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근무하던 학교의 학생인 OO이. 직접 수업시간에 가르쳐 본 적은 없었지만, 나랑은 인연이 꽤 있었다. 맨 처음 그 녀석이 입학했을 때, 모두들 OO이, OO이 했었다. 학급 반장으로 공부도 잘 하고, 행동도 반듯해서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했는데, 나도 얼핏 그 이름을 기억해 두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러 온 녀석을 보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네가 OO이야?"

"예? 아, 예!"

"무슨 책인데, 한 번 봐! 우와 제법인 걸?"

"......"

   이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끔은 도서실에서 몇 번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지난 여름에 공부하는 모임에서 주최한 여름캠프에 '안해'가 이 녀석을 데리고 왔다. 마침, 나랑 같은 모임에 들게 되어 우리는 죽이 잘 맞아서 놀았다. 녀석이 리더십을 잘 발휘해 준 덕분에 모둠의 분위기가 아주 좋아져서 함께 한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2학기에는 OO이와 조금 더 친하게 지냈다. 도서실에도 자주 놀러왔으며, 한동안 서재를 꾸미기도 했었다. 그리고 교내 토론대회에도 참여해서 부산시 토론대회에도 함께 나가기도 했다. 이후로도 가끔 도서실에 얼굴을 비추는가 싶더니, OO이가 갑갑한 학교가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다가 어제 OO이가 자퇴를 결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안해로부터 들었다. 이미 부모님께서도 자퇴서류를 챙겨가셨고, 녀석의 결심이 확고해서 몇 분의 선생님들의 충고도 소용없다는 말도 붙였다. 문자를 보내 놓고 조금 있으니 전화를 해 왔다. 검정고시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이미 결심은 확고하게 섰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굉장히 자의식도 강하고, 자기 생각이 뚜렷한 녀석이었다. 녀석과의 대화의 일부!

"OO아, 언제 자퇴서 낼 건데?"

"5월을 넘기고 싶지 않아요."

"자퇴서 내는 날은 뭐 할 거야?"

"글쎄요,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요"

"그래, 그럼 자퇴서를 낼 때는 꼭 오전에 내라"

"왜요?"

"네가 자퇴한 역사적인 날이잖아. 우리 같이 기념해야지. 자퇴서 내고 우리 학교로 놀러 와라. 그럼 내가 점심 사줄게"

"그래도 돼요?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내 마음이 착잡했다. OO이에 관해서 안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OO이가 우리 학교로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무슨 말을 하며 맞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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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5-05-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학년인가요?

느티나무 2005-05-2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고2학년이죠 ^^ 안타까워요~!

▶◀소굼 2005-05-26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그렇군요. 친하게 지내는 동생 둘이..둘다 중학교만 나오고 고등학교는 안가서^^;뭐 둘다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으니까...믿어 보시지요^^

느티나무 2005-06-13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워낙 당차고 든든한 녀석이라 큰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직업이 학교에 물들어 있는 '선생'인지라 이렇게 잔 걱정이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가끔 불러다 밥 사주는 것이겠지요? ㅎㅎ
 

 나는 불온한 교사인가?

- 최근 청소년들의 사회적 발언과 우리 사회의 문화지체 현상에 대하여



안준철선생님(순천 효산고) 




   10대 청소년들의 성장과 방황을 그린 영화 ‘그로잉 업(Growing Up)’을 본 것은 기억조차 까마득한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영화 속의 십대 주인공과 같은 또래였든지, 그 시기를 조금 비껴간 대학시절이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의 내 눈에 비친 영화 ‘그로잉 업’은 한 마디로 무지하게 야한 영화였다.

   얼마 후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그로잉 업’의 몇 장면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야한 영화를 안방에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한 영화평론가가 그 영화를 십대들의 에너지가 넘치는 ‘건강한 영화’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뇌인지 가슴에서인지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충격과 이해’, 바로 그것이었다. 내 눈에는 야하고 불건전해 보이는 영화를 건강한 영화라고 소개한 영화평론가의 말이 먼저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나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건강하다’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싹튼 것이었다.

   최근 입시문제를 둘러싼 청소년들의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학생들의 두발규제에 관한 문제도 하나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두발규제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청소년단체 관계자들이 교육부총리 집무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머리 에 떠오른 것은 ‘건강하다’라는 단어였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머리나 길게 해달라는 아이들’이 건강하다니, 나는 혹시 불온한 교사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친하게 지내는 동료교사라도 청소년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로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불온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가령, 학교 간부 학생들이 교문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뒤진다든지,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와 호주머니를 뒤지며 생활검열을 하는 것을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얘기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해지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색을 바꾸는 교사들도 있다.

