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두 딸과 TV로 월트디즈니의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2>를 시청했다. 극장에서 이미 본 영화였지만 케이블 TV 더빙판으로 다시 볼 기회여서 즐겁게 시청했다. 2편은 1편과 결이 달라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전작과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다. 여자아이들이 워낙 좋아한 영화이기에 두 딸은 아빠의 분석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내가 평가한 <겨울왕국> 시리즈는 이렇다. 1편이 동생 안나의 영화였다면 2편은 언니 엘사의 영화였다. 내가 느낀 건 그랬다.

 

2편을 보면서 '엘사가 이제 진정한 주인공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사실 <겨울왕국 2>는 엘사의 독무대라 할 정도로 엘사 중심의 영화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머리를 풀어헤치며 '렛 잇 고(Let it go)'를 부른 1편의 엘사보다 종횡무진 자신의 진본을 찾아 나선 2편의 엘사가 나에게는 더욱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인지 2편을 시청하면서 내가 유독 엘사에 대한 매력을 자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다. 아빠가 영화를 보면서 특정 인물을 한없이 칭찬하니 둘째 딸은 자신의 영어 이름에 아쉬움을 가지며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말한 것이리라.

 

사실 그랬다. 몇 년 전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영어 이름을 작명해달라고 했을 때 아내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첫째 딸의 영어 이름은 '벨(Belle)'이다. 당시 실사로 재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에서 엠마 왓슨이 맡은 여주인공 벨의 매력이 우리 가족 모두를 적잖이 경도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영어 작명이었다. 둘째는 엘사로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했고 1편에서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안나(Anna)'를 선택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은 안나가 됐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안나는 인류 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인물로 꼽힌다. 나는 톨스토이의 불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보여준 진심에 대한 자유와 극한의 생명력을 긍정하며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이해(理解)에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영어 이름 안나를 톨스토이의 안나가 아닌 월트디즈니의 안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울왕국 2>를 보며 엘사를 거듭 상찬한 아빠의 모습에서 무언가 마뜩잖음과 결핍을 느낀 것이다. 솔직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곧바로 아무 답변도 주지 못했다. 피상적으로 <겨울왕국> 시리즈의 주인공은 분명히 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잠자코 있던 첫째 딸이 엘사보다 안나가 더 대단한 존재라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더 놀랍다. "안나는 초능력(마법) 없이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엘사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결코 생각지 못한 한방이었다. 첫째 딸의 해석과 웅변에 나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항시 비범함은 범상함을 전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비로움을 쫓는다. 기적은 현실과 괴리되지만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원불변한 욕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엘사에 환호한 것은 그녀의 인간 됨보다 인간 되지 않은 초월성을 선망한 것이리라. 엘사의 강력한 마법과 초능력, 그리고 범상하지 않은 판타지적 카리스마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몽롱하고 화려한 미모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궁극일 것이다. 하지만 엘사에 가려진 안나의 매력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감상해왔다. 첫째 딸의 말대로 특별한 능력 없이 오직 인간적인 근거만으로 왕이 된 안나의 매력에 대해 우리는 너무 간과해왔다. 반추해보면 인간적 관점에서 고도의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항상 일관되게 현실을 긍정한 캐릭터는 안나였다. 나는 입장을 바꾸었다. <겨울왕국> 시리즈의 진정한(내재적) 주인공은 언니 엘사가 아닌 동생 안나였다는 것으로.

 

안나는 궁극적으로 <겨울왕국>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다. 1편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전환을 이루는 부분은 안나가 엘사의 장갑을 벗기면서 엘사의 정체가 탄로 나고 그 충격으로 엘사가 산으로 도망치는 장면부터다. 그 유명한 엘사의 '머리 풀어 헤친 <렛 잇 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때 엘사를 찾기 위한 안나의 여정이 시작되고 두 캐릭터의 내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 안에서만 지내며 외부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엘사와는 달리 안나는 적극적으로 부딪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밝고 건강한 정신으로 언제나 당당함을 유지한 안나의 내면은 자아에 구속된 듯 보이는 엘사의 소극성과 대비되며 영화의 중후반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종국적으로 안나는 진정한 사랑만이 안나와 아렌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낸다.

