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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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정치행위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탈정치'를 말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정치행위이다. 경제, 문화, 예술 등은 정치만큼 똑같이 중요하지만 정치의 방향과 수준은 시민의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명박 정권이 출현하자 그 이전 10년과는 다른 변화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생각해보라. (조국)
-7~8쪽

오연호 :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는 정치인들이 바꾸는데, 우리 사회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정치인이 만든 틀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 시민들이 그들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게을리 하고 나아가 그들을 냉소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보는 셈이겠죠.

조국 : 현재 대중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일자리, 교육, 주택 문제 등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성취하려면 정치가 제대로 서야 합니다. 제도를 바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물론 아래로부터 운동이 일어나고 대중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꼭지'는 정치가 따줘야 합니다. 어떠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가는 정치인이 결정합니다. (중략)
그렇다면 정치인들에게 그저 맡겨두면 될까요? 물론 아닙니다. 시민들이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각자의 영역에서 참여의식을 가지고 뛰어들지 않으면 정치인은 자신과 자기 정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게 됩니다. 정치인 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거죠. 정치권 바깥에서 정치인과 정당에게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38~39쪽

조국 : (중략) 정치권력을 잡은 뒤 마음만 먹으면 경제권력을 분명히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중략)
창출된 부와 가치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우선순위에 따라 얼마만큼 어떤 절차에 따라 분배할 것인가는 정치가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바뀌면 그에 따라 경제권력이 바뀔 수 있는 거죠.
(중략) 문제는 정치를 책임지는 주체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 구체적인 세밀한 계획이 있는가입니다.
-54~55쪽

오연호 : (중략) 일자리 해법에서도 정의,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구체적 정책은 이후 더 많이 개발되어야겠지만, 먼저 일자리를 바라보는 철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어떤 경쟁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놀아야 하는가, 어떤 임금이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다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진보·개혁 진영이 재집권을 위해서는 "진보가 밥 먹여 주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밥을 더 인간다운 방식으로 먹게 해준다"고 답해야겠습니다.
-125쪽

조국 : 어느 사회나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자원을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 경쟁하고 충돌합니다.
진보·개혁 진영은 이러한 욕망의 현주소와 흐름을 정확히 포착해야 합니다. 진보·개혁 진영 내부에 '이익의 정치'나 '욕망의 정치'를 '가치의 정치'와 대립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위험합니다. 교육, 일자리, 집, 의료 등에 대하여 대중이 어떠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아야죠.
그리고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 평등, 연대 등의 진보적 가치에 따라 욕망의 내용과 방향을 재설정해야 합니다. 법과 제도를 통하여 욕망이 자기 파괴적으로, 그리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방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에 가득한 불안을 제도적으로 감경해놓아야 합니다.
-135~136쪽

조국 : (중략) 그러나 지금 청년들이 완전히 시들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고, '이걸 어떡하지?' 하면서 고민하고 모색하는 단계 같아요. (중략) 우석훈 박사가 '88만원 세대'를 얘기하면서 논의가 촉발된 이후,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한다'는 청년들의 당사자 운동이 본격화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6.2 지방선거에서도 20대들이 투표참여 운동을 벌이면서 정치의 광장으로 나왔구요.(후략)

오연호 : 20대 청년들 스스로 자기 세대의 문제를 가지고 들고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시는 거죠?

조국 :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정치 세력이든 이들의 요구에 답하지 못한다면 집권할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178~179쪽

조국 : 여러 가지를 종합하면, 검찰은 삼성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삼성맨들은 자신들이 한국을 이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삼성이라는 조직과 그 수장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경제 외에도 정치와 사회 분야까지 삼성의 영향력을 넓히려 하고요. 요컨대, 저는 검찰을 검찰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236쪽

조국 : 그리고 진보·개혁 진영이 주의할 것은 복지가 진보·개혁 진영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비스마르크와 드골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복지국가의 기초를 놓았고, 골수 신자유주의 정당이던 스웨덴 보수당도 전격적으로 복지국가를 수용하며 집권했죠. 복지국가 모델은 사회민주주의의 비전과 투쟁의 산물이었지만, 이후 보수 진영도 이를 채택,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정책이건 먼저 주장했다고 해서 그 과실果實이 자기에게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예를 보더라도 무상급식 정책의 원조는 민주노동당이었지만,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그 과실은 민주당이 대거 가져갔죠
-294 쪽

조국 :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인은 도덕철학자, 종교인, 지식인, 학자와는 다른 역할이 있죠. 일찍이 나폴레옹은 "지도자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라고 갈파했습니다. 대중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은 정치모리배라 불려 마땅합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모두 갖추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큰 정치인'이 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295쪽

조국 : 베버의 말을 한 번 더 빌려 말하자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는 대중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꾼들의 지배를 받습니다. 정치인도 인간으로서 모든 한계를 다 가지고 있죠. 단점은 비판해야겠지만 그 사람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끌어내려 패대기쳐서너는 안 됩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키워줘야 합니다. 좋은 정치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좋은 지도자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295쪽

조국 : 진보·개혁 진영이 네티즌과 공동 작업으로 진보·개혁 진영의 '드림팀'을 뽑아보는 겁니다. 현재의 당 소속과 상관없이 집권을 전제로 한 정부 구성을 해보는 겁니다. 당 중심이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말이죠. 예컨대, 대통령으로 ○○○, 국무총리로 ○○○, 장관으로 ○○○, 대법원장으로 ○○○, 헌법재판소장으로 ○○○ 등을 뽑아보자는 거죠. 각 자리마다 3배수 정도로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종의 '놀이'일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이 그려져야 새로운 정부에 대한 감도 빨리 오지 않겠어요?
-296쪽

조국 : 그런데 386세대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집단경험을, 20,30대는 촛불 집회·시위의 집단경험을, 그리고 6.2 지방선거를 통한 이명박 정권 심판이라는 집단경험을 공유하고 있어요. 현재 50,60대가 공유하는 집단경험과는 전혀 다르죠. 유럽의 '68세대'가 나이가 들어서도 진보를 추구하면서 사회를 견인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20,30,40대도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대안미디어가 이들을 계속 묶어줄 것으로 예상해요.
-310쪽

조국 :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권력혐오증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인은 악마적 힘과 손잡는 사람"이라고 갈파한 바 있어요. 정치권력은 다름 아니라 악마적 힘입니다. 이 힘과 손을 잘못 잡으면 악마에게 내가 넘어가죠. 이 힘을 포기하면 반대 정파가 이 힘을 사용하여 나를 억누르죠. 그러나 그 힘을 정확히 사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정치인에게는 필요한 겁니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에 능한 것을 넘어, 그 권력을 잡았을 때 이를 잘 다루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거죠. 진보·개혁 진영의 사람들은 권력 행사를 혐오하는 경향을 버려야 하며, 권력을 유능하게 행사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253~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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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now 2011-02-0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p.61~62에서
미셸 푸코가 TV토론회 사회자의 질문에 유머러스하게 답변한 발언을 인용.


