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념을 두서없이 남긴다.

1.  19대 대통령 취임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시의성 때문인지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나라의 진보주의 담론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임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녹록지 않은 기대를 보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꽉 막힌 보수꼴통인 내가 그의 정책과 이념을 지지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취임 초기의 여러 신선한 모습에 박수를 아끼고 싶지는 않다. 철학과 진영이 다르다고 해서 잘한 것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다. 지지 여부를 떠나 지금은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줄 때다. 부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2. 이기주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베스트셀러 1위에서 쉽사리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위로의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계속해서 확대해가고 있는 듯하다. 가벼운 맥락의 힐링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기주의 에세이는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최근 말과 글로 인해 상처와 권태를 가진 내 자신의 현재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유독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나 자신을 비워야 할 때다. 이기주의 말대로,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3. 책 추천
   아끼는 교회 후배가 연애와 결혼을 준비하며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간만에 서재를 훑었다. 책장 빼곡하게 들어선 책들을 살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을 책임진다는 것.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 이것들은 그야말로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추할 때도 있고 고독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적의 길이기도 하다. 이 고차함수의 길을 묵묵하게 관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사랑과 사람은 동의어'라는 진리에 자신의 현존을 맡길 수 있게 된다. 부디 후배녀석이 뜨겁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육아
   최근 둘째를 많이 혼냈다. 둘째 특유의 심통기질이 최극단의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엄마와도 매일 전쟁을 치른다. 훈육은 엄마의 영역이지만 가끔 아이가 도를 넘어설 때에는 참지 못하고 개입하곤 한다. 인내가 부족했다. 부끄럽다. 물론 두 딸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어떨 때는 한없이 밉기도 하다. 아이는 정말 내 맘대로 크지 않는다. 육아와 훈육은 부모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난 아직 멀었다. 부족한 아빠다.

5. 구분선
   최근 객관과 주관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사실과 주관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설정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주관과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명확한 사실을 자신의 주관적 구성물로 대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몹시 불편하다. 그들은 사실에 관한 명확한 텍스트를 제시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 식의 '악의 평범성'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 내밀한 방식으로 숨어 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기각한 논거는 바로 대전제의 오류였다. 대전제가 잘못되면 과정과 결론은 공히 거짓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건 좋은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우리사회가 밝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분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명백한 구분선은 존재한다. 개인이 분출하는 모든 형태의 다양성도 바로 이 구분선 위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의견은 자유롭되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고민은, 그 구분선을 지적하는 순간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이다.

6. 진정한 남자
   "진정한 남자는 열등감을 갖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전여옥 작가의 말이 흘러나온다. 정치인은 정치를 그만둘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 같다. 전여옥도 그렇고 유시민도 그렇고 현실정치를 그만두고 작가라는 지식인의 본업으로 복귀하면서 내공과 매력을 더욱 찬연하게 뿜어내는 듯하다. 한때 거침없는 독설로 주변에 생채기를 많이 남긴 전여옥의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명언이다. 그렇다. 열등감은 남자의 본성과 양립하지 않는다. 결코 함께 설 수 없다. 형편없는 남자만이 열등감을 가진다. 남자는, 아니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7. 고전 원서
   외국고전을 읽다 보면 작품과 문장이 너무 좋아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원서로 읽고 싶은 욕망이 샘솟음치는 것이다. 대표적 언어가 독일어와 러시아어다. 나에게 독일은 괴테의 나라고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나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독일어 원서로 <안나 카레리나>를 러시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 인간의 타락이여. 바벨탑의 비극이여. 나의 무지함이여. 천성의 게으름이여.

8. 인간의 품격
   "품질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이다. 이 말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다음과 같이 패러디해볼 수 있겠다. "인격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의 품격이란, 과거와 오늘이 없고 보수와 진보가 없다. 인격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훌륭한 인격은 신(神)을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거추장스러운 형용수사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이란, 선하고 겸손하게,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다.

9. 독서 권태
   요새 들어서 책읽기에 흥미를 잃고 있다. 책읽기에 권태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간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앎과 지혜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다. 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에 봉착하곤 한다. 그럴수록 책더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 지혜를 알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과 나 자신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책과 지식을 떠나 사람과 신앙을 돌아보자.

