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버튼을 만들기로 했다. 사실, 학교 단위에서 만들면 좋은데, 나는 우리 모임인,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선생님들과 함께 버튼을 주문했다.

   아이들도 모르고, 선생님들도 무관심한 학생의 날. 작년에는 스승의 날에 받은 메세지처럼 학생의 날에 몇 분의 선생님들께서 게시판에 글을 붙이셨다. 그리고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작은 사탕이라도 선물로 주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할까? 나라도 학생의 날의 의미를 놓치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이 버튼을 선물로 나눠줘야지!


학생의 날 기념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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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을 대신할 방법을 고민합니다


글쓴이 : 송승훈, 광동종고 교사

 - 내용 -

1. 체벌을 둘러싼 풍경
1-1. 학교 바깥 풍경
1-2. 학교 안 풍경

2. 내 몸을 되돌아보며 : 폭력의 기억, 새겨짐

3. 어디서 체벌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는가
3-1. 학생에게 모욕당한다고 느낄 때
3-2. 교육을 인간관리라고 보는 관점에서
3-3.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는 생각에서

4. 체벌을 대체해서 해볼 만한 시도들
4-1. 몸을 움직이는 일
4-2. 학습과 관련해서 
4-3. 교사와 학생이 서로 교감하는 일
4-4. 그밖에

5. 체벌에 대한 잘못된 대안들
5-1. 때리는 것보다 더 학생들을 꽉 잡을 수 있어요! : 빽빽이
5-2. 이렇게 감동이 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 반성문 쓰기
5-3. 학교판 박정희 향수? : 해병대 체력단련
5-4. 이거 체벌을 대체한다는 제도 맞아요? : 벌점제도

6. 글을 마치면서 : 남은 이야기
6-1. 현상을 보고 욕하는 것 당연하지만 원인을 살펴달라
6-2. 최고의 의술이란 병이 안 생기게 하는 것
6-3. 폭력에 주눅든 학생은 나-당신-우리 사회 전체다

 

 

세상에는 우리들이 더 미워해야 할 잘못과
스스로 뉘우침 없는 내 자신과
커다란 잘못에는 숫제 눈을 감으면서
처벌받지 않아도 될 작은 잘못에만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우리들
- 김명인, 동두천5,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 체벌을 둘러싼 풍경

1-1. 학교 바깥 풍경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니, 교사가 학생을 너무 심하게 때렸다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했다. 가르쳐달라고 학교 보냈지. 매맞고 오라고 학교 보냈나. 교사는 합법적 폭력배다. 이 멍든 자국 좀 봐라. 한참을 그러더니 갑자기 학생이 교사를 때려버렸다는 소리가 다음에 들려왔다. 막가는 세상이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제 어쩔거나.
   언론에 며칠에 한번씩 교사와 학생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폭력의 가해자로 계속 등장하니, 보통 사람들은 뭐가 뭔지 헷갈린다. 이거 선생이 문제야? 애들이 문제야? 요새 왜 이래 이거, 하고 탄식이라도 할 법하다.
   체벌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하더니 어느날 체벌이 법으로 금지되었단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국회의원 여럿이 교육적 체벌은 허용해야 한다고 서명을 했단다. 참 어지럽다. 한쪽에서 아우성친다.
   “체벌을 없애면, 교사의 권위가 위태로워진다아~”
   다른쪽에서 받아친다.
   “그러면 때릴 권한만 주면 교사의 권위가 살아난다는 말이냐?”


