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인생을 아직 덜 살아서일까. 난 왜 쿤데라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말대로 과연 하찮은 것이 진지하고 무겁고 특별한 것들을 본질적인 선상에서 전복해낼 수 있을까. 텍스트의 분량과 화법의 속도는 전작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일관되게 포착하고 있는 '가벼움'의 철학은 신간에서도 여지없이 연장된다.

   그는 왜 항시 가벼움과 무의미함을 삶의 정형성 전면에 배치하는 걸까. 사실 '의미 없음', '보잘 것 없음', '하찮음', '초라함', '가벼움' 등은 쿤데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코드다. 기승전결 없이 막 써내려간 듯 보이는 짧은 소설을 통해 쿤데라는 무의미한 것의 의미, 가치 없는 것의 가치를 설파한다. 쿤테라는 결국 인간의 고독과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 것 없음의 축제이며, 이 '무의미의 축제'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고백컨대 쿤데라의 소설은 매번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영원성의 무거움과 일회성의 가벼움을 역설적으로 대비시켜 치환해버리는 쿤데라 문학의 골격은 니체식 시간관념의 문학적 재현이자 관통이다. 더 나아가 헤겔의 분해이자 쇼펜하우어의 소환이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상의 나날이 그 자체로 축제라고 규정하는 그의 일관된 논변에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혹시 그는 '지루함'과 '가벼움'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벨상을 목전에 둔 노작가의 거대한 진동이 좀처럼 나에겐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텍스트에서 쿤데라의 잔영(殘影)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언가의 모호성이 추동하는 강한 전율을 느끼곤 한다. 내가 여전히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쿤데라는 피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날씨가 무덥다.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에 접어들었다. 이에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아래와 같이 추렸다. 고전과 신간 중에서 시기적으로 적확성을 띤 열 권(여덟 편)의 책을 선정했다. 소설이 한 편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 고전과 인문학을 택했다. 무겁긴 하지만 현실 한국을 조망하는데 이 책들만큼 긴요한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디 휴가철에 책을 벗삼아 무더위를 식히기를 기원한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민음사

말이 필요없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다. 서양 소설사는 <이방인> 전과 후로 나뉜다.
<이방인>을 읽지 않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문학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 또한 '의식'이나 '주체'를 탐구하는 시대가 끝나고 '규칙'이나 '구조'를 천착하는 시대가 도래한 사상사의 과도기적 현상을 이해할 재간이 없다. 카뮈는 이 얇은 소설에서 인간 부조리의 본성을 진지하게 질문한다. 지난 4월 '세월호 사건'은 우리사회에 내재한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비극이다. 개인과 사회는 어떤 긴장과 갈등으로 얽혀있는가. 과연 부조리란 무엇인가. 최근 번역논쟁에 휘말릴 만큼 작품의 질적 밀도도 최고도에 오른 작품이기에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노예의 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나남

케인즈의 대척점에 있었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의 명저다. 좌파든 우파든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힌다. 사회주의적 기제는 반드시 집단주의(collectivism)로 귀결되며 이것이 개인을 어떻게 노예의 삶으로 귀속시키는지 경제·도덕·법·철학 등의 다양한 부문에서 논증했다. 하이에크는 이 책을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집필했다. 대중이 읽기에 어렵지 않게 썼다. 최근 우리사회의 모습에서 방향성 잃은 집단주의의 단면을 발견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념과 당파를 불문하고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한길사

교회 청년부 특강 시 인용한 책이다. 구조적 무지가 만들어내는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고발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충격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철학자 아렌트의 보고서다. 구조적 무지는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에 의해 무지를 내재적으로 생산하고 고착시키는 악의 귀속적 형태다. 저자 아렌트는 구조적 무지의 기제들이 어떤 형태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 이 책을 통해 날카롭게 고발한다. 절대적 진리와 정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작금의 시대에 강력한 울림을 선사하는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권한다.


  
『사랑의 역사』 - 남미영, 김영사

신간이다.
문학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여러 고전소설 속에서 다양한 사랑의 속성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 남미영 교수는 1597년 출간된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2012년 출간된 《사랑의 기초》까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34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사랑의 가치와 의미, 성장과 인생에 대해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사랑이 가진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양면적 속성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폭포수처럼 뽑아낸다.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는, 상당한 재미를 선사하는 사랑학 에세이다. 머리 식히기에는 딱이다.


