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오랜만에 '톨스토이'를 읽고 있다. 요즘 내 책읽기는 늪에 빠져 있다. 최근 책을 읽을 때의 내 정신적 에너지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책에 대한 의지박약 및 열정감소 현상은 읽을 만한 책이 없다고 판단해버리는 내 자신의 추악한 교만에서 발생된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항상 그러했듯이, 이 권태를 이겨내는 매우 적확한 처방법을.

  책으로 마음에 감동을 얻지 못할 때, 읽을 만한 책이 부재하다고 느낄 때, 책읽기의 권태가 주는 고독에 번민할 때, 바로 그때 내게 긴
요한 것은 '고전'이었다. 고전은 독자를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전은 독자에게 최소한의 어렴성을 넌지시 주문한다. 태동 이후의 인류사를 매혹시켜왔던 그 장엄한 '입증'이 한낱 머리카락 하나보다도 못한 내 교만한 기호嗜好를 압도해버는 것이다. 이미 검증되어진 위대한 텍스트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깊이있게 천착해나가다보면 책읽기의 첫사랑이 어느새 회복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러시아'다. 대학시절에 흠취했었던 '러시아문학'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를 끄집어냈다. 푸쉬킨은 나와 거리가 있었고 투르게네프는 다소 약했다. 단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톨스토이를 집었다. 집요하고 병적으로 인간의 심연만 파고드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인간(내부)과 세계(외부)에 균형을 맞추는 그림을 건강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톨스토이가 지금의 내게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끼며 어제도 오늘도 <안나 카레니나>의 매력에 잠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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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에 오소희 작가를 만났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와이프와 함께 만났다. 오랜만에 성취된 만남이었다. 내 결혼식에 오지 못한 죄값(?)을 저녁식사로 대신한다는 그의 대응이 나쁘지 않았다. 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의 내·외면적 아우라는 바뀐 것이 없었다. 수차례 그를 만났지만 항상 일관성을 견지하는 그의 모습에 난 흠모를 느꼈다. 물론 타자에 가려진 그의 속깊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는 모르는 것이겠지만.

  지금의 와이프는 내 첫사랑이다. 나는 '단 한 번'의 사랑을 했고 '단 하나'의 사랑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연애사와 겨루어도 생색낼 수 있는 컨덴츠가 내 사랑사에는 밀도있게 존재한다. 십 년이 넘게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사랑해왔던 내 자신이 당시에는 너무 밉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숱한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고 결혼까지 골인한 현재의 내 모습은, 너무, 멋지다.

  결혼 전이었다. 와이프와 헤어져 있던 시기였다. 오 작가와 단 둘이 차를 한 잔 마시며 사랑을 논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와이프를 잊지 못한 그리움에 마음 아파했고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내 현재상에 큰 부담을 느꼈던 때였다. 주변에서는 결혼과 연애는 다른 것이라며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과 기술을 남발했다. 그들은 역설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결혼생활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볼륨은 절대적으로 작다는 게 그들의 논설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의심하기도 했다. 사랑은 대체 무엇이며 결혼과는 어떤 방정식에 놓여 있는 걸까. 사랑이 결락된 채 세상이 열거하는 다양한 조건들만 갖고 결혼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저런 자못 진지한 질문에 이르렀다. 그러던 터에 오 작가를 만났던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오 작가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혼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에서 사랑은 필수이자 전부이며 궁극이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 맞는 말 아니던가. 사랑 없이 어떻게 결혼이 가능하겠는가. 당연한 진리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고도자본주의는 물질적인 것들이 과잉되어 인간 본연의 가치가 굴곡되고 호도되는 염치없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비본질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본래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 변질성에 내 순수함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 작가 오소희는 따끔한 일깨움으로 나를 본질의 선상으로 다시 데려다 준 것이다.

  오 작가의 조언과 격려에 난 힘을 얻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와이프를 다시 만났고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이 흘러서 당시 내 눈물의 원인이었던 와이프를 오 작가에게 처음으로 소개시켜준 것이다. 두 시간이 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잊지 못할 좋은 만남을 가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바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고를 이미 출판사에 넘긴 상황이며 3월 중에는 신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신간도 신간이지만 주제가 사랑이라니. 이게 왠 일인가. 가슴이 두근거렸고 맥박수가 빨라졌다.

