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기본이 되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이다. 최근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신약성서의 네 성경을 필사하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의 와이프도 밤마다 두 아이를 재운 후 열심히 성경을 쓰고 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필자가 이번달에 특별히 탐독하고 있는 성경은 옥중서신이 배치된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한복판에 있는 열왕기서다. 금월에는 열왕기상·하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열왕기서는 솔로몬 때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 주전 586년까지, 약 400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42명의 왕들, 북방 이스라엘의 19명, 남방 유다의 23명과 12명의 선지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합, 시드기야 같은 쓰레기 같은 군주들이 많았지만, 요시야나 히스기야 같은 거룩하고 탁월한 지도자들도 있었다.

   열왕기상·하는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조한다. 시작은 다윗이 세운 광대한 나라에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여 찬란한 성전을 건축하고,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여, 이스라엘 왕국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장면이다. 반면 열왕기의 끝은 성전이 훼파되고, 나라가 멸망하고, 왕이 두 눈이 뽑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장면이다. 400년이 채 안 되는 이스라엘-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중심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극단적이고도 진지하게 해부한다.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서로 지그재그로 비교하면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즉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사를 동시대 유다 왕들의 통치 기사의 배경 아래서 볼 수 있게 했다. 전반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누가 하나님을 더 열받게 할까 내기하는 수준으로 우상숭배와 악행만을 일삼은 역사였다. 한결같이 전부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에는 의외로 선한 왕들이 많이 나왔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두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로 기술한 것이다.

   필자가 이 시점에서 열왕기서를 탐구하려고 한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작금의 한국정치가 가진 심각한 병적증세를 목도하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된 리더십의 본질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둘째 가정에서는 가장으로, 교회에서는 집사와 회장으로, 회사에서는 과장이라는 직급으로 위치한 내 책임의식을 점검하면서 올바른 리더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중심주의적 방법론을 천착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현재의 나와 우리를 진단하고 부재와 굴곡에 직면한 내·외재적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소원하는 탐구상의 여정인 것이다.

   열왕기서는 솔로몬의 치세로 시작된다. 고백컨대 필자는 솔로몬을 정말 싫어한다. 솔로몬에 대한 필자의 비호감은 다소 각별한 데가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솔로몬만큼 필자를 짜증나게 한 인물도 없다. 솔로몬의 죄가 집대성된 열왕기상 11장에 이르러서는 화를 참지 못해 펜으로 성경책의 일부분을 후벼 판 적도 있다. 일부 사람들이 솔로몬의 위대성을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위대한 지혜도, 거대한 성전 건축도,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솔로몬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지 솔로몬이 잘나서 누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솔로몬이 뭐가 그리 위대하단 말인가.

   솔로몬은 열왕기상·하에서 가장 핵심적 모형이 되는 인물이다. 집권 초반기에 그토록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다가 후반기로 가면서 심하게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타락하게 된 가장 실제적인 배경은 결국 여자 문제였다. 인류 역사는 권력, 돈, 섹스 ― 이 세가지가 항시 한 셋트로 작동한다는 것을 명징히 보여준다. 하나에 걸리면 다른 두 개가 붙어 오는데, 처음엔 그것이 특권 같지만 나중엔 무서운 독이 되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솔로몬은 이방 왕비들을 많이 들였고, 그들을 위해 이방 신당을 짓고, 노예제도와 무거운 세금 부과로 백성을 힘들게 했다. 솔로몬의 집권 후반기는 하나님의 분노를 얼마나 끌어올릴까 궁리하는 악의 퍼포먼스와 같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후세 왕들이 답습하는 악행 패턴으로 굳어 버려서 두고두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권력, 부, 여자 ― 로 연결되는, 소위 문명사적 유구성을 띤 남자의 약점을 과히 입체적으로 포괄하여 죄악의 불길을 타올린 데 있다. 솔로몬의 모습에서 나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가장 실제적이고 악질적인 죄의 형태를 직시한다. 솔로몬의 죄는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모든 남자들에게 열려있는 어두운 고민과 유혹의 본성적 패착이다. 하나님중심주의의 삶에 대한 현란한 일탈이요 치졸한 반역이며 기괴한 공격이다. 남자의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 가운데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그러나 치명적으로 내면화된 추악한 죄의 형상이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인과관계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다.

