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전공자는 아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있어 왔다. 현실을 인식하고자 할 때 철학만큼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해주는 기준도 없다. 중용적 지성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역사는 필수다. 더욱이 작금과 같은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더욱 그렇다. 올바른 지성으로 세계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쳐다보기 위해서라도 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서양철학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중요한 기준점을 통과해야만 한다. 화이트헤드는 말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다. 플라톤은 그 첫 번째 기준이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한 사람의 철학자가 또 있다. 그는 바로 칸트다. 서양철학은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즉 플라톤과 칸트를 관통하지 않고서는 서양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이야 워낙 대단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의 계보에서 그의 위상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유명한 '이데아론'과 '철인정치론'에 대해 나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다. 사실 플라톤 철학은 나에게 녹록지 않은 이질감과 반발심을 발산케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만은 달콤한 철학자는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칸트는 다르다. 고백하건대 내 자신의 도덕심과 책임감은 기독교 신앙와 더불어 칸트에게서 연원한 부분이 많다. 철학사를 유심히 탐구해보면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로 빨려들어가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 다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칸트의 명저 <순수이성비판>을 완독하려다가 수차례 실패했다. 그 실패의 상흔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했다. 끝까지 완독하지 못한 책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 칸트라는 존재는 큰 성벽과 같은 것이었다. 대체 칸트가 무엇이관대 난 이렇게 씨름하고 좌절해야 하는가. 내 자신의 자존감적 질문이 내면 곳곳을 후벼팠다. 이후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어느것 하나 완독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두가지였다. 철학은 본래 어렵다는 당연한 전제를 망각한 게 첫 번째였고, 아무런 준비과정도 없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을 집어든 내 자신의 오기와 허영이 얼마나 우스운 행동이었는가 하는 게 두 번째였다.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로 칸트를 내세우면서 여태까지 <순수이성비판>조차 완독하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은 콤플렉스 이전에 거짓이며 허영이었다. 그리고 철학 전공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어마어마한 대작을 읽기로 작정했음에도 그것을 위한 지적 준비과정에 아무런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도 교만이자 만용이었
다. 그랬다. 난 교만했다.

   칸트를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칸트를 제대로 천착하기 위해 내가 배정한 시간은 3개월이다. 칸트를 오롯이 체화하기 위해서는 칸트 이전 철학의 개괄적인 흐름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램프레이트 <서양철학사>를 다시 한 번 정독하기로 했다. 이어 루드비히와 진은영의 칸트 입문서 세네 권을 탐독하기로 했다. 그 다음 국내 최고의 칸트 전문가이자 번역자인 백종현 교수의 <칸트와 헤겔의 철학 : 시대와의 대화>, <존재와 진리 : 칸트 『순수이성비판』의 근본문제>를 일독함으로써 <순수이성비판> 완독을 위한 워밍업 작업을 계획키로 했다. 그러고 나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의 순서로 칸트 비판서 시리즈를 모두 완독할 작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가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쓴 명저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백종현 교수 번역본으로 다시 한 번 탐독할 것이다.