  사실 오 작가가 쏟아낸 모든 저서들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몇 권 되지 않는 오 작가의 비블리오그래피는 한결같이 사랑을 말해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고, 아들을 향한 사랑의 메신져였으며, 세계에 대한 사랑의 학습과정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카테고리가 워낙 굵어서 텍스트의 본질이었던 '사랑'의 주제성이 다소 작게 와 닿은 것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그의 신간이 나는 너무 기다려진다. 삼 월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자주 가는 온라인서점의 검색창에 매일같이 '오소희'라는 이름 석 자를 타이핑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의 이러한 태도조차도 전혀 다른 사랑의 한 형태이리라. 그랬다. 난 사랑했다. 진지하고 인간적이며 열정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에 대해 기적같은 일말의 가슴 두근거림을 자신의 심장에 담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작가를.

  기다리는 건 힘든 일이다. 인간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고 우울한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울증은 기다림을 망각하는 병이라는 것을. 사랑의 속성에는 태생적으로 '기다림'이 함의되어 있다. 사랑한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와이프를 기다렸던 것처럼. 오 작가와의 만남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신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순간은 쓰고 아프지만 결국 삶과 사랑에는 달다. 그것이 기다림의 작동원리이다.

  곧 출간될 오소희 작가의 신간을, 나는,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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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울한 세상에 힘겨운 사람들에게 빛이 될 한 줄 글을 쓰라는 격려로 받겠다.


  제 35회 이상문학상李箱文學賞 수상자 공지영의 수상소감이다.

  소설가 공지영을 좋아하는 편이다. 평소 그녀의 소설을 꾸준히 탐독해왔다.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확고한 아우라를 갖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88년 등단 이후 그녀가 한국문단에 쌓아올린 공을 나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이야기, 진지한 척 하지 않는 솔직함, 타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난해하지 않은 단문장 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책을 손에 들게 하는 매력적인 이유가 된다. 물론 한편에서는 가볍고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돌을 던지기도 한다. 다수 평론가와 책 좀 읽는다는 독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가장 과대포장된 소설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상복 없다는 그녀의 문학사도 새로 쓰여지게 됐다.

  인터넷 곳곳에서 공지영의 수상에 대해 조롱하는 글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상문학상의 권위가 실추 혹은 변질되었다느니, 실력에 의한 수상이 아닌 공로상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이죽거림이 심심치 않게 목도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알고 느끼는 바를 주장하는 행위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의 수준이다. 논거가 빈곤하고 논설이 불성실하다. 이유와 논리가 결락된 채 공지영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포퓰리즘은 불관용의 극치다. 그 어떤 문학적 견해와 입장도 없이 성실한 소설가를 '그냥' 조롱하는 일은 곤란하다.

  주변에서 공지영을 싫어하는 이들을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 싫어하는 수준이 대부분 일차원적이고 조악한 편이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주장에 대한 자신만의 콘덴츠를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개성있고 확고한 문학적 주관으로 공지영 문학을 비판하는 이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이 평론가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거나 논리가 빈약한 불관용의 카르텔에 편승하는 꼴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상문학상 수상과 관련된 적지 않은 조롱성 글들도 그 태도와 방법에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물론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소설가 공지영의 문학적 성취가 절대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상문학상이라고 해서 신이 세운 기준이 아니며 심사위원의 권위가 곧 문학적 가치판단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견해와 식견이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수많은 이슈들이 결코 다양성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거머쥔 그녀의 성취는 일부분 납득될 수 있다.

  문학은 무슨 '척' 하는 예술이 아니다.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한다. 조정래의 말대로 문학은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해야 하는 것을 용기있게 말할 때에야 비로소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기본적 존재가치를 입증시킬 수 있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론에 있어 비본질이 본질보다 우선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불필요한 에두름과 쓸데없는 점잖음으로 문학을 난해하고 도저한 예술로 외식화外飾化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쉬움과 가벼움은 동의어가 아니고 난해한 것과 깊이있는 것은 연관적이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호도하여 세계의 실력있는 글쟁이들을 죽였던가. 문학을 '척' 하고 '체' 하는 사람의 기호에서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의 영역으로 확대 유도했다는 점은 소설가 공지영의 분명한 실력임을 인정하자.