  
   삶은 고되지만 참으로 역동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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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을 꼽자면 단연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이다. 당시 이 한 권의 소설에 나는 녹록지 않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소설의 주인공 맥은 딸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극한의 분노와 상처로 내면을 파괴당한다. 바로 그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맥을 찾아온다. 숭고한 자상함으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소설의 구조가 흥미로운데,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메시지는 팩션이다. 이 놀라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나를 자못 흥분시킨다.

   책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작가 폴 영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소설에서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로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었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킨다.

   원작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실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교제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묘사한다. 제도나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신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진실된 심정으로 진리와 평안을 전달하고자 하는 신의 수고로움을 오두막이라는 표상적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따뜻하게 녹여놓는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모든 영화는 원작에 못 미친다. 잘 만들어야 본전이다. 소설은 텍스트고 영화는 영상이다. 텍스트는 독자의 머릿속에 특정한 이미지를 일원화하지 않는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자기만의 자유와 개성으로 작가의 제시를 상상한다. 구속력보다 상상력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영상으로 모든 걸 다 보여준다. 표정과 색채, 배경과 분위기까지 완벽히 보여준다. 영상의 구속력이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가 원작(소설)에 필패하는 이유다.

   물론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건 불필요할 것이다. 원작이 훌륭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다. 저예산 밀실 스릴러 영화 <이그잼>으로 유명한 스튜어트 하젤단이 연출했고 <아바타의> 샘 워싱턴이 주인공 맥의 역을 맡았다. 지나치게 종교적인(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대중적으로 널리 흥행할 영화는 아니다.

   나는 원작자 윌리엄 폴 영이 내한했을 때 독자 사인회에 참석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매우 좋은 질문"이라고 운을 뗀 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두렵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그 간결한 작가의 메시지가 소설 『오두막』을 창작할 수 있는 신성한 동기이자 영화로까지 제작될 수 있는 근원의 힘이었을 것이다.

