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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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돌


슬픔은 주머니 속 깊이 넣어 둔 뾰족한 돌멩이와 같다.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당신은 이따금 그것을 꺼내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을 때라도.



때로 그것이 너무 무거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힘들 때는

가까운 친구에게 잠시 맡기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머니에서

그 돌멩이를 꺼내는 것이 더 쉬워지리라.

전처럼 무겁지도 않으리라.



이제 당신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때로는 낯선 사람에게까지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돌멩이를 꺼내 보고 놀라게 되리라.

그것이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손길과 눈물로

그 모서리가 둥글어졌을 테니까.





작자 미상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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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 노트 Death Note 1
오바 츠구미 지음, 오바타 다케시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요 근래 본 최고의 작품.

'고스트 바둑왕' 작가의 신작으로 전작의 명성을 이어가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따분함'에서 시작된 사신의 장난이 인간계의 놀라운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사신은 인간계에 '데스 노트'를 떨어뜨리게 되고 천재소년 '라이토'는 우연히 그것을 줍게 된다. '데스 노트'는 누군가의 이름을(반드시 본명이어야 함) 쓰고, 사망원인과 일시를 쓰게 되면 그 사람이 그대로 죽게 되는 신비의 노트이다.

다만 이 노트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규칙이란 죽일 사람의 '얼굴'과 '본명'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죽음을 집행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중요한 규칙들이 많이 있는데 '라이토'는 이 규칙들을 놀랍고도 교묘하게 활용하며 세상에 '죽음'의 형벌을 내린다. 실로 그는 '데스 노트'를 이용해서 엄청난 살육을 하게 되고 그러한 살육의 근간에는 그만의 독특한 정당화가 있다. 그가 죽인 모든 이들은 '강력범죄자'들이었으며 그러한 쓰레기의 정화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심장사가 세계 곳곳에서 연일 터지지만 단 하나의 진리는 존재했으니 바로 죄를 짓지 않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로서 그의 살인에 '신'적인 자기합리화를 부여하고 '신세계'를 만들기 위한 '정화'를 계속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그러한 범죄를 간파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천재 탐정 'L'이었다. L은 세계가 위협에 빠져있을 때마다 암암리에 활약을 해온 명탐정으로 누구도 그가 누군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껏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부터 세계를 구해왔으며 단 한번의 실패도 없었다. L은 일련의 범죄자 심장사는 분명 누군가 한 사람의 단독 범행이라는 것을 추리해내기에 이르고 마침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마를 - 통상 '키라'라고 불리우는 -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그는 '키라'야 말로 절대 악이라고 규정하며 메스컴의 공개방송을 통해 반드시 키라의 정체를 밝혀내어 그를 사형대에 세우겠노라고 장담한다.

격분한 라이토는 메스컴 발표를 하고 있는 그의 얼굴과 이름을 확인한 후 '데스 노트'로 처단한다. 생방송을 하던 그는 곧바로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는 사실 진짜 L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끼였다. 죽은 이는 L을 연기한 '사형수'였고 전세계에 생방송된 듯한 그 방송은 사실 일본의 관동 지방에만 방송되었던 것이고 이로서 '키라'는 일본의 관동지방에 사는 누군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L은 목소리만 방송으로 내보내며 '키라'를 향해 진짜 L을 죽여보라고 말하지만 라이토로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로서 L은 '키라'가 분명 사람을 죽이기 위해선 '얼굴'과 '이름'을 알아야만 가능하다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하게 된다. 이때부터 두 천재의 놀라운 두뇌게임은 시작된다. 불리할 것만 같던 L은 천재적인 두뇌플레이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연쇄 살인마 '키라'의 정체를 상당히 좁혀가고, 라이토 역시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L을 처단하기 위해 천재적인 두뇌플레이를 보이며 그에게 서서히 접근해간다. 이들의 승부는 한치앞도 알 수 없을 만큼 피를 말리는 명승부이다.