  제작년 이맘때쯤 그녀와 나는 사석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였었다. 심사위원과 수상자의 인연으로 회를 안주 삼아 밤새도록 삶과 인간과 문학을 논했던 당시의 술자리를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녀는 인간 존엄성의 각별한 인식과 소외된 계층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역설했다. 암울한 세상에 힘겨운 사람들에게 빛이 될 한 줄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포부를 나는 믿는다. 지구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거짓의 <도가니>를 '발견'하고 '차단'하며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글은 꼭 필요하다. 

  공지영 작가의 이상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등단시기를 감안하면 늦은 감이 있다. 작가는 태생적으로 보수保守가 될 수 없다. 작가는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이다.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세계에 없던 것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추가와 수정은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바로 변혁으로 연결된다. 소설이라는 영역은 전개展開를 통해 의미와 가치를 추출해내는 문학이다. 소설가는 자신만의 고유 픽션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인간 삶의 다양한 형태를 성찰하게 하고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천착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세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는 문학의 순기능인 것이다.

  공지영의 비블리오그래피(bibliography)를 살펴 보면 꽤 많은 지점을 거쳐왔음을 알 수 있다. 작금의 지점까지 다다른 그녀에게 나는 작가로서의 가치있는 진보를 기대한다. 낮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빛이 될 한 줄 글의 희망을 지지한다. 공지영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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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그러했듯이 올해 읽은 책 중에서 '베스트 5'를 선정해 이웃님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2010년은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읽은 만큼 서평을 남기지 못한 해였다. 개인사도 많았고 게으르기도 했다. 형편없는 리뷰어의 아마추어리즘을 가감없이 보여준 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한 해를 마무리하며 책 읽은 리스트를 반추하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하겠다.



1.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

 


  2010년 '올해의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선택했다. 현재 거의 모든 온라인서점에서 압도적으로 금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고 있다. 이
현실성에 부담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현상에 무턱대고 경도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간명하다. 책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의 기준은 본질이다. 

  2010년은 각계각층에서 말로써 정의를 수없이 논한 해였다. 갑작스레 대통령께서 어울리지 않게 '공정한 사회' 운운하며 한국사회에 정의론을 부르짖었다. 또한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루키의 종합예술문학 완결판도, 대한민국 자본주의사의 역동성을 그려낸 황석영의 장편도, 신경숙의 매력적인 청춘소설도 이 한 권의 인문서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연 무슨 마력을 가졌을까.

  '정의(justice)'는 우리사회의 지속된 당위當爲이다. 정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한국사회는 정의에 대한 '당위'가 '존재'로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든 공정성의 집행이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 속에 내재된 한계와 실수의 유전자는 사회의 오류와 굴곡을 발생시킨다. 이는 유한적이고 비논리적인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간의 '방향성'만큼은 항상 올곧음을 지향해왔다. 역사를 깊고 넓게 보면 인간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했다. 에드워드 카의 주장대로 역사는 언제나 발전해왔고 그 바탕에 인간 삶의 긍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샌델 교수는 다양한 사례와 흥미로운 토론거리를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밀어넣는다. 상당수 미국적 예시에 기댄 부분과 기존의 철학 이론 위주로 풀이한 부분은 '한국인의 정의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안내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밀, 벤담, 칸트, 롤스의 세계를 관통해가다 보면 어느덧 가까워지는 정의의 본질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사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막장까지 정의란 무엇인지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의는 진정 무엇인지, 정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 정의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명제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즉 독자에게 저자 자신의 정의론을 강요하기보다는 정의에 대한 올곧고 열정적인 태도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정의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이야말로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을지 모른다.

  정의가 꼭 필요한 사회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겸허한 태도를 견인했다는 점, 그리고 정의의 붐을 만들어내며 공정한 사회 건설을 위한 진지한 사유를 추동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올해의 책이 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



2.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삼인출판사, 2010



  <김대중 자서전>은 한 사람의 일대기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텍스트다. 한 인물의 전기를 넘어서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밀어넣는 힘이 있다. <김대중 자서전>이 담은 시공간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1920년대의 일제식민통치부터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을 거쳐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투쟁,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요 고비를 온몸으로 건너왔던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렸다.

