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서점을 드나들었다. 동탄-분당-잠실-강남-부천-강서로 이어지는 긴 코스였다. 말 그대로 '북 투어(book tour)'였다. 대부분 중고서점이었다. 첫째 딸의 『설**의 한국사 대모험』 시리즈가 이빨이 많이 빠져 상태 좋은 중고책으로 채워 넣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여기에 기왕 간 김에 내 책도 몇 권 사자는 취지가 이차적이었다. 고르다 보니 애들 책보다 내 책이 더 많아졌다. 뜻밖의 책 호사를 누렸다. 구입한 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읽은 책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 위한 것이었다.


1월에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서점을 드나들었다. 동탄-분당-잠실-강남-부천-강서로 이어지는 긴 코스였다. 말 그대로 '북 투어(book tour)'였다. 대부분 중고서점이었다. 첫째 딸의 『설**의 한국사 대모험』 시리즈가 이빨이 많이 빠져 상태 좋은 중고책으로 채워 넣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여기에 기왕 간 김에 내 책도 몇 권 사자는 취지가 이차적이었다. 고르다 보니 애들 책보다 내 책이 더 많아졌다. 뜻밖의 책 호사를 누렸다. 구입한 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읽은 책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 위한 것이었다.

집 서재에 동일 제목이 있다는 걸 눈치챈 둘째 딸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빠. 근데 왜 읽은 책을 또 사?" 아이의 질문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해외문학은 번역마다 결이 다르고 읽는 맛이 다르단다"라고 답했다. 아이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관심 코너로 이동했다. 사실 그렇잖은가. 가령 톨스토이 『부활』의 경우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그 유명한 첫 문단만을 비교해도 출판사마다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같은 작품이라도 2편 이상의 번역본을 소장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병독하면서 조금 다른 맛을 찾아 살피는 건 해외 고전을 입체적으로 탐독하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기존 정기수 번역본(민음사)이 다소 투박하고 직역 투여서 <동서문화사>의 송면 역으로 다시 고른 것이다. 위고 특유의 지난한 묘사와 잦은 장광설을 힘 있게 이겨내기 위해서는 번역의 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철 지난 프랑스어의 된소리 번역만 개의치 않는다면 송면 번역이 나에게는 더 맞으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그 유명한 비야르의 삽화 300점이 수록된 건 덤이다. 『레미제라블』은 올봄이나 여름 정도에 쉼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전두엽에 꾹꾹 누르며 다시 읽을 계획이다.

톨스토이의 처녀작 『유년 시대』는 동완의 번역(신원문화사)으로 읽고 싶었던 책이다. Y 중고서점에 1권 있는 걸 얼른 집었다. 『유년 시대』는 톨스토이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품이다. 『소년 시대』, 『청년 시대』와 함께 '톨스토이 자전 3부작'으로 불리는데, 개인적으로 『유년 시대』만 읽어도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뒤의 2개는 작품성이 조금 떨어질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넓게 조망한다는 차원에서는 굳이 안 읽어도 되는 작품이다. 후일 『안나 카레니나』나 『고백록(참회록)』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유년 시대』만으로 충분하다. 박형규 역(인디북)과 함께 골랐다.

장융의 『대륙의 딸』은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구입했다. 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추적한 역작이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 현대사의 비밀과 중국 민족성의 특질을 생생하게 그려낸 20세기 최고의 기록 문학'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 논픽션 최고상 수상 등 출간 당시 각종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모택동으로부터 본격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인간 말살의 측면에서 모택동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못지않은 인물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이 중국공산당의 오욕의 역사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룬 책인데 이와 함께 읽으면 문화대혁명의 기치 아래 얼마나 악랄하고 엽기적인 일들이 20세기 중국 대륙에서 벌어졌는지 잘 알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중이다.