치밀한 스토리와 탄탄한 구성 허를 찌르는 반전의 연속으로 무장한 이 작품은 다음 장면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놀라운 재미와 강렬하게 빠져드는 흡입력을 제공한다. 세세히 따진다면 이런 설정이 아주 새로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엄청난 '스토리의 힘'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서는 '스토리의 힘'이 곧 신선함이요 새로운 자극임을 부정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스토리를 생각해내는 작가의 천재성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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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품절


슬픔에 빠진 나를 본 순간
그 여자는 내 곁에 머물고 싶어했지.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쓰고 있었다네.
이미 그녀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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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물밑에서
스즈키 코지 지음, 윤덕주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본 영화지만 리뷰를 지금에서야 올리네요~


이 영화는 특히 주연 여배우 구로키 히토미(천리안에서 무척 카리스마 있게 등장한 여배우)의 살아있는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천리안때부터 제가 좋아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사실 굉장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잘하고~~ 나이가 40대인데 굉장히 어려 보이는 얼굴이며~~ 게다가 모델 출신인지 키도 엄청 크더군요~~
더불어서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거론해 보자면 딸 이쿠코 역, 귀신 미츠코 역 두 꼬마 애들 모두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이쿠코 역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꼬마 여자애였는데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좋은 연기란 튀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캐릭터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연기를 하고 있다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연기가 정말 좋은 연기지요)
그리고 미츠코 역을 맡은 여자애 역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귀신 꼬마애 하니 생각나는데 작년에 개봉된 한국 공포영화 '폰'에서도 귀신들인 꼬마애가 한명 나오죠. 미츠코는 극중에서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합니다.(마지막에 딱 한마디 하는데 굉장히 오싹하면서도 왠지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카리스마란 굉장했습니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폰의 여자애는 굉장히 오버를 하며 나 무섭지,를 강조했었지만 조용한 미츠코가 정색을 하고 눈이라도 한번 흘기면 기겁을 하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아역들의 능력 보다는 전적으로 감독의 능력이라고 해야겠지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스즈키 코지의 동명 소설 '어두컴컴한 물밑에서'를 '링'의 명콤비 나카다 히데오 감독이 영화화 한 것이지요. 그래서 굉장히 궁합이 잘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즈키 코지의 소설을 가장 영화로 잘 옮기는 사람이 나카다 히데오 일 것입니다.

또한 히데오 감독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호러계의 대가 입니다.(이미 헐리웃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왔다지요~)

검은 물밑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괴담이야기 입니다. 식스센스처럼 기막힌 반전도, 링 처럼 기발한 스토리 전개도, 큐브 처럼 번득이는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실종된 소녀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단순한 귀신 이야기에 불과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스토리를 가지고 흥미롭게 이끌어 나가는 능력이야 말로 감독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쾅쾅 울리는 사운드는 거의 없습니다. 조용히 물 흐르듯이 흐르는 소름끼치는 배경 음악 위로 열린 문틈, 좁은 엘리베이터, 혹은 비오는 거리 등에서 슬그머니 스쳐 지나가는 유령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카다 히데오 감독은 인간이 어느 순간 진짜로 손에 땀이 나고 등골이 오싹해 지는지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듯 해보였습니다. 주변의 소리와 일상의 사건들을 조합해서 미궁같은 두려움을 서서히 뽑아냅니다. 관객들이 어느 순간 긴장감이 극대치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는 바로 그 순간에 상상 속에서 거대하게 부풀려진 공포의 실체를 단 한번 터트리며 결정타를 날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짜집기 스토리에 사운드의 기교로만 얼룩진 국내 호러물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좀 밋밋할 수도 있겠지요~

공포란 뭔가 거대하고 흉포한 인상을 풍길때 오히려 비대하게만 느껴지는 법이지요. 그래 저거 정말 공포영화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 이미 그것은 공포가 될 수 없습니다. 나 귀신이야, 하는 느낌이 팍 들게 되면 그 순간 긴장감도 팍 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누구라도 일상 속에서 경험 해 보았음직한, 이를테면 한 밤중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을 때,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는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진정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공포도 일상의 세심한 관찰과 인간 심리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가 필수적인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외국의 거대 슬래셔 무비만을 쫓다가는(혹은 성공한 유령영화들의 모티브를 흉내내려고만 하다가는) 매니아들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요~!

