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봐야 하나요?"

올해 중순, 트위터의 독서 관련 모임에 누군가 올려놓은 질문이었다.
곧바로 여러 개의 멘션이 달렸다. 대부분은 너도 나도 가볍게 "네, 한번 읽어보세요."

이상한 것은, 당시 질문을 올린 사람도 답변을 올린 사람의 대다수도 피차 그 책을 확실히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고 있더라는 거다. "무슨 책인지 잘 모르지만 유명하다고 하니 한번 읽어볼까요?" 라는 질문에 "무슨 책인지 잘 모르지만 유명한 것 같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라는 기묘한 답변들... 문득, 책상 위에서 힘겹게 진도를 달리고 있던 <정의…>가 빼꼼히 내다보는 것 같아

"본인이 직접 내용을 살펴보고 결정하는게 어떨까요?"
라는 지극히 당연한 멘션을 달았더니, 질문자를 포함해 해당 타임라인이 오히려 뜨아해 하는 분위기다.(뭥미?) 내친김에 몇 마디 말을 섞어본 즉, 평소 윤리/철학 분야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도, 롤스의 <정의론>을 들어본 적도, 사회적 이슈에 별반 고민한 적도 없는 평범한 20~30대 젊은이라 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하도 여기저기서 이 책을 들먹이니 읽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이 되어 남들에게 대신 선택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책인지 서점 가서 직접 확인해볼 생각은 딱히 없으면서 말이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나의 '패션'이었다.

왜 그토록 이슈가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단행본 <'정의란 무엇인가'는 무엇인가>라도 한 권 낼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했다. '정의에 목말라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자조적 분석, 현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 미국 출신 엘리트에 대한 한국사회의 동경, 딜레마 문답식의 교수법, 하버드大라는 상징성, 인상적인 강의실 장면,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베스트셀러를 부채질한 출판시장, 동일 저자/유사 도서의 출간과 해명, 정의에 대한 무수한 담론과 도서 리뷰, 마이클 샌델 교수의 방한과 5000명 공개강연의 열풍, 그 강연에 대한 취재 기사 등등등...

이유야 어쨌건 놀라운 것은 이 책의 '알맹이'보다는 거기 붙은 '라벨'로 인한 관심 자체가 엄청났다는 점이고, 평소 정치철학이나 윤리철학, 정의론 같은 분야에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들조차 부담없이 이 책을 손에 들더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따분한 개념들을 딜레마 상황을 통해 쉽게 풀어내는 저자의 강의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책 제목만을 가지고 그 내용을 지레짐작하면서 나름의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경우를 접할 때면 뭔가 좀 떨떠름했다. 저자가 원하던 '시민사회의 자발적 고민'보다는, 귀에 익숙해진 '제목'만으로 이미 <정의>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말의 거품들...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떤 면에서 책으로서의 '내용'이 휘발된 채 유통되는, 일종의 'Must have' 아이템이나 대중문화의 기호품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더랬다.





역시 복합적 이유로 이 책을 접했고, 운좋게 평화의 전당에서 저자의 공개강연까지 듣게 되었다.
나름 경험해본 <정의>의 미덕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것.

내 관점과 가치관이 상황에 따라 교묘하게 말을 바꿀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 주고,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입장과 관점에도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 막연하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던 정치/사회/윤리적 이슈들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볼 직접적인 기회를 제공하더라는 것.


경희대 강연에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는 그랬다.
"이게 뭐야. 말만 빙빙 돌리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는 않네."



2010.12.13. 경향신문 만평



자, 누군가 하버드 모범답안을 떠먹여 주길 기대하며 한번의 되새김도 없이 널부러져 있을 동안, 대한민국 정치권은 "이것이 정의다!"하며 '그들만의 정의'를 강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번, 책상 위에서 진도를 나가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새책은 표지에서부터 그 당위성을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왜 도덕인가?>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의 다른 저서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 2005)>으로 언급된 바로 그 책이다. (척 봐도 이렇게 한국판 책제목을 뽑아낸 그 사람에게 판매이익의 일부를 인센티브로 지급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도덕>은 다행히 <정의>보다 쉽게 진도가 나아간다. 

그리고 마이클 샌델 자신의 견해가 직접적으로 더 뚜렷이 제시되어 있다. <정의> 책이나 강연에서 '그러니까 당신의 주장은 무엇인가?'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반가워할지도 모를 일인데, 앞서 문답식 강연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서인지 조금은 낮선 느낌이다. 질문을 통해 딜레마에 빠트리고 독자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기 보다는, 한달음에 술술술 관련된 사건과 이론들을 끌어와 설명하면서 다양한 이슈들을 훑고 지나간다. 굳이 서문을 읽지 않더라도 쌍방향 소통의 강의가 아니라 잡지에 기고한 일방통행 칼럼의 느낌이 곳곳에 배어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대체로 생소하지가 않다.