1-2. 학교 안 풍경

   말썽쟁이여서 가끔 학교를 빼먹기도 하지만 총각이라고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지O이. 지O이는 지금 얼굴을 감싸고 내 옆에 서 있다. 얼굴이 넙적한 선생님께 앞머리를 쥐여서 끌려갔다가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맞고 튕겨나갔다가 또 끌려와서 또 맞고 튕겨나간다. 자기가 잘 따르던 남자 선생님 옆에서 계속 맞는 모습을 보일려니, 맞아서 아프기도 아프지만 마음은 더 아프다. 그 여학생이 모멸감을 느끼게 머리를 여러 차례 맞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에서 늦게 나왔다고, 그전에 술 사러 나갔다가 걸린 것까지 합쳐서 혼나는 아이들. 반 전체 아이들이 엎드린 채 담임 선생님에게 걷어차인다. 나중에 양호 선생님이 아이들 상처를 보고 눈물 흘리고, 그 옆반 부담임이던 나는 다음날 경주 어느 또 무슨 유적인가를 가는데 버스에서 그 반 아이들이 안 내려서 곁에 있는 아이에게 물어보다가 기겁을 한다.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다리를 절면서 나를 따라오며 이야기 나누던 그 학생은 “모두 어제 저녁 발에 걷어차여서 아파서 버스에서 못 내려요. 저도 그래서 절룩거리는 거예요.”
   무서운 담임 교사 아래서 늘 겁먹어 지내는 학생들이 쓰는 언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짜증내는 언어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가치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갖는 언어는 풍자의 언어다. 곳곳에 날이 서 있는 말.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뒤에서 상대를 완전히 씹어버리는 말. 건설의 전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공격의 말. 저주의 말. 널부러짐의 말. 자유가 없으니 책임도 없다. 단지 벌이 무서울 뿐. 그러기에 때리지 않는 교사는 우리에게 그간 쌓인 피로를 풀 대상이다. 열린 교사는 힘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닫아버린 문 앞에서 당황한다.
   기죽은 교사들. 누가 봐도 교육적 체벌이 아닌, 폭력의 체벌을 행사하는 교사들은 요즘 좀 기죽어지낸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때리면 큰일난다고 떠들어대는 턱에 그렇다. 학생들이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까지 한다니, 참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교육부장관도 인상이 보통 아닌데, 이런 차에 한번 걸리고 큰코 다치겠구나 싶다. 내 눈앞에서 저 버르장머리없는 애들놈들을 다 때려잡고 싶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잠시 참아본다. 한쪽 귀퉁이에서 웅숭거리던 저 전교조 무리들도 합법화되었다고 아주 기가 살아서, 애들을 좀 때리면 내놓고 눈치를 팍팍 준다. 아~옛날이여. 어디 두고보자. 이 분위기가 얼마나 갈는지.

2. 내 몸을 되돌아보며 : 폭력의 기억, 새겨짐

   내 교단 첫인상은 교생 때 기억이다. 그때 나는 내가 나오고 동생이 다니는 그야말로 모교인 동대부고로 교육실습을 나갔는데, 순간순간 ‘이건 개집이야, 개집’ 하고 중얼거렸다. 저렇게 함부로 맞고 채이면서 어떻게 선생 턱을 돌려버리지 않을까 하고 신기해했다. 어느 한 교생이 4.19를 가르쳤다고 다음날 교생들이 머무는 교실 칠판 위에 빨간 분필로 ‘쓸데없는 것 가르치지 마라’고 적혀 있기까지 해서 교생들은 모두 늘 숨막혀 했다.
   군에서 나는 내 바로 위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보인 적대감에 꽤 심란해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고 내 바로 밑으로 두 명이 들어왔다. 어느 순간 내 전투화 신은 발이 내 아래 병사의 엉덩이에 가 닿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게 굴종해주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다. 그뒤로 그 장면이 머리에 남아서 나를 흔들어댔다. 남이 나를 괴롭힐 때는,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저쪽이 문제가 있고 내 쪽은 문제가 없다고 여겨져서 마음이 편했는데, 내가 남을 때리는 순간 나는 폭력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그뒤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다음 주문에 시달렸다.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래. 원래 사람이 다 그런 거야. 뭘 위해 뭘 노력해. 여기를 벗어날 수 없는데.”
   교사인 내 손에 왜 까닭없이 힘이 들어가지? 왜 별 이유도 아닌데, 쟤를 한 대 때리고 싶지? 괜히 분한 마음이 솟아나니까 등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난다. 돌아보면, 나는 꾸준히 맞으며 자라왔다. 초등학교 때 연습종이를 안 가져왔다고 뺨을 네 대나 맞고 눈물 글썽거린 일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때는 하루라도 안 맞으면 몸이 근질거려서 어색해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동아리 선배들에게 각목을 경험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늘 공권력에 학대당하는 친구들을 보고 지냈다.
   몸에 배인 폭력,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돌아보면, 학교에서 행사되는 폭력은 학교 바깥 사회 분위기와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다. 70년대 학교는 선배들이 후배를 때리고 군기 잡는 것을 방조하면서 은근히 격려한 분위기다. 90년대에 와서 권위주의 사회가 얼마만큼 청산되자, 이제 학교도 그 자유의 바람이 분다. 3년이 안 된 교사는 직원회의 때 발언하지 말라고 ‘아직도’ 윽박지르는 수직적 교무실 문화는 ‘폭력의 문화화’라고 이름붙일 만하다. 우리의 몸은 모두 오염되어 있다.

