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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성세대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이 땅의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몹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정말 화가 나는 게 있다. SNS를 위시한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요란하고 자극적인 표현들이다. 순수하고 일차적인 슬픔의 표출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뿜어내는 방향성 잃은 감정의 폭발들이 문제다. 더욱이 몇몇 SNS의 글들은 거짓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일찍이 강조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곧 '무지無知'를 뜻한다. 무지는 사전적으로 "아는 것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넓은 의미로 확대하면 보다 입체적인 정의를 갖는다. 하나의 지식이나 사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일차적인 무지라면 타인의 마음과 현재의 상황에 몰이해한 것은 보다 궁극적인 무지라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재앙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사회는 후자의 개념을 포함하는 무지의 집대성적 광기를 양산했다. 뉴스와 신문으로 대변되는 메스컴뿐만 아니라 대중과 위정자들까지도 이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위기 극복을 위한 구심력보다는 비본질에 함몰된 원심력의 방해로 국민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응집성을 잃어왔던 게 우리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었다.

   방송과 SNS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형태의 언어적 표현들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그것을 만들어낸 제삼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순수한 마음에서 표현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참다 참다 못 참아서 폭발된 것일 수도 있다.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로는 위로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해 시작된 위로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위로라고 할 수 없다.

   비트켄슈타인의 무지에 대한 격언은 곧바로 공자孔子가 역설한 '중용中庸'의 철학과 연결된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주자朱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중용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한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중용이며,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에서 출발한다는 게 중용 철학의 핵심이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하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無忌憚하다는 것인데, 여기서 시중時中은 때, 곧 타이밍(timing)을 의미한다. 같은 진리라도 적절(timely)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학에서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시時 속에서 중中을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중용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현되지 않은 중이 어떻게 때에 맞게 발현되느냐(時中)를 뜻하는 것이다. 시기의 적절함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인 것이다.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폭포수처럼 분출되고 있는 세간의 관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공자 식으로 말해서 적절한 타이밍을 갖추고 있느냐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처한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락된 공허한 언어의 전달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꼭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아픔의 밀도와 궁극을 모르는 입장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할 수는 없는 걸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절제된 자세로 기다리며 기도하는 게 수준 높은 위로의 모습이 아닐까. 위로가 과하여 잉여가 될 때 상대는 피로를 느끼는 법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씹으면서 '이해'와 '위로'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상의 종속적 선후 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나는 소설에서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반드시 관통해야 할 그 시절의 특질이라고 지적하면서,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위로는 분출이 아닌 이해를 전제한 기다림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위로하려는 대상이 현실에서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모호한 고유성과 불가해한 밀도를 가진 상황이라면, 진정한 위로는 나중의 영광을 기도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게 아닐까. 꼭 할 말을 해야 하고 상한 감정을 표현해야만 할까. 손석희의 침묵이 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언어화하여 표현시켜야만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침묵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게 차원 높은 위로의 바른 순서다.

   절제하자. 차분해지자. 실제적인 것들을 살펴보고 챙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사실을 추출하는 것도 벅차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자. 지금으로서는 보다 절제하는 게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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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04-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그동안 이번 뉴스를 보면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 공감받더라도 그저 관심으로만 남는다면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 없이도 위로의 마음을 느끼고 전달하는 것도 충분하다고 봐요. 이 글을 제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싶은데 괜찮은지요?

다윗 2014-04-18 23:49   좋아요 0 | URL
네. 퍼가셔도 됩니다. 잉여된 위로는 항시 인간 사이의 피로감을 쌓을 뿐입니다. 공감 고맙습니다. ^^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얼빠진 철학자 니체도 간혹 멋진 말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혐오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니체를 조망하는 내 기준에는 여러가지 복잡성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의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겠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위의 명언 만큼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니체의 저 문장을 내 방식대로 풀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낙타-사자-어린아이'로 대변되는 '세 가지 변신'의 비유는 생성의 존재론, 위버멘쉬(초인), 영겁회귀론, 관점주의, 힘에의 의지 등과 함께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동력, 곧 힘에의 의지를 통해 허무적 문명을 긍정적 문명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삶의 온갖 모순적인 면, 즉 미와 추, 고통과 기쁨, 사랑과 증오 등을 모두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오로지 삶이 유일한 가치이자 가치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설파함으로써 쇼펜하우어가 온갖 악과 불행의 원천으로 보았던 의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면서 '초인(Übermensch, 超人)'으로 집대성되는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시킨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과 참 대신 힘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모든 세계관을 해체시킨 것과 다름없다.

    니체 식의 기독교 사멸론은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주장한 '신=인간' 도식에 비하면 그나마 세련(?)된 면이 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자의식이 절대화된 산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화 너머의 대상화로 역동적인 성장을 꾀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지금까지의 종교가 전제해온 인간의 필연적인 '유한성'은 신의 '무한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닌 제한된 개인의 사유에 갇히지 않고 외연의 가치로 확장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기제다. 을 주조해나가며 느끼는 인간 스스로의 제한성은 단순히 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분리되어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의 외연에 또 다른 무수한 주체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또 다른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실로 개소리가 따로 없다.