   장장 3개월의 시간을 들여서까지 대철학자 칸트의 숨결을 탐구하고자 하는 동기는 간명하다. 자유주의, 엄밀히 말해 개인주의의 올곧은 정신과 가치가 사라져가는 작금의 사회적 모습에 위험과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을 외쳤던 천재 철학자의 숨결을 오롯하게 천착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천착과정을 통해 결국 내 자신의 내면을 깊이있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내공을 키워보기 위함인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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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이웃님으로부터 폴 존슨(Paul Bede Johnson)의 <2천 년 동안의 정신,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세 권의 두꺼운 기독교 역사책을 추천받았다. 살림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데 현재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4대 온라인서점을 위시하여 오프라인 대형서점을 두루 훑고 다녔지만 단 한 권도 찾지 못했다. 중고로 사는 것은 마뜩치 않았다. 새 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출판사에 직접 연락했다. 종국적으로 파주시 출판단지까지 가서 몇 권 남지 않았던 새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간명하다. 기독교 역사 2천 년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물론 이 책만 갖고 교회사를 개괄해보려는 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이신 교회의 협동목사님으로부터 평신도가 읽는데 부담이 없고 동시에 가볍지 않은 책을 추천받았다. 그 책은 별도로 주문했다. 즉 기독교 내부의 시각에서 쓴 책과 외부의 관점에서 쓴 책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나름 확보해보려 한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다. 엄연한 보수주의자로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천착하고 있는 석학이다. 그의 저작 중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20세기 현대사를 꿰뚫을 수 있는 명저이며, <지식인의 두 얼굴, Intellectuals>은 기존 지식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파헤친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저자 특유의 방대한 자료 모음과 힘 넘치는 서술은 그의 저작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그간 읽어왔던 존슨의 책들을 통해 그의 집필 스타일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이웃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2천 년 동안의 정신>은 적기에 내 손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는 이곳저곳에서 어마어마한 욕들을 폭포수처럼 얻어맞고 있다. 물론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 중에는 사실과 다르고 논리가 빈약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한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욕 먹을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교회 관련 좋지 않은 뉴스를 접하게 되면 기독교인으로서 치솟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감출 방도가 없다.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면 이런 문제가 비단 한국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봉착한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간 인류에게 선사한 밝은 에너지의 이면에는 참혹한 역사적 편린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위시하여 참혹한 전쟁과 살육의 피의자로서 교회권력은 직·간접적인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해왔다. 이에 수박 겉 핡기 식으로 배우고 알아왔떤 교회사에 대해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정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며 세계와 대화하는 일은 적잖이 고통스럽다. 신神의 가르침은 세상과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을 선포한다. 이 '단절'과 '구별'을 구분하고 해석하며 실천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지식에 대해 제대로 알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고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필히 세상과 씨름할 수밖에 없는 이 지독한 '인간적 실존'은 본질적이고 태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추동하는 '신적 본질'에 종속된 채 맞물려 나아가는 함수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 고민은 결국 지성의 목마름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었다. 2천 년의 교회사를 침착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협동목사님의 추천도서는 분명한 신앙서적에 속한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오셨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건강하고 은혜롭게 다루었다. 반면 존슨의 책은 저자 자신이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객관성을 견지하며 교회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내부와 외부의 관점을 동시에 탐구하는 양자적兩者的 책읽기는 교회사를 균형있고 입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의 저서와 철학사 관련 책을 끝내면 바로 진행할 계획이다.

   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의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통과 질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직 믿음'으로 대변되는 칼빈주의(Calvinism , ─主義) 신학을 굳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무신론(atheism , 無神論)과 범신론(pantheism , 汎神論)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관념'으로 규정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 and Leinism)의 계급사상과 유물론(materialism , 唯物論)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자생적 행동과 행위에 존재적 본질을 두는 프랑스식 실존주의(existentialism , 實存主義) 철학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세상의 목소리에 무조건적인 배타로 일관하는 꽉 막힌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상과 타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세상과 따뜻하게 호흡하기를 소원하는 내 지성과 열정에 대한 존재론적 약동인 것이다. 이번 책읽기가 그 길을 안내하는 작은 촛불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
오. 주님. 신앙고백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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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톨스토이 전집이 출간된다. 그것도 국내 유일의 톨스토이 전문가인 박형규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전 교수의 번역을 통해서 말이다. 북한 미사일 사태를 위시하여 시끄럽고 우울한 뉴스의 홍수 속에서 톨스토이 전집 출간 소식은 단연 빛나는 보석과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더욱이 모든 작품을 박 교수가 직접 번역한다니. 날아갈 것 같다.

   사실 '톨스토이 전집'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재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모두 9권이 나와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 불멸의 대작 <전쟁과 평화>가 누락된 상태에서 중단된 상황이다. 박 교수는 이미 출간된 <안나 까레니나>를 시작으로 출판사 뿌쉬낀하우스를 통해 내년 말까지 모두 18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을 번역해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전집에서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에 세 권짜리로 들어 있는 <안나 까레니나>를 1,000쪽이 넘는 양장본 한 권으로 편집했으며, 200자 원고지로 1만장에 이르는 <전쟁과 평화>를 두 권으로 분책하는 등 분량부터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이번 전집 작업에 눈과 귀를 모으고 요란하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톨스토이의 본격적인 전집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작업이라는 데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전집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초기 중·단편집 <악마>, <결혼의 행복>, 희곡집 <어둠의 힘>, 후기 중·단편집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예술·문학·교육론집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종교·사회평론집 <고백> 등은 그의 번역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기존 번역 역시 신역에 가깝게 손을 보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는 박 교수의 비전은 나같은 톨스토이빠 독자에게는 환희이자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82세라는 연로한 연세에도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 수고하며 헌신하는 박 교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 교수는 러시아 문학자이자 해방 이후 1세대 번역가로서 톨스토이 문학의 천착과 번역작업에 60년의 시간을 바치며 오직 학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의 노고는 훗날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억해줄 것이다. 부디 무탈하게 귀하고 거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한다.