마녀고양이 2011-02-0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구, 권력 혐오증에서 벗어나자... 이거 딱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목도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아아,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조급증이... ^^

herenow 2011-02-10 00:13   좋아요 0 | URL
앞의 댓글도 그렇고, 마녀고양이님은 벌써 결론(?)을 알고 계시는듯... ^ ^
시사주간지 읽듯 설렁설렁 잘 읽어보실 것 같아요.


cyrus 2011-02-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정치의 발견>이라는 책의 저자도 조국 교수의 말처럼 막스 베버의 저 말을
인용하면서 진보 진영에도 권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더군요.

herenow 2011-02-10 00:30   좋아요 0 | URL
오, 그래요? '정치' 관련해서 꽤 유명한 말인가 보군요. ㅋㅋ
벌써 <정치의 발견>도 보셨나요? 어떻던가요?
신간평가단 추천도서용 리스트에 넣어두긴 했는데 아직 확인을 못해봤답니다.
(아, 이번달에도 20권 넘는 책이... 어느 걸 골라야할지... ㅠ.ㅠ)
괜찮은 책이면 아마 시루스님이 Top 5로 추천하시겠죠?
아니면 리뷰라도... ^-^ (오호.. 간접독서~)

cyrus 2011-02-10 23:09   좋아요 0 | URL
좋은 내용인거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안 좋게 보실 수 있는,,
저에게는 참으로 애매한 내용인거 같아요. 제가 정치에 대해서
깊이 있는 식견을 가지지 못해서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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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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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에서, 인민군 리수화는 동막골의 노촌장에게 의아해하며 묻는다.
"큰소리 한번 내지 않는 위대한 영도력의 비밀이 뭡네까?"

"뭐를 마~이 멕예야지 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 어디서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온갖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혼자만 잘 먹는 것에서 → 다함께 잘 먹는 것으로,
다함께 잘 먹기 위해서는 전체 자원을 어떻게 나누고 운용하는가 하는 것이 대략의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경제·정치 모델에서는
골고루 나누는 것에 더 신경 쓰자는 쪽을 '진보-개혁-좌파'의 입장,
키우고 유지하는 것에 우선 집중하자는 쪽을 '수구-보수-우파'의 입장이라고 대략 정의내려 왔다.


◆ 무엇을 묻고 무엇을 대답했나

<진보집권플랜>에서 오연호-조국 듀엣이 대화를 통해 짚어내는 현실적 문제는 시의 적절하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대체로 명확하다.

책은 크게 6개의 마당으로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 정치적 현실을 되짚어본다.

(1) 성찰                  : 왜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가
(2) 사회·경제 민주화 : 특권과 불공정의 시대를 넘어
(3) 교육                  : 청년들의 미래에 투자하라
(4) 남북문제            : 그래, 통일이 밥 먹여준다
(5) 권력                  : '괴물' 검찰 어떻게 바꿀 것인가
(6) 사람                  : 잔치는 다시 시작이다


'진보·개혁'이라는 시각을 통해
과거 반성 + 현재 분석 +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본 것이다.


책 제목에서부터 정치적 입장이 뚜렷하니 어쩌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이 남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과연 정치적 편향에서만 비롯된 것이겠는가?

언론 통제, 재벌로 대표되는 경제권력, 무상급식 논쟁, 여성의 출산 부담, 노동시간과 여가활용, 
  복지 확대와 세금 증가, 청년 실업, 4대강 토목공사, 비정규직 확대, 양극화된 기업 환경, 세습경영,
부동산 거품과 주택 문제, 뉴타운과 용산참사,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복지 정책별 차이, 
  대학 교육의 질, 외고 논란과 입시 제도, 대학간 서열화와 채용 정책, 학벌에 의한 차별,
핀란드 교육, 빚쟁이 낳는 대학 등록금, 사립 재단 비리, 햇볕정책과 북한 핵실험 논쟁, 천안함, 
  한미동맹, 주한미군, 개방과 세계화, 한미 FTA의 불공정 조항, 식량주권, 이중국적과 병역문제,
외국인 노동자, 노무현 대통령과 검찰 권력,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 검찰 개혁, 코드 인사 논란, 
  2012년 대선, 야권 통합, 선거제도 개정, 20대의 보수화, 유시민/정동영/안희정/이광재/김두관/
이정희/송영길/원희룡/나경원/박근혜/김문수 등 유력 정치인에 대한 인물론과 비평, etc.


책을 읽으면 지난 3년, 나아가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을 관통했던 주요한 이슈들을
재빨리 훑어보며 쟁점이 되어왔던 부분들을 간략히 정리해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주제를 일반인들이 정리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면서도 중요한 대목을 놓치지 않는다.

멋있는 용어나 개념을 내세워 그걸 잘 모르면 무슨 소리인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거나,
읽는 사람이 자신의 교양수준을 자책하게 만드는 현학적인 표현도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시사주간지 정도의 난이도에 토크쇼 수준의 재치, 거기에 지식인으로서의 문제 분석이 곁들여져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 제기이고, 그에 대한 논의 또한 대체로 고루하지 않다.
대화속에 인용되는 책이나 시, 노래, 영화 이야기들은 그 내용에 말랑한 온기를 더해준다.


 


◆ 어떻게 하자는 소리일까?

나름대로 정리해본 이 책의 논리 전개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역시 "뭐를 마~이 멕여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밥의 문제', 복지 정책.
      먹고 자고 입고, 보육과 교육, 일자리, 주택, 건강에 대한 문제 해결은 필수적이다.
      대중의 관심이 정치 영역에서→ 경제 영역, 생활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무상급식, 준 무상의료와 같은 구체적인 '생활경제' 어젠다를 찾고,
      제대로 된 '대안 경제모델'을 제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2) 그러기 위해, 정치권에서는 진보·개혁 진영의 '연대'를
     20대, 30대, 40대들에게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현실적으로 힘겨운 '정당 통합' 보다는, 소통합과 상설협의체 등의 협의기구를 통해
      '하나로 합치지 말고 하나인 것처럼 연대하자'는 제안이다. 동시에
      무관심한 20대, 분노하는 30대, 이중적인 40대들에게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3) 그래서 정치권과 시민들이 함께 '판을 바꾸고 인물을 키워보자'고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드림팀'과 같이 새로운 판에 대해 함께 구상하고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놀이터'가 제시된다. 앞으로 더 생각하며 키워나가야 할 영역이다.