『설**의 한국사(세계사) 대모험』 시리즈는 유아를 둔 부모에게 인기가 많은데 초등학생에게 한국사(세계사)의 기초적 흥미를 더해주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가 역사왜곡 논란으로 방송에서 하차한 상황이지만 책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리는 것 같다. 서점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매하고 있다. 구매 관련 팁을 주자면 해당 시리즈는 굳이 새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하기 바란다. 전 시리즈를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는데 완전히 새 책이었다. 새 책 같은 중고가 아니라 진짜 '새 책'말이다. 무슨 얘기인지는 직접 중고서점에 가서 확인해보면 알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낳은 '웃픈' 풍경이라고나 할까.

아이들과 서점에서 뒹구는 시간이 즐겁다. 가끔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줄 때 나 자신이 참으로 멋지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쳇말로 '자뻑'이지만 솔직한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 습관과 태도는 사랑과 분노처럼 정확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두 딸이 공부를 잘 안 하고 학력은 조금 떨어져도 책 읽는 습관만큼은 어려서부터 습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딸이 책상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언젠가 두 딸과 단테의 『신곡』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함께 읽은 후 서로 다른 감상평을 나눌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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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리커버리 출간이나 기념 이벤트를 준비할 것으로 예측된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살짝 편승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조만간 다시 읽으려 계획 중이다. 전에 읽은 것과 다른 번역본을 찾았다. 현재 소장 중인 민음사판(김연경 교수 역)이 문제 있어서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가 다분히 찰지고 개성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는 것도 감상의 확장을 위해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게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판이다. 절판되진 않았지만 중고를 찾았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리커버리 출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번지르르한 새 책은 그때 구입하면 된다.

 

도스토옙스키 얘기로 글 문을 열었지만 실제 내 현재 관심사는 톨스토이다. 지금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손에 들고 있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을 걸쭉한 감동으로 읽은 나에게 그의 중·단편들은 또 다른 성격의 울림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뻑 간 나머지 서평을 어떻게 쓸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지금 읽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압권이다. 이에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기로 결심했다. 톨스토이 전작에 뛰어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다. 도스토옙스키 200주기를 맞이해 톨스토이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톨스토이에 대한 관심을 문의 받았다. 총 두 사람인데 교회의 협동목사님과 친동생처럼 지내는 회사 후배이다. 이에 그들에게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78편의 전작(全作)을 소화하는 게 가장 입체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효율과 압축을 위해 보통 3대 장편(『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을 꼽는 편이다. 3개 대작 중 앞선 두 개는 문학적·예술적인 면에서 단연 걸작으로 꼽히지만 뒤의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은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 소설을 정점으로 이후 작품들이 지나친 종교적 관점과 금욕(절제)주의에 함몰되어 다소 따분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나에게도 후기작 『부활』은 한없이 밋밋했다. 이러한 톨스토이 문학의 변화를 음미하는 것도 나름 굉장한 쾌감이다.

 

톨스토이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제법 대중적인 작품으로 주변에 읽어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전쟁과 평화』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 과거 서평에서 지적한 대로 대부분 『전쟁과 평화』의 존재와 명성은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총 4권으로 2200페이지가 넘고 등장인물만 550여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소설을 읽어낸다는 건 웬만한 독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일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읽지 않은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책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 소설을 꼽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과히 신비의 소설이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 마니아나 러시아 문학 그룹 사이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중 어떤 작품이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이 간혹 화두가 될 때가 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문학적 취향과 작품의 해석은 다르기 마련이다. 문학평론가 이현우 씨(필명:로쟈)의 말대로 『전쟁과 평화』는 '소설을 초과하는 작품'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쟁과 평화』는 스케일과 구조 면에서 전무후무한 독자성(獨自性)을 가진 소설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장편소설이란 장르로서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소설이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겠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쟁과 평화』에 조금 더 애착이 간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보다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 내 컨디션이 좋았고 내 마음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과히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소설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랑하고 성장하는 젊은 남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아래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채롭게 그려졌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인상과 역동은 숨이 멎을 정도다. 안드레이의 진지함, 니콜라이의 일관성, 피에르의 자유분방함, 나타샤의 생명력 등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을 넘어 삶과 사랑에 대한 웅대한 예찬서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완독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설 말미에 도착했을 때의 농밀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100년도 채 되지 않는 한 사람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온 것이 실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조금 더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에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처럼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의미라는 걸 알려준다.

