취권을 부리듯 작가는 언급하지 않고 질문의 핵심에는 충실하게 답변하는 묘술을 발휘해 피해감. 그러나 대답했던 이들 중에 한낮의 우울을 쓴 앤드류 솔로몬이 있었는데 올리버 색스 (다행인지, 뭔지 그이는 2년전 고인이 되었네)를 이야기했다. 그가 아주 유려하게 글을 쓰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살짝 무대 감독 같은 허세가 있다는 것이다. "이봐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잠시 멈추고 이것 좀 보라고요!" 하는 논조가 깔려 있다고 한다. 그런 관음증적인 정서없이도 의료 행위의 엄격함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아 그럴 것도 같지만, 그런 지점들 때문에 뭇독자들은 올리버색스를 읽는지도. 무엇보다 두 작가 모두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공통점 아닌 공통점.  

 

또하나 발견한 작가들의 공통점 '종이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전자책도 보편적으로 많이 본다는 사실. 이게 나는 왜 놀라울까?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앤 라모트(작동 설명서, 글쓰기 수업 등 국내 번역 안 된 책이 대다수인 듯) : 오후에는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책을 읽으며 보내는 걸 좋아합니다. 현실이 그 추한 머리를 들이밀 때까지는 말이지요. 낮 시간에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서 책을 읽는데, 이때는 주로 논픽션이나 <뉴요커>를 읽어요. 그리고 열한시까지는 잠자리에 들어서 한 시간가량 책을 읽다가 자는데, 그때는 주로 소설을 읽지요. ...한 번에 여러 종류의 글을 읽는 건 말하자면 즐거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과 같아요.

 

 

 

지금까지 독자에게 받은 편지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가 있다면요? 어떤 이유로 그 편지가 특별한가요?

한 이탈리아 독자가 자기가 아내를 만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는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어요. 아내가 버스에서 제 책 중 하나를 읽고 있었는데, 자신이 이제 막 다 읽은 책이더랍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서로 만나기 시작했죠. 지금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셋이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존재가 그들 부모의 책에 대한 사랑 덕분이었을지 궁금해지더군요.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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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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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글쓰기 슬럼프는 있어도 독서 슬럼프는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책을 읽고 난 후에 부산물을 염두에 두고 하는 목적 지향적인 독서가 아니라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독서의 동인이 되어야 슬럼프 없이 오래 읽을 수 있나 보다.

 

본인 책에서 말하기를 좋은 책은 책의 3분의 2 지점을 훑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지점이 필력이 떨어질 즈음이라서...

 

이  책의 3분의 2지점을 옮겨 오면...

 

146쪽

책을 읽는 진정한 가치를 좀 다르게 표현하면, 책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거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읽을 때 저자의 세계 전체와 상대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독서 행위의 정말 중요한 가치는 '이 사람이 한 권의 책에서 구현해낸 엄청난 세계를 내가 어떻게 빨리 습득하느냐'가 아니죠. '이 책은 저렇게 말하는데 나는 이렇지'하고 자기 반성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핵심이 아니죠.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두 세계 사이의 교직에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기 성찰과 반성을 위해서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깊은 방식일 수 있지만 그 역시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핵심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다는 거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만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을 함께 흘려 보내는 식으로 만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좋은 삶은 뭐겠어요. 시간을 흘려 보내는 삶, 시간 속에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잘 선택하는 삶, 그것이 좋은 삶이잖아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습관이라는 것도 시간을 경영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면, 시간을 흘려 보내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검증된, 유쾌한, 훌륭한 방식 중 하나가 책 읽기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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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락시아 2017-10-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 사색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지 얼마 안되어서 반가워 댓글 남겨요.^^

icaru 2017-10-11 19:05   좋아요 0 | URL
네~말씀이 맞습니다!! 전투마법사 님 굉장히 오랜만에 댓글로 뵙는 것 같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책 리뷰 올리신 거 보고 반가웠는데 저도... 그 책 얼마전에 봤더래서요~
책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는 것에도 공감하고요~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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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책에서도 나온다. 훌륭한 책은 반드시 서문이 좋다는 것. 그러면서 이 책의 서문을 예시로 들고 있다. 본문 전체의 맥락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면서 그 자체로 힘 있는 멋진 글. 

 

머리말

 

나는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었으면 하는 유혹에 빠질 만큼 스스로를 대단한 인간이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의 세대에 보통 주어지는 갖가지 사건들, 파국, 시련보다 한없이 더 많은 사건들을 겪게 되고서야,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중심부에 내세워 책 한 권을 써 보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중략)

사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이다.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어떠한 세대도 경험해 본 바 없는 그런 운명을 견뎌낸 우리 세대의 운명 말이다.