   아! 솔로몬! 최소한 솔로몬과 같은 리더는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사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우리 정치의 모습에서, 가끔은 필자 자신의 모습에서 솔로몬의 모습을 본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낀다. 땅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와 필자 자신의 리더십 속에서 솔로몬의 방식이 사라지고 다윗의 방법이 세워져야 한다. 솔로몬은 아버지를 잘 만났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의 발꿈치 때만도 따라오지 못했다. 다윗과 솔로몬 ― 두 사람의 리더십의 궁극적인 대조는 차후 별도의 지면을 통해 논설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솔로몬을 까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텍스트가 필요하다.

   작금의 국가적 혼란과 필자 자신의 위치를 바라보며 진정한 리더십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사유한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곤란하다. 다윗의 왕권이 세워져야 한다. 국가, 사회, 가족 등 모든 인간 공동체의 리더십은 하나님 왕권의 파생품이다. 바로 이 지점에 열왕기서가 주는 교훈이 있다. 필자가 열왕기서를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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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평소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기에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의 제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강의 주제는 '청년의 본질'이었다. 그리스 철학과 20세기 현대사를 넘나드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강의는 계획된 시간보다 꽤 많이 초과됐다. 그러나 청년들은 마지막까지 잘 따라와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청년들에게 역설했다. 청년시기에 올바른 지식과 건강한 사랑, 올곧은 비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지식'과 '사랑'과 '비전'은 청춘을 빛내는 보석과 같은 것이며 그 시기 젊은이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성인의 아우라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시간 관계상 사랑과 비전에 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그날은 청춘이 가져야 할 지식의 성질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보여준 구조적 무지와 같은 악의 평범성에 귀속되지 말 것을, 또한 중용을 파괴하는 편향된 지성에 함몰되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나 아렌트가 설파했듯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은 악의 평범성을 생산시키는 귀속적 기제다. 젊은 시절에 편견과 선입견에 빠진 무지는 훗날 건강한 어른이 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기대는 것은 일시적이고 징징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청춘의 본질은 아픔에 있지 않다. 청춘은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다. 청춘과 어른 사이의 시간차는 청춘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증거다. 어른이라는 실존은 청춘의 본질을 규정한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하고 넘어진다. 청춘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 이는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진정한 어른의 생으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게 될 때, 그때는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 당연하게 용서됐던 상처와 실수가 무조건 옳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의 내내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솔로몬 등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두들겨 깠다. 쓰레기 같은 삶과 사상을 남긴 과거의 인물을 천착하며 청년들이 고민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삶은 피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달콤한 말로 선동한 이데아idea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다른 곳'의 숭고한 비밀을 아는 자만이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곳의 비밀을 경탄하며 그것을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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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를 개최했다. 필자는 중등부 교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주제는 「이성교제와 성性」이었다.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딱히 관심이 가거나 실제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주제임은 분명했다. 교회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꽤 높은 수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세미나는 정해진 시각을 넘어서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됐다. 이 칼럼은 어제 세미나를 통해 느낀 필자의 단상을 글로 추린 것이다.