이 영화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불행과 그것이 아파트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어떤 식으로 참담한 비극을 그려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이 공포는 동떨어진 세계의 악마나 살인마 따위가 아니라 조용한 아파트(너무나 조용해 인적이 거의 끊긴듯한)가 어느 순간 위령제를 치루어야 할 지옥의 온상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악몽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공포감은 우리들의 불안한 영혼 깊숙이까지 스며들수 밖에 없는 진짜 공포가 되는 것이지요~~

이쯤에서 결론 짓도록 하지요.

저는 검은 물밑에서에 별 네개 정도를 주고 싶습니다. '링' 같은 불멸의 걸작은 아니더라도 탄탄한 구성과 적절한 공포연출이 잘 조화를 이룬 꽤나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검은 물밑에서는 헐리웃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완벽한 일본 적인 공포라는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유령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식스센스'나 '디아더스'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며 귀신영화의 교과서인 '엑소시스트'를 흉내내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이는 탄탄한 원작 스토리가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지만 감독만의 독보적인 공포철학이 확고하였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겠지요. 역시 대가 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가 거의 없었지요. 있다고 한들 앞으로도 물을 소재로 이만큼 잘 만든 공포영화는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네요. 무섭고 감동적이며 긴 여운을 주는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였습니다.

(끝으로 몇 마디 더, 영화는 원작 소설과는 다른 면이 많습니다. 그러니 소설과 영화를 모두 보시는 것이 좋을 듯싶네요~~~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쾅, 하고 물이 쏟아지는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명장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영화가 슬프면서도 암담한 느낌의 공포감 때문에 오랫동안 가슴 한 쪽이 먹먹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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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1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영화 보았는데요.
무섭기도 하면서 몹시 슬프고 그랬습니다.
심장이 깜짝 깜짝 내려 앉을 정도로 놀라는 장면은 없었습니다만...

교수님의 리스트와 서평 대단하고 멋지시네요.
전 호러물중엔 특별히 뱀파이어류 ^^; 만 좋아해서 입맛은 좀 짧은 편입니다.

또 구경 오겠습니다.
^^

살인교수 2005-08-1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멋진 영화죠~! 나카다 히데오, 참으로, 공포영화를 제대로 잘 만드는 감독 같습니다~! 구로키 히토미의 연기도 정말 좋았고, 아역 배우들도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었죠~!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년여우
콘 사토시 감독 / 대원DVD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천년여우  千年女優: Millennium Actress / Chiyoku-Milleniem Actress

 

감독 : 곤 사토시
주연 : 쇼지 미요코, 코야마 마미, 이즈카 쇼조
장르 :
애니메이션, 환타지, 로맨스, SF
등급 :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 85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랑을 찾아 꿈속으로까지 달려왔건만, 그는 눈덮인 안개 언덕 저 너머로 또 한번의 그리움만 남기고 사라지네'

나름대로 이 영화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창립 70주년을 맞아 개축을 위해 촬영장을 철거하는 `은영' 영화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타치바나 겐야' 에게 맡긴다. 평소 그녀의 작품을 수십 번이나 봤을 정도로 열혈 팬이었던 그는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녀는 전성기를 누리던 30년 전 갑자기 은막 뒤로 사라진 뒤, 신비에 둘러싸여 온 인물. 타찌바나는 어렵게 찾아낸 그녀에게 그녀가 잃어버린 추억의 열쇠를 내 놓으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퍼펙트 블루'로 이 감독의 놀라운 재능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미야자키 하야오' 종교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곤 사토시는 신선한 자극이라는 표현을 넘어서는 전율의 영상으로 단숨에 매니아층을 확보했다. 실사로 찍었어도 무방했을 '퍼펙트 블루'의 사실적이고도 충격적인 영상에 매료되었던 팬들이라면 '천년여우'에 다시한번 감탄의 황홀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로맨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판타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범위를 극한으로 넘나드는 각본과 표현의 절대 수위! 언어로는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이 환상적인 영화는 인간의 한계적 시각과 청각으로 미처 좇아가기조차 힘든 경이로움의 서사시다!

시작부터 이렇게 과다한 칭찬을 늘어놓는 데에는 필자로서 정말로 '이런' 애니메이션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것에 대한 감격 때문이다.