낙태, 동성애, 존엄사를 비롯하여 배아복제, 환경오염, 역사 유물, 핵전쟁, 소수집단 우대정책, 공공기업의 상업화, 공정한 법 집행 같은 이슈들은 <정의> 뿐만 아니라 TV나 논술지문 같은데서도 흔히 접할 수 있던 것들이다. 다만, 상당 부분 미국사회 고유의 주제와 시각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러한 정치/문화적 배경들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용은 크게 3부로 나뉘어진다.

- 1부는 지난 20년간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위와 같은 도덕적 현안들을 다루고,
- 2부는 현대의 다양한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본격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 3부는 미국 정치의 전통과 미국 정치사의 주요 논쟁을 짚어보면서 질문을 던진다.





'왜 도덕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발견하려고 샅샅이 훑어보게 되는 1부까지는 그다지 학술적인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워밍업 단계.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근사한 부제가 붙은 2부 부터는 롤스, 칸트, 벤담, 밀, 듀이 등 이 분야의 낮익은 슈퍼스타들과 함께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실용주의 등, 역시 낮익지만 쉽게 친해지긴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 사이에 본격적인 비교/분석이 펼쳐진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따지고 그러세요.' 라든지, '그렇다 한들 실생활에서 이런 개념을 인지하고 써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라는 볼멘소리가 불쑥 입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즈음, 그는 꽤 근사한 설명을 통해 학습동기를 부여한다.
 

   
  우리의 관행들과 제도들은 이론의 구현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론과 연관되는 것이다.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문제들, 즉 정의와 가치, 좋은 삶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들에는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 바로 항상 '모종의' 답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행과 제도에 내재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철학으로서 유지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그러한 정치철학의 불안 요소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오직 하나의 정답을 모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답에 따라 살아간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이 여러 개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일종의 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답을 허용하는 정치이론이 바로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p.175~176; 관행과 제도에 내재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책의 딱 절반쯤, 위의 인용문이 포함된 8장章 23페이지 분량의 내용은 알쏭달쏭한 개념들에 지쳐갈 무렵 다시금 눈을 번뜩 뜨이게 만드는 부분인데, '옮음과 좋음'이라든지 '정의와 공동체' 등 자주 언급되는 마이클 샌델의 논제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침 알라딘 '로쟈'님의 서재에서 이 챕터와 책에 대해 언급한 글을 발견하여 반가움에 링크를 걸어둔다. 언급된 영어 원문은 여기로. 놀랍게도 1984년에 쓴 글이다.) 
 




일견 엇비슷한 개념과 이론들에 대해 날카롭게 그 차이점을 도려내고 그 사이에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걸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작업들은 해당 분야 전공이 아닌 독자에게 몇 번이나 앞 뒤를 들쳐보는 독서를 요구한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 자신은 그런 단락에서 오히려 신나게 글을 써내려 갔을 것 같아 그의 미소짓는 얼굴이 자꾸만 오버랩되니 참으로 묘한 기분.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것은 존 롤스와 그의 <정의론>이다.

이 책 2부의 절반은 아예 롤스가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불의에 맞서는 정의'쯤으로 가볍게 집어 들었다가 생뚱맞은 사고실험(!)과 겹겹이 둘러싸인 이론에 질겁을 하게 만들었던 그의 <정의론>. 고작 '무지의 베일'이나 대충 주워담을 정도이지만 그나마 이 이론이 친숙하게라도 느껴지게 된 것은 김영사 지식인마을 <정의로운 삶의 조건> 이래 <정의>와 이 책의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나는 1975년 옥스퍼드 대학원을 다닐 때 처음으로 <정의론>을 읽었고 그의 책은 나의 논문 주제가 되었다. 이후 나는 자유주의에 관한 그 위대한 저서의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채 하버드대 정치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런데 하버드에 도착하자마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 반대편에서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 존 롤스, R-A-W-L-S입니다." 신께서 몸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말하면서 자신이 누군지 모를까봐 자기 이름의 철자를 일일이 말해주는 것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p.266~267; 롤스를 기억하며)
 
   