3. 어디서 체벌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는가

   어쨌든 지금 학교에서 폭력적 체벌은 줄어드는 분위기다. 사회에서 하도 이 문제를 갖고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다. 그러나 이게 진정한 해결방식은 아니다. 교사가 수준이 높아져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권력으로 모순을 내리눌렀기에 그렇다. 교사 집단 스스로 문화를 바꾸어나가서 극복한 게 아니기에, 지금 체벌은 해결의 길에 접어든 게 아니다. 단지 잠복기에 들어갔을 뿐이다.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 다시 발병할 수 있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창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낡은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파괴와 창조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체벌이 왜 생기는지를 따져본다.

3-1. 학생에게 모욕당한다고 느낄 때 :
교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학생이 했을 때, 교사가 자존심을 상해하며 감정이 섞여서 이루어지는 체벌이다. 보통 인간적 감정의 문제여서, 누구나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울컥 하는 심정이 원인이다.
문제가 심각한 경우도 있는데, 이런 흥분이 일상화되어 나타나는 교사가 그에 해당한다. 이런 교사는 까뮈가 쓴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과 닮아 있다. 햇살에 눈이 부시자 기분이 이상해져서 사람을 총을 쏴죽인 뫼르소처럼, 그냥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을 아무 의식없이 툭툭 가볍게 치기도 하고, 때로 힘주어 때리기도 한다.
   이 경우에 대안은 첫째,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풀어가는 기술에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도 일단 하나의 인간관계라 여기면 편하다. 선생님이 앞에 있던 말던 빽빽 소리지르며 짜증내고 인상쓰는 아이들이라고 개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가정교육이 다 깨져버려서 그렇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당장 교사의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보고,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그래’ 하고 말하는 것은 무력할 따름이다.
   한탄하는 대신에, 나는, 내가 교사로서 학생에게 지킬 예의를 깍듯이 지킬 테니, 학생인 너희들도 사람이 사람에게 기본으로 지킬 예의를 교사인 나에게 지키라고 이야기한다. 내 앞에서 나보다 먼저 인상 쓰지 말고, 나보다 먼저 큰소리 내지 말고, 대화를 시도하기 이전에 짜증 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네 앞에서 건들거리지 않으니 너도 내 앞에서 바로 서 주기를 바란다며, 이래야 사람과 사람이 기분좋게 만날 수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하면, 학생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바로잡혀서, 감정적 체벌을 할 기회가 많이 줄어든다.
   두번째 대안은 상황을 ‘객관’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그 학생은 별 생각 없이 어떻게 하다 보니 무심코 나온 몸짓인데, 교사가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체벌의 충동을 넘어서 폭행의 충동까지 생겨난다. 돌발상황을 예방할 수 있게 이런 학생들의 유형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쟤가 왜 저러나”
“어떻게 저 자신이 잘못하고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하고 흥분하지 말고, 이런 일이 대한민국 어느 교실에서든 흔히 일어나는 상황임을 교사가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 한순간 발끈 하고 폭발하는 감정에 교사가 객관적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고로 이어지기 쉬운 충동적 체벌을 상당수 줄일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감정적 체벌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렇듯, 인간관계를 푸는 기술(The Art of Love)에 그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교사와 학생이 있을 때, 그 관계를 지혜로 풀어가는 일은 교사의 몫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사람에 대한 섣부르지 않은 이해와 꾸준한 마음 공부가 필요하다. 克己復禮, 자기 안의 충동적 자아를 이겨야 공동체 윤리가 죽지 않는다!