  
『지적 사기』 - 앨런 소칼 & 장 브리크몽, 한국경제신문사

절판됐다가 금년초에 한국경제신문사를 통해 재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를 대변하는 학자들의 이론과 사상을 강도높게 비판한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논리는 마치 다양하고 입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객관적 사실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구성물(구축물, 작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인류의 진보, 보편적 가치, 과학적 발견, 이성에 대한 믿음 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며 과학(적 지식)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목소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다. 약간의 지적知的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⑥ 『나의 한국 현대사』 - 유시민, 돌베개

출간된 지 얼마 안 됐지만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책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내용을 공감한다기보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달필가 유시민의 신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55년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조망했다. 저자는 1959년에 출생했다. 그의 출생년도부터 2014년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유시민의 정파적 색채는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가 여태까지 분출해왔던 국내 보편의 좌파적 역사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저자의 쿨한 서술은 눈에 띈다. 박정희 시기의 명암을 차분하게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책 곳곳에 주석을 단 인용서적의 리스트를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은 아쉽다. 자전적 현대사 에세이 정도로 읽는다면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 역시 글빨 하나만큼은 죽인다.


  
⑦ 『혁명 I, II』 - 김탁환, 민음사

최근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혁명가 정도전의 이야기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민심이 들끓고 정부에 대한 회의가 높아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혁명의 본질을 흥미롭게 탐구해볼 수 있는 소설이다.



 

⑧ 『병자호란 I, II』 - 한명기, 푸른역사

병자호란은 치욕의 역사다. 왕이 무릎을 꿇었고 백성은 죽거나 다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조선시대를 객관적이고 생산적으로 연구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시대 최고의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역작이다. <광해군>과 더불어 당대를 다룬 책 중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한 교수의 저작은 객관적인 시각과 담담한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해자인 청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잘못한 게 없는가. 국제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당쟁에만 휘말려 국력을 낭비한, 그리하여 연약하고 허접한 나라가 된 당시 조선 지도부의 무능과 허약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민족적 수치이자 쪽팔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병자호란의 역사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녹록지 않은 화두를 던진다.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초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전쟁을 펼쳐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현재상과 자연스럽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의 교훈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G2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나름 어렵게 선정한 열 권의 책이다. 책이 곧 답이 되진 않지만 책 속에서 답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좋은 책은 항시 답으로 가는 여정 위에 존재한다. 힘들고 난해한 세대일수록 책을 벗삼아야 한다. 이번 여름에 위의 책들이 좋은 벗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박하게나마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뮈 전집 특별판을 질렀다. 오전에 '네24'에서 결제한 것이 보기 좋게 당일 저녁에 집에 도착했다. 2010년 카뮈 작고 50주기를 기념하여 출판사 책세상에서 출간한 것이다. 7권의 두꺼운 양장본으로 구성됐다. 사진에세이집을 제외한 전체 19권을 연대순으로 재배치했다. 연보, 해설, 옮긴이글을 실었다.

   이미 <이방인>을 위시하여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김화영의 번역으로 읽었다. 카뮈의 문학세계를 보다 깊게 천착하기 위해서는 그 외의 작품들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가장 자유로운 정신, 가장 첨예한 지성, 가장 명징한 언어, 카뮈의 세계를 연대순으로 읽을 수 있다는 건 독자로서 큰 축복이다. '부조리 문학(不條理文學, literature of the absurd)'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어 현대소설의 가장 전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간절히 느껴보고자 했다.

   고백하자면 최근 들어 더욱 카뮈가 읽고 싶어졌다. <이방인> 번역 논쟁이 이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최근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소란들이 기본적으로 카뮈식의 부조리(Absurdity, 不條理, L’Absurde)를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 악질적으로 존재하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카뮈는 개인의 부조리와 사회의 부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1957년 노벨문학상을 카뮈에게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은 멋진 헌사를 남겼다.