   불신자(non-Christian)들이 갖는 한 가지 오해가 있다. 기독교는 성을 배척한다는 생각이다. 이 불편한 오해는 성과 거리를 두는 행위를 '거룩성'과 동일한 의미로 여기는 오류를 발생시켰다. 성적 추구를 마치 불신앙의 양태인 것처럼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는 성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나님은 성에 대한 인간의 후퇴와 외면을 지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부부夫婦'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 사랑의 연합은 부부관계라는 절대불변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기독교 성 사상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비극이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 그중 성에 대한 인식은 급변하고 있다. 당일 만난 남녀가 아무 조건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하는 게 가벼운 놀이처럼 되어 있다. 혼전순결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나 가야 할 처지가 됐다. 첫 성관계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성병 감염률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사랑'과 '섹스'는 더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포르노를 위시한 다양한 성적 미디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법률 제정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는 섹스 산업의 규모는 작금의 시대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에 대해 뭐라 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기 때문이다. 펄펄 끓어오르는 청춘의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만의 문화와 방식으로 성적 에너지를 불태우는 행동을 두고 일개 개신교 집사가 이러쿵저러쿵 지적한다는 건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욕 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 사랑이라는 인간 생명력의 원초적 갈망이자 고결한 기본능력이 싸구려처럼 취급받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 사실 현대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입양은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모른다.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찬란한 유전자가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들끓게 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흡수한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5월 칼럼(『사랑과 가정에 관한 신앙적·인문학적 고찰』)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두들겨 까며 이 책이 끼친 해악을 지적한 바 있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제2의 성>을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차원의 해석을 내놓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헛소리가 따로 없다. 과연 그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이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저자는 지적인(인격적인) 사랑과 육체적인(감각적인) 사랑 사이의 종속성과 삼투압성을 전제적으로 차단시키며 자신의 주관을 논증한다. 저자의 사랑관을 요약하자면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인과 부부 간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러한 탈구속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온전한 '자유'를 부여할 수 있고 구속성을 타파하는 열정에 복무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각한 수준의 개소리가 따로 없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 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보부아르에게 사랑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 게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이란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것과 달리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들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해 개념적으로 제시한 상대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의 디테일을 구구절절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두 철학자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친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부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각한 무언가를 느끼곤 한다. 마치 대한민국이 포스트모더니즘 국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력이 결핍됐다. 선과 악, 지식과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졌다. 프랑스 68혁명 이후 유럽사회를 휩쓸었던 쓰레기 담론들이 21세기 한국 대학강단의 주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학의 인문·사회과학계열 교수 중 80% 이상은 '구조주의 좌파'라고 규정한 모변호사의 외침이 결코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역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neo-Marxism)'와 살벌하게 씨름 중에 있다. 이미 8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폐기처분된 이론들이 아직까지 이 나라 지식사회와 담론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교수들이 의외로 논문 표절에 많이 노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 나라 청춘들에게 일갈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분리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둘은 공히 지독한 희생과 올곧은 책임의 영역 안에서 작동·발현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절제하고 지켜주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게 바로 인간의 성과 사랑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성과 사랑의 일체성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집 <향연>에서 에로스의 본질적 성격을 구명究明하고 다른 대화집 <파이드로스>에서 에로스로부터 필리아에로의 이전 경위를 명료하게 거론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로스에 대한 언급 대신에 필리아에 관한 놀랄만큼 깊이있고 상세한 서술을 남겼다. 기독교는 에로스와 필리아를 그리스도적 아가페의 개념으로 끌어들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시하고 몰이해할 정도로 사랑 탐구의 연원은 결코 녹록지 않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필경 악으로 귀결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이 '거짓'과 '교만'은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며 파괴다. 현실에서 지옥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든 자유가 용납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아무런 질서와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시공간,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기에 선악과는 필경 낙원에 존재했던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 실상 이 말은 개소리다. 인생은 징징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남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청춘이기 때문에 아플 수 있다.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비단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 할지라도 면죄받을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젊음이 가진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임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란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기도한다. 잊지 말라. 인간 세상의 가장 단단한 질서와 권위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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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기에 이웃들과 나누며 조금이나마 분노를 삭이고자 한다. 영업직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영업은 인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간혹 매출, 수금 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냉정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 장부가 맞지 않는 문제는 꽤 악질적이다. 결제를 받아야 하는데 공급사와 주문사 사이에 잔액이 맞지 않으니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날은 평소에 좋은 관계를 가져온 거래처와 논쟁이 발생했다. 그 거래처와는 오래전부터 3,630원의 장부상 잔액 차이가 발생해왔다. 그랬기에 업체 측에서는 딱 그만큼의 차액을 제외하고 결제를 해왔다. 워낙 소소한 금액이라서 오랫동안 처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업체 측에서 금년부터는 서로 간의 장부상 일치를 깔끔하게 정리하자고 나선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바로 품의를 득해서 자사 잔액에서 3,630원을 떨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업체 측 장부와 동일하게 맞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업체 측도 3,630원을 함께 떨군 것이다. 팩스로 보내준 반품전표를 업체 측도 그대로 장부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적으로 예전과 동일한 차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업체 측 회계담당자는 이 간단한 수학적 상식을 이해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 측에서 반품 전표를 처리했으니 그 전표대로 자기네도 함께 처리하는 게 맞다고 오히려 역성을 내는 게 아닌가. 나는 몹시 황당했지만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업체 담당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 2011년 거래이력부터 보자며 그간 3년 간의 장부를 전부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명확한 확인이 되지 않으면 결제를 할 수 없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까무라쳤다. 우리회사 여직원은 뒤로 자빠졌다. 내 직속상관은 경악했다. 업체 회계담당자의 무지와 고집으로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무려 한 시간을 소비하며 에너지를 낭비했다. 바쁜 가운데 무더운 날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 받을 것인가. 거래처 회계담당자의 기초적 무지와 오만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기의 수준과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지각으로 보는 세계가 참 세계라고 생각하는 우를 쉽게 범한다. 진리의 문제가 아닌 개별성의 영역을 자신만의 객관화로 색칠하여 재단한다. 정작 진리의 영역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파이어아벤트가 <무엇이든지 좋아>에서 외쳤던 것처럼 진리의 구분선을 조롱하며 허투루 흘려보낸다. 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발생된 무지의 결과로서 인류 역사를 불행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20세기 현대사는 인간의 무지가 지구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시대였다.