    여기서 니체와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反기독사상의 디테일을 서술한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닌 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준비과정이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앞서 인용한 니체의 명언을 일반적인 시적 구조가 가진 외연적 의미로 걸러내 해석하고, 바로 거기에서 멈출 수 있다면, 의외로 걸죽한 사유의 추출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요컨대 니체의 언어를 反니체적 입장에서 공격해보자는 것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단계는 인내력의 지고함이나 희생의 숭고성이 아니다. 또한 자유를 쟁취하고 자아실현을 도구적으로 전환시키는 내적 힘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근본적 웃음에서 생성되는데, 니체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규정하며 그 해석성을 부각시킨다. 어린아이는 잘 웃는 자로서 삶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갖고 놈으로써 인간의 자기변형의 최종적 단계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어린아이가 가진 초고차원적 힘의 원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이 아닌 심연을 관통한 인간의 내재적 삶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틀렸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총론은 현실의 다양한 각론들로부터 배반당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태도와 습성을 끊임없이 천착한다. 가끔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아이의 유치찬란한 행동 가운데 은연중 드러나는 찬란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다. 그때는 잠시 소름 돋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그 '찬란한 것'은 무엇인가. 치열한 현실을 견디는 과정과 깊은 고뇌의 끝에서 깨달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리고 '생명력'이었다.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는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내재된 힘이다. 여기에 생명력이 보태지면 그것을 더욱 오롯화하고 현실세계를 천국의 자장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는 초월적 자유가 추동하는 신적인 생명력이 존재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니체가 이를 어찌 알겠는가.

    어린아이의 초자유적 순수성은 태생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산물이다. 민족, 문화, 국경, 언어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는 초월적 생명력을 소유한다. 이는 본래적이다. 니체의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가 함의한 변신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본래적 실존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거룩한 창조성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신'밖에 없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현현되는 초월적 자기긍정의 힘은 근원적으로 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를 명확히 깨닫는다. 그리고 경외한다. 이 놀라운 경험의 연속성은 과히 폭포수가 샘솟는 것과 같다. 니체가 '어린아이'에게 부여한 저 많은 형용사들은 곧바로 신의 찬탄스러운 속성을 압도적으로 헌사하는 반증의 도구가 될 뿐이다. 결국 니체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신을 긍정하고 경외한 것이다.

    내가 니체의 말 한 토막을 끄집어내 이렇게 장황한 글로 버무리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됨을 바로 천착하자는 취지에 있다. 인생의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한 특질에 아파하는 주변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웃어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바로 그 지점에서 웃어야 한다. '희喜'와 '비悲'는 등가적으로 대립되는 게 아니다. 웃음은 울음을 포괄한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위대한 것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신성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웃음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웃음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의 본질이다. 웃음은 완벽히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라는 신의 명령에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은 생명의 약동이고 기쁨의 실현이다. 인간이라면 비단 웃어야 한다. 인생의 짧고 추악함, 고단과 가난함을 망각할 수 있는 힘은 웃음에 있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저 위대한 푸쉬킨의 말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웃어라. 신성한 긍정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서 발현된다. 웃음은 신적 행위이자 신의 축복이다.

    웃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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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나 또한 일천한 책읽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누구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이 적절한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를 함께 나누고 그것을 통해 책읽기의 순기능을 확장시키자는 취지에서는 용기를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을 추천하며 서평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독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책을 선택하는 자신만의 기준과 방법이다. 그 책이 좋은 책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이다. 가령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실존주의 철학의 교과서로 보고 성경처럼 머리맡에 두는 독자가 있는 반면 독일 현상학의 아류작으로서 쓰레기로 규정하는 나같은 독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고르는 기준은 본질적으로 타자의 견해를 인식하기 이전에 자기자신의 내면의 기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읽지 말아야 할 책들이 우리세계에 많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두가지로 정리되는데 바로 '고전'과 '자기계발서'다. 아니 고전을 읽지 말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항상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내가 읽지 말아야 할 책으로 고전을 꼽고 있지 않는가. 내가 말하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어렵고 난해한 텍스트로서의 고전'이다.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텍스트를 앞에 두고 낑낑대며 오기로 읽는 책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한 번 보자. 케인즈의 <일반이론>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아무런 어려움없이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들 서적은 전공자도 혀를 내두르는 난해한 전문서적이다. 이를 고전이라는 명분으로 일반독자에게 읽히게 하거나 읽으려 하는 자들을 보면 씁쓸하다. 왜 이해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해설서를 끼고 독서를 둥개는가. 어떤 책에 대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고전을 앞에 두고 시간을 낭비하며 독서를 둥개는 독자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읽지마!