   "카뮈는 세계 속 인간의 조건을 특징지음에 있어 거기에 모든 개인적 의미(personal significance)를 부정하고, 오로지 이를 부조리(absurdity)를 통해서만 바라봄으로써, 또한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흐름을 대표하게 됩니다. (…) 이러한 점이 <이방인>을 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직원인 주인공은, 부조리(absurd)한 사건의 연속 끝에 아랍인을 죽입니다. 그러고는, 자기 운명에 무관심(indifferent)한 채,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한편,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합일하여 무기력에 절은 수동성으로부터 탈출합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병들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사회의 오류와 한계는 무엇인가. 개인의 문제인가 국가의 문제인가. 국민으로서 각 개인은 건강한 가치관을 확보해왔는가. 국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개인에게 철학은 존재했는가. 정치는 왜 필요한가. 정치인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 중에 무엇이 우선하며 그 사이에서 '박애'는 어떤 형태로 발현하는가.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구조만으로 절반 이상의 부정不正을 지닌 오류 시스템인가. 개인의 책임감과 윤리의식은 어디서부터 태동하는가. 우리사회의 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는 위험수위인가. 그렇다면, 종합적으로, 이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인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용솟음친다.

   이 지난하고 서글픈 질문들을 냉정하게 관통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카뮈를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문학계(출판계)에서는 흥미로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번역에 관한 것인데, 그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해왔던 기존 번역의 권위가 과히 '혁명'적인 내용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거리다. 무엇보다 해당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소설이 가진 모호한 매력에 한참이나 미쳐 지냈던 나에게도 그 관심의 폭발력은 응당 대단한 것이라 하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김화영의 번역을 최고로 쳐왔다. 고려대 김화영 명예교수는 평생을 카뮈 연구에 몰두해왔고 카뮈 전집을 번역해냈을 정도로 카뮈 전문가다. 프랑스 현지에서 카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다. 그렇기에 국내에 수십여 권에 달하는 <이방인> 번역판 중에서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민음사판(김화영 역)을 '갑'으로 꼽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번역이 오류투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한 <이방인>은 이정서(필명) 씨에 의해 번역됐다. 이런저런 논란 속에서도 역자가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해왔던 만큼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역자 이정서 씨는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기존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엉터리인지 구체적으로 공박해왔다. 주변에서 노이즈 마케팅이 아이냐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올린 글과 신문의 인터뷰 내용을 훑어보면서 논리의 세밀함과 논증의 설득력이 녹록지 않은 수준에 있어 쉽사리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정서 씨는 기존 번역을 비판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한다. <이방인>에 대한 기존 독자들의 해석적 통념은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뫼르소의 모호한 항변은 그 어처구니 없는 반논리성으로 인해, 소위 '부조리不條理'로 대변되는 20세기 문학 역사상의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부조리 문학의 창시자로서의 카뮈 문학의 거대한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정서 씨는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아랍인의 칼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조리적인 살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건을 오독한 김화영 교수의 잘못된 번역 때문에 한국 독자들이 수십 년 간 <이방인>을 오해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자의 말을 통해 <이방인>이 "어느 한 문장 이해되지 않는 곳도 없는, 완벽한 소설"이라고 결론내린다. 계속해서 "이제 경험해보면 아시겠지만 원래 카뮈의 '이방인'은 서너 시간이면 다 읽고 감탄할 소설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 국내에 형성돼왔던 <이방인> 해석에 대한 복잡성과 보편성을 재단하고 있다. 즉 김화영 교수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자신만의 <이방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방인>의 문학성은 법정에서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그리고 타인들(독자 포함)의 몰이해 사이의 압도적인 긴장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는 뫼르소의 살인동기로부터 출발하는 지점이며 불합리·불가해·모순으로 인도되는 이 소설의 핵심 사유이기도 하다. 즉 뫼르소의 살인동기가 '강렬한 태양'인지 '아랍인의 칼날'인지는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양립 불가능성의 단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번역 논쟁은 언어와 해석이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소설 <이방인>에 대한 궁극의 도전이다.

