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안 준 철/순천 효산고 교사
하나. 교사는 역할 뒤로 숨을 수가 없다.
한 유명한 사진작가가 친구에게 가난한 인디언 마을의 고난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들은 임신 중이고, 아이들은 병들었고, 남자들은 일하러 밖에 나가 있고, 마을은 폐허이고, 땅은 초토화되어 있었어.”
“넌 뭘 했는데?”
“그들의 모습을 컬러 사진에 담았어.”
사진작가는 대답했다.
이 사진작가와는 달리, 교사들은 역할 뒤로 숨을 수가 없다.(하임 G 기너트의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학급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집안 환경이 어렵거나, 과거의 그늘진 삶으로 인해 심성이 뒤틀려 있거나,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잘하거나, 어떤 일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거나 하는 그런 아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사에게 그들은 감상이나 취재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들을 껴안고 사랑하든, 무관심으로 대하든 그것은 교사 개인의 선택이지만, 어느 편을 선택하든 그 역할 뒤로 숨을 수는 없습니다. 가령, 한 아이에게 무관심하게 되면 그 무관심으로 모든 일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 무관심으로 인해 발생되는 후속의 사건을 교사자신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둘. 교육적 상상력에 대하여
수업시간에 영어 단어를 설명하다가 내 스스로 뭉클한 감동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인 셈입니다. 낭만적인 시구 하나로 학생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던 호시절도 아닌데 자기 말에 스스로 도취되는 이런 촌스러운 선생님을 향해 눈을 반짝여줄 순진하고 만만한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훌륭한 시편과 견줄만한 팝송으로 수업을 하면서도 한 줄의 가사가 주는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제가 치러야하는 인내와 극한의 감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제 가슴에서는 여전히 뭉클뭉클 솟구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어느 날 영어시간, 저는 '코스모스(cosmos)'라는 단어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꽃 한 송이에서도 우주를 봅니다. 선생님이 시인이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시적 상상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학적 상식에 가깝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태양의 도움 없이 한 송이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태양은 저 혼자서 일을 합니까? 태양계의 여러 천체는 만유인력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정연한 역학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천체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서 균형이 깨어지면 태양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태양이 지구에 조금만 가까워져도 꽃은 타죽고 말겠지요. 이렇듯이 꽃 한 송이를 피우는데 온 우주가 협력하고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코스모스가 하나의 꽃 이름이면서 우주, 혹은 질서라는 뜻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들어보니 그럴 듯한 지 귀를 쫑긋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중 한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숙제를 네 번씩이나 해오지 않은 아이입니다.
"네가 어떻게 태어났지? 누가 널 만들었냐고?"
"예? 그건 말하기가 좀 뭐한데요."
"오버하긴? 네 엄마 아빠가 널 만드셨잖아. 그럼 네 엄마 아빤 누가 만드셨지?"
"그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누가 만드셨지? 물론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만드셨겠지. 그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인간이 나오겠지. 그 사람은 누가 만들었을까? 두 가지 주장이 있어. 신이 만들었다. 아니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 난 전자 쪽인데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넌 신의 아들이야.
그리고 말이야, 그 최초의 조상부터 너에게 이르기까지 천재지변이라도 생겨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잃었다면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너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전 우주, 전 역사가 동원되었다는 얘기야. 네가 그런 사람이야. 그런데 4관왕이 뭐야 4관왕이? 앞으로 잘 할 거야 어쩔 거야?"
"잘 하겠습니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다니요? 제 자신도 이상한지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그런데 4관왕이라니요? 그것은 숙제를 네 번 해오지 않은 아이에게 붙여준 별칭입니다. 처음에는 "별이 네 개네"하는 식으로 말했다가 아차 싶어 말을 바꾼 것입니다. 숙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들을 향해 던지곤 했던 부정적인 언어들도 이런 식으로 변했습니다.
"오늘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들 고마워요. 수행평가 점수를 모두 만점을 줄 수는 없는데 선생님 곤란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알아서 점수를 깎아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자,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준 친구들에게 모두 박수."