'신께서 몸소 전화를 걸어'라고 했지만, 주지하다시피 마이클 샌델은 롤스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옮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는 롤스의 주장 하나만 가지고도 그는 롤스의 '자유주의'와 견해를 달리하는 소위 '공동체주의'의 편에 서 있다. 그의 명성이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일정 부분 얻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식으로건 롤스와 대립각을 세우며 반목하는 관계는 아니었을까 하는 섣부른 짐작도 해봄직하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롤스의 이론을 다각도로 비교 분석하고, 미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나 개인적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에서는 오히려 해당 분야의 대선배에게 바치는 은근한 존경의 마음이 내비치어 신선한 느낌이었다. 견해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정당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모습을 본다는 게 그리 흔치 않다는 새삼스런 발견도 함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p.266)고 했다지만, 역시 그에 못지않게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한국을 돌아보면 인물과 상황에 대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온갖 뭐뭐 '~주의'로 뒤범벅 되어 있던 롤스 고개를 넘어와 책 후반의 3부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에 다다르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치-시민사회가 직조해낸 미국의 '민주주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와 경제 논리에 침식당해 자유와 도덕적 가치를 위협받고 있는 시민과 공동체의 현실... 결국 마이클 샌델이 다시 역설하는 것은 글로벌 경제 시대의 민주주의를 떠받칠 수 있는 '시민의식'의 회복이다. 그럼 무엇을 통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이웃에서 국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정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애매모호한 통치권에 저항하고 다중적인 연고적 자아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 특히 두드러지는 시민 덕성은 때로는 주어진 의무를 수용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자신의 길을 협상하고,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
(p.303~304; 시민의식은 과연 회복될 수 있는가 - 시민생활 회복을 위한 과제들)
 
   


그리고 그 시민의식이 정치철학과 맞물려 운용될 수 있는 공간은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community)'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접했지만 아직도 왠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동체'라는 용어. 미국이 연방정부 체제라서 그런가 싶다가도,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거치는 동안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을 고작 '옛날엔 그랬었지' 내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면 미국의 사례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다. 신자유주의도 일종의 정치철학(?)인양 '미국 무작정 따라하기'에 빠져있는 어느 '국가공동체'의 현실이 어느새 1부 내용들과 자꾸만 교차 편집되어 떠오른다.
 

   
  통치와 상업주의가 지나치게 뒤섞이는 현상은 우려의 수준이다. 정치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커지면 정부 관리들은 대중문화와 광고, 오락 등을 이용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를 높이려 애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위장된 권위가 실패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확실하게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중략) 하지만 국민은 고객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들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올바르게 시행된 정치는, 국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올바른지 판단한 후 그 욕구를 수정하도록 이끈다. 고객과 달리 국민은 때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와 상업의 차이점이며 애국심과 브랜드 충성도의 차이이다.
(P.40~42; 공공기관이 상업화돼가는 현상)
 
   

 




2010년 8월 20일, 경희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인 메모)
 

- 경제를 우선시하면 윤리, 정의, 도덕과 같은 의미있는 주제들이 잘 다루어지지 못한다.

- 도덕적 질문들이 정치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그들에게 맡겨두면 안된다. 시민참여가 필요하다.
   정의에 위배되는 결정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삶을 통제하려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 하나의 획일적 정체성을 설정하기 보다는,
   구체적인 생활터전 속에서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고민해보야야 한다.

- 적극적이고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시민들이 서로 다른 신념을 들어주고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미 2005년에 펴낸 에서도 이런 생각은 고스란히 결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뭐뭐' 주의와 개념들이 분명 생각의 방향과 범위를 넓혀주지만, 이러한 기본적 뼈대를 숙지하고 그의 글을 읽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철학적 개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최소한의 지표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가져보게 된다.




재미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때와 마찬가지로 <왜 도덕인가?>라는 한국판 제목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처럼 슬그머니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 원제
<왜 도덕인가?>    ← 원제

아마 이번에도 미처 내용을 챙겨 읽지 않은 사람들까지 제목에 자극을 받아 '왜 지금 도덕을 이야기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되먹여보고 있지 않을까?

<정의>가 안겨준 독서체험과 말로만 듣던 하버드 명강의가 만족스럽긴 했지만, 마이클 샌델이나 그의 저작들에 막연히 열광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 열광이 원서 제목에 덧붙여 창작된 '번역본 제목'에 어느 정도 힘입은 것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등 이 책들이 펼쳐놓은 다양한 정치철학의 세계에 빠져들어 그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해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체험이다. 그러나 '가정'과 '조건'에 의해 다양한 견해차가 곁가지로 뻗어가는 '개념'들에 휩쓸린 나머지, 그가 몇 년째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공동체의 위기'나 시민 각자의 자발적 고민, 그리고 여러 가지 답을 허용하는 열린 대화의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책 제목이 건드려놓은 '정의'와 '도덕'에 대해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과 '공동체적 관심'이 한데 모여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가만히 빌어본다.

책을 덮으면, 이제 스스로 생각을 해보아야 할 시간이다.