(4) 그렇게 해서 바꿔야 할 것은 바로 '제도'이다.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어떤 정의도 철학도 근사한 담론들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
      현실 생활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마~이 멕일 수 있는' 살맛 나는 세상으로 이끌어 주는
      실질적인 장치는 '제도'와 그것에 기반을 둔 '사회구조'.

(5) 그리고,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치'이다.
      정치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대다수 시민을 위해 '제대로 잘 하는' 정치.


   
  오연호 :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는 정치인들이 바꾸는데, 우리 사회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정치인이 만든 틀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 시민들이 그들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게을리 하고 나아가 그들을 냉소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보는 셈이겠죠.

조국 : 현재 대중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일자리, 교육, 주택 문제 등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성취하려면 정치가 제대로 서야 합니다. 제도를 바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물론 아래로부터 운동이 일어나고 대중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꼭지'는 정치가 따줘야 합니다. 어떠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가는 정치인이 결정합니다. (중략)
  그렇다면 정치인들에게 그저 맡겨두면 될까요? 물론 아닙니다. 시민들이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각자의 영역에서 참여의식을 가지고 뛰어들지 않으면 정치인은 자신과 자기 정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게 됩니다. 정치인 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거죠. 정치권 바깥에서 정치인과 정당에게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p.38~39
 
   



◆ 무시못할 정치의 힘, 그래서 집권이 필요한 건가

개인적으로 와닿은 이 책의 미덕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지난 몇 년 동안의 사회적 이슈들을 적절한 난이도로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둘째, 솔직히 무시해왔던 '정치'의 중요성을 달리 인식하게 된다는 것.
셋째, 이 내용을 계기로 어떤 식으로든 다른 논의들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두 사람의 분석이나 제안에는 다른 의견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아마 자칭 '진보·개혁·좌파'라는 사람들이 더 그럴 것이다. ㅎㅎ;
그 재능을 나누고 쪼개는 쪽으로 쓰기 보다는, 통합하고 연대하는 쪽으로 집중하면 어떨런지.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고 일반 시민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쪽으로도 말이다.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책으로 접한 것만도 여러 차례 되었던 것 같다.
조지 오웰부터 조국-오연호에 이르기까지
"정치에 무관심한 것도 정치적 행위" 라는 똑같은 요지의 멘트를 날리지 않나,
미셸 푸코는 대놓고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라고 하지를 않나...

오연호-조국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는 그 당위성이 차근차근 접수되는 느낌이다.
'제도'로 만들어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그 제도를 만드는 것은 결국 '정치'라는 이야기.

워낙에 '철학'도 없고 '정의'나 '도덕성'은 찾아보기 힘든 '그들만의 정치'를 목격하고 있는지라
그럴싸한 정치철학과 정의론, 투철한 윤리의식 같은 것이 먼저 그리워지는 현실이지만,
일단은 씹어대고 무시해왔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그들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고
간편한 손가락질 보다는 가능한 방법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 일어난 분명한 변화이다.

   
  조국 :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권력혐오증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인은 악마적 힘과 손잡는 사람"이라고 갈파한 바 있어요. 정치권력은 다름 아니라 악마적 힘입니다. 이 힘과 손을 잘못 잡으면 악마에게 내가 넘어가죠. 이 힘을 포기하면 반대 정파가 이 힘을 사용하여 나를 억누르죠. 그러나 그 힘을 정확히 사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정치인에게는 필요한 겁니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에 능한 것을 넘어, 그 권력을 잡았을 때 이를 잘 다루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거죠. 진보·개혁 진영의 사람들은 권력 행사를 혐오하는 경향을 버려야 하며, 권력을 유능하게 행사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p.253~254  
   

 


 


◆ 어떻게 골고루 마~이 멕일까?

무상급식에서 촉발된 '복지' 논쟁은 이 책의 출간을 전후로 진보/수구 모두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

그동안 인상깊은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던 진보·개혁 정당은 책 내용 그대로
무상급식에 이어 의료 등 다른 분야로까지 '보편적' 복지 간판을 계속 밀어부칠 기세이고,
부자 감세, 소외계층 지원 삭감 등 기득권 배불리기만 '선택적'으로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복지 이슈를 싸잡아 '포퓰리즘'이라 평가절하했던 수구·보수 정당은 뒤늦게 눈치를 살피면서
역시 '선택적'으로 수정된 복지 정책을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양 들고 나타나는 모양새다.


   
  조국 : 그리고 진보·개혁 진영이 주의할 것은 복지가 진보·개혁 진영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비스마르크와 드골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복지국가의 기초를 놓았고, 골수 신자유주의 정당이던 스웨덴 보수당도 전격적으로 복지국가를 수용하며 집권했죠. 복지국가 모델은 사회민주주의의 비전과 투쟁의 산물이었지만, 이후 보수 진영도 이를 채택,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정책이건 먼저 주장했다고 해서 그 과실果實이 자기에게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예를 보더라도 무상급식 정책의 원조는 민주노동당이었지만,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그 과실은 민주당이 대거 가져갔죠. -p.294
 
   



모두가 '복지'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 시점에서 진보/수구/개혁/보수의 아웅다웅 편 가르기에 의해
시민들의 소중한 삶의 질이 정치적 소모품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정치와 제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복지국가를 이룰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제는 '5세' 훈이식 치졸한 광고보다는 구체적인 정책 논쟁을 통해 미래 세대를 책임지려는
발전적인 경쟁의 모습을 한번쯤 지켜보며 밀어주고 싶어진다.

생뚱맞은 생각이 하나 불쑥 솟아오른다. 더 좋은 정책을 겨루는 '복지 정책 배틀 대회'...
버스값, 배추값도 모르는 철없는 사회지도층(?)들이 정당의 이익만 내세워 입씨름 벌이기 보다는,
'심시티' 개념의 소셜네트워크 온라인 게임 같은걸 공개적으로 진행하여
다수의 유저들이 각자의 정책을 미리 시뮬레이션을 통해 경쟁적으로 검증해본 다음,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를 통해 도출된 최적의 솔루션을 제도화하여 수정 보완해 나가면서
공공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몇 년간 꾸준히 추진해 나가는 모습...
민주사회의 '21세기 정치'라면 이런 것도 한번쯤 대안으로 생각할 만한 때가 되지 않았을까?
(... 적어도 4대강 '로봇물고기' 보다는 접근 방식이 낫지 않나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ㅎㅎ;)


 

현재의 대한민국이 만족스럽고 잘 돌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손에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뭔가 불만족스럽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함께 고민하고 참고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여기에 있다.