 

 

 

 

[사진출처:해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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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은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났다. 반드시 서평을 남겨야 하는 작품임에도 아직까지 정리를 못한 채 둥개고 있다. 소설 자체는 쉽다. 갈무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여태까지 나는 철학자와 사상가로서 카뮈를 대해왔다. 소설가로서의 탐구가 소소한 이상 <이방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카뮈를 사르트르의 반대편에서 주로 해석했다. 카뮈에 대한 내 긍정과 동경은 사르트르와 멀어진 내 변화의 크기가 추동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음사판의 <이방인> 해설이 사르트르에서 역자 김화영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이방인>을 수용하는 디테일은 사르트르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주관적 기호와는 별도로 <이방인>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입체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이 작품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사실 사르트르는 카뮈가 <이방인>을 써 문단의 총아로 등장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에서부터 <페스트> 그리고 사고로 죽기 3년 전 발표한 <전락> 등을 격찬하면서도, 카뮈가 쓴 <반항적 인간>을 두고 극단적인 논쟁을 벌였다. 더욱이 <이방인>에 대한 카뮈와 사르트르 간의 실존주의 논쟁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화두였다.

   주지하다시피 <
이방인>의 키워드는 '부조리'다.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을 상정했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기존의 통설적 실존주의와는 구별된다. 엄정한 철학적인 방법론으로 구성된 학문적 이론이라기보단 그냥 인간이 가지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과 대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와 벽을 세웠던 것 아니겠는가. 카뮈 식의 부조리에 대한 개념화가 결락된 채 그저 사르트르의 대책점에서 <이방인>을 읽어내려 했던 내 천착이 오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깊은 이해와 카뮈 세계관의 진지한 학습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방인>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실존주의 사상의 단초가 되는 부조리 따위를 철학서 속의 사어가 아닌 실제의 삶과 일상 속에서 기묘한 괴리나 위화감과 함께 직접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방인>은 무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이방인>의 완벽한 갈무리를 위해 세 가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역자 김화영 교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엄마'와 '어머니'의 번역 차이가 소설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김화영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번역판의 재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이에 문학동네판으로 다시 읽기로 했다. 이게 첫 번째 과제다. 그리고 카뮈의 부조리에 깊이 침잠하기 위해서 그 전초가 되는 <시지프 신화>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실존주의의 태동성과 역사성이 담보된 실존 철학과 문학의 알맹이들에 보다 깊이 감화되기 위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상기
세 가지 수고로움은 나에게 소설 <이방인>을 보다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과제다. 이를 통해 이 지독한 작품에 대한 내 입장정리가 보다 명료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방인>은 분명 흥미로운 텍스트다. 하지만 동시에, 피곤하고 고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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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아침, 오랜만에 작가 오소희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간만에 성사된 안부의 동기는 그의 신간이 출간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항시 그의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마다 가장 먼저 구독해서 후기를 남기곤 했다. '가장 먼저'라는 속도 권력은 한 작가를 사랑하는 내 나름의 독특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고백컨대, 오소희는 내 이십대의 마지막을 '서른'이라는 엄연히 다른 세계로 아름답게 연결해준 작가이다. 내 스무시절의 말미는 사랑의 '결핍'과 '과잉'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둥개고 허우적거린 시기였다. 그때 오소희는 나에게 사랑의 본질과 결혼의 의미를 토닥거렸다. 나는 그의 텍스트 속에서 '괴테'와 '톨스토이'와 '하루키'를 보았다. 그의 에세이는 과거에 사랑을 논했던 모든 고전과 인문학이 현대적 감성으로 합일되는 것을 이루어냈다. 작가의 혼잣말 수준을 넘어 자신과 타자와 우주에 노크하며 그에 적확한 반응을 얻어내는 힘이 그의 에세이 속에는 오롯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나는 그와 여러번 사석에서 만났다. 그때마다 일관되게 나에게 주문했던 그의 조언은 당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내 사랑의 원형'을 뚜렷하게 각인하는 데 일조했다. 그 각인의 반복적 반추는 곧 내 첫사랑을 부활시켰고 그 사랑은 결국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가족'으로 완성되었다.

 

   작가가 가진 힘은 실로 강력하다. 텍스트의 힘은 시대를 뚫고 의식을 전환시킨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이코는 동시대 비평가의 임무를 "시대를 선도해가는 작가를 죽이는 것"으로 규정한다. 개소리와 같은 시게이코의 말을 인용하는 게 웃기지만 그의 말을 독자를 주어로 패러디하면 의외로 멋진 문장이 완성된다. "동시대 독자의 임무는 시대를 선도해가는 작가를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작품은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면 내 딸은 세 살이 된다. 오소희의 처녀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는 세 살배기 아들과 터키를 여행하며 기록한 여행수기다. 당시 결혼 전에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벌벌 떨면서 몇 시간만에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그 책이 가진 본래성과 나의 시간적 현재성이 일치하는 며칠 후,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행복한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작가 오소희를 사랑해도 너무 사랑했던 것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서점으로 향한다.

 

 

Written By David

http://gilsamo.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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