  이 책을 평하는 데 있어 정치적 견해차이는 배제되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김대중을 지지했든 비판했든, 그 어떤 입장에 서있든지간에 인간 김대중의 족적을 훑어보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욕의 현대사를 살피는 일과 동일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김대중이라는 한 위인의 자전이자, 넓게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관통이라는 측면에서 <김대중 자서전>은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다. 실로 깊고 풍성하며 방대하다.


3. 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정신적 압박은 책을 평가하는 내 기준의 자장 밖에 있다. 세기의 대작가 헤르만 헤세를 비웃었고, 헤럴드 블룸이 극찬한 코맥 메카시의 <로드>를 잘근잘근 씹었다. 외부, 즉 타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내 독서기호와는 무관한 것이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는 분명한 진리다. 책의 주체는 작가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며 책을 집고 있는 현재의 당사자, 바로 자기자신이다.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의 수상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에 대한 관심이 녹록지 않았다. 본래 한국문학을 즐겨 읽기에 그리 많은 수상작을 만나보진 못해왔다. 그중 몇몇 눈에 띄는 작가에 호감을 가져왔는데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소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짐승>을 읽고 응축된 시적 언어가 어떻게 산문화될 수 있는지 놀랐다. 소설은 독재 시절의 루마니아의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남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슷했던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네 청춘남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내용의 투영과 독특한 전개구조, 응축된 시정詩情과 세밀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고통과 공포의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게 하는 가슴 쓰라린 '완성도'가 된다.



4.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문학동네, 2010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이 소설에 대해 하루키 소설의 전형적인 아류라며 혹평했다. 특히 <상실의 시대>를 신경숙적으로 재구성하여 표절한 텍스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대로 따온 1차원적 표절은 아니더라도 작품 전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유사성이 하루키 아류의 증거라고 외치는 조영일의 지적에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다른 장르도 아니고 문학에서 상징, 등장인물, 서사구조의 지엽적 유사성을 이유로 표절 운운하는 그의 오류가 심히 불편하다. 조영일의 주장대로라면 이 세계의 책들 3할 이상이 표절로 증발해버리게 된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른 텍스트다. 소설의 주제가 다르고 작가의 태도가 다르며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다르다. 신경숙과 하루키는 전혀 다른 소설가다. 신경숙은 하루키 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섹스씬 하나 없이 청춘시절의 혼란과 아름다움을 세련되게 그려냈다. 더욱이 발군의 세밀한 문체는 신경숙 문학의 보석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폭풍이 워낙 강렬해서 신간이 내뿜는 불빛이 상대적으로 밝지 않아 보였을 뿐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충분히 강렬하고 유려하며 매력적인 소설이다.


5.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2010



  최근 몇 년간 인권이 후퇴되었다고들 한다. 일견 공감한다. 미네르바가 구속되었을 때 같은 글쓰는 블로거로서 겁났던 게 사실이다. 이 정권 들어서 국가가 무서워 어디 맘 편히 글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아직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삼 자유와 인권을 생각하게 된 지난 몇 년이었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청소년 등 사회 약자들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권이라는 묵직하고 딱딱한 주제를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시킨다. 저자 특유의 재치와 맛깔스러운 문장은 독자에게 흡입력을 더한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소개함으로써 다양성을 배가했다. 요컨대 <불편해도 괜찮아>는 숭고한 인권의 가치를 흥미롭지만 가볍지 않게 풀어낸 책이다. 책 자체도 훌륭하지만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응당 2010년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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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다 보면, 어찌 글을 이리 잘 쓸까, 하는 탄성이 나올 때가 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세계의 역량있는 작가들은 발군의 필력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특히 몇몇 작가는 글에 신성을 불어넣은 듯 마법적인 힘으로 읽는이의 심장을 뒤흔든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멋지고 아름다운 글로 인해, 그리고 그것이 주는 삶의 교훈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책 속에 파묻혀 산다.