거창한 의미 따질 것도 없이
'진보'나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가 원래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니었을까.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다. (파우스트)
- 조국 교수의 트위터(@patriamea) 프로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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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2-0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어려울거라고 지레 겁먹는 저같은 사람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동막골 대사로 설명해주니 쉽게 이해되고 공감이 되네요.^^

herenow 2011-02-06 22:3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어렵지 않게 쓴 것 같고 책 만듦새도 괜찮으니
서점 가시는 길에 부담없이 한번 살펴보세요. ^ㅅ^

잘잘라 2011-02-0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깐요. 진보두 좋구 진보가 집권하는 것두 좋구 진보 집권 플랜두 좋구,
다 좋은데 말이죠. 정권을 잡고 나서 딴소리 하지 않을, 그런 사람을 원한단 말이죠.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모든 과정은 회색이다... 라는 말로 들려요.
(너무나 무책임한 회색, 석달 열흘쯤 쨍쨍한 햇빛에 널어두면 하얗게 표백되려나? 때 타서 더 짙은 회색 되겠지. 대기 오염 심각한 도시에서라면..)

herenow 2011-02-07 22:14   좋아요 0 | URL
Both Sides Now



Both Sides Now - Hayley Westenra



Both Sides Now - Joni Mitchell


herenow 2011-02-07 22:15   좋아요 0 | URL
아마도... Never ending story ? ^^



Never ending story - 윤상현

herenow 2011-02-16 17:18   좋아요 0 | URL
예전에 메리포핀스님 이 댓글에 대해 직접적 답변을 안올렸는데,
다른 분이 저 인용문의 의미를 다시 언급하셔서 외람되이 긴 댓글 하나 달았습니다.
이론이 회색이니 과정이 회색이니 하는 것보다, '딴소리 하지 않을 사람' 원하신다는 말씀이
메리포핀스님이 이 댓글을 다실 때 강조하려던 본뜻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도 '모든 이론 = 모든 과정'이라고 치환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아래 설명에 함께...
시간되시면 참고 바랍니다.

2011-02-08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erenow 2011-02-09 13:31   좋아요 0 | URL
나이와 서열을 가린다고 '보수적'이고
나이 서열 따지지 않으면 '진보적'이라고 간단히 구분지어 말할 수는 없겠죠.
어떤 상황과 전제가 그런 판단에 깔려있었을테니 그걸 모르고는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네요.
예의도 모르고, 말꼬리 애매하게 내려 까는 사람이 '진보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ㅎㅎ;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은 불변 부동하는 '실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태' 내지 '자세/태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진보'라도 한 자리 차지하면 어딘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지 않던가요.
(어려운 철학 이론 들먹일 필요 없이 陰陽의 이치로만 봐도 그러하잖아요.)

불변 부동하지도 않는 '진보↔보수'라는 개념을 미리 굳게 정의내리고
그 개념을 여러가지 잣대로 섬세하게 쪼개고 나누어
그 '차이'에 초점을 맞추면서 각자가 잘난 척 분열되어 있기 보다는
일이 되는 쪽으로, 가능한 방법 쪽으로,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쪽으로 지혜를 모으는 것이
진정 '진보'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은 진보와 보수가 win-win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이런 논의를 솔직하게 나눠볼 수 있다는 것도 '진보'된 것이겠죠? ^ㅅ^


마녀고양이 2011-02-0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늦은 댓글을 달게 되는군요. ^^
설 지내고, 감기 앓다보니 그렇게 되네요... 자칫했으면 너무 좋은 리뷰 놓칠뻔 했습니다.

너무나 쉽게 들어오네요. 아직도 손대지 못 한 책에 더욱 욕심이 가구요.
거기다 진짜 공감되는 부분 있네요. 결국은 '정치'로 귀결된다는 것.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순수함도 좋고 이상도 좋지만,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도 실행력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겁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다 깨달아서 변혁해야 한다지만, 그것은 교육과 생활의 차이가 있는한 어림없는 이야기거든요.
그렇다고 예전 공장에 가서 교육시킨 것처럼 농촌과 공장을 교육한다? 그것도 아닌거 같구요...

빨리 읽어봐야겠어요. 히어나우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herenow 2011-02-10 00:2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방가방가~
왜 이케 오랜만에 뵙는 것 같죠? (^ㅅ^)m

늦게라도(?)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ㅋ
실행력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말씀, 이게 바로 '정치'라는 걸, 정치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걸
이제껏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에공... ^ ^;

햇빛눈물 2011-02-13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보관만하고 언제 읽어야지 마음만 있던 책이었는데 히어나우님 덕분에 아주 일목요연하게 책 내용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다라는 말에서 전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는 동의하지만,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힘드네요.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이 말의 진심은 '모든 이론은 처음에는 푸르지만 회색일수 밖에 없다'라고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어렵네요. ㅋㅋ

herenow 2011-02-14 20:17   좋아요 0 | URL
전에 메리포핀스님도 그러시더니, 이 말에 걸리는 분들이 더러 계시나 봅니다..
저 멘트를 내뱉은 메피스토펠레스나 괴테가 직접 설명을 해주셔야 할 듯. ^ㅅ^;
사실 저는 참 공감하며 옮겨온 말이라서요.
(1+2=3처럼 본인에겐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을 설명한다는 게 제일 힘들죠. ^ ^;)


herenow 2011-02-14 20:30   좋아요 0 | URL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다." (파우스트)

주제넘게 잠시 사족을 달아본다면, 저 말은 뇌과학으로 보아도 사실(fact)에 해당하고
'이론'이나 '생각', '개념화', '추상적 사고'라는 것의 본질을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 개념, 사고라는 것은 '과거'의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경험들, 개념들, 말들, 상징들 같은 것이죠.

뇌과학에서는 이걸 간단히 '기억'이라고 해버리더군요.
'미래의 기억'이라는 용어도 있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모든 생각은 '과거'이고 '기억'이라는 사실(fact)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맞다, 틀리다, 좋다, 싫다는 것도 경험한 어떤 과거의 조합들이나
내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것이구요.
(이런 과정에 개입해 새로운 정보를 적절히 넣어주면 인지와 판단에 변화가 생기게 되죠.
그리고, 이런 과정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게 되구요. 유물론 같은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생각'은 '언어(내적언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실제의 무언가를 하나의 기호나 상징으로 대체하는 행위입니다.
즉, 살아있는 것을 죽어있는 '개념'으로 대체해버린 결과, 이렇게 말과 글을 쓰고 있는 것이거든요.