 

위에서 잠시 줄거리를 언급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액면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번의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을 가슴속에 간직한 한 여인이 있고, 그녀의 순정과 그녀의 열망과 그녀의 그리움이 녹아든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의 이야기가 시같이 아름다운 영상속에 질주하듯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무한의 로맨스를 아우르는 것은 곤 사토시 특유의 화려하고 충격적인 연출력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액자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전설적인 여우가 절정의 시기에 돌연 은막을 떠나고 30년간 은둔생활을 한다. 어째서 그녀는 돌연 은막을 떠난 것일까! 그 여배우의 열혈 팬이었던 감독이 그녀의 인생 다큐를 찍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의 입을 열게 한 것은 감독이 그녀에게 건넨 '비밀의 열쇠'이다. 그리고 노여우는 그녀의 과거, 사랑을 찾아 끝없이 헤맸던 벅찬 기억들을 풀어놓는다. 그 때부터 현재와 과거, 심지어 미래까지, 모든 상식적인 시공의 범위는 무너진다. 여우의 일생을 좇아 카메라는 끊임없이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심지어는 직접적인 개입까지 한다. 전국시대부터 에도, 막부 시대, 전쟁과 근대 시대, 나아가 미래의 우주까지, 가슴 속에 순정을 품은 여우의 사랑찾기는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퍼펙트 블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복잡하고 전율적인, 그러나 더욱 치밀하고 세련되어진 퍼즐 게임이 시작된다. 시공간의 해체는 기본이고 현실과 환상, 허구와 진실, 영화 속과 영화 밖, 심지어는 다큐 속과 다큐 밖까지, 가능한 모든 스토리텔링의 문법은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기막힌 연출법은 감독의 능수능란하고 감각적인 재능 때문에 전혀 산만하지 않고 꿈 같은 황홀감에 빠지게 한다. 그 무아지경의 마지막에는 얼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미스터리의 답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사랑을 찾아 천년을 헤맨 여우의 스토리가 우리네 가슴속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불변의 진리 중 하나였음을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비밀의 열쇠'로 우리의 가슴 속을 열어보게 되고, 우리의 일상과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벅찬 감동 속으로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마법같은 연출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장황한 미사여구가 사실상 이 영화에게는 무색할 정도로 그 신비로움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직접 보고 느끼지 않고서야 어찌 그 터질 듯한 무한의 감각을 한낱 글자로 적어낼 수 있으랴!

 

'퍼펙트 블루'의 충격을 사랑한 팬들이라면 '천년여우'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필자가 최고의 저패니메이션으로 꼽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한치도 뒤짐이 없는,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공동 1위로 할 만큼, 걸작 중의 걸작이다! 걸작 중의 걸작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두번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2001년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같은 해에 만들어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제5회 일본 미디어예술영화제에서 공동대상을 수상했고,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에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캐나다 판타지 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치요코의 달리는 모습이다. 그녀는 무수한 모습으로, 무수한 방법으로 사랑을 찾아 달리고 또 달린다. 특히 극후반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달리고 또 달려 눈덮인 홋카이도, 땅끝까지 도달하는 모습은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이제까지 그녀의 마음 속에, 피 속에, 시간 속에, 그리움 속에 녹아있던 모든 열정의 응어리들이 다시한번 풀로 가동되며 그녀를 한없이 격정적으로 몰아가는 하일라이트였다. 그 때 흘러나온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하고 빠른 교차편집, 그리고 반복되는 이미지의 세련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압권이었다!

'퍼펙트 블루'에서 처럼 관객들에게 작은 파문과 여운을 던지며 새로이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열정'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은 곧 영화이고 그것을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 아닌가 싶다!

 

첫사랑의 열정을 간직한 어리고 순수한 여배우는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사랑을 간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사랑하는 이가 혹시 보아주길 갈망하며 영화를 찍고 또 찍었다. 그것은 그녀의 예술이었고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의 인생이었다. 우주의 어느 별 한 가운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비밀의 열쇠'의 주인공, 그를 찾아 우주까지 달리는 그녀의 목마른 그리움과 열정은 그녀를 이루는 전부였고, 그 순간 그녀는 언제까지나 만월(滿月)을 꿈꿀 수 있는 14일째의 달(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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