   어떤 사람은 무지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 지와 행이 모두 마음의 활동으로서 하나라는, 즉 지식과 행위에 대한 근본 명제를 불러일으킨 양명학의 논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식과 실천 사이의 긴장관계를 탐구하는 지행합일설은 무지에 대한 기초적 해석 뒤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무지란, 구조론적 본질로서의 무지, 즉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체계적인 무지를 일컫는다.

   물론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니다. 순수하게 모르는 것 자체가 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형성된 '구조적 무지'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제대로 된 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비판한 것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본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를 고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중용中庸'의 정신과도 직통으로 연결된다. 자사子思가 자신의 명저 《중용》에서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가르친 중용의 개념은 산술적인 의미로서의 '가운데'가 결코 아니다. 중용은 시 속에서 중을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까지의 전체를 다 안 뒤의 시간적 선택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총량을 가늠하고 그중 시대와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것을 뽑아내는 능력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와 중용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앎이란 항시 겸손과 짝이 되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자신의 앎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의 토대에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존경받는 지식인은 항상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과 성실로 중무장한 사람들이었다.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훌륭한 지식인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도 아닐 뿐더러 교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상대의 말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거래처 회계 담당자의 작태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지와 불관용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고발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을 올리며 거래처와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나도 그런 편견의 무지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만큼은 이러한 구조적 무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강력한 도전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역설했듯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상은 누구나 자신이 옳고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달콤한 거짓이 엉성한 사실을 숨기고 편리한 불의가 불편한 진리를 가리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침묵의 미덕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공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만하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거래처 담당자와의 일화를 소개하며 새삼 참과 거짓의 매커니즘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3,630원의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거래처 회계담당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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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벌써 마지막 주에 와 있다. 가정은 사랑으로 형성된다. 사랑을 먹고 살며, 그것이 잘 되었을 때 비로소 '천국'이 되는 게 바로 가정이다. 필자는 그간 '사랑 전도사'를 자칭하며 사랑에 대해 많은 탐구를 진행해왔다. 필자가 책을 읽는 이유 중 5할은 사랑에 대한 탐구이다. 사랑에 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책을 읽는다는 건 책에 대한 모독이자 세상에 대한 교만이다. 그렇기에 시끄러운 철학자 러셀조차도 자신의 전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 중 하나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꼽았던 게 아닌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모두 사랑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 그중 부부의 사랑은 행복한 가정의 핵심조건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정의 무게중심이 점차 자녀로 옮겨가고 있다. 자녀가 가정 내 대부분의 가치판단과 결정사항의 우선순위가 된다. 부부관계는 뒤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가정의 설계적 본질에 이탈된 무지몽매한 것이다. 가정은 전적으로 부부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지탱되는 공동체다. 부모와 자녀의 영역은 공고한 부부관계 위에서만 펼쳐져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떤 존재(혹은 의미)도 들어올 수 없고 그 어떤 논리(혹은 가치)도 개입할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정 행복'과 '부부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네이버 사전을 검색했다.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정도의 의미로 정의되어 있다.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다른 사전들도 이와 대동소이한 수준에서 사랑을 풀이한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의미가 공허하다. 해석이 허전하다. '좋아하는 마음' 정도의 해석으로는 사랑이 향유하는 아름다운 복잡성을 관통하기 힘들다. 사랑은 몇 마디 말로 정의된 사전적 풀이를 통해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원천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랑에 관한 많은 책들을 탐독해왔다. 수없이 많은 책 중에서 사랑을 정의하는 최고의 책은 단연 성경(聖經, Bible)이다. 특히 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章'으로 불리면서 사랑 탐구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디테일은 후술하겠다. 반면 사랑에 대해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책도 더러 있다. 그중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性>은 가장 가관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의 연인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면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적 텍스트로 군림했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으로 평가받는 <제 2의 성>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읽지 말아야 할 1순위 책으로 규정된다.