   ‘모든 문화는 불온한 면이 있다’고 말한 시인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오늘날의 민주국가, 즉 모든 공화국은 당시의 사회통념이나 이념적 잣대로 잰다면 인간의 불온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사실 아닌가. 문화의 이런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친한 동료교사라고 해도 대화의 장벽이 생기고 만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학교의 수직적인 명령체계와 비민주적인 관행에는 불끈하여 반발하면서도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에는 철저히 모르쇠하든지, 아니면 괘씸죄로 다스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교사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인 셈이다.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왜 거리에 청소년들이 보이지 않는지 의아해한다고 한다. 그 시간 대다수 학생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의 과도한 교육열이 그들 눈에는 자연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의 성적(性的)호기심이 불건전하고 위태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희망자 조사를 할 때 나는 학생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거니와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너 왜 멍하니 있는 거야.”
   “저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냐고. 네가 원해서 학교에 남은 거잖아.”
   “아닌데요. 선생님이 강제로 남으라고 해서 남은 건데요.”

   자기 삶을 살고 있지 않는 듯한 이런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우리 교육의 위기가 동기의 위기요, 자발성의 위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런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나라의 백년대계가 심히 염려스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청소년이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그들의 당당하고 건강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꽃다발이라도 한 아름 안겨주고 싶은 나는 정녕 불온한 교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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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지난 한 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새로운 학교에 와서 담임을 맡은 지 겨우 두 달 조금 지난 저는, 한없이 쑥스러운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정말, 스승의 날을 2월로 옮기든지, 아예 형식적인 기념식을 폐지하든지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 저는 매년 '스승의 날'에는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어 조금은 견딜만 합니다. 디지털사진기가 없었을 때는 필름사진기로, 몇 년 전부터는 디지털사진기로 교실에서 저희반 학생 한 명 한 명과 제가 나란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반 교실에서 담임과 함께 찍은 자기 사진을 가지게 되는 셈이지요.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해서 찍는데요, 제가 업히기도, 녀석이 제 등에 업히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고, 팔장도 끼고, 어색한 폼을 잡기도 하고... 사진을 찍을 때 꼭 이렇게 말합니다. (또 유달리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학생이 있는데 이 날만은 스승의 날이니까, 제 말을 좀 들어줍니다.)

   먼 훗날 이 사진 한 장이 너희들의 고등학교 생활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를 찾아올 일이 있으면 이 사진을 꼭 들고와야 내가 네 담임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라고 말이지요.ㅎㅎ

   올해 찍은 사진은 게을러서 아직 인화해서 나눠주지는 않았습니다. 얼른 해야겠네요. 혹시나 우리반 학생 중에 제 담임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자기집 책상의 유리 밑에 고이 끼워두는 녀석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날'이 하도 뻘쭘해서 이렇게 해 오고 있는데,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해 본 게 이런 거 밖에 없으니 참고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월 18일에는 좋은 말씀해 주셨는지요? 17일 밤 늦게 '5/18 동영상 CD' 구하신다고 저희 집을 다녀가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CD를 집에, 학교에, 이제는 한 구석에 밀쳐두고, 먼지만 마시고 하고 있던 제가 참 무심한 교사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이들에게 4.19에, 노동절에, 5.18에 한 마디라도 하고 지나가야하는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5.18이면 떠오르는 시 한 편 보냅니다. 사실, 5.18과 별로 관련은 없지만 저는 이맘 때는 늘 이 시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늘 교실에서 겪게 되는 일이라 그런가 봅니다.

 

  교실 풍경


 - 신현수


(너무나 감격스러운 어조로, 약간 눈물도 글썽이며)

너희들이 태어나던 해에 우리나라 남쪽에서

아주 불행한 일이 있었단다.

어떤 욕심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칼로 죽였단다.

그 후에도 그 일을 다른 곳에 알리고자 한 사람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사람들이

계속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단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이제 정부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고

그날 이후의 희생된 넋들을 기리기 위해

오늘부터 기념일로 제정하기로 했단다, 얘들아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선생님! 그럼 내년부터 5월 18일날 놀아요?