당장, 한국말이 아니라 우간다말 같은걸 써서 '생각'을 해보라고 하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죠.
(이미지? 기억 또는 기억의 재구성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회색'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본질이 '과거', '기억'이라는 절묘한 은유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녹색으로 태어났다가 어떤 과정을 거쳐 회색으로 변질되는 그런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머리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나 판단의 본질을 보면 그 또한 과거의 지식/기억이 바탕이지요)
그 '개념'이라는 것 자체의 본질을 꿰뚫어본 것이죠.

여기까지는 뇌과학, 인지과학, 불교, 명상, 일부 철학과 사상에서 거의 동일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딴것들은 이걸 직관이나 논리로 풀어내는데, 뇌과학은 신경세포의 재조합으로 간단히 보여주구요.)

조금 더 나아가면, 모든 '생각'이나 '개념', '이해', '추상적 사고'의 바탕이 되는
'아는 작용'은 '대상'을 '한정짓는' 것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므로,
제 아무리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 개념이라고 해도 한정지워진 어떤 것,
결코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거나 설명해줄 수 없는 창백한 대체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괴테의 말에서 '생명의 나무'는 위의 글에서 '있는 그대로' 쯤이 되겠네요.
길게 적었습니다만, 앞부분의 몇 가지 내용만 찬찬히 확인해 보신다면
비슷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구질구질한 설명보다 단 한줄로 본질을 아름답게 노래해버리고 있으니
파우스트가 역시 명작은 명작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촘스키와 푸코, 두 사람이 산을 오른다.
그 산의 이름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

촘스키는 날 때부터 타고난 '내재주의 언어론'을 재잘대며 뛰어가고,
푸코는 "규정된 건 없어. 뭐가 그리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정의할거야?" 중얼거리며
한 발 한 발 '권력 관계'의 규칙성을 찾으면서 걸어간다.

네덜란드 TV, 토론의 사회자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한다'고 서두에 소개한다.

지켜본 소감은?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산을 타고 있었던 것 같다.


촘스키 : 저의 관심사는 정신에 내재하는 특성이고, 반면에
푸코 씨는 사회적, 경제적, 기타 조건들의 특정 배열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합니다. - p.56


촘스키가 오르는 산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보편적인' 지형이 결정되어 있는 산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진행할 때 마다 부분적으로 밝아지는 지도처럼,
그는 '생래적' 지형의 존재를 의심치 않고 그 '심층구조'를 밝힐 수 있다며 겁없이 뛰어다닌다.
지식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사회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면서
언어이론과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거침없이 골고루 재잘거리며...

푸코가 오르는 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아무것도 '당연한 게 없다'.
상황, 사회, 역사, 제도, 계급 등 조건에 따라 지형도, 오르는 규칙도 변화 무쌍하다.
그는 그 속의 여러가지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이런저런 주제들의 법칙성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의 발 아래에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의된 '담론'들이 디딤돌처럼 한 발 한 발 솟아올라 놓여진다.
때로는 자신의 모습조차 불확실해지는 그 산을 오르면서 그는 화두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이 언어, 이 지식을 규제하는 권력 관계는 대체 뭐야?"


푸코 : 중요한 것은 사건들을 변별하고, 그 사건들이 속한 네트워크와 층위를 가려내고,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생산해내는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구조의 영역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 대신에 권력 관계의 계보, 전략적 발전, 전술의 측면 등을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대단한 랑그(langue: 모든 개인의 두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 체계)와 기호(랑그에 의해 가능해지는 각 개인의 구체적 언어 행위)모델이 아니라 전쟁과 전투 모델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품고 규정하는 역사는 전쟁의 형태를 취하지 랑그의 형태를 취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 관계이지 의미의 관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 p.190


그렇다면, 이걸 '같은 산'인 양 퉁쳐서 소개했던 그 사회자는?
아마 또 다른 언덕에서 이들 둘을 구경하고 있었겠지. ㅎㅎ;

잘은 모르지만 두 사람의 익숙한 이름과 '인간의 본성', '대중을 위한 TV토론' 같은 말에
홀딱 넘어가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내용을 접한 독자들은?
한번쯤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런 멘트를 떠올려 봤음직하다.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듀스, '우리는')

그들이 내뱉은 한숨들이 한겨울 중고책 되어 어딘가 쌓여있다는 슬픈 전설...
이해하기 어려워 더 많이 읽히기도 한다는 역설적인 독서계의 주인공들 아니시던가. ㅠ.ㅠ


촘스키 : 지배 이데올로기와 선전 체계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해방하려는 사람은, 조금만 노력하고 응용하면, 상당수 지식 분자들이 발전시킨 왜곡의 양상을 즉각 간파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만약 이런 분석이 잘 안 된다면 그것은 사회·정치적인 분석이 실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특정한 이권 계층을 옹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분석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지식인 계급이 우리에게 심어주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난해한 활동에 종사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립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사회과학도 그렇고 무엇보다 오늘날의 사건에 대한 분석에,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가설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고, 심오하고, 모호하다는 얘기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체제가 선전하는 환상일 뿐입니다. - p.97~98


생득론이 어떻게 활발한 정치적 참여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촘스키다운 발언이지만,
푸코와 촘스키가 당연한 듯 내뱉는 이야기들 그 자체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쉽게 이해할 것 같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상황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 ^;

그렇다고 얄팍한 두께에 동네 뒷동산쯤 만만하게 생각하고 성큼 발을 내디뎠다간
마주치는 생경한 언어와 개념들에 길을 잃고 헤메일 수 있는 산이라는 것도 조금은 안타까운 사실... 

두 관점의 차이는 "옮긴이 후기"(p.263)를, 책 전체의 배경은 "서문"을 일단 먼저 챙겨 읽고,
가능하면 웹 서핑과 최소한의 사전 지식으로 기초 체력을 다진 다음
베이스캠프가 감 잡혔을 때 한 발씩 도전하면 '골라먹는 재미'를 조금씩 느껴볼 수 있는 것 같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와 자료를 한 권으로 묶어뒀기에, 언어/정치/권력/진리/정의 등
그들이 1970년대에 각기 다른 산을 오르며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주요 분야의 견해들을
생생한 인터뷰 형식을 통해 짚어보고 때로 비교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등산 코스의 장점.


푸코 : 당신의 질문은 제가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 어떤 맹목성, 어떤 귀먹음, 어떤 이데올로기가 나를 압제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정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경제 관계, 우리 행동의 규칙적 형태와 그 행동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권력 체계, 이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됩니다. 우리 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적 기능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치에 관심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제입니다. 그러니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일동 웃음을 터뜨리고 방청객도 웃음) - p.61~62


이민자 지지 데모중인 푸코와 사르트르 (1972)

 

인터뷰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곁다리들...