   워낙 감명깊게 읽은 원작이라 영화 개봉 소식에 나도 모르게 들떠서 횡설수설 글 몇 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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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서재' 운영자 다윗입니다. 블로그에서 정치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 블로거로서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곳은 책과 작가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토론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웃들에게 꼭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몇 자 적고자 합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시민의 책임과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내일은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각 당의 공천과정에서 국민들은 우리정치의 온갖 추함과 후진성을 목도했습니다. 제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를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됩니다. 대개 극한 분노는 비아냥으로 치환됩니다. 투표를 안 한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소중한 권리이며 의무인 투표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도 않으면서 '헬조선'이라 외치고 위정자를 비판하며 국가권력을 조소하는 것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유와 책임이 하나의 셋트이듯이 권리와 의무도 한 셋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거를 하지 않는 행위도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일견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옹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어두운 현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투표율은 상당히 낮습니다. 낮아도 너무 낮습니다. 대한민국은 투표 안 하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선진국이 투표율이 낮다구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5세 때부터 실전에 가깝게 투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각자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합니다. 1인당 GDP 5만 불의 북유럽 복지국가 스웨덴의 지난 국회의원 투표율은 85,8%였습니다. 스웨덴은 의무투표제를 시행하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평균 투표율은 71.4%였습니다. 2010년 5월 유엔 공인 ‘민주주의·선거 지원 국제기구’(IDEA)가 발표한 수치입니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56.9%의 투표율로 최하위권인 26위에 머물렀습니다. 한국보다 투표율이 낮은 나라는 멕시코(56.1%), 슬로바키아(55.0%), 폴란드(50.5%), 스위스(46.8%) 뿐입니다. 투표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94.8%), 벨기에(91.4%), 덴마크(86.1%) 등입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68.9%와 62.6%도 한국보다 높았습니다. 요컨대 선진국일수록 투표율은 높습니다. 투표 안 하는 게 자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함을 선택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각 개인으로부터 발현된 개별성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지향하며 찾아가는 제도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수를 주목하고 패자를 위로하는 제도입니다. 인간사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불완전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와 시스템은 오류와 한계를 갖습니다. 그렇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차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고자 하는 실시간적 고민이 유권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재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뽑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투표하기 전에 한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기'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1번을 찍거나 자동반사적으로 2번을 찍거나 하는 등의 관습적·수구적·비사유적 투표행위는 올바른 주권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과 결정을 할 때 반드시 '생각하기'라는 인간 유일의 숭고한 차원을 관통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경험, 양심, 신앙, 비전, 사상, 이념, 철학 등을 총동원하여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며 자기만의 최고의 선택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된 선택이라면 1번이든 2번이든 몇 번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건 죄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거짓 등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철학적 기제로 비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을 주도했던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 그는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습니다. 이러한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봅니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비속화하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아렌트의 선언은 20세기 가장 시원하고 냉철하고 위대한 고발로 인류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자들의 '악의 비속성'으로 인해 어두웠고 암울한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사유'는 권리가 아닌 의무입니다. 인간의 도리입니다. '생각하기'는 인간 품격의 바로미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난 존귀한 존재입니다. 보다 행복한 개인, 보다 화목한 가정, 보다 나은 사회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용단하는 개인의 책임있는 선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투표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십시오. 그리고 또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그 다음입니다. 이 끊임없는 개인의 사유과정 속에 우리 정치의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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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37%정도가 국정화에 찬성하고 있다. 반대는 절반을 넘어섰다. 시간이 갈수록 무응답층의 비중이 반대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그렇기에 공중파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서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다. 그중 13일 방송된 JTBC <밤샘토론>은 단연 눈에 띄었다. 국정화 반대 패널로 출연한 유시민의 활약이 타 패널들을 압도하며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토론을 시청하며 "내공있는 지식인의 '말'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어느 학년이나 유독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유난히 못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강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명강의로 학생을 압도하는 교수가 있는 반면 강의 내내 졸음과 지루함을 유발시키는 교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르치는 자의 학벌과 이력이 '잘 가르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학벌과 지력이 높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건 아니다. 말을 잘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누구나 말을 잘하지는 않는다. 물론 똑똑한 사람이 말 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콘덴츠를 갖춘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이 '말 잘함'의 하드웨어적 시스템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달변에는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듣는 이의 동의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역량은 필수적인 요소로 고려된다. 자기 혼자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행위를 말 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와 페이퍼 사이의 교류는 말 잘함의 학습과정에 불과하다. 말을 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감정과 정보를 외부로 잘 표출해내는 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이 오롯하게 형성될 수 있는 역량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1차원적 행위를 참된 지식인의 역할로 보는 것 같다. 입시와 학벌 위주의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 동인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은 공부가 아니다. 지식인의 참된 역할은 자기 내면에 'input'된 지식과 정보를 정갈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소매화하여 바깥(대중)으로 'output'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output'된 지식과 정보를 타자가 어떤 긍정으로 'input'하는가에 따라 지식인의 자질과 역량은 결정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공있는 지식인의 원형이 도출된다.

   아무리 고매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자에게 전달되어 생동하지 않는 한 그것은 죽은 정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은 페이퍼에 기록된 지식과 정보만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 함몰됐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다. 그들은 '시장(market)'으로 불리는 인간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지식과 정보의 교류 혹은 부딪힘의 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인간들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한 부딪힘의 점증과정은 인간 내면에 체화된 지식으로 남는다. 페이퍼적 지식은 그것을 담지 못한다. 그렇기에 힘이 없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날아다닌다.

   오래전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임무를 해석에서 변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가 자기 안에 고착된 상태로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깥으로 내보내는 방식이 조악하고 경박해서 종국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안 된다. 꾸준한 학습과 자기관리, 현실 문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 대중여론의 분석과 수렴, 극단과 거리를 두는 중용적 자세, 세련된 말과 글 등은 내공있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필수조건이다.

   나는 아무런 교훈과 의미를 담지 않은 쓰레기 같은 배설물을 토해내는 우리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에 자주 분노한다. 얼핏 봐서는 정의를 위해 울부짖는 모양새지만 진지하게 그들의 분출물들을 천착해보면 치졸한 허위와 졸렬한 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개 실력 없는 사람이 태도도 꼴불견이다. 물론 공부는 많이 했다. 서울대를 나왔고 외국에서 공부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머릿속 지식은 녹록지 않다. 그러나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말 할 능력이 부재하다. 즉 'output'의 역량이 보잘것없기에 그 공백을 단순적 말장난으로 감추는 것이다. 그런 싸구려 수사를 지식인의 위트와 재치로 바라보는 혹자들의 '박애주의'가 안쓰럽다.