 

   좋은 글 놔두고 앞에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생태기행'(5월 22일) 잘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 말씀 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 메일 열어보시는 선생님, 읽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만, 옆에 앉으신 다른 선생님들께 읽/을/ 만/한/ 메일이 가끔씩 오더라고, 넌지시 한 말씀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답장과 좋은 글도 언제나 환영합니다. 학교에서 힘차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진우도에 다녀와서 곧 소식 전하겠습니다.

나를 키우는 말


 - 이 해 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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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교실 안팎의 의사소통 통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꽃이 되고 싶다

 

김명희(경북 안동여중 교사)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의사소통이다.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보다 나은 학급운영을 고민하고, 좀 더 괜찮은 수업을 고민하는 교사라면 한 번쯤, 아니 시시때때로 고민해 보았을 아이들과의 의사소통 문제. 아이들과 잘 소통하기 위해 교사인 나는 어떠해야 하는지, 먼저 나로부터 고민해 보자.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잘 다가가고 있는지, 나의 미숙함이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데서부터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은 가능해질 것이다. 교사는 훈시자도, 전달자도 아니다. 동등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서 의사소통을 고민한다면 나의 언어 방식부터 되돌아보자.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상대의 모습도 진정 보일 것이다.


그 옛날 나빴던 경험이 지금 가장 좋은 교훈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한 마디 이유라도 물어보면 안 되는 걸까? 선생님들은 자기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를 차근차근 말 좀 해 주면 안 되나? 지금의 아이들도 선생님께 불만과 의아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학생 시절의 억울하고 속상했던 경험이 그대로 나의 학생들에게 되돌려져 되풀이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중학교 1학년, 서울로 유학을 가 낯설게 3월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영어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교과서를 읽는데, 안 그래도 얼굴이 고와 홀려 있는 터에 생전 처음으로 유창한 외국어를 들으니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이 황홀하도록 예쁘고 신기하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헤에~' 하며 웃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책 읽는 것을 멈추고는 "너, 나와!" 하시더니, 나의 뺨을 힘껏 날리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데다가 변명할 틈도 없이 복도에 나가 서 있으라는 바람에 나는 그저 추운 복도에서 한 시간 동안 수치감 속에 떨기만 했다. 그러나 추위와 수치감보다도 더한 것은 '대체 내가 왜 맞았을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감히 그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교사가 되어 생각하니 선생님이 그때 "너 왜 웃었니?" 한 마디만 물었어도, 아니 "얘, 책을 읽는데 네가 웃으니까 마치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다"라고 한 마디만 하셨다면, 적어도 변명이나 해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이후 영어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비언어적 행동을 읽어 내는 마음의 여유와 사랑

 오래 전 밤 11시까지 야간 자습을 하던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피로와 어두운 침묵으로 가득찬 교실, 이 한 시간만 지나면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힘을 쏟으며 들어선 순간, 이 밤늦은 시간에 유난히 교실이 깨끗하고 교탁 위에는 분필통이 단정하게 놓여 있어 기분이 유쾌해졌다. 게다가 그 안에는 예쁜 껌종이로 옷을 입힌 분필들이 한 상자 가득한 게 아닌가. 낭만도 사랑스러움도 사라져 가던 고3 교실에서 모처럼 따사로운 인간 냄새를 맡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무심결에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뭐야 이거, 고3이! 시간이 얼마나 걸릴 텐데!" 그리고는 돌아서서 무심히 칠판에 제목을 적고 있는데, 갑자기 뒷자리에서 후다닥 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저 뒷자리에 앉아 있던 늘 말 없고 공부를 잘하던 한 아이가 그 넓은 교복치마를 한껏 펄럭이면서 쿵쿵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휘익 분필통을 집어들고선 다시 쿵쿵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그런 무례한 모습을 아이들도 처음 보았는지 교실은 죽은 듯 조용하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사과해야지.' '교실을 나갈 때까지는 사과해야지.' '스쿨버스를 탈 때까지는 사과해야지.' … '졸업할 때까지는 사과해야지.'

 그러나 결국 사과를 못했다. 지금까지도 못했다. 그 아이의 이름조차 모른다. 굵은 테의 안경을 쓰고 말수가 없던, 지금은 엄마가 되고도 남았을 아주 오래된 제자.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겁다. 회복이 안 된다. 그런데 찾을 길이 없다. 어떻게 사과하나.