 

책 선물을 한다는 얘기에 너무 장황한 서설이 붙었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를 두 명의 지인에게 선물한다. 번역본은 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문학동네판을 골랐다. 박 교수는 해방 후 러시아 문학 1세대ㅡ1.5세대로 보는 사람도 있음ㅡ학자로서 학구열이 대단한 번역가이다. 90세의 노년임에도 그의 번역 활동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이다. 성실하고 세심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없으며 한국어 어휘 구사력이 탁월하여 통상 옛 번역의 한계로 지적되는 '투박함'이란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잘 읽히는 번역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 하여 각광을 받는 추세라 한다. 최근 몇 년간 『전쟁과 평화』도 수많은 번역본이 쏟아졌다. 그중 젊은 번역가 연진희 씨의 민음사판도 좋다. 문학동네판이 우아한 문어체의 맛을 살렸다면 민음사판은 젊은 세대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듯 문장을 잘라서 구어체를 부각시켰다. 두 번역본 모두 훌륭하다.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책 선물을 받을 두 분에게 큰 감동이 있기를 바란다. 두 분 모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내 인생 소설을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그들이 『전쟁과 평화』의 완독에 성공하여 서로 다른 리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만의 책 선물에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상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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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네이버에서 가장 큰 북 카페의 서울모임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순수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작가 지망생까지 책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이고 까칠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정식 모임 후 회식자리에서 가장 자주 안줏거리가 된 건 소설가 공지영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오(好惡)는 유독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나는 호(好)의 입장이었고 항시 소수였다. 다수의 공격은 매서웠고 광활했다. 과히 지독한 논쟁이었다. 밤을 새우며 공지영 문학을 토론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공지영의 신작이 출간됐다. 응당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신간 『먼 바다』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아직도 작가 개인을 철저히 배제한 완벽한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 중 탑이다. 최근 작가를 둘러싼 시끄러운 뉴스를 단박에 잠재울 만큼 소설 자체는 끝내준다. 공지영은 소설가일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오래간만에 그녀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10년 전이다. 모 포털사이트에서 주관한 큰 규모의 시상식이 끝난 뒤 그녀와 나는 서초동에서 술자리를 함께 했다. 여러 안건에 대한 솔직하고 가식 없는 그녀의 아우라를 긍정적으로 기억한다. 어마어마한 주량에 놀랐던 것도 기억한다. 이후 둘은 작가와 독자라는 전형적인 관계로 돌아와 지금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최근 그녀가 많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과 외로움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작은 정말 재미있고 훌륭하다. 자세한 건 내일 오전에 올릴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소설가 공지영의 삶과 문학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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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가 예전 같지 않다. 양과 질 모두 총각 때와는 전혀 다른 독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아이들이 좀 크면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겠지,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의 성장과는 무관하게 내 스스로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체감하는 시간의 지독한 부족 현상이 내 독서를 방해하는 궁극의 요인이었다. 한 달에 스무 권씩 읽어냈던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내 나이 마흔둘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꼭 필요한 책만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2020년에 무조건 읽어야 할 책을 두 편 골랐다. 첫 번째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과거 한차례 읽기를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이력이 있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집중하기 힘든 프루스트 특유의 미로찾기 식 만연체에 초반부터 녹다운 됐던 기억이 선연하다. 가령 잠들기 전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30페이지를 할애한다. 오죽하면 프루스트의 동생이 "이 소설을 읽으려면 중병이 들거나 한쪽 다리가 부러져야만 한다"라고 말했겠는가. 여하튼 새로운 번역으로 곧 재도전하려 한다. 내가 이 난해한 소설을 다시 읽으려 하는 이유는 시간과 인생 사이의 고밀한 함수성을 프루스트 식 조망으로 통찰해보기 위함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천착해보려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매끄러운 번역으로 평가받는 김희영 교수 번역(민음사 판)은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아 古 김창석 시인의 완역본 세트(10권)를 물망에 올려놓는다.