 평화의 전당 앞, 내한 강연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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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0-12-21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금 추천을 눌렀지만, 이 리뷰는 좋은 리뷰일까요?
리뷰를 읽고 책이나 저자에 대한 관심은 생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의-도덕-철학-정치-,,,
평소엔 관심없던 단어가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게 생겼네요.
생각하게 하는 리뷰인건 확실해요.

herenow 2010-12-22 15:01   좋아요 0 | URL
엥.. 좋은 리뷰일까요? 라는 부분에서 한 순간 삐질...
다행히 책이나 저자보다 '주제'가 관심을 끌어 당겼다면
꾸역꾸역 힘들게 읽고나서 리뷰 적은 보람이 있네요. ^ ^;

2010-12-22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2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erenow 2010-12-23 17:01   좋아요 0 | URL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자'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 같은 표현을 보면
원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긴 합니다.
같은 개념을 문맥에 따라 달리 말한 것인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개념인지 헷갈리지요.

'옳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p.219 등)는 식으로
'옳음=권리', '좋음=선' 관계로 대부분 의미를 풀어가지만
'선(옮음)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p.176)이라고 일부러 괄호안에 '(옳음)'을 넣어
'옳음=선'이라는 관계를 표기해놓은 경우에는 이게 오타가 아닌지,
원문에선 어떻게 적고 있는지 역시 확인해보고 싶어집니다.

번역자가 서로 다른 것도 분명 글의 느낌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cyrus 2010-12-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 책도 읽어볼까 생각중인데
herenow님께서는 <정의>보다 <도덕>이 더 쉽게 읽혀진다는 내용을 보면서,
또 한 번 머리 아파 오기 시작하네요. 살면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간단한 주제이면서도
막상 책으로 읽을 때는 여간 쉽지가 않네요.
도서관에서 빌려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기에는 어려운 책인거 같습니다.

herenow 2010-12-23 07:50   좋아요 0 | URL
순전히 제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직접 책을 펴서 확인해 보시기를... ^ ^;
<정의>는 딜레마 상황을 통해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아서 쑥쑥 진도가 덜 나간 것이구요,
<도덕>은 읽어 보셨겠지만 대체로 일방적인 설명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일일이 고민 안해보고 그냥 읽어 나간다면 <정의>가 오히려 <도덕>보다 쉬울 수 있을테지요.
제목이 그냥 '정의'와 '도덕'이지, 사실 저 양반이 다루는 내용은
우리가 일상에서 가볍게 다루는 그 '정의'와 '도덕'이 아니잖아요. ^ ^;;;

2010-12-27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7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8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 캐주얼 플래너 위클리 48절 B형 - 브라운

평점 :
절판


휴대하기 좋고 가장 실용적인 크기 + 가격 + 디자인. 부담없는 선물로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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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0-12-1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수첩을 많이 쓰는 사람만이 알 수 있죠.
저 크기가 가장 실용적이란걸..
그나저나 세월은 왜 이렇게 빠르답니까? ㅜㅜ

herenow 2010-12-17 00:0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연말되니 더 가속이 붙은 것 같네요.
(ㅠ.ㅠ)
 
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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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몸으로 말야, 직접 체험해 보고,
그 중에서 자신이 느낀 것과 생각한 것,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잖아?
그런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을 존경해. 신용도 하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척이나 하는,
타인이 만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기만 하는 인간일수록
잘난 척만 하지.
-124쪽

난 말야, 타인에게 죽여 달라고 하고는
죽이는 법에 불평하는
그런 인생 보내기가 싫어졌어.
여길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코모리 사람들...그리고 부모님도 존경할 수 있게 됐어.
내용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오셨구나 라고.
-127쪽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집중해.
다치기 쉬우니까.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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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강 회복 기념 선물
    from 제발 제발 2010-12-11 20:33 
                  서재 이웃 herenow님 선물, 리틀 포레스트1,2  수술하고 45일이 지났습니다. 아직 수술 자리가 남의 살 같은 느낌이라 저는 병원에서 보낸 9일을 매일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한테는 이미 멀고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번에 서재 이웃 herenow님께서, 수술 회복 기념으로 이 책을 선물
  2. 만화책입니다. 요리책이구요, 에~ 또~ 귀농일기? 전원일기? 그 중간 어디쯤.
    from 제발 제발 2010-12-13 17:22 
    작가도 몰랐어요. 출판사도 그닥 유명하지 않아요. 처음 보는 표지라 신간 서적인줄 알았어요. 심지어,  만화책이라는 것도 책을 받고 알았어요. (저는 밑그림같은 만화, 단순하지 않고 이렇게 수채화 밑그림 같은, '만화'라는 느낌보다 '스케치'같은 이런 만화책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책엔 그런 만화 취향이 문제가 안될 정도로 저를 확- 끌어당기는 한 방이 있어요.)  이웃(herenow) 서재에 놀
 
 
잘잘라 2010-12-0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무조건 사서 봐야겠어요.
밑줄만 그어놓은 리뷰가 이렇게 강렬할수가!!!