 

2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정령들을 깨워 마법 하나 없이 댐을 부수어 얼어버린 엘사를 녹여낸 것도 안나였다. 열정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두를 구원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건 언제나 안나였다. 그 어떤 마법과 초능력도 없이 말이다. 드레스 변신 장면과 메인 테마곡이 모두 엘사에게 돌아가서 비주얼적으로 대중적 매력에 엘사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지만 인간 정신의 고결한 승리와 가치라는 면에서 안나는 항시 엘사를 압도했다. 그렇기에 결국 2편 말미에서 진정한 아렌델의 왕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겠는가. 안나의 왕 등극 장면은 월트디즈니의 연출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극작술의 극치였다. 결국 중요한 건 현실성이다. 산타클로스는 신비롭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크린(영화)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우리네 삶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안나는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안나의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둘째 딸의 오해, 즉 톨스토이의 안나와 월트디즈니의 안나가 괴리한 지점에서 이렇게 깊은 사유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는 전적으로 두 딸의 공이다. 가끔 아이들의 언어 가운데 신(神)의 터치를 엿볼 때가 있다. 특히 첫째 딸의 워딩에 가끔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 됨의 숭고함에 압도된다. 어른스럽다는 건 성숙하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그만큼 때가 묻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관찰과 해석을 통해 현상에 가려진 본질을 천착할 수 있다. 태도는 어른처럼 성숙한 외연을 갖되 생각은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어름 됨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겨울왕국>의 진정한 주인공 안나에 대한 아이들의 관찰을 통해 그것을 깨닫는다. 둘째 딸의 영어 이름 '안나(Anna)'가 더없이 빛나는 순간이다. 가슴 벅찬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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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글씨다. 손으로 직접 쓰셔서 어머니에게 전달한 편지라고 한다. 글씨도 명필이지만 내용도 아름답다. 단순히 사변적인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일평생에 걸쳐 증명해온 글이기에 더욱 찬연하다. 저 짧은 편지 속에는 아버지의 삶과 철학과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한 고통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연륜의 축적이 정직하게 손글씨를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아들인 나를 감동시킨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건 한 사람 일생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차마 존경하지 못하는, 혹은 존경할 수 없는 주변의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나에게 부러움을 표했다. "친구야, 너는 정말 좋은 아버지를 두었다. 나는 그런 네가 부럽다." 그때는 확 와닿지 않았던 말이 왜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깨달아지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진리가 대개 시간차를 통해 각인된다는 사실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서글픈 비극이다.

 

남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게 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발표한 이론으로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정도로 정의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무의식적 소망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 나오는 고전적 신화의 내용과 연결했다. 그의 학설의 과학성과 면밀성은 차치하고, 내가 정말 감사한 것은 나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할 만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동시에 인정하고 사랑했지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과하게 미워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과하게 애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핵심이 되는 여러 개념들이 멘델의 법칙, 유전자에 관한 염색체 이론, 선천성 대사 장애, 호르몬의 존재, 신격 자극 장치 등의 생물학의 원리 앞에 무기력하게 기각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면의 원리만은 남아서 아직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구조를 해석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여자의 뇌구조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골 때린 알고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존재론적 크기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넘어선다는 건 앞서거나 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현존을 관통하지 못한 아들의 실존은 대개 슬프고 절망적이다.

 

세상의 많은 아들들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와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인생을 좀먹는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채 밖으로까지 흘러내려 가족과 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자기 자식에게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은 과히 지독한 것이어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술한 바 있지만 나는 내 주변 친구와 지인의 예를 통해 '보통 남자'가 갖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상의 디테일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들은 대개 어둡고 건조하고 폭력적이었다. 슬픈 일이다.

 

고백하겠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아버지라는 존재를 극복했다. 만약 그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면 나는 나의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술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내 영혼을 좀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너무 크고 웅장했기에, 그것을 순수히 인정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그를 관통하고 넘어설 수 있었다. 그렇다. 아버지가 '참 아버지'가 될 때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것에 속박되지 않는 '진짜 남자'가 되어 자유롭게 세계와 타자를 주유(舟遊)할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밀한 방정식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올해로 아버지의 연세가 일흔셋이다. 그의 일생의 말년이 건강하고 멋지고 품격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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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우주보다 거대한 우주선보다 고도의 과학기술보다 더 위대한 건 바로 인간의 내면이다. 영화 《퍼스트맨》에서의 닐 암스트롱의 달 탐사는 딸 카렌과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관통하는(극복하는) 여정이다. 달 표면에 도착해 우주선 문을 여는 바로 그 짧은 순간(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고요하고 적막한 달의 대지 앞에서 주인공 닐은 한동안 묵직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찰나의 순간은 가장 조용한 외연이었지만 가장 많은 것을 담아낸 내면이었다.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퍼스트맨》은 달과 우주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닐 암스트롱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닐은 영화에서 명징한 한 인간으로서 직립해 있다. 미국의 영웅이자 애국심의 표상이 아니다. 60년대의 시대정신도 아니다. 달에 성조기를 꼽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꿈, 상실, 고독, 집념, 용기, 회복 등의 숭고한 디테일이 데이미언 셔젤의 뛰어난 연출과 라이언 고슬링(닐 암스트롱 역)의 절제 있는 연기로 발산되어 러닝타임 2시간 21분을 가득 채웠다. 인간 닐의 내면은 우주선보다 높았고 달보다 신비했다. 우주보다 인간이었다.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바로 이곳ㅡ현실 지구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많은 인간들이 별과 달의 삶을 갈망하며 엄연한 일상의 편린에 주목하지 않는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사유체계는 멀고 크고 추상적인 것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을 띤다. '모호함'과 '거대 담론', '판타지'와 '애매성'이라는 현대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진짜 나'와 '명확한 내 것'을 주목하지 않게 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 이상을 지향했고 결국 인간 이하가 됐다. 현대사의 비극은 대부분 여기에 연원해 있다.