 

   또 다른 책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다. 소설가 박경리가 그토록 추천해 마지않았다고 알려진 유명한 소설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읽기를 갈망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땅한 번역본을 찾지 못해 차일피일 해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가볍게 완독한 작년 말의 기억을 긍정하며 또다시 러시아 대작에 침잠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소설에 잘 감응하는 편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 지금까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내 기호와 부합했다. '방대한 서사를 유려한 문체로 힘 있게 이끌어가는 힘'이야말로 러시아 문학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서문화사 판으로 만날 예정이다.

 

   고전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다. 시대가 흐르고 문화가 바뀌어도 변질되지 않는 거대한 산맥 말이다. 작품 자체의 스케일이 크고 웅장할수록 독자로서 받는 정신적 확장의 사이즈가 커진다. 큰 작품이 큰 독자를 만든다. 2020년에는 시공간은 물론 정신과 의식의 확대 영역에서 굉장히 큰 사람이 되고 싶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사랑하고 크게 꿈꾸고 크게 일하고 싶다. 내가 두 편의 고전을 예약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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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는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이웃이라면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내 인생의 단 한 권이 책이고, 『전쟁과 평화』는 내 내면의 크기를 바다와 같은 스케일로 확장시킨 걸작이다. 톨스토이에 대한 지나친 헌사인지는 모르겠으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근대소설의 개시를 알린 이래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 두 장편만으로 인류 소설사는 모두 덮이고 커버된다.

 

주지하다시피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톨스토이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다른 두 소설에 비해 비교적 후일에 쓰여 후기 톨스토이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예술성과 완성도 면에서 과거 두 작품에 비해 저평가 되고 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아끼고 사랑한다. "『부활』을 읽는 건 우리 자신을 읽는 일이다."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해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함축적으로 안내한다.

 

사실 『부활』은 종교적·사상적 관점에서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소설에서 상징하는 '부활'이 본래의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부활과 다를 뿐 아니라, 귀족과 지주로 대변되는 19세기 러시아 특권계층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유재산권 중 가장 기초가 되는 토지소유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면서 평화주의자, 기독교 사상가, 공동체주의자 등으로 바뀌어 갔다. 톨스토이가 말년으로 갈수록 작가에서 신학자로, 소설가에서 사상가로 변질(?)해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안쓰러운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을 집어 든 이유는 바로 '힐링'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여 영혼의 부활을 이루는 과정을 극한의 진솔한 묘사로 그려냈다. 유려하기 그지없는 톨스토이의 글발은 한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 구원의 과정을 아름답게 이끌어간다. 악에서 선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육체에서 영혼으로 향하는 네흘류도프의 순전한 여정은 그 방향의 전개 과정을 살피는 것만으로 독자에게 힐링이 되고 위안이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자 이 소설을 들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힐링'과 '멘토'라는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관련 책들이 서점가를 지배했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싸구려 힐링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의 외침이 들린다. 고단하고 추악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힐링은 거부한다.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을 넘었다. 현실을 도피하는 힐링이 아니라 현재를 객관화하는 힐링을 소원한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힐링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가 상승하는 힐링을 갈망한다. 전자는 일상을 파괴하지만 후자는 삶을 단단하게 한다. 전자가 과거의 시간대에 구속되는 반면 후자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요컨대 인간세계의 저차원적 힐링이 아니라 훨씬 높은 차원의 신성한 힐링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동기부여의 선상에 톨스토이의 걸작 『부활』이 놓여 있다.

 

오래간만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려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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