 학생의 말없이 바라보는 표정이나 사소한 몸짓 하나, 그리고 목소리에 담긴 빛깔과 냄새, 감정, 분위기… 같은 비언어적인 행동을 섬세하게 읽어 내기에는 교사로서 나이가 너무 어린 27세였다고 하면 자위가 될까? 아니다. 아직 인간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데에는 뛰어난 시각이나 청각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사랑이 필요할 뿐. '마음'만 있으면 된다. 마음으로 바라보고 다가갈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과의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대답으로 말하기의 두려움 없애기

   요즘 아이들, 흔히 어른을 능가하는 것처럼 굴기도 하고, 또 우습게 여기는 모습도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말할 자리에서는 의외로 부끄러워하며 쑥스러워서 몸을 비틀거나 입을 꼭 다물고 있기가 예사다. 게다가 여전히 사회적 관념이 남아 있어서 '선생님은 어른인데 뭐 이런 게 문제되겠나?' 하며 아직도 선생님과 어른들에 대해 환상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으레 자기들만이 잘못하고 또 용서받는 미숙한 인간들인 양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교사가 아이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또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도 한다. 또한 교사들 역시 '교사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교육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인간임을 제쳐놓고서 오직 교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나 아닌 다른 자의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서곤 한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거짓이 나오고 자기 기만이 나와 결국 스스로 해방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조․종례 시간이나 교과 시간, 틈만 나면 집단상담을 통해 정답이 따로 없는, 즉 자기 느낌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훈련을 하여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읽고 인정하며 자신감을 키워 볼 일이다.


  * 어떤 때 나는 기분이 좋아지는가/나빠지는가?

* 최근에 즐거웠던/속상했던 일은 무엇인가?

* 내가 잘하는/못하는 것은? …

* 전에는 잘/못했는데 지금은 못하는/잘하는 것은?

  * 최근에 실천하고 있는 새로운 일이 있다면?


 어느 날인가 공교롭게도 들어가는 학급마다 속상한 일이 있어 종일토록 열이 가득 올라 있었다. 종례를 들어갔는데도 아이들이 쳐다보지도 않기에 "선생님이 왔는데 본 척도 안 하고! 나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애들이 말을 안 들어 너무나 화가 나 있고 지금도 기분이 안 좋아. 우리 반에 왔으니 너희들이 나 좀 기분 좋게 해 줘 봐." 그러자 아이들은 한꺼번에 쏟아지듯 말을 내 붓는다.

 "할미꽃을 꺾어 드린다." (-평소에 늘 들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명희 선생님!" (-나는 '명희 선생님'이라고 불리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고 한 적이 있다.)

 "억척이가 참 잘생겼어요!" (-억척이는 내 짚차의 이름으로, 나를 칭찬하려면 억척이를 칭찬하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산에 불을 지른다아!"

 엉, 뭐라고? 산에 불을 질러? "아니 얘들아, 산에 불은 왜?" "선생님이 나뭇잎 타는 냄새가 좋다고 하셨잖아요! 산에 불을 지르면 하루종일 타니까 선생님 기분이 좋아지실 거잖아요." 아, 세상에! 그로부터 나는 약 5분간 배를 부여잡으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곤 언제 기분이 나빴더냐는 듯 날아갈 듯 즐겁고 행복해졌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이들이 미워지고 교단이 지겨워질 때면 이 말을 생각하곤 웃음지으며 옷깃을 다시 여민다.


적극적인 경청이 주는 놀라운 효과

 청각장애인은 상대의 입을 주시한다. 최대의 집중력으로 잘 보기 위해 상대방을 손으로 툭툭 건드린 뒤에 말이다. 자기의 말을 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기쁨은 대단히 크다. 마치 내가 굉장히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듯이 생각되어서 말이다.