   이런 배경에서 유시민이라는 지식인의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보물과 같은 것이다. 과거 "옳은 말도 싸가지 없게 한다"는 비아냥이 그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언행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국정경험과 그간의 겪은 아픈 상처들이 그를 태도까지 겸비한 완벽한 논객으로 성숙시킨 에너지였을 것이다. 당대에 유시민과 붙어서 말로 이길 논객은 없어 보인다. 나와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정치·사상적 이념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가 선택한 정치적 결단과 정책적 입장도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식을 소매단계로 끌어올려 대중에게 적확하게 전달하는 능력 만큼은 항상 최고의 수준에서 나를 고무하며 설레게 했다. 보수에 유시민과 같은 논객이 없다는 건 서글프다.

   유시민의 말은 수정없이 그대로 옮겨놓으면 책이 될 정도로 정교하다. 그는 구어의 한계인 주술관계의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말의 마지막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한 서술어로 끝맺는다. 또한 자신의 'text'에 'context'를 그대로 담아낸다. 즉 말이 맥락이요 맥락이 곧 말이 된다. 그래서 논점을 흐리지 않고 항상 고밀한 논리의 수준을 유지해낸다. 표정과 어휘의 적확성도 뛰어나다. 부드럽게 말해야 할 때는 부드럽다. 힘주어 말해야 할 때는 억양을 높이며 제스처를 부가시킨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실시간의 감각적 교정으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된 언변을 토해낸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달변가의 모습인 것이다. 응당 지식인의 말빨은 이래야 한다.
 
   글을 정리하자. 지식인이라면 유시민처럼 말해야 한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그야말로 멋진 웅변이었다. 선술했듯이 말이라는 건 내 안의 감정과 정보를 꺼내 나를 뚫고 타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말을 잘 한다는 건 그 과정이 세련되고 정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말 잘할 권리'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타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지 못한 무능과 결핍의 산물이었음을 상기하자. 유시민의 사자후가 돋보인 토론을 보며 참된 지식인의 아우라와 말 잘함의 본질에 대해 궁구해봤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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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11-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7%는 한일합방을 한다해도 찬성하지 않을까요 ㅠㅜ

다윗 2015-11-18 19: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가슴 아픈 글을 쓴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의혹이 문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숙 본인과 출판사 창비의 해명이 있었지만 문단 내외의 비판은 점입가경이다. 안부, 쪽지, 카톡 등으로 이번 표절 의혹에 관한 내 견해를 묻는 질문이 적지 않이 쏟아지고 있다. 평소 나는 신경숙을 가장 아끼는 소설가로 자랑해왔다.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호평을 아끼지 않은 팬이었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내 주관이 이웃들로서는 궁금했을 것이다. 이에 적당한 선에서 솔직한 입장을 내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글은 그 판단의 연장선상이다.

   신경숙이 누군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다. 나는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소설가로 신경숙을 꼽아왔다. 많은 서평에서 그의 작품을 한결같이 상찬했다. 『외딴방』에 대해 작품성에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능가한다고 말한 백낙청의 평가에 백번 공감했다. 210만 권이나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차후 십 년 동안 이런 소설은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니체가 주창한 '피의 글쓰기론'을 인용하면서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문학적 서정성과 발군의 시적 문체, 섬세한 감성 등은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브랜드이자 그가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로 우뚝 선 힘이었다. 그런 그가 창작자에게 가장 큰 수치라 할 수 있는 표절 의혹에 휘말린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이번 표절 의혹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의 문제제기로 시작됐다. 이응준은 인터넷매체 '허핑턴포스트'에 소개된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경숙의 단편 소설 「전설」이 일본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게재된 이응준의 글을 면밀히 읽고 그의 논지를 살폈다. 그가 제시한 문제의 문단을 서로 비교했다. 기준은 '상식'이었다. 부분적인 어휘의 쓰임새와 문단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원작(유키오의 단편 「우국」)과 무관한 독립적인 창작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역자 김후란의 시적 의역을 그대로 옮긴 부분은 원작과 번역을 동시에 베낀 최악의 표절 사례로 의혹을 살 만했다. 우선 이응준이 표절의 증거로 내세운 두 소설의 문단을 비교해보자.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우국, 연회는 끝나고' 233쪽. 김후란 옮김. 주우세계문학전집. 1983년 발행)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확인하듯이 두 문단은 부분적으로 거의 동일한 문장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의미 배열의 순서까지 완벽히 일치한다. 소설 전체의 서사와 상관없이 상기 두 문단만 봤을 때 단어 선택과 문장 맥락에서 다분히 종속적이고 연계적이다. 더욱이 이응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문구는 김후란이 의도적으로 의역화하여 역자 재량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시적 문체를 구사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문학적 창작력으로는 도저히 일치하기 힘든 부분이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위 정도의 유사성은 의식적인 개입 없이는 상응하기 힘든 문장 배열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겠다.