   영화에서 닐은 말한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시각은 달라집니다." 명대사다. 지구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우주선에서 우주를 보는 것, 그리고 달에서 지구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관찰자의 시각과 철학은 완벽히 달라진다. 관찰자의 입력이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세계를 향한 출력도 변화한다. '입장 차이'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과 우주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 성질의 일부만을 알뿐이다. 결국 차원의 문제다. 그렇기에 닐의 명대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긴요하다.

   우주를 배경으로 했던 근래의 몇몇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 같다. 내 견해를 말하겠다. 《인터스텔라》가 광활한 우주와 대자연, 복잡한 물리학의 공식을 전면에 배치했다면,  《그래비티》가 적막한 우주를 떠도는 한 인간의 사투를 거대한 영상미로 발산했다면, 《마션》이 모험에 기반을 둔 영화적 재미와 지적인 즐거움을 포인트로 삼았다면, 《퍼스트맨》은 인간의 실존이 곧 또 하나의 우주라는 깨달음을 고요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추적하는 작품이다. 영화적 소재와 색깔은 다르지만 인간 천착의 실재성과 공감성 면에서 나는 앞선 세 영화보다 더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걸작이다.

   아폴로 11호에 올라타는 삶. 그것은 달에 가는 과정이기에 앞서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 건강을 챙기며 주변 이웃을 돌아보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본질적으로 그 둘은 '같은 삶'일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수준 있는 영화를 만났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 덕에 기분 좋은 일상을 보낸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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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무차 영풍문고에 왔는데 세 분의 노인이 인문 코너에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인데 대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인문학을 주제로 양질의 지식을 주고받는다. 핵심 키워드는 최근 한국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유태계의 젊은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다. 그들의 대화는 하라리의 전작, 즉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를 위시하여 최근에 출간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얼추 일흔이 넘어 보이고 외모는 포근한 동네 어르신 인상인데 쏟아내는 말들에는 여러 인문학적 지력이 디테일하게 묻어 있다. 호기심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책과 지식과 배움에 어찌 나이가 있겠냐 마는 세 분 노인의 열띤 대화를 보면서 나는 강한 도전을 받았다. OECD 국가 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독서율이 떨어지는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체 독서율은 OECD 국가 중 평균에 속한다. 하지만 5-60세 이상의 중장년층 독서율은 최하위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에서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독서율도 따라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나라만 나이와 독서율이 반비례한다. 45세부터 꺾이기 시작해서 5-60대 이상은 만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과거 「무식한 어른과 오만한 꼰대 문화」라는 제목의 싸늘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칼럼에서 나는 생물학적 나이는 인간의 천부적 권력이 아님을 지적하고 경험주의의 맹신을 주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감각의 맹신이 축적된 교조화된 경험론은 모든 '꼰대주의'의 근간이다. 공부하지 않고 어른 흉내 내는 시대는 지났다. 오직 나이라는 권력만으로 훈계하고 잔소리하는 세상은 종말했다. 어른일수록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어른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단언한다.