  3학년 지도부 학생들이 화가 난 채 교무실로 1학년 담임선생님을 찾아와 항의를 한다. 옆에서 보아하니 1학년들에게 실외화를 신고 교실이나 복도를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도, 교실이 현관 옆에 있어 편하다는 이유로 그냥 실외화를 신고 다니며 도무지 고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사연을 씩씩거리며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내내 듣고 있던 1학년 담임선생님이, "아, 1학년들이 형들을 우습게 알고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났구나. 형인데 동생들이 권위를 안 세워 줘서 되게 자존심이 상했겠구나!" 그러자 그 펄펄거리며 열을 내던 그 학생이 "예, 맞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며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가는 것이 아닌가! 교무실에서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선생님들은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압력솥의 밥도 잔뜩 김이 차 오르면 그 김을 빼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극도로 흥분하거나 이성을 잃게 되면 평소 지능의 30%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 이야기를 잘 듣고 맞장구를 쳐 주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마음을 정확히 읽어 주고 알아 주는 이가 있을 때, 그 '이해받는다'는 느낌은 곧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 다가와 한 인간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나전달법의 적절한 사용으로 바른 전달법 익히기

 우리 중세 국어에 '갋다'라는 말이 있다. '나란히 하다, 맞서다, 대결하다'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에 어른과 아이가 말다툼 혹은 말씨름을 하는 걸 보는 노인들이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지 않고 같이 고 있다"라 하시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을 자주 보았다. 동료들이 학생과 대립관계를 보일 때 그들 간에 오가는 언어를 보고 있으면 마치 탁구를 치는 것처럼 '탁-탁-탁-탁'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팽팽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에 바로 그 '애를 갋고 있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야, 너 왜 선생님(어른)을 보고도 인사도 안 해?" "했는데요." "언제 했어? 못 본 척하고 지나갔잖아!" "했어요." "이게, 얻다 대고 말대꾸야. 손들고 무릎 꿇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대체 너 이름이 뭐야?" "그건 왜 묻는데요?"


  뭐 이런 풍경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흔히 본다. 이 경우에 그저 쉽고도 간단하게 왜 마음이 상했는지를 투명하고 정직하게 전달해 보자. 즉, "얘, 네가 선생님을 보고 인사도 없이 지나가니 내가 선생 같지 않아 보여서 그러나 하고 생각돼서 기분이 안 좋구나" 혹은 "너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니? 날 보고 인사도 안 하니 내가 조금 기분이 안 좋구나"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그러면 이 말을 받는 아이는 어떻게 나오겠는가? 적어도 "그건 왜 묻는데요?" 보다 "아, 예. 죄송합니다"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우선 나부터 변화하고 나부터 마음의 문을 열고 아이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정직하게 대할 일이다. 그러면 절로 그 광명은 우리 학생들에게로 가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나를 몰라준다’며 아이들에게 곧잘 서러워하고 속상해 한다. 그렇게 겪었으면서도 내 마음 내 기분을 몰라도 이렇게 모르냐고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선생님의 기분을 잘 모를 뿐더러 도무지 선생님 개인에 대하여 그다지 아는 게 없다. 그저 선생님들은 으레 공부 잘하고 예의바른 아이들을 좋아하겠지 하는 짐작이 있을 뿐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는 어느 날 종례시간에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동시에 친구들의 바람을 귀 기울여 들으며 생활에 반영할 것을 덧붙였다. 물론 담임인 나도 참여하면서 내 차례가 되어서 이렇게 말했다.

 "난 스승의 날에 너희들의 편지를 받고 싶어. 그것도 1번부터 끝번까지 전부 다 써서 파일에다가 번호대로 다 끼워서 말이야. 들꽃 한 다발과 함께라면 더 좋고. 그러면 난 참 행복할 거야."

그랬더니 정말로 스승의 날 아침에 반장이 편지가 가득 든 파일과 들꽃 한 묶음을 내미는 것이었다. 편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무얼 드릴까 고민했는데, 마침 선생님이 편지와 꽃을 받고 싶다 하셔서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참 편했어요. 또 돈이 안 드는 것들이라 더 좋았구요. 선생님, 고마워요.>


표현교육은 목숨을 살리는 교육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표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제 때'에 ‘자기’를 '제대로' 드러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거나 부적절한 인간관계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왜곡된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러한 표현의 길을 못 찾거나 차단 당하면 결국 이 사회는 병든 사회로 가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인간다운 성장과 앞날에 모든 가능성을 피어나게 하는 것은 자유로운 표현을 가르치는 교육에서 비롯된다. 때의 자유로움이란 다분히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덕목인 이성과 절제와 조화가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아이들의 생명을 꽃피우는 표현 교육을 통해 행복은 물론이요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일까지도 모두 우리 교육자들에게 놓인 엄숙한 과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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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화창한 봄날에 학교에서 든 생각들


4월, 우리 반은①

   우리 반은 수업시간에는 산만하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주요 사건/사고의 장본인들이고, 매일 지각하는 학생들이 있으며, 힘이 약한 학생을 골리기도 하는 못된(?) 학생들이 있는 그런 평범한 반입니다. 또, 이런 답답한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담임이 학급 운영을 한답시고 있는 그저 그런 반입니다.