   내가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을 까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이 사랑의 원천적 정의를 과히 악랄한 논리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사랑을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로 구분한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의미화된 것으로서 서구 사상계 안에서 '아가페(Agape)'와 함께 사랑의 삼원성을 구성하는 용어이다. 문제는 보부아르가 이 둘을 병렬적이고 독립적으로 분리하여 논증한다는 데 있다. 즉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따로 없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정신적인 순결만 지켜주면 되고 육체는 아무렇게나 굴려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놀랄 건 없다.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행위를 전도자적으로 보여준 예이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삶은 곧 포르노그라피였다.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도 자세히 알고 보면 거짓과 비인간성을 매개로 한 허위의식에 불과했다. 여기서 보부아르의 추잡하고 거짓된 삶에 대해 구구절절 기술하지는 않겠다. 필자가 보부아르의 삶과 저작을 인용한 이유는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마적 영향력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직면했다. 길고 잔인했던 전쟁은 이전 시대의 지식과 가치관을 붕괴시켰다. 인간 실존에 방점을 둔 다양한 철학들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그 시대 청춘들의 응급실이었다. 주체와 자존을 강조하는 철학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이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상대주의 가치관은 양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열매를 생산해냈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 도덕과 양심이라는 19세기적 가치관은 붕괴했다. 보부아르의 사상과 저작도 그 연장선상 위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보부아르는 틀렸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병렬적이고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리아는 에로스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필리아는 사랑의 본질에 인격성을 부여한다. 본연의 인격적 사랑은 한 인격체에서 다른 인격체에게로 향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명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사랑은 대응하는 사랑이 있을 때에만, 즉 상호응수적相互應酬的일 때에만 온전한 형태로 꽃피우게 된다고 설파했다. 이는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기적 사랑을 철저히 거부하고 상대를 오직 사랑의 목표로 삼는 이타적 사랑의 양식을 도출시킨다. 이타적 사랑이야말로 상대방을 독자적인 고유 가치를 지닌 인격자로 인정하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참 사랑이다.

   부부애夫婦愛는 그 뿌리를 에로스의 절정 속에 두고 있는 필리아다. 부부에게는 제3자에 대한 배타성과 부부만의 내밀함이 존재한다. 부부의 합일 속에서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인격적 사랑의 온전한 삼투작용이 실현된다. 이 삼투작용의 원만한 결과로서의 부부 일치가 실현될 때에 에로스와 필리아 사이의 권력 구도가 깨지고 서로를 보호하고 지탱하는 부부관계가 유지된다. 에로스와 필리아의 균형과 원만한 삼투작용은 부부 생활의 건실한 기반을 형성한다. 사랑에 '책임'이라는 속성은 필연적으로 부여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에로스에게 입체적으로 공급하는 건 필리아의 삼투성이다. 이 작동방식이 고장난 부부관계는 궁극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필리아의 연합만으로 사랑은 완전태가 될까. 다시 말해 사랑이 가진 전 우주적 포괄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 말이다. 에로스와 필리아만으로는 무결점 절대선으로서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사랑은 인간이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도 이끌 수 있는 총체적 기본 능력이다. 사랑이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상반되는 방향을 함께 내포하기 때문에 삶에서 결정적 요인이 된다. 에로스는 물론 필리아조차도 무오하고 완전한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다. 교묘한 자기 추구의 위험과 상대에 대한 우상화는 필리아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의 거대한 본질이 호출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가페는 에로스와 필리아의 구원자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가페는 인간 능력 안에 본성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선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인간의 감각적 사랑 에로스와 인격적 사랑 필리아는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단지 그것을 건드릴 수 있을 뿐 영원히 그 안에 머물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을 통해서 에로스와 필리아를 넘어서 신적 생명에 부응하는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 자체인 사랑이 먼저 인간과 만물에게 선물로 전달되면서 가능해진다. 성경은 아가페에 대한 주석이다. 인간에게 특별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에는 신적 사랑의 다양한 각론이 녹아 있다.
아가페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전시간적全時間的 메시지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사랑을 논하지만 그중 백미는 선술했듯이 단연 '고린도전서(Korinthos前書)'이다. 특히 13장은 아가페에 대한 세밀한 각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4절부터
7절까지가 핵심이다. 무엇보다 7절은 앞선 세 절의 내용을 종합하면서 동시에 심플한 집대성으로 마무리하는 명문장이다. 우선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⑤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⑥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⑦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 4~7절 -