3-2. 교육을 인간관리라고 보는 관점에서

   인간을 동물과 비슷한 무질서한 존재로 보고, 그런 인간을 통제-관리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정해진 통지표의 길 바깥으로 나가는 행동을 모두 ‘비정상’으로 보기에, 이 관점 아래에서는 병영 수준의 체벌이 일상에서 끊이질 않는다.
   이것은 교육철학의 문제이다. 하나의 ‘가치관’이기에 해결이 만만치 않다. 낡은 관념, 낡은 이데올로기이지만, 통제와 복종 그리고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약육강식 논리는 어찌된 일인지 우리 사회에서 무척 매력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현실에서 대다수 교장들의 가치관이기도 하고, 또 상당수의 학부모, 적지 않은 학생들도 여기에 동조한다. 오랜 권위주의 사회의 산물이랄까. 학교의 통제적 분위기는 교사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 각 교육 주체의 동의에 어느 정도 바탕해 있다. 어떤 체벌 통계조사에서 학생들이 체벌에 찬성한다는 비율이 어느 만큼 계속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의식을 어떻게 전환시킬 수 있을까. 간단히 생각하면 교육청에서 연수하면 되지 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유인물도 몇 장 내려보내고 하는 식으로. 그렇지만 이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솔직히 우리 사회는 창의적인 인간을 요구하는가? 혹시 말 잘 듣고 적당히 순종할 줄 아는 인간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사회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우리네 학교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학교에서 공식 의사소통 체계인 교무회의 문화가 그렇고, 학급 분위기가 그렇다. 이미 온몸으로 그렇게 하고 있기에, 몇 마디 말을 똑바로 한다고 해서 곧바로 바로잡힐 일이 아니다. 꼭 우리 국민들이 재벌을 입으로만 비판하면서, 온몸으로 추종하듯이 말이다. 자기 집안에 재벌에 취직한 사람이 있으면 자랑하듯이.
   사회 전체 문제이기에, 이 부분은 모든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교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교실에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학교에서, 교육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교육부에서 말이다. 이번 보충수업-자율학습 폐지 결정은 교육부가 할 수 있는 좋은 실천 모범사례이다. 입바른 소리로만 입시교육을 비판하지 말고, 현실에 작용하는 힘인 행동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관리의 교육관, 통제적 교육관은, 체벌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다.
   이 교육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 인용한 학생들의 글로 대신한다.


<학생글 인용 : 김O란 학생이 쓴 글, 99년 2월 졸업>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 될 수 없어요'(정명훈, 프리미엄북스)와 같이 나의 선생님이 될 수 없는 분이었다. 단체생활, 단체활동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들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도 침해하셨다. 하다못해 교복 속에 블라우스 대신 폴라티를 입는 것조차 허락없인 안 됐다. 같은 반이라면 모두 다 똑같은 걸 입어야 한다는 웃기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 마치 우리를 야단칠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바로 선생님의 권위였다. “니들도 아니꼬우면 선생해라”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내가 담임선생님께 질려버린 데는 또한가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누군가가 선생님에게 혼나고 있으면 자신들은 신나한다. 선생님은 교묘하게도 그점을 이용하시는 것이다. 언젠가 국어시간에 배운 말이 생각났다. ‘폭력보다도 더 강한 것이 동의이다’ 선생님은 재치있는 말로 창피를 주어 다른 아이들의 웃음이라는 동의를 얻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면서 마치 한편의 코미디 연극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싫다. 그리고 선생님이 누군가를 때릴 때 잔인하게 웃어대는 아이들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다. 누군가가 그건 옳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깨우쳐주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잘 모를 것 같다. 담임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상당수 되기 때문이다.


<학생글 인용 : 강O자 학생이 쓴 글, 99년 2월 졸업>
우리나라는 옛부터 스승의 체벌을 학생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지만 요즘에 체벌은 이런 성격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어느 선생님이 그날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괜한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의 교사들은 체벌에 진정한 의미보다는 학생들이 자신의 틀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체벌을 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 같다. 한때 대중매체에서 체벌에 대한 찬반론이 대두되었는데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교사가 가하는 체벌이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맞을 의향이 있다. 대다수가 공부를 자신이 알아서 하는 자율적인 학습이 아니라 선생님-부모님이라는 공포의 인물들의 집약적인 요구에 따라서 하는 듯해서 지금 학생의 신분을 지니고 있는 나로서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성적은 떨어질 수도 있고 또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일등이 있으면 꼴찌라는 인물이 있고 꼴찌가 있으면 일등이라는 인물이 있듯이 항상 일등만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른들은 너무 일등만을 원한다. 아직 생각도 머리도 몸집도 어린 정말 아직은 어린애 같은 초/중등학생들에게 너무 일찍 큰짐을 맡겨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자신의 키보다 몇 배나 큰 산을 향해 누군가가 가라고 하니까 그냥 가는 것은 아닌지.... 나는 오늘 새삼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주위의 선생님들 중에서 정말 나의 선생님이 아니 우리의 선생님이 될 수 있는 분이 있는지 이것이 의문스럽다. 학교는 정말 우리의 수용소일까?