   독서는 오기와 허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오기로 읽은 책은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물론 본인의 필요에 따라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순수한 관심과 진지한 공부의 차원을 넘어 허세와 위선의 영역으로 넘어든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책은 읽지 말라. 정 읽고 싶으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지력을 쌓은 후에 다시 도전하거나, 다이제스트 수준의 것으로 핵심만 짚어내라.

   또 하나는 자기계발서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계발서를 읽지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내가 계발서를 거부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계발서가 가진 본질적인 구조 면에서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자기계발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의 열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외람된 얘기일 수 있으나, 계발서에 고무되고 요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명확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내면 속에 실존하고 있는 '참 나'로서의 견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초적인 인문학적 지식과 식견이 부재하거나 결락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적 견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는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견인하는 지성의 통찰력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이 부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계발서는 불티나게 풀려나간다.

   웃긴 예를 들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가 파산한 것을 아는가. 인세로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파산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가 한 답변이 가관이다. 책에 기록된 '7가지 습관'을 자기 스스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부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읽지 말라는 것이다.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고전서적과 자기계발서적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양서를 선택하는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지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인간의 삶이란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을 만큼 길지 않고 한가롭지 않으며 값싸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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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건, 한 사람이 지닌 사랑의 순수성은 그의 사상과 철학에도 반드시 묻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테일러에 대한 밀의 사랑은 순수하고 애절하다. 그리고 전존재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한 여인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야말로 밀이 진정한 '자유'를 탐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밀의 역작 <자유론>은 테일러 부인이 죽은 후에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질이란 말인가.

   수없이 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자신의 추잡스러운 여자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레기 같은 '연애론'이나 '사랑론'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을 깊이 고찰하면 할수록 그들의 사상과 철학은 자신의 꼴사나운 사생활 못지 않게 별볼일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19세기부터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카테고리를 정면으로 해부하며 천착한다. 그러나, 진정 귀담아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랑이 곧 전부'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인내와 희생이 뒤섞인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의 주장과 논리에는 무언가의 공허와 결락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의 범주를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며 경험을 쌓아가는 연애의 '기술자'보다 한 사람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예술가'가 삶의 영역에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사랑의 본질은 '대상의 다양성'보다 '존재로의 침잠'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의 깊이는 곧 삶의 풍성함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가. 혹은 답답한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톨스토이의 명언 하나!

   "네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를 아는 것은 천 명의 여자를 아는 것 이상으로 모든 여자를 잘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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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지방출장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지 않은 일정이었다. 둘째 날에 숙박으로 고생을 했는데 평소와 달리 방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도 많지 않았고 야심한 시각도 아니어서 의아한 면이 있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지방출장을 가져왔지만 저녁 8시 이전에 방이 없어 모텔을 잡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모텔 주인은 솔직히 고백했다. 화이트데이 대목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날이 날인 만큼 젊은 연인들의 대실을 꽉 차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숙박은 10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랬다. 화이트데이였다. 모텔촌 인근에 대학교가 있다는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삼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성관념이 얼마나 쿨하고 개방적인지를 말이다.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고결한 단어가 싸구려처럼 남발되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견디겠다. 사실 작금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해외입양은 거의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모른다. 그리고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오묘한 특질이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발현된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더욱 들끓게 했다.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를 일군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까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의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의 삶으로 몸소 보여줬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년 100권의 청소년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사회과학 교수들이 엄정하게 선정한 것인데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책 선정의 자료로 삼는 것같다. 그러나 문화 탓인지, 기호 탓인지, 수준(?) 탓인지, 나는 그들네의 책 추천에 공감하기 힘들 때가 많다. 특히 몇 년 전에 발표된 추천리스트를 보며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버드 대학 교수들의 자질을 의심할 정도로 실망적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100권의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버젓하게 추천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쓰레기'로 보는 책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이라는 평가는 우습다. 순수 페미니즘의 정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가진 폭넓은 위험성에 있다. 이 책은 청소년의 성의식을 왜곡된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뿜어내고 있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 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저자만의 꼴불견식 해석은 부아가 치밀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로스(Philos)'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지적인(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독립적이고 의도적으로 떼어놓는 저자의 논지는 사랑의 본질적 해석에 한참 벗어나 있는 무지몽매無知蒙昧의 극치이자 찬탄스런 사랑의 원형에 대한 모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 곳에나 굴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인과 부부 사이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서로에게 전적인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사랑의 구속성을 타파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소리가 따로 없지만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저자 드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전도자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드 보부아르에게 사랑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게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계약결혼이라는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만큼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한 개념상의 상대적 제시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를 구구절절하게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쳤던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결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 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일갈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가치는 공히 지독한 희생과 철저한 책임의 카테고리 내에서 작동되고 발현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절제하는 것이고 지켜주는 것이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자명하다.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e)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무조건적으로 거짓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그 '거짓'과 '교만'은 분명한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죄를 면할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젊음만의 특질이며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숭고하고 순전한 통로라는 것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잊지 말라. 세계의 모든 질서와 권위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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