2010-12-07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8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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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3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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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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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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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가 꽤 높다.

"한 권으로 읽는 인문학 147권" 따위를 예상했다면 그건 좀 아니라고 살짝 말씀드리고 싶다.

그 책들의 핵심 내용만 쏙쏙 뽑아 알기 쉽게 간추려 주는 책도 아니다.

어떨 땐 리뷰 같기도 하고 어떨 땐 비평 같기도 하며, 어떨 땐 책 그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때그때 자신의 감상과 하고픈 말에 더 많은 비중이 실린다.

그의 글은 엄정한 '비평'과 가벼운 '리뷰' 그 사이를 자유롭게 산보하는 느낌이다.

솔직히 말해, "로쟈"를 이미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온라인 서점에 올라와 있는 책소개와 목차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설명은 대충 끝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를 안다면 상당수는 그의 블로그(로쟈의 저공비행)도 알 것이고, 그의 글 쓰는 스타일도 알 것이며, 책소개와 목차만 훑어보아도 눈에 익은 글들이 많을 테니깐. 한국의 '책 좀 본다는 사람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터이다.

그러나, 대뜸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부터 물어본다면 설명이 좀 길어진다.
아니, 사실은 그럴 때에도 블로그 주소부터 알려줬을 것 같다. 



 

뒷표지에 '매일 천 명 이상의 사람이 들락거리는 강의실'로 표현된 그 블로그에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책에 대한 글'이 올라온다. 처음에는 정말 무슨 '책 읽는 기계'이거나 '로쟈'라는 이름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독서집단 같은게 있는 줄 알았다.

가만히 보면, 올리는 모든 글이 온전히 그의 글들만은 아니다.
주요 일간지에 실린 괜찮은 도서 소개를 하나 슥~ 갈무리해온 다음, 관련된 원서 표지나 주제에 관련된 이미지를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기사의 앞 뒤로 짤막한 멘트를 다는 경우도 많은 그의 블로그 스타일은 다른 '인터넷 서평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이 책에 대해 그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준다는 것은, 웹툰 작가가 웹툰을 엮어 책으로 내었는데 공짜로 그걸 볼 수 있는 온라인 주소를 알려주는 기분과 조금 흡사하다. 하지만, <한겨레21>, <시사IN>, <출판저널>, <텍스트>, <공간> 등등 다른 매체에 기고된 글들이 엄청 많기 때문에 그런 걱정일랑 안 읽어본 글들을 읽는 데에 돌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제법 많이 덧붙여진 [P.S.]들도 재미와 부담을 함께 가중시킨다.  



그가 작심하고 쓰는 글에는 정교하게 켜켜이 쌓아올린 섬세한 독서의 흔적이 있다.
빵으로 비유하자면, '바움쿠헨'이나 특수한 종류의 '패스트리' 같은 것인데, 한 가지 결과 맛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문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 자연과학, 정치, 심리학 등 다양한 재료가 서로 얼기설기 엮여서 독특한 지식의 결을 구성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학자적 자세와 양심이 마음에 든다. 오타나 오역에 대한 가차없는 지적과 비판,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용어를 곰씹어 사용하는 그 태도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싶다. 어색한 번역을 가지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것은 알라딘 서재에서도 늘상 보아왔지만 이 책에 소개된 다른 글들에서도 여전하니 반갑다.

그는 요컨대 '발췌독'의 대가이다. 워낙 많은 책을 건드리니 당연히 구석구석 다 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남들이 잘 발견하지 못한 독특한 점을 그 책에서 찾아내어 또 다른 지식과 연계하여 소개해 준다. 이미 봤던 책인데도 하나 이상은 꼭 새로 건질 것이 있다는 점이 그의 글을 찾아읽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자유>를 쉽사리 '한권으로 읽는~' 류의 책으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모두 '로쟈에 의해 선별되고 재해석된' 것이므로 이 책을 다른 147권에 대한 소개서 쯤으로 여기는 것 또한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책 앞쪽에 실린 "책머리에"와 "프롤로그 :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를 읽고 그닥 쫄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글들이 원래 그렇듯이, 평소보다 멋있고 좀 거창한 멘트를 집어넣은 느낌이다. 그냥 본문에 실린 그의 글들부터 읽기 시작한다면 심리적 부담이 덜해지지 않을까, 라는 사족.


여기 실린 글들은 기본적으로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뭔가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 자체를 대신해 주지는 않는 법. 분명 이해의 질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 '책' 자체를 직접 읽어보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리라. 그것 역시 "책을 읽을 자유".


P.S.