3-3.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는 생각에서

   이 관점은 학생들이 잘못한 데 대해 말로 일깨워서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생각이다. 감정적이거나 통제적이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적지 않은 교사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두 경우에 견주어보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체벌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이때 대안에는 실천적 대안과 이론적 설득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교사가 전문가라면 때리지 않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고, 사람의 신체에 아픔을 주는 일은 인권에 어긋난다고 주장할 수 있고, 맞으면서 자란 아이는 폭력에 무감해지고 폭력을 내면화해서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해내는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는 논리를 주고받으며 토론할 수 있다. 이들은 학생의 인간 발전을 최고목적으로 하지 않는 왜곡된 가치를 가진 교사들이 아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제 삶으로 교직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칫 통제적 교육관을 갖는 사람이 이 생각을 갖는다면, 더욱 답답한 학교를 만들어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교육 현실이 이 관점의 극복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이다. 교실에서 학습하는 상황을 따져보자.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서 듣는다. 정해진 진도를 정해진 지식을 교사는 전하고 학생은 전해받는다. 이 수동적인 분위기 자체가 체벌을 일구어낸다. 이러한 단순행동의 반복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이 지친 일상이 체벌을 부르는 상황으로 학생과 교사를 이끈다. 여론조사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체벌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사회적 처지에서는 그런 사회적 의식이 다수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
   하루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만 있는 학생이 무슨 예의를 익히고, 무슨 인간에 대한 배려를 배우겠는가. 정해진 커리큘럼을 바쁘게 쫓아가다보면 교사가 자기가 ‘인간’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가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답답한 사회에서 우발적이고 엽기적인 폭력 사태가 일어나듯이, 교사 폭력이나 학생 폭력이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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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4-10-28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참고하고 싶은 글입니다. 퍼가겠습니다.

느티나무 2004-10-2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은 아니지만, 좋은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우주 2004-11-1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지난 수요일, 인제대학교 2학기 수시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응모했으니 희비가 엇갈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오후 수업시간이 무척 어수선했다. 교실은 세 분위기가 섞여서 아주 묘했다. 수시 2학기에 합격해서 이젠 수능시험 준비가 필요 없는 학생, 수시 2학기에 떨어져 낙담한 얼굴로 멍하게 있는 학생, 수시와는 상관 없이 오로지 수능만 보고 공부하려는 학생이 한 교실에 앉아 있으니 그날은 제대로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금요일에도 동아대학교 수시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점심 시간에 도서실에 앉아 있었더니, 3학년의 이OO 학생과 김OO 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도서실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슬쩍 다가갔더니, 후다닥 무엇인가를 감추는 분위기. 뭐 하냐고 물었더니, 수시 2학기 합격자 발표를 보려는데 떨린단다. 그러다가 같이 봤더니 결과는 불합격! 실망한 빛이 가득했다. 괜히 옆에 있었다가 난처해져 버렸다.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떨어진 기념으로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냥 그 순간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녁에 다시 찾아와서 무엇을 사 줄 거냐고 물었다. 좀 생각해 보다가 토요일, 간단한 점심이 좋을 것 같아서 약속했다. 토요일 점심, 이OO과 김OO, 셋이서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그런데 평소에 말 없이 차분한 두 녀석이 담임선생님과의 갈등 상황을 털어놓았다. 학생의 말은 수시 입학 전형에 떨어져서 마음의 상처가 컸는데, 평소에 불편했던 담임선생님께서 그 사건을 두고 비꼬아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입장에서 이야기해 주었는데,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다.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담임선생님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나는 좀 난처해졌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학생의 예민한 감정도 이해가 되고, 다른 선생님의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누군가가 나에게 서운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풀고 있다고 생각하면 썩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니까.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른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올 때 참 어렵다. 학생들이 아직도 선생님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보다는 자신이 서운했던 이야기를 하기가 더 쉽다.