꾸중을 들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박수를 받은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이들의 눈에서 동요의 빛이 일기도 합니다. 아무리 무감각한 아이라도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의 질감을 가릴 줄은 압니다.
저는 저대로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도 교사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 즐거움의 시간은 물론 반성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시를 쓸 때는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를 쓰지만 아이들을 만날 때는 교육적 상상력을 발휘하곤 합니다.
어느 핸가 저는 점심시간에 학교 등나무 아래를 걷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는 두 아이가 함께 있었다. 두 우주와 함께 걷고 있는 저는 마냥 행복했습니다. 제가 그들의 삶에 작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교사라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교육적 상상력의 결과입니다.
초임교사시절, 저는 제게로 온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아이들 대한 사랑이 아니라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한 나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6월의 등나무 숲은 거대한 터널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 등나무 터널이 그늘을 만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아이들과 함께 푸르고 눈부신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등나무 터널 안에만 있다 보면 그 위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다행히도 등나무 숲에는 작은 틈새들이 있었습니다. 빛의 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리는 그 틈새들을 들여다보다 말고 저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습니다.
나는 네게 틈새가 되고 싶다/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먼 길 가다가/해찰하여 눈 마주친 소년처럼/간이역에 핀 코스모스처럼/틈새에서 피었다 지는 풍경이 되고 싶다//네게 맑은 물 내어주는 틈새가 되고 싶다/그렇지, 맑은 물은 언제나 틈새에서 흘러나오지/깊은 틈새에서 흘러나오지/그 틈새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되고 싶다//나는 네게 작은 틈새가 되고 싶다/까맣게 하늘을 가린 여름 등나무 숲/그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다고 일러주는/나뭇잎 사이, 작은 틈새가 되고 싶다. -시, <틈새> 모두
요즘 아이들은 왜 교사의 말에 감동하지 않을까요? 지식에서 점수만을 취하고 감동을 지워버린 입시위주 교육이 그 주범일 테지만 이런 현상에 대하여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지쳐버린 우리 교사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교사가 꿈꾸지 않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셋. 천천한 걸음걸이로
“넌 여기 앉고, 넌 저기 앉아.”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두 아이에게 종이 한 장씩을 건네며 던진 말입니다. 텅 빈 열람실에 싸늘하게 울려 퍼진 제 목소리에 놀란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평소 제 담임선생을 남자친구 대하듯 하던 녀석들이었으니 갑자기 돌변한 저의 태도가 낯설기도 했겠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은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내년에 꼭 담임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 학교 자퇴할래요.”
지난해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그런 말을 내비쳤을 때는 “내가 담임하면 너희들 마음 놓고 말썽 피우려고 그러지?” 하고 농담조로 넘기고 말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정말 담임을 맡아볼까?’ 하는 생각을 품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나를 선택해준 아이들이 고마웠던 것입니다. 수업시간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휴대폰을 가지고 놀거나, 줄기차게 잡담을 하기 일쑤인 녀석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담임을 맡고 싶다고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우연히도 단짝이었던 세 아이 모두 우리 반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신바람이 나는지 뜬금없이 반장을 하겠다고 나섰고, 두 아이도 덩달아 학교생활에 열의를 보이면서 삼월 한 달은 순조롭게 지나갔습니다.
사건이 터진 것은 달력이 삼월에서 사월로 넘어가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자리 배정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번호순으로 자리에 앉다가 다음 달부터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하기로 했는데 막상 자리를 바꿀 날이 다가 오자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한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저 자리 바꾸면 학교 그만 둘래요.”
“그러든지 말든지. 그만 두면 네 손해지, 내 손해냐?”
겉으로는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꾸를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는 논리적으로 따져서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따끔하게 혼을 내주는 방식으로는 아무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학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사 자신의 화를 풀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날 자리배정에 불만을 품고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두 아이에게 저는 까마득한 절망을 느끼면서도, 그럴 아이들이 아닌데…, 하고 한 가닥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달 동안 보여준 변화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들 안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면, 뭔가 길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다음 날 학교에 온 아이들에게 종이를 내주면서 반성문이나 경위서가 아닌 편지를 써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어요. (…) 분명 먼저 제비뽑기로 한 다음 앞자리가 됐든 뒷자리가 됐든 양해를 구하고 바꿔준다는 말로 전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부터 학교에서 갑자기 나가거나 전화 한 통 없이 결석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할게요. 저희 마음은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저희 마음속에 들어와 보지 않는 이상 잘 모르시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저희가 잘못한 것 잘 알아요. 정말 죄송해요.’