▶ 유전, 선험, 관념론, 인지, 정신, 생득주의... 이것은 촘스키?
▶ 양육, 경험, 경험론, 구조, 조건, 구조주의... 이것은 푸코?

엄밀히 말해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이런 개념들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이 건드려놓은 관점과 논쟁들에 한 다리씩 연결 가능한 개념들 되시겠다.
푸코는 "저는 구조주의자 아니거든요?" 라며 꼬장꼬장 의미의 재해석을 요구할 듯 하지만. ㅎㅎ 
여기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행동주의, 인지주의, 구성주의 같은 것도 슬쩍 한 다리... 

그렇다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여 반대 입장을 내놓았던 것은 아니니 재미있는 일이다.
푸코와 촘스키의 견해는 '다른' 것이지 엄밀히 말해 '반대'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책이 두 사람을 엮어놓긴 했지만, 그들이 돌아다닌 山은 서로 다른 산이라니깐... ) 
 
어쩌면 힌두교와 불교의 관점까지 대비되어 떠오르기도 한다.
생득적인 '아트만-브라흐만' 내지 '푸루샤-프라크리티' 시스템의 힌두교는 촘스키와 뭔가 이야기가 통할 것 같고,
모든 것은 서로 조건지어 발생할 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는 없다고 하는 '연기론'의 불교는
어쩐지 푸코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연히 촘스키/푸코의 구체적인 사상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느껴지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유사성이 엿보이는 이상의 관점들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내 인류의 관심을 끌어왔다는 것,
현실세계를 설명하고 집단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도구로까지 사용되어 왔다는 점은 
푸코나 촘스키의 이야기에서 선뜻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을 접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던 사실. 

어쩌면 한갖 '관점'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들의 생각이 언어, 정의, 정치로까지 개념이 확장되어
그들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일련의 학문적/사상적 흐름을 이끌어내면서
사회적/정치적 활동으로까지 체계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던 쉽지 않은 독서를 통해 얻게 된 또 다른 뿌듯함이랄까...

그런데, 이처럼 현란한 언어와 관점으로 짜여진 남의 산을 헤메이다 얼핏 드는 생각은

왜 내가 남들의 그 산을 애초부터 '명산'이라 열광하며 오르려고 애쓰는지,
이렇게 발 디디고 서 있는 내 산은 대관절 어떤 것인지 더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지더라는 것. 

 
P.S.

실제로 푸코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사상가로 분류되는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이 모두
불교와 선禪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로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게다.
(그러면, 푸코의 '권력'에 대한 설명은 불교의 어떤 개념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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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2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이라길래,,
그리고 솔직히 사이러스 님에 이어 히어나우님의 리뷰를 보고,
신간평가단이라지만 이리 어려운 책도 읽으시는 분들이 있구나... 존경스럽다 싶답니다. ㅎㅎ

혼자 말하는 글도 어렵던데, 대담이라.. 대담이란 두사람의 논지를 이해하고 공박까지 이해해야 한다눈. ㅋ
거기다... 두 분 진짜 거리가 있는 분들에 동감입니다. 하긴 그래서 붙여놓았을까여?

herenow 2011-02-04 12:03   좋아요 0 | URL
허걱.. 존경이라뇨. 신간평가단이 아니었다면 서점에서 펼쳐보고 그냥 왔을지도 몰라요. ^ ^;
읽고 싶고 관심있는 책 뿐만 아니라 의무적으로 읽게되는 독서를 통해서도
새로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게 신간평가단의 또다른 매력(?)인 것 같아요. ㅎㅎ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건, 1부 대담 초반에 서로가 이미 간파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공박이랄까 싸움의 느낌이 아니라 대부분 각자 자기들 세계관대로 자기 얘기만 하고 있죠.
인터뷰 형식이라 푸코나 촘스키에 대해 사전지식이 있는 분들은 조금 편하게 보실 수 있을테구요,
각자 다른 산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그들 둘을 어떻게든 연관시키려면 (사회자가 그랬듯이)
읽는 사람 나름대로 도표를 그리든지 비교를 하든지 하면서 머리를 굴리게 되는 것 같아요. ^ ^;

두 거장의 대담이라고 미리 너무 거창하게 보실게 아니라 (이게 책을 읽은 후의 솔직한 느낌),
서점에서 잠시 펼쳐 읽어보시면 분위기 파악이 되실거라는... ^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1-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에 적극 공감하며..ㅎㅎ 존경합니다..^^
전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이 책을 봤는데 빌려가는 사람도 뽑아가는 사람도 없어서
저도 (어려운 책이구나 싶어) 표지만 보고 왔다는 후문이..ㅎㅎㅎ
리뷰 읽으며 덕분에 녹슬어가는 머리 잠깐 굴려보았어요^^

herenow 2011-02-04 12:08   좋아요 0 | URL
허거걱... 부끄럽습니다. 저도 버벅거리며 읽었답니다.
한번씩 이런 책을 읽어두면 조금 똑똑해지는 느낌이 들기는 해요. 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1-01-29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고 딱딱한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정리하는 재주가 있으시구만요. 재밌게 읽히는 리뷰여요.^^

음.. 하루가 25시간이면 그 중 한 시간을 저 책 읽는데 쓰고 싶군요. 그러니까 읽어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제 머리에...(촘스키 인용 읽다가 머리에 쥐가...-_-;)

herenow 2011-02-04 12: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

하루가 몇 시간 남지 않았을 때에도 절실히 손에 잡히지 않는 책이라면
굳이 하루를 25시간으로 늘려서까지 마음에 부담을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 ^;

버스에서 읽으셨다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1~3권이 더 땡기는걸요! ㅋㅋ

cyrus 2011-01-30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는 순간 제 마음 같아서 공감했어요 ㅎㅎ
정말 사상적 배경지식이 없으면 맨 손으로 등산하는 기분이라고 해야되나요,,? ^^;;
재미있게도 루우님 댓글처럼 저도 신간평가도서가 확정하기 전에
도서관 신간코너에 이 책을 보게 되었는데,, 빌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을거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herenow 2011-02-04 12:30   좋아요 0 | URL
비슷한 예로, '알라딘중고샵' 인문학 코너에 이 책이 한가득 쌓여있는 상태에서
덜컥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되는 걸 보면 '왜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죠. ㅎㅎ;

시루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학 준비하느라 슬슬 바빠지겠네요? ^ ^

2011-02-01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erenow 2011-02-04 13:25   좋아요 0 | URL
실질적인 체험이 있으셨다면 경계를 넘어 연결을 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불교든 선이든, 어떤 사상, 철학이라도 '개념'과 '해석'에 묶여있다면 그 산에서만 노는 것이구요.
그렇다고 '경계를 넘어섰다'며 마냥 '개념'을 무시하면 이도저도 아닌 꼴이 되는 것 같구요. ㅎㅎ

이 책의 대담에서는 각자의 산조차 벗어나지 않으려 해서 그 점이 안타까웠죠. ^ ^
자기 산을 키우고 그 안에 정밀한 길을 내고 유사한 다른 것들과 연관은 시킬 줄 알면서도
결코 각자의 산 자체를 벗어나거나 산 아래 땅, 너머의 하늘 같은 것은 관심있게 보지 않는다고 할까요.