 

  우리가 관심있게 볼 문장은 7절이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이 문장 속에는 아가페의 본질을 관통하는 웅장한 지혜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우선 '참는다'는 말부터 보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할 때 '참는다'는 말은 단순히 인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으며'는 헬라어로 '스테고(stego)'란 말로 "감싸준다. 비밀을 지켜준다. 침묵 중에 너그럽게 봐준다"란 뜻을 가진다. 어떤 번역에는 "사랑은 어떤 것이든 덮을 수 있으며"라고 했다. '참는다'의 바른 해석은 가정에 적용될 때 적확성을 띤다. 가정은 상처를 내는 곳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곳, 다시 말해 참 사랑은 가족 간에 서로서로 실수도, 약점도, 부족함도, 허물도 덮어주고 감싸주고 기도해주고 침묵하며 기다려주는 것이다.

   둘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헬라어로 '피스튜오(pisteuvw)'란 말로 여러가지 부족함을 다 알면서도 믿어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어준다는 말은 상대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한다. 이는 필리아와 연합되는 의미로서 상대에게 허물과 부족함이 있어도 여전히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다. 완벽해서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믿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믿음과 연합된다. 사랑과 믿음은 서로 간에 필요충분조건한 관계로 동등 대응함으로써 독특한 관계 방정식을 성립한다. 사랑이 있는 가족은 서로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인격적인 신뢰를 가지고 모든 일을 믿어주는 것이다.

   셋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라며"에 '바란다'란 말은 헬라어로 '엘피조(evlpi,zw)'로 단순하게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현재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또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망한다. 사랑은 원칙적으로 소망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아가페를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환난을 당할 때 인내를 부여한다. 인내를 통해 인격이 만들어지고 이 인격은 곧 소망을 낳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근원적 힘은 역시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견뎌낼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것을 견딘다"는 헬라어 '휘포메노'란 말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것도 아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견디며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려움이 우리를 고난 속으로 함몰시키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대척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 사랑, 즉 견디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한 번 희생하고 마는 것이 아닌 계속적인 희생의 반복이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지속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찬란한 사랑의 심연에는 '견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신약성서의 명구절까지 주석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탐색한 이유는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사랑의 정결한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또한 가정의 파괴에 직면해 있는 현대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을 직시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새삼 가정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행복한 가정의 원형이 어디서부터 세워지는지를 깨닫기 위함이다. 즉 참 사랑의 숭고한 의미를 회복하고 이해하며, 각 가정 안에서 그것이 어떤 기작으로 발현되어야 하는지를 도전하기 위한 것이다. 

   연인과의 순간적 로맨스를 사랑의 숭고한 포괄성에 등가시켜서는 곤란하다. 연인 사이의 감정은 총체적 사랑의 지엽적 각론이다. "사랑이란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가는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의 명대사는 헛소리다. 제인 오스틴은 틀렸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사람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이 보다 뚜렷하고 명징한 생명력 속에서 끌어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경으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아숨쉬는 주체가 되어 주인공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인간 이전의 것, 혹은 인간 너머의 숭고한 무언가가 인간 본연의 심해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신적 사랑 아가페이며, 이를 집대성하는 유일한 유토피아가 바로 가정이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한다. 가정은 필사적으로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다양한 병적 증세와 부조리 현상은 원천적으로 가정의 파괴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가정에서 얻은 상흔은 절대로 사회가 치유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인간의 전인격적 선함과 완전함을 이해하고 훈육하는 과정의 특권을 가정 이외의는 그 어떤 형태의 그룹에도 부여한 적이 없으시다. 인간은 오직 가정 안에서 인간이 된다. 이는 가정에 독점적으로 부여하신 신의 매커니즘이다. 활력있는 사회와 힘있는 국가는 행복한 가정이 폭포수처럼 샘솟는 데서 출발한다.

   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역시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은 외연의 공허한 형태로서의 관념적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와 필리아, 아가페의 삼원성으로 수용되는 원천적인 실재로서의 사랑이다. 부부 간 사랑의 합일은 행복한 가정의 기초 조건이다. 부부애가 결락된 '작은 천국'은 존립하지 않는다. 이 세계가 곧 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는 가정에서 나온다. 사회와 국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오직 가정만이 천국이 될 수 있다. 이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각기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때, 세계는 점차 어둠을 벗고 밝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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