   문학에서 번역과 해석은 본질적으로 다른 체계를 가진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사를 해석의 관점에서 통일시켰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작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그러나 이를 번역에도 적용할 수는 없다. 해석의 주관적 완결성은 독자와 비평가의 권리이다. 역자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번역의 지엽적인 기능으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지만 역자는 본질적으로 작가의 입장에 있어야 한다. 작가적 의도를 관통하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야말로 최고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가장 주요한 출발은 '작가적 객관'인 것이다. 역자의 주관과 개성은 그 다음이다. 이번 번역 논쟁을 바라보는 독자와 출판계의 시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이정서 씨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김화영 교수는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 문학과 관련된 이런 식의 논쟁은 독자에게는 땡큐요 선물이다. 텍스트를 비틀고 뒤집어 봄으로써 하나의 문학작품을 과히 입체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국내 불문학계 최고의 석학이자 대학자로서 김 교수는 성실하게 본인의 학문적 견해를 피력해주기를 바란다. 듣보잡인 익명의 번역가가 도발적인 방식으로 본인이 쌓아올린 학문적 권위에 도전한 것 자체가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학자는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하는 법이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전범이 아니었던가.

   김 교수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의 번역으로 수없이 읽고 느낀 <이방인>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이방인>을 통해 내 젊은 시절의 불가해한 고민과 아이러니한 모호성을 녹여냈다. 카뮈가 제기했던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용솟음치는 반증적 열정을 통해 세계 속에서 내 실존의 현재상을 살폈던 것이다. 나에게도 김 교수의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정말 반갑고 기대되며 재미있는 논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블로그에 먼지가 많이 쌓였다. 예전보다 책을 읽지 못하는 환경적인 배경도 있지만 아무래도 결혼 이후에 시간상의 한계로 후기를 남기지 못한 측면이 크다 하겠다. 물론 내 게으름이 일차적인 사유가 될 것이다. 즉 블로그에 쌓인 먼지는 주인장이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반추하건대, 지난 몇 년간 내 독서는 '문사철文史哲' 중 역사와 철학에 집중적으로 머물렀다. 전통적으로 호감을 보여왔던 장르인 문학엔 한없이 소원했다. 최근 발표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그간의 내 독서편식을 일깨웠다. 주지하다시피 금년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단편 여류작가 앨리스 먼로(Alice Munro)에게 돌아갔다. "단편소설을 특별한 예술 형태로서의 완벽한 경지로 올려놨다"고 요란을 떠는 스웨덴 한림원의 시상 배경은 관심 밖이었다. 인문학의 명징한 한 기둥인 문학과 소원해진 내 독서의 일그러진 현존을 응시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이러한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특히 우리사회가 어딘가의 호도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어두운 현실인식이 '사철史哲'에 대한 내 관심을 부채질했다. 고백컨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싶었다. 무지가 두려웠다. 알고자 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공히 제대로 안 후에 작금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고 생산적인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는 중용적 지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의도는 그러했다. 만만치 않았다. 결국 허무했다. 세상의 문제와 번민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요체는 그저 '아는 것'으로만은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진리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고 세상은 복잡한 것이었다.

   최근 재독한 하이에크의 명저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룬 신간서적의 후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앞으로 블로그 내에서 정치적 입장과 이념주의적 색채를 발산하는 일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한다. '순수 북리뷰어'라는 이곳의 순전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표현했다. 선을 넘어선 적도 있었다. 경박했다. 부족했다. 스스로 마음을 추스린다.

   온라인서점을 둘러봤다. 반가운 문학 신간소식이 줄지어 메인을 장식했다. 한국 역사사회소설의 대가 김주영은 <객주>의 마지막 10권을 내놓음으로써 마침내 완간을 마무리했다.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필생의 역작 <파운데이션>은 그 거대한 시리즈를 모두 모아 완세트로 출간됐다. 신비로운 언어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는 신간 <아크라 문서>를 이미 출간시켜 호평을 받고 있다. 희대의 이야기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와 우리시대의 공감작가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출간을 대기 중이다. 반갑고 흐뭇한 리스트다. 고민없이 전부 카트에 집어넣었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시끄러운 현실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끄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번민하는 현존 인간을 쓰다듬는 가슴의 크기를 확보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걸 잊고 있었다. 깨달았다. 뒤를 돌아봤다. 문학의 필요를 새삼 갈망했다. 문학이 공허했던 내 가슴 속의 여백을 무언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운으로 채워주길 기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