   그러나, 우리 반은 청소를 열심히 하고, 학급일기장을 열심히 써 오고, 대부분은 학교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점심시간엔 활발하게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며, 이번 체육대회의 줄다리기 결승에 올라간 활기찬 반입니다. 매일 점심시간에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고, 공부하느라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의 생활이 행복해질까하는 황당한 고민을 하는 담임이 맡은 그저 그런 반입니다.

 

4월 우리 반은

   3월 말쯤에 가정통신문을 보냈습니다. 이번이 첫 편지라 학부모님들께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정통신문은 꾸준히 보내볼 계획입니다. 이후 학부모님들과 저녁 모임을 한 번 했습니다. 약간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고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을 다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급일기 쓰기는 지난 4일에 시작해서 지금껏 잘 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내용도 충실하고, 반응도 꽤 좋고, 빠트리는 경우도 적어서 담임인 제가 꼼꼼하게 잘 챙긴다면 이 일기장이 학기말에 좋은 추억이 될 듯 합니다.

   점심시간엔 1층 교무실 뒤편으로 나가 이야기를 합니다. 꼭 하루에 한 명씩만 합니다. 교사(校舍) 뒤편이 참 좋습니다. 비록 울타리 밖이지만 큰나무도 있고, 무엇보다 요즘은 햇빛이 너무 좋아서요. 그냥 특별한 주제 없이 이것저것,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뭐, 꼭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심심하니까, 점심시간엔 제가 이야기할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애들보고 저랑 놀아달라는 거지요.

   며칠 전에는 학급회의 시간을 이용해서 자화상 그리기를 했습니다. 이 자화상을 코팅해서 자기 사물함의 간판으로 쓰려고 했거든요. A4용지 한 장에다 사진을 보며 자기 얼굴을 그렸는데, 제가 문외한이라 그런지 몰라도 좀 걱정스러운 그림들이 몇 장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제(4월 25일) 성격검사와 직로탐색검사에 대한 결과가 왔는데, 대체로 걱정스러운 그림들의 주인들을 주의하라고 적혀있더군요.[가출충동, 학교폭력피해, 자살충동 등] 그 결과물은 이 무능하고 힘이 없는 담임에게 과연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요구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오늘 어느 반 국어시간에 내 이름은 ‘남자 국어(샘)’이 아니라고, 앉아 있는 몇 명에게 ‘내 이름을 아냐’고 물었더니, ‘아니요. 근데요, 샘은 제 이름 아세요?’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순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쉬움도 컸습니다. 학년 첫 국어시간에 아이들에게 제 이름을 말해주었거든요. 그러면서 꼭 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부탁도 했는데…… 이렇게 교사와 학생의 간극은 큰 가 봅니다.

   요즘에 저는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습니다. 저렇게 마냥 철없이 구는 우리 반 아이들을 그냥 좋은 얼굴로 대해도 되는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학생들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학교라는 곳에서 나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까? 선생님들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계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오늘은 너무 감상적이지 않았나 싶네요, 날도 좋았는데…… 참!           

    

                                                                                                  [느티나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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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5-04-27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이름은 참 쉬운데도 아이들이 제 이름 몰라요. 저도 가끔 서운하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도 각 반에 몇 몇 학생들은 이름 못 외웠어요...

그나저나 저에게 급한 건 임용고시인가 봐요. 요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해콩 2005-04-2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모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 임용 삼수생 드림. ^^

느티나무 2005-06-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빛우주님의 성함은 무엇일까 한 번 상상을 해 봅니다. 궁금한데요. ^^ 이젠 이름을 대충 다 외우셨나요? 저도 아직 한참 남았어요. 그래서 NEIS에서 사진 출력해서 가지고 다닌답니다.
임용고시에 대한 부담감, 실체는 뚜렷하지 않지만,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언젠가도 드린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제 친구 중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마음 먹은 녀석들은 결국 다 되더라구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젤 중요하지요. 젤 친한 제 친구도 6수(7수?) 했어요.
해콩님, 뭐 여러가지로 애쓰시는 일이 많은데 별 도움이 못 되는 거 같네요. 미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