불교나 선 같은 것은 '의식의 내용물'을 통해 그 '너머'를 가리키고
내용물 보다는 그 본질을 꿰뚫어본 다음 그에 기반한 현실적 실천을 얘기했던 것에 비해,
(제가 이해한) 이들의 사상은 '의식의 내용물'만을 정밀하게 가다듬고 구분지어 다루고 있을 뿐
이것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개념적 촉수를 뻗으려는 듯 싶다가도
다시 내용물 자체에 집중하거나 한정된 개념 속으로 제한되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찌보면 연기론과 비슷한 발상을 시도했던 구조주의 같은 것이 '구조' 자체가 아니라
구조로 형성된 '대상'과 그 법칙들에 더 초점을 기울인다든지 하는걸 보면 그렇구요.
그래도 비슷한 뭔가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불교나 선을 연구하고 친밀감을 표시한걸 보면
건성으로 절에 다니는 일반 불교신자들보다는 서구의 구조주의 계열 사상가들이
불교이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고 볼 수 있는데 말이에요.

일반적인 철학 내지 사상가들은 의식의 내용물/개념/언어를 벗어난 그 바깥의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도 없을 뿐더러 유물론이나 허무론 같이 극단적인 관점으로만 취급해 버리는 듯도 합니다.

사상적 바탕이 비슷하다는(?) 동양에서도 그런 식으로 간단히 불교 등을 오해해버리는 판국에,
애초에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뚜렷한 서구의 사상이 '연기론적 무아'를 얘기하는 불교나
아예 '나'조차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동양철학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사상이 역수입되는 걸 보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핵심을 벗어나긴 하더라도, 그런 해석들을 통하여
고리타분하고 천편일률적이었던 '동양적' 사고방식에 비해 분명히 배울 것들이 있거든요. ^ ^

명절 잘 보내고 계시겠죠?
다시한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코쿠를 걷다 - 시간도 쉬어 가는 길
최성현 지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길을 떠나 돌아보는 마음의 풍경, 글을 따라 마주치는 사람과 자연. 성찰의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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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만포르트, 에트르타] 1883, Monet,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무래도 19세기 후반 프랑스에는 '인상파의 神'이 강림을 하셨던 모양이다.

감상적인, 그러나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어딘가 들떠있는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

책을 펼쳤을 때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장면들과 함께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수다스런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바람과 햇빛,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매 순간 끊임없이 출렁대며 변화하는 바다의 표면, 그처럼 울렁이며 들떠있는 목소리라니.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와 어느정도 동일한 시공연속체를 공유했을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와 물을 즐겨 그린 그의 그림으로 <La Mer (라 메르; 바다)>의 한국판 표지와 삽화 일부를 장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번역자도 출판사도 두 사람의 작품 사이에서 유사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일까?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 …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 …
  - 네이버 백과사전 :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中에서


모네의 화풍에 대한 설명이 미슐레가 묘사한 <라 메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흡사 '글로 그려낸 인상파 그림' 같은 느낌이다.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을 파악하여 직관적인 표현과 함께 주관적인 감각을 반영'하는 글쓰기 방식은 영락없는 19세기 인상파 회화의 그것이다. 바다와 관련된 온갖 생명들과 현상에 대한 설명들이 하나 하나의 붓자국이 되어 점묘법처럼 전체 그림을 형성해낸다. 묘사되는 대상의 윤곽선은 때로 불분명하지만, 자신만의 감상과 표현이 붓자국 처럼 뚜렷이 남아있다. 열띤 감정으로 글 전체에 '밝은색'을 구사하고, 생생한 묘사로 '자연의 빛'을 대신한다. 사실적인 묘사와 자유로운의 표현이 인상파 화가들의 '빛과 색의 진동'처럼 독특한 밝음과 깊이를 함께 만들어낸다. (아, 그런데 이 양반, 붓질이 너무 잦다...)



[에트르타, 일몰] 1883, Monet,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크기와 힘에서 모두 감탄할 이 짐승은 피는 뜨겁고 젖은 따뜻하며 선의에 넘친다. 오로지 생존 수단만 부족하다. 그 수단은 이 지구의 전체 규모와 무게에 불가피한 법칙도 고려하지 않았다. 거대한 뼈대로 받쳐진 거죽은 아름답다. 거대한 늑골은 가슴을 자유롭게 열리도록 할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땅에 올라와 바다에서 적을 피하자마자 곧바로 폐의 무게라는 적에 짓눌린다.
멋지게 10미터 높이로 뿜어올리는 물기둥과 분수구멍은 바로 유치하고 야성적인 기관이라는 표시이자 증거이다. 힘껏 공중으로 분수를 쏴 올리면서 그 '숨 가쁜 통풍기'(수플뢰르 에수플레'라고 고래의 한 종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노예로 만드셨나이까?" (p.219; 고래)
 
   


내용물이 '무엇(what)'인지를 설명하기에 이 책은 참으로 부적절하다.

묘사하는 대상과 범위, 그리고 표현의 방식이 너무나 다양하고 폭이 넓기 때문이다. 바닷물 그 자체부터 그것이 품고 있거나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다채롭게 생동하고 요동친다. 작디작은 티끌과 미생물부터 사람과 파충류, 어류를 거쳐 고래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비와 파도와 폭풍과 달과 태양에 이르기까지, 서양과 동양의 여러가지 장소, 옛날부터 지금과 알 수 없는 시간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온갖 것들이 정신없이 득시글 거린다. 실제의 바다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더더욱 온갖 '묘사와 감상'들이 사실(fact)의 틈들을 메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고, 작가의 <라 메르>가 쓰여진 방식 또한 그러하다. <라 메르>가 '무엇(what)'을 다루고 있는지 설명하기보다는 '어떻게(how)' 어떤 문장으로 쓰여졌는지를 묘사하는 것이 합당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만약 제 3자에게 이 책을 설명하려면
(1) 상당히 많은 부분을 직접 '인용'하여 소개해주거나
(2) 글이 쓰여진 '방식'에 대해 추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만이 대체로 가능할 듯 싶다.

