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
느티나무
J야.
날이 많이 춥다. 추워도 잘 지내고 있느냐? 그래도 거의 지난 1년 동안은 매일 만나던 얼굴이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고 소식도 뜸하다, 그렇지?
그래, 요즘 정말로 어떻게 지내? 머리를 마음껏 기르고 싶다더니 그렇게 하고 있니? 지난 여름에는 나에게 그랬었는데...... 네 시간이 많이 생기면 꼭 책을 읽고 싶다고. 네 바람대로 요즘은 좋은 책에 흠뻑 빠져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친구들처럼 네 손으로 돈을 벌기 위해 어느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난생 처음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텔레비전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려면 어떠냐? 살면서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도 좀 있어야 할 테니까 어떤 것이라도 좋다. 아무튼 J가 여전히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대학이 오늘로 정시 모집을 마감하더라. J, 너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느 대학인가에 원서를 넣었을 테지. 원서를 넣고 나서는 네가 지원한 대학 학과의 경쟁률도 살펴보았겠구나.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하겠구나. 하지만 이 안타까운 기다림의 순간도, 네 인생이 걸린 것 같은 절박함도 지나치지만 않다면 너에겐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나는 학교 밖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가 많다. 그런데, 들른 식당에서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는 네 친구들을 만난단다. 수줍게 인사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학교에서 만날 때와는 달리 이젠 슬쩍슬쩍 어른 티가 나는 녀석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 한편으로 안타까움이 동시에 차 오르더군. 그 설명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에 어쩔 줄 몰라 식당에서 제대로 말도 나눠보지 못하고 나온 경우도 많았다.
J야.
올해는 유난히 늦은 추위로 3월에도 눈이 펑펑 내렸을 때 J를 만났었지 싶다. 그 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책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너와 네 친구들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던지. 그 고요함 밑으로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교실에서 나 역시도 제법 긴장했던 것 같다. 너의 얼굴에서 언뜻 십 수년 전의 내 모습이 보여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는 올해 네 앞에 서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약속했었다. 첫 번째는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네가 미성숙한 개체가 아니라-그래서 많은 보편적인 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제한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한 인간으로 존중하기 때문에 언제나 너의 작은 권리에, 요구에 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내 기분에 따라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대등한 인격체로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로 인정하겠다는 다짐이다. 따라서 언제든 교사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을 내어 친절하게 대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네가 보기엔 못 느낄 정도로 내 실천이 형편없었는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처음의 내 마음은 그랬다는 걸 이 자리에서 밝혀둔다.
두 번째는 너희들과 함께 생각하는 수업을 해 보자는 욕심이었다. 입시를 눈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에게는 무모한 욕심이었는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어느 공부라도 관성화(慣性化) 된 사고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는 공부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지금껏 네가 해 온 언어 영역의 공부라는 것도 굳은 사고력의 다른 말인, 암기력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어리지만, 그래서 어쩌면 더 굳어버렸을지도 모를 네 사고의 틀에 조금의 변화를 주고 싶었는데, 내 수업이 어떠했는지 이젠 네 대답이 궁금하기도 하다.
세 번째는 너의 긴장감을 좀 줄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역시 공부란 쉬운 것은 아닐 터이다. 더구나 아직 왜 공부가 필요한지에 쉽게 공감하지 않는 너와 네 친구들에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부할 때는 늘 긴장 속에서 보내게 된다. 그것도 힘든데, 나까지 너를 지나치게 긴장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내 수업이 편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엉뚱한 짓을 하면 수업에 집중할 수 없는 것처럼 머릿속에는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 찬 긴장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 여유와 집중의 교차 속에서 너희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활용하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을 보니 1년 동안 너의 영혼이 성숙하는데 내가 어떤 도움을 준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닌지, 목표는 제대로 세운 것인지......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은 새삼스럽게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의 흔적들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시간들이 아련하다. 그 시간동안 너를 한없이 부러운 눈길,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던 내 모습을 너는 보았는지?
무엇보다도 내가 부러웠던 건 너의 웃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웃음, 웃음, 웃음.
언제고 어디서고 항상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너를 보면서, 아직은 마음이 순수하고 따뜻하다는 것과 영혼이 건강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세상을 알게 되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생기발랄한 웃음, 좋은 것을 좋은 것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 웃음이 무엇보다도 나는 부러웠더랬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없는 나는 너의 그 웃음에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었고, 너에게 비춰본 나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짓기도 했다.
가끔씩 나는 너에게 이런 이야기도 했었다. 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아름다운 존재라고. 그 때마다 너는 피식 웃으며, 저는 선생님이 부러운걸요, 라고 말하곤 했었지.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네가 부럽다. 한줌도 되지 않는 내가 가진 것이 혹시 너의 부러움을 샀는지 모르겠다만, 네가 가진 가능성에 비하면 사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니, 네가 가진 그 가능성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점심시간 어쩌다가 내가 도서실에 앉아 있을 때, 가끔씩이라도 책을 빌리러 오는 너를 볼 때마다, 여러 책을 앞에 두고 반짝거리는 네 눈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너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점심시간엔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친구랑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그 짧은 시간을 쪼개서 도서실을 찾아온 네가 고마웠다.
오랜 시간 학교에서 말문을 닫고 살아가는 너이기에 점심시간, 도서실은 좀 시끄러우면 어떠냐 싶어서 네가 친구랑 재미있는 이야기로 깔깔대는 것도 모른 척 지나가곤 했었다. 그런 너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어찌나 흐뭇하던지!
이제 졸업을 앞둔 너에게, 흔하디 흔한 잔소리 같은 당부를 하고 싶다. 이 잔소리 같은 말을 내가 너와의 짧은 인연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너는 ‘리차드 바크(Richard Bach)’가 쓴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을 테지? 우리는 그 책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의 놀라운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우리도 더 멀리 날수 있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고는 했다, 그렇지? 조나단이 겪게 되는 시련과 따돌림마저도 얼마나 멋있어 보이고, 거기에 반해서 조나단을 비웃고 배척하는 다른 무리의 갈매기들은 어찌나 답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러나 현실에서 조나단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우리는 어쩌면 조나단처럼은 아니더라도 조나단을 핍박했던 갈매기의 무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되짚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괴롭더라도 우리는 항상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은 오늘 우리가 어디로 서 있고,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별과 같은 존재이지. 비록 마음 속에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향해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결국 그 고통과 시련이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진실로 인간됨의 괴로움을 알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오래도록 자기 마음에 선한 꿈을 품고,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사람, 네가 바로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지닌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워서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마도 너는 현실에서 가슴으로 느껴볼 기회는 적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제부터는 지금껏 배운 지식들이 네 눈앞에 현실 상황으로 펼쳐질 것이고, 너는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네 지식을 검증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껏 네가 배운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네 배움이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부디 세상을 냉철한 이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되, 너의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에 온기가 돌게 했으면 좋겠다. 네가 가진 고운 마음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사는 것이, 결국은 네가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빨리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정말 작별의 인사를 건네야 할 시간이구나. 씩씩한 기상과 착한 마음을 지닌 J. 그래서 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네가 대견스럽고 뿌듯하다. 네 앞길의 시련과 고통에 맞서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럼, 지난 1년 간 내 사랑이었던 J.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