"아따, 그 양반, 눈알도 부리부리하고 수염도 텁수룩한게 한국어를 아주 잘 하데~. 귀화한 러시아 사람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 인문학에 관심 있다길래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를 소개해 주었더니 며칠 후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아니 왠 러시아 사람? 아하.. '로쟈'는 <죄와 벌>에서 봤는지 어땠는지 러시아 이름인줄 안 것이고, 블로그 대문 왼편에 앉아있는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의 사진을 바로 주인장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 사람은 슬라보예 지젝이라구요, 지젝... (ㅠ.ㅠ)


☞ 로쟈 =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
☞ 로쟈의 저공비행 = http://blog.ala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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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1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 분땜에 책값 장난아니게 나갔어요~~ㅎㅎ

herenow 2010-11-23 01:41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maggie님.
정말 중요한 멘트를 빼먹었군요. ^ ^;

도란도란 2010-11-1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herenow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히어나우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herenow 2010-11-23 01:51   좋아요 0 | URL
방문하여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딜 다녀오느라 이 글을 이제야 봤네요 (이벤트 기간 만료 ㅠ.ㅠ)
흥미로운 내용인 것 같은데, 알찬 서평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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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을 읽어야 하나?' 

신간서평단 도서로 선정된 이 책이 도착했을 때, 약간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조지 오웰은 유명한 작가니까, 라고 말했다면 그냥 한 대 쥐어박았을 지도 모른다. 기실 이것은 서평을 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었건만, 남들이 좋아하는 책이라 해서 무작정 읽을 수는 없다는 얄팍한 자존심.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뭔가 합당한 사연을 붙여줄 필요가 있었던 거다.

조지 오웰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동물농장>과 <1984>가 떠오르긴 하지만, '말하는 돼지'나 'Big brother의 감시' 같은 단편적인 사항 외에는 '어릴 때 읽었던 소설책의 작가' 정도로나 기억될 뿐. G20 개최로 선진 일류 시민이 되어야죠 라고 호들갑인 이 판국에, 꽤 오래 전 '이것저것 자기 생각을 써낸 에세이 따위'를 왜 읽어야 하는거야? <나는 왜 쓰는가> 라니... 솔직히 그 이유는 별로 관심 없는데요, 라며 478 페이지 두툼한 책을 책상 한쪽에 밀쳐 놓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만 쌓여갔다.
 

◆ 스스로를 독려하기 위한 정보 (ㅡ_ㅡ;)

1. 한국인 번역자가 선별하여 엮어낸 29편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즉, 1권짜리 '원서'가 따로 있지 않다.

2. 조지 오웰 = <동물농장>,<1984>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1903년 인도 출생의 영국 작가/저널리스트(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1950년 사망(47세)

3. 왜 그의 에세이를 모아서 펴냈을까?

"18세기 영국 문단 최고의 문사였던 사무엘 존슨 이후 최고의 에세이스트"
   (브랜다이스大 영문과 교수, 어빙 호우)

"오웰의 글이 매력적인 것은 문체 자체가 간결하고 명쾌할 뿐만 아니라 예리한 통찰, 특유의 유머와 독설이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오웰이 주목한 언어의 타락에 대하여 오늘 우리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젖줄에 비유되는 강을 파헤치고 댐을 쌓아 물을 가두는 일을 '강 살리기'라 부르고 '녹색' 뉴딜이라 일컫는다. 오웰은 말한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역자 후기)

인간과,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만든 제도에 대한 경이로운 성찰  (책 뒷표지)


'캬~ 칭찬 일색이로군. 옮긴이의 말이 그럴싸한데?'
목차를 훑어보던 투덜이 서평자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글은 <어느 서평자의 고백>(1946).

   
  그의 서평(800단어 분량이었다)은 다음 날 정오까지 '입고入稿'되어야만 했다.
그중에 세 권은 그로서는 전혀 무지한 분야라서 적어도 50페이지는 읽어봐야 한다. 그래야 저자뿐만 아니라(물론 저자는 서평자의 습성을 훤히 알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자신을 다 드러내 보이는 황당한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오후 4시면 그는 책을 소포 꾸러미 밖으로 내놓긴 하겠지만 여전히 펼쳐볼 용기는 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중략}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점점 추워지고 담배 연기는 점점 자욱해진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아침이면 퀭한 눈에 면도 안 한 얼굴로 고약한 표정을 짓고서 빈 종이를 한두 시간 바라보고만 있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갑자기 타자기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한다. 온갖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자석을 따라 움직이는 쇳가루처럼 척척 제자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서평자는 원고를 들고 나서야 할 때를 3분쯤 남겨두고 정확한 분량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 사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시시한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은 일은 반복된다.
 