   아무튼 칼국수를 먹고, 학교 주변을 잠깐 산책했다.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평온하던지. 정말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하늘은 아주 맑았고, 거리는 한산했다. 적당한 기온과 따사로운 햇살, 떨어지는 낙엽과 붉은 단풍, 200미터 정도의 짧은 거리를 걸어오면서 '옛날에는...'과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했던 것 같다. 기억나는 대로, 꾸미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그 가을날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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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주 화요일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학생토론대회가 모고등학교에서 열렸다. 우리 학교에서는 박OO양이 교내 대표로 선발되어 이 토론대회에 참가했다. 지난주 화요일은 19일이었는데, 이 날은 중간고사 시험 둘째날이라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본인이 참가해 보고 싶다고 해서 그냥 준비해서 토론대회에 나갔었다.

   토론대회의 주제는 미리 정해졌었는데, 호주제 찬반이었다. 박OO 양은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토론하기로 정해졌고, 우리는 일주일 전부터 저녁 식사시간에 도서실에서 예비 토론을 했다. 시험기간과 겹쳐서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도, 옆에서 보는 내가 조금 안쓰러웠다. 좀 준비가 부족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평소 닦아둔 실력이 만만치 않은 토론자여서 내심 좋은 성과를 기대했었다.

   토론 대회가 열리는 당일. 나와 시험을 마치고 내려온 박OO 학생을 푸른나무님께서 차를 태워주신다기에 근처에서 간단한 햄버거로 점심을 먹었다. 먹으면서 정작 호주제 찬반에 대한 토론은 없고, 그냥 일상적인 학교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아무튼 무사히 토론대회에 참가했고 토론은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결과는 즉석에서 발표되었는데, 주최한 학교의 학생이 최우수 학생으로 뽑혔고, 나머지 5명의 학생들이 우수 학생이 되었고, 박OO 학생은 아쉽게도 수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나는 학교로 다시 돌아가 밤늦은 특기적성 수업을 해야했기 때문에 서둘러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짜증이 팍 났다. 이건 우연일 수 있지만, 너무도 신기한 우연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심사는 토론대회에 지도교사로 참가한 8명의 교사 중에서 4명이 했다. 그리고 심사위원장은 주최 학교의 교사가 맡았다. 수상 결과는 앞에서 말한 대로 주최 학교의 학생이 최우수, 나머지 심사위원 4명의 교사들이 근무하는 학교 학생들이 우수였다. (물론 5명이 우수상을 받기 때문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지 않은 한 학교의 학생도 우수상을 받기는 했다.) 택시 안에서 그 생각이 하다 보니 '울컥' 했다. 그러니까, 어른스러운 박OO 학생이 '선생님께서 제가 젤 잘하는 것처럼 생각하시듯이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자기 학교 학생이 젤 잘하는 것으로 보셨을 겁니다. 저에게 좋은 경험이었어요' 하면서 위로까지 했다.

   오늘 다시 이 글을 올리면서 또 그날 일이 생각나고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주최학교에 전화를 걸어서 비디오테입을 좀 보내달라고 해야겠다. 두번째는 심사결과표를 공개해달라고 요구해서 누가 어떻게 심사했는지 확인을 해야겠다. 비디오를 보면서 분석을 해 보고 싶다. 아무튼 대회는 공정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이 글이 일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느낀 건 이랬다는 것이다. 여기는 나만의 공간이니까,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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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최고야 2004-10-23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스러운 박00.... 어째 시상이 좀 그렇네요. 짜고치는 고스톱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요!!
 

  • 토론대회를 맡은 이유

   사실 토론대회 공문은 방학 전에 왔다는데, 나는 잘 몰랐다. 내 업무담당은 도서관 운영과 교과서 공급이기 때문에 토론대회 개최는 담당부서가 따로 있어서 아마 그리고 간 모양이다. 그러나 2학기가 시작되자 담당선생님께서 공문을 주시면서 나보고 행사를 맡아 달라고 하셨다. 굳이 딴사람의 일까지 떠맡아 가며 '착한 척'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가 아주 관심 있는 '토론회'였기 때문에 한 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 토론대회의 준비 과정

   우선 토론대회에 참가할 희망자를 모으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는데, 학급 담임선생님들께 돌릴 안내문을 만들고, 학교장의 결재를 받았다. 각 학급에서 모인 토론자는 1,2학년을 합쳐 모두 11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개인적으로 찾아와 '토론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두 명의 학생이 더 있었다.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최고의 자질로 생각하는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토론의 주제는 이미 공문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공문에는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토론의 주제가 너무 도덕적인 답을 요구하는 편향된 경향이 있어서, 토론의 공정성과 토론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 '잘못된 법, 지켜야 하는가?'로 큰 주제를 잡았다.