   대형서점의 인문학 코너 한복판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수수한 옷차림의 노인 몇 분이 최신 역사학계의 뜨거운 감자를 논하는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이 진지하게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의 숭고함을 느낀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나이) 만으로 머리를 채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통찰대로,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편견과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혜로운 노인'과 '꼰대'를 가르는 기준이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어른들의 책 읽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육십 대 이상의 노년의 책 읽기는 선술한 바 있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매우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유교-주자학적 잔재가 일소되지 않은 한국적 현상을 하나 더 보탠다면 한국의 어른들은 더 많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 외람된 말일 테지만 어른이 무식하면 젊은이가 피곤하다. 무지(無知)도 유산이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으로 젊은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나도 그 흐름을 지지한다. 나이 듦의 궁극을 외면하자는 건 아니다. 노년의 지혜는 꼭 필요하다. 젊은 리더십이 요구될수록 역설적으로 어른의 지혜는 더 긴요하다. 그 위대한 키케로 말대로 "위대한 나라에서는 젊은이가 망친 나라를 노인들이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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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소설은 길다. 소설에도 급이 있다. 유독 거대한 소설이 있다. 여기서 '거대함'이란 단순한 분량보다는 '정신의 크기'를 말한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인류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금자탑으로서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기적의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수와 생명력, 서사적 흡입력, 시대를 관통하는 구심력, 심원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작풍(作風) 등 그야말로 괴물과 같은 소설이다. 거의 모든 출판사의 세계명작전집에 반드시 들어가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읽어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읽어본 사람이 드문. 좀 더 솔직히 말해 책 좀 읽었다는 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떠들 뿐 정작 읽는 이는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작년에 처음 완독했다. 허리수술을 한 뒤 집에서 요양하면서 읽은 것인데 아직도 그때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sms다. 소설을 제법 빠르게 읽는 나에게 이 소설은 꽤 긴 호흡을 요구했다. 다 읽고 나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내 안에서 왜 살아야 할지를 새삼 의문하게 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직까지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공유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명확한 주관과 도스토옙스키의 의미심장한 세계관에 대한 차분한 견해가 아직 내 머리속에서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소설은 거대한 여운을 남긴다. 여운이 클수록 갈무리는 어렵다. 이는 세밀함이나 복잡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세계의 크기'와 '의식의 확장'에 관한 문제이다.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거대할 경우 스케일 자체에 압도되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논쟁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문 이름이 어려워서 메모해가면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분량이 상당하다. 민음사를 위시하여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출간했다. 읽기도 전에 책 두께에서 먼저 주눅이 든다. 수천 페이지를 넘기는 것 자체도 곤욕이거니와 소설 기저에 흐르는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맥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건 여간 험난한 작업이 아니다. 평소 꾸준한 책읽기로 기본적인 독서체력을 확보하지 않고 장편에 대한 이해(理解)와 애착을 전제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다가 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일한 미완의 소설이자 최후의 걸작이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이 소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문학성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간의 묘사와 갈등을 굉장히 섬세한 방식으로 그려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복합적 인격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분류,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부딪힘 속에서 인간의 절대가치가 무엇이고 무너진 인간성의 회복을 신앙적, 실존적, 도덕적 선상에서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심오하고 묵직하게 담아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인간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끄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는 인간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떤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다. 소설은 미완으로 남아 주인공 알료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장면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혹자들은 이 소설의 주제를 '신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해왔고 또 다른 혹자들은 '악의 문제'로 규정해왔다. 고전 중 가장 토론적인 소설이다. 잔인하되 웅장하고, 추악하되 숭고하며, 기이하되 선명한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철학적 정수를 맛볼수 있는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 바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소설에 대한 소개가 길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를 하자. 얼마전 '효리네민박'이라는 종편예능에서 가수 아이유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어 화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취미로 삼아온 아이유의 입장에서 "책읽는 게 뭐가 그리 화제일까"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선술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학적 무게와 심원성을 부인하지 못한다면 이십대 중반의 아이돌 여가수가 한가롭게 여유로운 자세로 이 소설의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책과 관련한 그녀의 여러 에피소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왔고 진지하게 책읽기를 탐식해왔는지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성에 관한 관찰로 내 관심은 전도(확장)됐다.

   아이유는 상당히 노래를 잘 부른다. 가창의 기술뿐 아니라 표정과 감성에 있어 도저히 이십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특색있는 운치와 기풍이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아이유의 음악은 시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모든 노래는 시대를 안고 태어난다. 즉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그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감정과 겹쳐지는 것이다. 아이유의 목소리에는 그 시대를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 끌고 오는 힘이 있다. '그 시대'와 '이 시대'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감수성을 가진 이십대 가수는 많지 않다. 나에게는 아이유와 로이킴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감성을 가진 가수가 됐을까. 그녀보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지만 그녀와 같이 노래하는 가수는 드물다. 어린 나이에 시간과 목소리를 공명시키며 노래하는 가수는 극히 드물다. 그 나이에 얼마나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세상을 경험했기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김광석이나 유재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無)'와 '여백'에 관한 공허한 감동이 느껴지는 걸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음악적 현상이 어떤 내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깊이 사유했다.

   혹 독서 때문은 아닐까. 그녀가 읽어온 수많은 소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과 부질없는 세계에 관한 탐구가 그녀를 높은 차원의 시간세계로 인도한 동력은 아니었을까. 책을 통해 여러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색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질의 긴장을 자신의 가슴속에 녹여놓은 게 아닐까. 어려서부터 아이유가 쌓아올린 책더미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부여잡은 음악적 감수성의 연원을 찾아보는 건 지나친 오버일까. 내가 너무 나간 것인가. 아이유와 도스토옙스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제법 어울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독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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