‘아, 그러면 그렇지. 그런 오해가 있었구나!’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먼저 제비를 뽑기를 한 다음 눈이 나쁘거나 키가 크거나 해서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다시 자리를 조정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앞자리에 앉게 되거든 그때 아이들에게 양해를 얻고 뒷자리로 바꿔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라도 자리 문제로 그동안 누려온 평화가 깨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내 쪽에서 애매모호하게 말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그것까지 두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그들과 뜨겁게 화해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저와 철썩 같이 한 약속을 저버리고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것이 벌써 세 번째였고, 게다가 잘못을 뉘우치는 빛이 없어 보이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한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습니다. 이 아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들인가. 누구 말대로 나는 혹시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실이 통하지 않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써달라는 부탁을 한 뒤에 잠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슬프고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와 상의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 열이면 아홉은 아이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쪽으로 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는 봄인데도 낙엽이 한 장 뒹굴고 있었습니다. 푸른 낙엽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가 문득 오래 전에 썼던 시가 한 편 떠올랐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낙엽을 줍는다
허리를 숙일 때의 천천한 동작을 즐긴다
땅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작은 것들이 커 보인다
겨울을 나려는 듯, 함께 먼 길을 가는
땅에 사는 작은 생명들
허리를 숙이고 낙엽을 줍다보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다
자연히 낙엽 줍는 손길이 늦어진다
성급히 쓸다보면 쓰레기가 되는 것들이
천천히 줍다보면 낙엽이 된다.
-시, ‘낙엽 줍기’
저는 푸른 낙엽 한 장을 손에 든 채 다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쓰고 있을까? 그것을 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왜냐하면 내가 솔직하게 써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우린 그렇게 서로 약속을 지키며 믿음과 사랑만으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으니까. 저는 천천한 걸음걸이로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나의 성급함으로 자칫 푸른 낙엽이 될 뻔한 아이에게.
넷. 조퇴하러 온 아이와의 대화
몸이 아프거나 남학생에게는 없는 일을 치르느라 허리가 반쯤 접혀져서 교무실을 찾아오는 아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꾀병인지 아닌지 옥석을 가려서 조치를 해주면 되지만, 문제는 이런 아이들입니다.
"선생님, 저 조퇴 좀 시켜 주세요."
"왜 어디가 아파?"
"솔직히 말해요?"
"당연하지. 그럼 거짓말하려고 했어?"
"그냥 학교에 있기 싫어요."
이런 경우는 일단 심호흡부터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버럭 화부터 내버리면 다음부터는 담임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지도 않을뿐더러, 그동안 잘 다져놓은 아이들과의 인간관계가 깨질 염려도 있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요."
"아닌데 왜?"
"그냥 학교에 있기 싫어요."
"왜 싫은데?"
"그냥요."
여기까지는 탐색전입니다. 별로 뜻 없는 말을 던지긴 했지만 그 사이 아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조퇴를 청하러 온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엄연한 교육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버리면 그만큼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게 되지요.
"선생님, 오늘 딱 하루만 조퇴시켜 주세요."
"그럼 내일부터 잘 하겠다?"
"예.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간절한 어조로) 선생님, 정말 약속할게요."
"좋아. 대신 5교시까지는 버텨봐."
일단 조퇴를 해준다고 허락을 한 셈이니 지금 당장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결국은 5교시까지 버티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 마련이지요. 이런 경우, 대개는 5교시까지 참았던 것이 억울해서라도 계속 학교에 눌러 있든지, 친구들과 깔깔대며 다니다가 조퇴를 허락받으러 간 사실조차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교사가 봤을 때) 이유로 조퇴를 청하러 온 아이들을 야단을 치거나 일방적으로 설득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이런 조건을 내거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대화의 창을 열어놓기 위해서입니다. 대화를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키워줄 수 있기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을 대화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깜짝 놀랄 만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예 생각 같은 것을 안 하고 사는 듯한 아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조퇴를 청하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한 아이와 나눈 대화입니다.