   첫 번째 예비모임에서는 모두 모여서 잘못된 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에 생각을 물었다. 그러니까 여섯명과 일곱명으로 의견이 딱 갈렸다. (ㅋㅋ 극적이었다.) 그래서 서로 모여서 토론팀장을 뽑고, 의견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모임의 계획과 토론의 형식과 소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참고로 토론의 소주제는,

 - '잘못된 법'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떤 법이 '잘못된 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잘못된 법'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 '잘못된 법',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었다.

   두 번째 모임은 야간자율학습 한 시간을 활용해서 도서실에서 예비모임을 했다. 일단 토론의 형식은 교육방송에서 하고 있는 '청소년 원탁토론'의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저번에 나눠 준 토론 안내 자료에 나와 있는 소주제에 대한 내부토론과 자료를 찾는 시간을 주었다. 1시간 정도는 토론준비를 하기에는 아주 부족한 시간이어서 아우성이었다.

  세 번째 모임은 토론 대회 전날 저녁 8시에 모였다. 이번에는 두 팀이 모여서 지금껏 준비한 자료와 토론의 쟁점에 대한 기본 입장을 서로 설명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토론 당일날 서로 딴 영역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팀의 주장을 정리하고, 자료를 찾는 시간을 두었다. 그 날은 비가 엄청 많이 내렸는데도,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이 돌아갈 줄 몰랐다. 겨우 10시 30분에야 도서실에서 아이들을 내보냈다.

  • 토론대회의 실제

   토론대회는 화요일 6,7교시. 며칠 전부터 도서실에 토론을 위한 좌석 배치를 해 두었고,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자리에 두었다. 6교시가 끝나니까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으나, 모두 모이는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드디어 토론대회 시작! 사회는 내가 맡았고, 가벼운 인사와 기조 발제가 이어졌다. 그런데 토론자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들이 떨렸고, 억양도 약간 어색했다. 그러니까 생각도 굳어지는지 준비해 온 자료만 읽기에 바빴다. 그런데,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잘못된 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쟁점도 없어지고, 감정적인 문제로만 치닫다가 생각을 정리할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다시 한 번 토론자들에게 토론의 소주제에 따라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고,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자기에게 유리한 영역에서만 토론하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해 두었다. 두 번째 소주제부터는 준비해 온 자료와 자기 생각을 적절히 소화시켜서 제법 토론이 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소주제에서는 한껏 토론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러나, 7교시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그러다보니, 결론도 흐지부지 되어버렸다.(아이들은 더 해 보자고, 아쉽다고 했지만 내가 수업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마칠 수 밖에 없었다.)

  • 토론대회 이후

   다음날 점심시간에 아이들에게서 평가서를 받았다. 평가서에는 자기 평가와 토론자 상호간의 평가, 그리고 토론회 자체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다. 토론 평가서를 꼼꼼하게 읽고, 자기 평가와 상호 평가를 통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1학년의 OOO 학생을 최우수 토론자로 뽑았다. (이 학생은 10월 19일에 열리는 부산시토론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한다.) 토론회를 참관하러 온 아이들 세 명에게도 토론회 감상문을 한 번 써 보라고 했다. (참관한 학생 중에는 자기가 참가하지 못해서 무척 아쉬워하는 학생이 있었다. 토론회 감상문은 빨리 받아서 정리해 두어야겠다.)

   이것으로 열흘 동안 준비했던 토론회가 끝났다. 요즘도 토론회에 참가했던 그 아이들은 나에게 그 날의 토론회를 이야기한다. 무척 별난 경험이었던가 보다. 더불어 나도 아이들과 무엇인가를 만들어간다는 기쁨에 바빴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열정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언제든 토론대회의 주체는 내 몫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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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정리의 황제... ^^ 이 글 읽으니 토론대회, 함 해보고 싶어지는걸요. ^^ (우리 학교는 이런 행사에는 무관심한 듯 잠잠~ 해요.) 그리고 토론대회 때 오고 갔던 아이들의 구체적인 발언, 주장들도 읽고 싶네요. 정리해주실? 샘은 늘 행복을 만들어가시는 것 같아요.

느티나무 2004-09-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캠코더로 찍기도 했는데... 보여줄 정도는 안 되는 것 같아요 ^^ 혹시 다음에 편집하게 되어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가려고 해도 일이 많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