   


'아니, 이건 바로 내 얘기잖아?'
나도 몰래 ㅋㅋㅋ 웃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출판문화와 전혀 다르지 않은 당시 풍조, 그리고 서평자로서의 자세를 꼬집는 그 다음 단락에서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연이어 실려있는 에세이는 '앨범의 타이틀곡'에 해당하는 <나는 왜 쓰는가>(1946).

"아주 어릴 때부터, 아마도 대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커서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조지 오웰의 작가론(문학론)과 정치론이 한데 잘 녹아 있는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일종의 짧은 자서전인 이 글에서, 그는 글쓰기의 네 가지 동기를 밝히고 있다'(옮긴이 주). 그 네 가지란? 요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Q: 당신이 글을 쓰는 동기는 다음 4가지 중 어느 것인가?  (   )

순전한 이기심  ②미학적 열정  ③역사적 충동  ④정치적 목적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중략}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중략}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을 때였다.
 
   



◆ 20세기 초반, 파란만장한 글쟁이의 모험담

편당 1장에서 30여장 사이를 오가는 총 29편의 에세이를 통해 (대체로 6장 내외), 참 많은 사건과 사유, 다채로운 글쓰기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그 때는 세계 1, 2차 대전이 라는 인류사적인 Big Event가 발생했던 때 아닌가. 그렇다 쳐도 조지 오웰은 책상앞에 가만히 앉아 글만 써대는 댄디한 샌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났던 그는 영국의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한 뒤 식민지 버마에서 대영제국 경찰간부로 잠깐 일하다가 파리와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도 해보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총상도 입고, 2차 대전 때는 BBC 라디오 PD도 하면서 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게다가 지금과 달리 공산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민족주의/파시즘 하는 '이데올로기'들이 급류처럼 몰아쳐 사람들을 죽이던 그 시절에 독립노동당을 자처하여 공산당 경찰에게 쫒기기도 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면서 날카로운 사회 비평을 쏟아내기도 한다.

얼떨결에 총으로 코끼리를 쏴 죽인 이야기, 노숙자가 보답으로 건넨 담배꽁초, 원자탄, 히틀러, 헌책방, 스페인 내전에 얽힌 정치적 이슈, 대중에 대한 과학교육, 정치와 문학 & 정치와 언어에 대한 고민, 걸리버 여행기, 끔찍한 파리의 병원, 참 좋았던 학창시절,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치열한 작가의식 등등... 현재의 시점에서 보아도 그는 '좌파' 내지 '운동권'으로 분류될 만큼 급진적이고 별난 글쟁이였던 것이다. 단순히 '29편의 에세이'라고 했지만, 그의 인생만큼이나 소재가 다양하고 글솜씨 또한 빼어나서 때로는 소설처럼, 때로는 평론처럼, 때로는 르포르타주나 모험담처럼 다양한 글읽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 1984년 보다 겁나 먼 미래, 2010년

1903년 생이니 내 할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아버지 뻘이고, 주로 활동했던 1930~1940년대엔 우리 아버지 세대들조차 거의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인물인거다. 그러니까, 2084년 정도가 아니라 <1984>년을 '미래'로 보고 소설을 쓸 정도였다면 그가 언제적 사람인지 대충 감 잡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제3세계 국가의 생활이나(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마라케시) 스페인 내전(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런던과 파리의 빈민가를 그려내는 모습(스파이크;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은 얼마 전 다녀온 여행기를 읽는 듯 현장감이 생생했고,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무관할 수 없었던 글쟁이로서의 고뇌는(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좌든 우든 나의 조국; 민족주의 비망록; 정치와 영어 등) 지금 읽어도 역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의식이 그 안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정치와 언어>(1946)를 한번 보자.

   
  나는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가 지난 10년에서 15년 사이 독재 정권 때문에 상당히 타락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부적절한 어법은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습과 모방에 의해 퍼져나갈 수 있다.
 
   