  책 관련 블로그를 오픈한 지 어느덧 사 년 차가 되었다.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것은 내 부족한 책읽기를 보완하고 정리하기 위함이요, 타인의 사유와 견해를 참고하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깊고 풍성한 책읽기를 견인한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총체적 의미와 부분적인 가치에 대해 글을 쓰며 정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블로그라는 공간에 오픈함으로써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타자를 통한 다양성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독서에 왕도는 없기에 고집을 꺾고 보다 겸허한 자세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블로그 이웃님들로부터 글쓰기와 관련된 문의를 종종 받는다. 서평의 왕도나 글 잘쓰는 비법에 대해 물어올 때면 나는 한없이 민망해진다. 내 자신조차 미천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어찌 타인에게 조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님들의 질문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잘 쓰고 싶어할까. 그렇다면 과연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온라인상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불편해진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글은 필자의 창조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창조적 행위이다. 필자의 생각과 경험과 철학을 필자만의 필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에는 필자의 사상과 개성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글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누군가'의 개성이 글의 존재성을 결정한다. 최소한 '논설'의 규격을 갖추고 있는 모든 글은 철저히 필자의 주관에 의해 창조된다. 필자의 주관은 논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글이 될 수는 없다.

  서평을 포함한 모든 리뷰는 하나의 논설문이다. 논설문이라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먼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피력하는 것이 논설문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것이다. 즉 글은 '주관'의 목적을 '객관'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글은 타자에게 읽힘을 전제로 한다. 더욱이 온라인에서 씌여지는 모든 글은 불특정다수가 읽는다는 것을 염두한다. 그것은 필자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글이란 것은 내 생각의 갈무리를 넘어 타자를 향한 메시지이자 소통이다. 태동적으로 글은 '사회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필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태도를 이끌어낸다. 동일한 소재라 하더라도 필자에 따라 글의 논지와 색깔은 분명 다르다. 다른 만큼 빛나고 개성이 있을수록 멋지다. 다양성은 선善이 된다.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글에 대한 최소한의 규격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기본이고 명확한 주관 피력, 조리있고 논리적인 서술, 합리적인 논거, 풍부한 어휘력, 매끄러운 문장력 등은 글과 읽는 이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의 주관적 개성과 함께 좋은 글을 완성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온라인상의 적지 않은 블로거들이 바로 이 부분을 망각한 채 리뷰라는 카테고리를 마치 자신의 일기나 낙서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며 읽는 이에게 가져야 할 신성하고 묵직한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결여된 모습도 눈에 띈다. 물론 솔직한 건 좋은 것이다. 글에서 정직은 매우 중요하다. 솔직함이 언어를 힘있게 한다. 하지만 솔직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휘와 문장을 넘어 하나의 완성된 글까지 텍스트는 다듬어져야 한다. 잘 써야 하는 것이다. 잘 쓴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글은 언제나 잘 쓴 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글은 타자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조악한 문장을 솔직함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가리면서 큰소리 치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들의 오해가 너무 불편하다. 노력과 예의가 결락된 자신의 혼잣말 수준의 낱말 조합을 좋은 글이라고 호도하며 착각에 빠진 이들에게 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조언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건 없는 듯하다. 글쓰기는 철저히 훈련으로 발전될 수 있다. 언어에서 말하기는 선천의 영역에 기대지만 글쓰기는 후천의 영역에서 다듬어진다.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채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형편없는 문장에 담아내면서 자신이 괴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솔직'과 '충격'이라는 요행보다 깊이있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책과 벗하고 인간과 소통하기를.

  솔직함으로만 작가가 된 이는 없다.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필력을 손보고 다듬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언어의 정수를 걸러낸다. 어떨 때는 하루 내내 한 문장도 쓰기 어려워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집필한 글을 수 년 동안 탈고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거듭된 탈고도 맘에 들지 않아 세상에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고통이다. 신성한 것이다. 나를 보는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고 의식하는 행위이다. 글을 향한 이러한 경외한 마음이 없다면 좋은 글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글쓰기의 '집중中'과 '성의意'를 의미한다.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는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좋은 글에는 반드시 필자의 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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