   물론 표절의 기준은 단순하지 않다. 음악은 별도의 표절 기준이 존재하지만 문학은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정립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문학 외의 텍스트들은 나름의 허용되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철학자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보자.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실제로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얘기할 때 격문처럼 회자되는 문장이지만 진실은 칼 샤퍼와 장 폴 마라가 처음 사용한 문구를 마르크스가 짜집기하여 편집한 것이다. 서로 흩어진 독립적인 문장일 때는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 개의 문장이 상기의 순서로 배열되어 『공산당 선언』의 대미를 장식하니 거대한 매력을 발산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표절자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혁명 구호'로서 각 문장의 독립된 개별성이 화학적으로 합쳐져 전혀 다른 차원의 힘과 메시지로 치환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혁명 선언의 용도로 재배치된 구호일 뿐 창조물로서의 시간순서가 방점인 텍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문학은 다르다. 순수문학은 창작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어떤 텍스트보다 엄격한 표절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가 창작의 영역이라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비문학보다 작가(저자)로 하여금 창작의 양심과 그에 따른 긴장감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한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의 태동이 작가의 의식적 순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허구의 것으로 현존의 시공간을 재구성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일차적 힘은 바로 '진실성'에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말할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작가는 문학 위에 진실을 쌓는 게 아니라 반드시 진실 위에 문학을 쌓아야만 한다.

   신경숙은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해 신속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우국」을 읽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게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이 꺼림직하지만 이번 의혹을 단칼에 부인하려는 의지는 엿보인다. 하지만 당사자의 해명과는 상관없이 온라인상에서 폭포수처럼 번지는 비난의 목소리는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성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문단의 방향을 제시해온 책임있는 작가라면 한 걸음 더 나서서 자신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번 논란의 본질을 '신경숙의 표절'이라는 단선성에 두지 않는다. 대형 작가의 표절 의혹을 음지에서 비호한 문단과 출판사의 잘못된 관행이 본질이다. 이번 표절 의혹에 대해 대부분의 평론가와 작가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표절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온 한국 출판계의 더러운 민낯은 정말 충격적이다. 소위 '메르스급'이다. 한국 문단의 발전을 좀 먹는 거대한 병원성을 침묵과 비호로 잠복해온 바이러스의 존재를 밝힌 것만으로도 이응준의 용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신경숙 개인의 입장표명과 별반으로 출판사 창비의 해명은 그야말로 수준미달이다. 국내 최대규모의 문학 전문 출판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아적 수준의 해명을 내놓았다. 창비의 해명은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가 극우민족주의다'라고 폄하하면서 신경숙의 글이 더 뛰어난 작품이라는 식의 논지를 펴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표절 글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대등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외연의 부차적 요소를 프레임화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쪽팔리지도 않는가. 그나마 트위터상에 일부 직원들이 잇따라 양심선언을 한 걸 보면 출판사 자체적으로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줘야 할 상황임은 분명하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글이 횡설수설했다. 입장을 정리하자. 이응준의 논지를 볼 때 표절 의혹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작가나 출판사나 침묵으로 시간을 끌며 결국 유야무야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결국엔 양심의 문제다. 모든 표절 논란이 그렇지만 '칸트의 도덕률'만이 작금의 사태를 밝혀줄 빛이 될 듯하다.

   고백한다. 『외딴방』을 벌벌 떨면서 읽었다. 『깊은 슬픔』의 여운에 장시간 경도됐었다. 『엄마를 부탁해』는 처음으로 울면서 읽은 소설이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내 생명력 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내가 사랑한 소설가 신경숙이 거짓을 말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잠재적 표절도 표절이다. "우주가 도와줬냐"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조롱은 표절 논란의 중심을 관통한다.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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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사랑 2015-11-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본질을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다윗 2015-12-01 15:47   좋아요 0 | URL
공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