이 대목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의 '소통'과 '서민', '녹색 성장' 같은 말들의 쓰임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것은 왜 그런 걸까? 옮긴이도 잠시 언급했던 그런 상황들이 떠오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민족주의 비망록>(194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부와 세력을 부러워한다면, 유대인을 경멸한다면, 영국 지배계급에 대하여 열등감을 갖고 있다면, 그런 감정을 생각만으로는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인식할 수는 있으며, 그것 때문에 사고 과정이 오염되는 일은 방지할 수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평론(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같은 글은 또 어떤가. 독립만세 부르며 일제 치하에서 막 해방되었을 1946년 당시에 벌써 이렇게 현대적인 느낌의 평론을 쓰고 고민했다니... 詩나 노래, 신문기사, 대화체를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고, 갑자기 '1,2,3' 하고 숫자를 매겨 내용을 정리/서술하기도 하는 등(민족주의 비망록; 행락지; 정치와 영어; 나는 왜 쓰는가 등)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는 지금 당장 인터넷에 올려놓아도 잘 통할 듯 싶다. 오웰의 자연관과 문명관, 예언적인 식견이 드러나 있다는 <행락지>(1946)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호화 유람선이나 '리용 코너 하우스'에 가보면 그런 미래의 낙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다. 분석해보면, 그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도 혼자 있는 법이 없다.
2. 아무도 자기 힘으로 뭘 하는 법이 없다.
3. 어떤 종류의 야생 초목이나 자연경관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4. 빛과 온도는 항상 인공적으로 조절된다.
5. 아무도 음악 소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 곳곳에서 자주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글쓰기'와 '언어'의 사용에 대한 고뇌였다. 물론 '정치적'이라는 형용사가 가미된. 책의 타이틀로 쓰인 <나는 왜 쓰는가>도 그렇지만, 일일이 다 인용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한 언어적 고민들이 그의 글을 이처럼 빛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있는 것은

이 책 <나는 왜 쓰는가>를 읽다보면 어릴적 큰집 2층에 있던, 골동품이 가득한 어떤 방이 떠오른다. 일제시대 때부터 1980년대 까지 할아버지 세대들이 쓰던 물건들이 컴컴하게 들어차 있던 곳.

오래된 책과 물건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가 달린 나무로 짠 옷장, 오른쪽으로 넘기는 세로 쓰기의 두꺼운 전집들, 한글보다 한문이 가득한 옛날 잡지, 말라 빠진 물감들과 청동 촛대, 알 수 없는 도자기들, 큼지막한 금속 라이터, 물소뿔로 만든 돋보기 안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그리고 멈춰 있는 크고 작은 시계들.

그랬다. 시간이 멈춰 있는 곳. 오래된 잡지와 기대놓은 병풍 뒤에서 뭔가 와락 튀어나올 듯 조마조마 하면서도 일곱 살 꼬마에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던 그 곳.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구석구석 새로운 발견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곳.

이 책은 어딘가 그 방과 닮아있다. 오래된 과거가 담겨 있지만 지루하지 않고, 페이지마다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번뜩이는 새로움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처럼.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에서 조지 오웰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었다며 '정치적' 글쓰기의 의미를 슬쩍 밝혀놓았다. 그럼 나는 (서평을 쓸 것이 아니었다면) 왜 이 책을 읽었을까? 벌써 조각보 처럼 이리저리 앞뒤로 다 기워 읽었으면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날카로운 문제의식, 세련된 언어 감각, 독특한 풍자와 유머,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회적 통찰, 진실을 추구하는 남다른 자세 등등.. 남들도 꼽을 수 있을 법한 여러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다! You win. 녹슨 것처럼 칙칙해 보이던 겉표지가 어느새 큰집 2층 방의 금시계 처럼 고상하고 멋있게 보이는 것이, 그의 이름만으로도 책을 찾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순순히 이해가 된다. 이번 서평만 쓰고 나면 읽어야지 하며 벼르고 있던 <1Q84> 셋째 권 대신에 오리지널 <1984>를 다시 빌려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슬쩍 생겨난다. 아하! 그저 '글자'라면 무심코 읽고만 있었던 내게,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떤 기본적인 '까닭'이 그제서야 불쑥 고개를 내민다.

글을 읽는 즐거움, 책을 읽는 재미.

그래, 당신이 언제 어떤 동기로 글을 썼건 간에, 요것이 있었기에 그리 쉽게 세월을 헤치고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닐까? 요것을 담고 있었기에 그 모든 '이유'를 함께 데리고 사람들을 만나왔던 것은 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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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0-12-0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님의 리뷰를 읽고 (특히 어느 서평자의 고백, 인용문) 확실해졌어요.
한편으론 고민이예요. 이미 많은 사람이 한 얘기를 나도 똑같이 또는 비슷하게 쓸거면 아예 쓰지 말자는 주의라서, 이왕이면 남들보다 먼저 읽고 먼저 쓰는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 이 책은 벌써 너무 많은 사람이 읽고 리뷰도 많은데다 hearnow님처럼 이렇게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을 이런 인상적인 리뷰까지!!
그래도 아무튼, ThanksTo♥

herenow 2010-12-03 01:13   좋아요 0 | URL
정말로 하나도 기대 않고 봤는데,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칼럼인지 헷갈릴정도로
글 자체가 재치있고 재미있습니다. 책 읽는 맛이 제대로 나더라구요.
작가의 글빨을 이렇게 전달할 수 있도록 번역하신 분에게도 감사드려야 할 듯..
저의 어설픈 리뷰는 무시하시고, 늘 그렇듯 시원하고 솔직한 서평 남겨주세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