따라서 (그럴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 책의 내용을 사실(fact)의 측면에서 접근하려 한다면 작은 혼란을 맛보게 될 것이다. 1861년 출판이다. 과학적 사실 여부나 남성이 봐도 불편한 19세기 남성 우월주의적 표현 같은 것을 차치하고라도 작가는 이미 달빛에 취한 시인처럼,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사실과 감상과 추측과 창작을 뒤섞으며 자신만의 풍성한 이야기를 시작한 상태다. 무언가에 단단히 필(feel) 받은 것이다.



[벨일의 폭풍] 1886, Monet, 개인소장

 
<라 메르> 전체에 흘러넘치고 있는 이 열띤 감성과 같은 것의 정체 어쩌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쥘 미슐레' 항목의 설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슐레는 〈프랑스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 르네상스부터 대혁명 직전까지의 제2부(11권, 1855~67)를 완성했다. 불행히도 그는 성직자와 국왕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문서를 성급하게, 마음대로 다루며 상징적 해석에 심취했기 때문에 이 책들은 내용이 왜곡되어 환각이나 악몽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왜곡은 마녀를 신에게서 버림받은 영혼이며 교회의 반(反)자연적인 금지령에 희생이 된 것으로 보고 마녀에 대한 변론을 전개하고 있는 책 〈마녀 La Sorcière〉(1862)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뒤 더욱 새롭고 행복한 영감에 사로잡혀 〈새 L'Oiseau〉(1856)·〈곤충 L'Insecte〉(1858)·〈바다 La Mer〉(1861)·〈산 La Montagne〉(1868) 등 자연에 관한 몇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책들은 1849년 자신보다 30세 어린 아테나이 미알라레와의 재혼에서 자극받아 쓴 서정적인 작품으로, 최상의 산문작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구를 담고 있다.
 
   

 
3개 국어를 구사하면서 석박사 학위를 4개나 가지고 있던 프랑스계 캐나다 교수 한 분이 떠오른다. 그가 영어에 프랑스어와 다국적 유머를 섞어가며 신나게 이야기 할 때면 남자도 저렇게 수다스러울 수 있구나 감탄(?)하곤 했다. 때론 너무 현란한 표현과 제스처에 질릴 때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분을 자주 떠올렸다. 당신 같은 분이 19세기 프랑스에도 계셨던가 봐요 라고. (아, 그러고보니 그분에게도 거의 띠동갑의 젊은 아내가 있었더랬지. 그것 참...)

 


[Coming into Port-Goulphar, 벨일] 1886, Monet, 개인소장

 
무엇보다 번역자와 출판사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원래 미슐레의 문장 자체가 그렇다고 들었지만, 우리말로라도 흔하게 접할 수 없는 현란하고 감수성 풍부한 표현들은 새로 글을 창작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클로드 모네의 표지 그림을 비롯하여 원서에도 없었다는 저자 당대의 삽화들을 골라 넣으면서까지 쥘 미슐레의 유명한 '바다(La Mer)'를 새롭게 되살려 내었다. (외국의 다른 표지에 비해서도 한글판이 본문의 실제 느낌을 잘 반영한 듯.)




   
  바다라는 큰 세계의 일은 현실적이다. 바로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다. 사랑은 그 밤을 풍요롭게 채운다. 사랑은 깊은 곳으로 잠수하고, 가장 작은 생물에게서 더욱 넘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정말 원소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것을 붙잡아 보면, 여전히 사랑하면서 또 다른 개체로 분리된다. 생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어떤 유기적 기관도 없는 그런 것에서, 이미 모든 생식 형태가 완전하다.
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 (p.103: 풍요로운 바다)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출간이 거듭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펴 보기 전까지는 이런 느낌의 책일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설도 아니면서 이처럼 페이지마다 숱한 묘사와 감상이 출렁이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산문과 운문, 사실과 허구를 현란하게 뒤섞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뚜렷이 갈릴 수 있는 독특한 표현들. 불확실함, 감흥의 과잉, 근대 유럽의 정신, 기이하게 들떠있는 열정, 다양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특이한 묘사의 호흡... 이런 온갖 것들이 뒤엉켜 형성해낸, 여전히 책을 열면 와르르 쏟아질 듯 출렁이는 무엇.

<라 메르>는 그 자체가 말들로 넘실대는 수사적 표현의 '바다(La mer)'이다.
이 책은 정말로 바다의 그 무언가를 기묘하게 닮아있다.



[벨일 해안의 폭풍] 1886, Monet, 오르세 미술관

 

P.S.

웹서핑을 해봤지만 이 책 표지에 사용된 클로드 모네의 원작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책날개에 1886년작 <벨일 해안의 폭풍>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검색으로 발견되는 그런 이름의 작품은 바로 위의 그림뿐이고, Belle-ile 이나 Monet, Tempete 등으로 연관 검색을 해보아도 표지의 바다 일부를 담고있는 그림은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은 개인 소장가의 희귀본 같은 것일까 못내 궁금하다. 덕분에 130여점 모네 그림을 실컷 감상하여 눈이 호사한 하루.

P.S. 주의 : 배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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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3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3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0-12-24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에 오는 사람 중에 제일 미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꽃다발 들고 오는 사람이예요. 그 어떤 훌륭한 그림이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두 자연 그대로, 예를 들면 꽃이나 나무 바위 돌 같은거요, 그런 거에는 못당해요. 그림 보러 오는 사람이 그림보다 더 주목 받을 꽃다발을 들고 오는 것처럼 센스 없는 짓이 없는 거죠. 반대로 제일 고마운 사람은 누굴까요? 그림 사 주는 사람이죠."

현직 화가한테 들은 얘기예요.

바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림은 못 사드라두 책은 사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바보~ 뭐하러 그래. 30분만 달려가면 진짜 바다를 볼 수 있는데! 이러고 있네요. 제가.. ㅋ

2010-12-27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2-27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바다와 관련된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던거 같아요.
바다가 생각나면 한번쯤 읽어보면 참 좋은 책인거 같습니다.
바다와 관련된 모네의 그림,, 찾기가 어려우셨을텐데
글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herenow 2010-12-27 23:25   좋아요 0 | URL
원서엔 없었다는 그림들을 골라서 실은 번역자와 출판사의 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표지의 원작 그림은 아직도 못 찾았답니다.
(누구 아시는 분 좀 알려주시면... ㅠ.ㅠ)
이 책 서평에 퍼놓은 모네의 그림들이
메리포핀스님이 말씀하신 '꽃다발'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랍니다. ^ ^;

ashilver 2016-08-03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표지 그림: Claude Monet _ Sea Study (1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