"선생님 근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뭔데?"
"제가 조퇴를 해달라고 하면 그냥 해주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요, 조퇴해주고 출석부에 조퇴했다고 표시를 하고, 무단 결과를 하면 무단 결과했다고 하면 되잖아요."
"조퇴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네가 지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 이거냐?"
"제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요."
아이의 표정을 보니 조퇴를 하고 싶어서 안달하던 조금 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눈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말이 전혀 엉뚱하거나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제 곧 발을 들이게 될 대학은 그런 일종의 자율규칙이 적용되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너다운 말이다. 사실은 나도 그러고 싶어. 모든 행동을 자신이 책임지게 하는 거지."
"맞아요. 제 인생 제가 책임지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느냔 말예요."
"그런데 말이야. 너 학교에 있기 싫을 때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갈 수가 있다면 한 달이면 몇 번이나 밖에 나가려고 할까? 열 번, 아니 스무 번, 아마 거의 매일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럴 것 같아요."
"그럼 공부는 끝난 거네. 그리고 말이야. 만약 선생님 허락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렸다고 해봐. 그런데도 다음 날 선생님이 널 보고 아무 말도 않는 거야.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겠니? 너한테 관심이 없는 담임이 아니라면 말이야. 어때?"
"그래요. 이상할 것 같아요."
"바로 그거야. 너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네 이웃집 아줌마가 너에게 화내던? 아니잖아. 네 엄마가 화를 내시는 거지. 왜 그런다고 생각해?"
"절 사랑하시니까요."
"그래. 나도 널 사랑해.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 순 없는 거야. 널 사랑하니까."
"그럼, 선생님 제발 저를 사랑하지 말아 주세요."
"뭐? 너 정말이지?"
"대신, 저 조퇴해달라고 할 때만요."
"이런 똥강아지!"
‘똥강아지’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면 곤란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그것이 제가 사용하는 최대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날 대화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네가 했던 말 선생님은 좋게 생각했어. 그만큼 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니까. 어쩌면 넌 대학생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은 일러.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네 자신이 더 잘 알거야. 이제 아무 생각 말고 중간고사 준비나 해. 학생이 공부에 관심을 잃게 되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거야. 밖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하루 7시간은 학교에 있어야 하잖아."
그 말을 듣는 아이의 표정은 진지함 반, 설득을 당해서 다시는 조퇴를 할 수 없게 된 절망감(?) 반이었습니다. 문득 그런 반반씩 섞인 미완성 상태가 아이들의 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는 없지만 대화의 창마저 닫아버린다면 얼마나 답답해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말입니다.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축하시도 하나의 대화인 셈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생일을 맞이한 OO도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친한 친구와 반이 갈리자 잠깐 학교생활에 취미를 잃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출석을 부를 때마다 예쁜 웃음을 방긋 지어줄 만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OO에게 준 생일시입니다.
너를 위한 작은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지금은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너에게 편지가 왔을까 궁금했는데
'사랑하는 선생님께…'라는
반가운 글씨가 눈을 즐겁게 하는구나.
대학에도 가고 싶고, 취업도 하고 싶고
돈도 디따 많이 벌고 싶고
미용도 배우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그러나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것이 우리 OO의 현주소구나.
그런데 넌 알고 있을까?
대학에 가든, 돈을 디따 많이 벌든
무엇이든 한 순간에 이룰 수는 없다는 거
무엇이든 아픔과 고통이 뒤따른다는 거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
OO야,
너의 열일곱과 열여덟의 사이가
깊고 푸른 강 하나를 건너듯
그렇게 큰 걸음이었으면 좋겠다.
강을 건너와서는
후회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너의 그 환한 미소로
예쁘게 환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때 나는 네가 발 딛고 건너는
작은 징검다리였으면 좋겠다.
2005년 4월 29일
사랑하는 OO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