 

 

영원한 청춘의 도시 파리(158~159쪽)

 

파리 인상파 화가들의 생활은 외견상으로는 소시민이나 연금 생활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집은 증축한, 아틀리에를 가진 작은 집 같은 것으로, 뮌헨에서 렌바하나 다른 유명 화가들이 화화 별장에서 남에게 보이려고 만든 듯한, 모방한 사치스러운 그런 설비는 아니었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얼마 안 있어 개인적으로 친하게 된 시인들도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거의 실제로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작은 정부 관리직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최저 지위의 사람으로부터 최고 지위의 사람에까지 뚜렷이 보이는 정신적인 일에 대한 높은 존경이 수년 전부터 높은 수입을 얻지 못하는 시인과 작가에게 눈에 띄지 않는 한직을 주는 현명한 방법을 채택하게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해군성이나 상원의 부속 도서관 사서로 임명되었다. 이것으로 얼마간의 월급이 주어졌으나 일은 없었다. 상원 의원은 아주 드물게만 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행스러운 직장의 소유자는 훌륭한 양식의 오래된 상원 건물에서 뤽상부르 공원이 바라보이는 창문 앞에 조용하고 쾌적하게 앉아서, 집무 시간 중에도 조금도 원고료 생각을 할 필요 없이 시를 쓸 수가 있었다. 이 얼마 안 되는 안정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훗날 듀아멜과 듀르탕처럼 의사였다든지, 샤를 빌드라크처럼 작은 화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 로맹이나 장 리샤르 블로크처럼 김나지움의 교사이기도 하고, 폴 발레리처럼 몇 시간을 통신사에 앉아 지내는 사람도 있었고, 출판사에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중의 아무도, 영화나 많은 판매 부수로 버릇없게 되고, 최초의 예술적인 인기에 기고만장하여 곧 독립하여 살려고 하는 그들의 후배들처럼 오만하지는 않았다. 이 시인들이 그들의 작고 야심 같은 건 전혀 없는 직업에서 얻으려고 한 것은, 내면적인 작업에 대한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외면적인 생활의 조그만 안정뿐이었다. 이 소박한 안정 덕분으로 그들은 부패한 파리의 대 일간 신문들을 경멸하며 그냥 지나쳐 갈 수 있었고, 개인의 희생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는 그들의 작은 잡지에 원고료 없이 글을 썼다. ...언제나 도와주고 충고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성실함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데가 있었으며, 시계 장치처럼 어김없던 그는, 다른 사람에 관한 모든 일에 신경을 썼지만, 절대로 자신의 개인적 이득에 신경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만약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시간 같은  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돈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참 이 책 맨 앞에는 유서도 있다. 사실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를 60세에 아내와 동반 자살을 한 일로 그가 평생 펴낸 저작들보다 먼저 만나고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으니, 그도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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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7-11-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엄청 좋아하는 책! ^^

icaru 2017-12-04 16:07   좋아요 0 | URL
오오 역시 수준이 높으셩... 저는 범접 못하겠더라고요~ 여러번 읽어야 마땅한 듯 합니당 ㅎㅎ

북극곰 2017-12-11 11:36   좋아요 0 | URL
힝... 무슨 말씀이십니꽈. ㅜ.ㅜ 이해와 통찰과 상관없이 그냥 좋은 책은 좋다고 느껴지는 거? 같은 거?? 라는 거죠. ㅎㅎ
 
일하지 않을 권리 -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 동녘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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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사적 계획이 우리 존재를 규정한다. 직업, 결혼, 여가 시간의 관심사, 자녀, 재산에 관한 계획이 우리를 앞질러 달린다. 그러나 때로 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길을 건너고 표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예측 가능한 여정과 너무 정확한 지도의 모습, 어제 지나온 길과 오늘 걸을 길이 상당히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걸음을 방해한다. 이게 정말 내 인생이 나갈 길일까? 어째서 매일의 여정이 지루함, 타성, 판에 박힌 느낌을 안겨 주는 걸까? -코헨, 테일러, <도피 시도>


대다수에게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선택이며, 적게 일하기는 언제든 실행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다. 주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부풀어 오르면, 다들 보다 익숙한 도피 전략에 의존한다. 그러나 일시적 도피를 보다 영구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 또다른 소비주의로의 도피는 지속적 소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불행을 유발하고 단절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격차였다. 해법을 찾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누구든 원하는 일을 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더 행복을 느낀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이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해법을 일상 속에서 실현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자기를 위해 꾸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사랑하는 이와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출을 볼 기회가 얼마나 적은지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일과 여가의 혼합으로서의 자발적인 바다거북 보호 활동>


일에 대한 저항을 지켜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첫째, 소득 의존성을 기꺼이 줄일 수 있는 방법, 일 중심 사회에서 일에 대한 저항이 유발하는 낙인 및 고립감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데 사용할 만한 전략. 나는 그런 전략으로 틈틈히 육아의 세계로 도피를 택했다. 육아서를 읽는 일, 육아 일기를 쓰는 일. 물론 진정한 육아의 세계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현장에 있는 것이나,,, 나의 주업은 그게 못 되니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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